[찬샘통신 170/200520]‘강호일몽江湖一夢’이라는 한시
남원에 사는 친구가 자기와 동명이인同名異人 동창이 있었다는데 고교앨범이 있으면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어렵사리 찾은 앨범에서 그 친구를 찾아 사진을 찍어 보내주니 “진짜 있었구나. 고향도 나와 같은데 어찌 몰랐을까.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나도 살면서 우연히 동년동월동일同年同月同日 동창을 두 명이나 만나 앞으로 생일을 같이 지내자고 한 적도 있었는데. 417명이 한날 졸업했건만, 그동안 30여명이 유명幽明을 달리했다고 들었다. 앞으로 10년 후 ‘7학년 4반’이 되면 그보다 배는 더 만날 수 없게 되겠지.
아무튼, 앨범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찾았다. 가외加外의 수확. 이사를 다니며 잃어버린 줄 알고 애돌애돌했던, 한없이 빛바랜 신문, 1975년 12월 24일(수요일) 발간된 ‘전라고학보’ 창간호(전체 4면의 신문크기)였다. 그 신문에는 나의 글이 처음으로 활자가 된『어린왕자』독후감이 실려 있었다. 200자 원고지 15장쯤? 그때가 예비고사(현재의 ‘수능·수학능력시험’)를 본 직후였다. ‘어린왕자의 감동’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는데, 낯이 후덕거릴 정도로 유치했다. 친하게 지내는 황00 친구의 ‘고향’이라는 에세이도 발견, 스캔을 하여 카톡으로 보내주니 ‘추억여행’을 하게 해줘 고맙다는 댓글이 왔다.
나의 글보다 더 반가웠던 것은 1면에 실린 한문선생님의 자작 한시였다. ‘스승의 날’을 맞아 엊그제 45년만에 만나뵌 그 선생님, 그전에 발견했으면 보여드렸을텐데. 일단 그 시를 감상해 보자. 제목 ‘강호일몽江湖一夢’부터 심상치 않다. 자연 속에서 유유작작하게 사는 게 결국은 ‘한바탕 꿈’이라는 뜻이련가?
人間苦樂問幾區 인간의 고락을 묻노니,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不貪功名無事頭 공명을 탐하지 않는 것이 편안함의 으뜸일세
和日淡雲生遠峀
화창한 날 맑은 구름이 먼 산굴(峀·수)에서 피어나고
淸風明月滿長洲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강호(長洲)에 가득찼네
引觴幽谷友麋鹿
술잔(觴·상)을 그윽한 골짜기(幽谷)에 이끄니 미록(麋鹿·고라니와 사슴)과 친구가 되고
垂釣滄江伴白鷗
낚시대(釣·조)를 드리우니(垂·수) 흰 갈매기와 친해지네
一斥紅塵閑世俗
번거롭고 어지러운 세상(紅塵)을 물리치니(떠나니.斥·척), 세속 또한 한가해지니
諸君莫道是非
그대들이여, 무엇이 옳고그르다 시비(是非)에 얽매이지 말게나
1937년생이니 당시 38세. 작달막한 키에 항상 웃으시던 동안童顔, 삼국지와 고사성어 얘기를 어찌나 구수하게 잘 하시던지(그때 ‘한감동’하여 나도 ‘역사 이야깃꾼’이 되었을까?), 그 모습 지금도 생생한데, 이 한시를 감상하니, 알겠다. 그 나이에 세상을 바라보던 한 사나이의 ‘포부抱負’와 로망을. 운韻에 맞춰 잘 지은 한시인지는 모르지만, 그 뜻만은 십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골짜기를 찾아 술 한잔을 마시며, 강가에 낚시대를 드리우며 사슴과 갈매기를 벗 삼는 ‘풍류風流의 삶’을 지금도 누리고 사신다한다. 부럽 부럽.
용담댐이 환히 보이는 진안 상전면 어느 산속에 정자를 지어놓고, 자연과 함께 고독孤獨을 즐기려 전주에서 버스로 혼자 종종 다녀온다는 멋쟁이 선생님. 친구들이 세상을 많이 떴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다는 선생님이 들려준 에피소드가 유난히 기억에 남아 부기付記한다.
하루는 그 정자에 카톡도 가지 않는 ‘폴더 핸드폰’을 놓고 왔다고 한다. 사나흘만에 찾았지만, 그동안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누가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남겼을 것을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했는데, 막상 찾고보니 전화 한 통도, 문자메시지 하나 없는 것을 알고 가슴이 쿵했다고 한다. 홀로 버림을 받은 듯, 자기만 왕따를 당한 듯, 세상을 잘못 산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 허탈하게 하산을 하며 ‘아 내가 이제야 진짜 자유인自由人이구나. 이깟 핸드폰이 뭐란 말이냐?’로 생각을 바꾸어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는 것. 하여 그 생각을 정리하여 모처럼 그날의 일기를 썼다고 한다. 핸드폰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내용으로 한 그 일기가 보고 싶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있잖아요. 무엇이든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저희도 ‘핸드폰 노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맞짱구를 쳐드리니, 아주 좋아하셨던 이 일화逸話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는가. 이 소중한 한시를 보여드리려 한번쯤은 더 뵈어야겠다.
첫댓글 아하 연락처도 찾았는가?
문과 이종대
이과 이종대
둘다 남원 출신이라
나도 이과 이종대를 찾는데 전화걸었더니 자기는 문과 이동대라네ㆍ
그래도 지난 모임에 만나니 겁나게 반가웠어
우린 긍지를 갖되 패를만들지않는 전라인이 아니던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