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장]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설교]
어제 본문에서 선지자는 매우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는 18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기까지 했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이렇게 탄식하며, 선지자는 이제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절망 중에 애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이르러, 선지자는 갑작스레 자신이 잊고 있던 소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20절, “내 마음이 내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본문 21절,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기서 선지자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지금껏 선지자는 계속해서 슬퍼하고 탄식하기만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나오듯이,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했습니다. 쑥과 담즙이란 말 그대로 쓰디쓴 고통을 가리킵니다. 현실의 냉혹함을 가리킵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패망 상태이고, 여전히 현실은 참담합니다. 그러나 본문 21절에서 선지자는 갑작스레 자신의 마음속 심경의 변화를 고백합니다. 분명히 앞선 본문 18절에서 그는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21절에서 그는 아주 놀라운 심경의 변화를 고백합니다. 그 변화가 무엇입니까? 끊어졌던 소망이 다시금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소망이 다시금 회복된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본문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지금껏 선지자는 계속해서 ‘여호와의 진노하심’, ‘여호와의 의로우심’만을 노래했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도무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 22절에 이르러, 마침내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깊고 긴 터널을 지나, 한 줄기 빛이 비취는 작은 통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통로가 무엇이냐? 바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흔히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불리는 말입니다. 주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랑’이라는 말 앞에, ‘완전’이라는 말을 붙여서, ‘완전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 사랑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바로 여호와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긍휼하심?! 여기서 ‘긍휼하심’은 히브리어로 ‘라하밈’이라고 부르는데, ‘라하밈’은 보통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는 ‘레헴’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즉 여호와의 긍휼하심에는 기본적으로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모태로부터 품고 살듯이, 여호와께서도 자기 자녀인 이스라엘을 그렇게 품고 산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긍휼, 헌신. 이 모든 것들이 함축된 말이 바로 여호와의 긍휼하심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을 다시금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상 지금 선지자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말 그대로 관점의 변화입니다. 절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얼굴에서 지금껏 어두움만 보았다면, 이제는 그분의 얼굴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라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진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 23절에서 선지자는 “아침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찬송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가스펠송 중에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라는 찬송이 있는데, 바로 이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선지자는 자기 속에 싹튼 이 소망을 가지고 노래 불렀습니다. 물론 주어진 현실은 여전히 비참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제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 낙담하지 않고, 이러한 노래로써 아침을 깨웁니다.
그런 이후 선지자는 본문 25절 이하에서 ‘기다림’에 관하여 말씀하며,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바랄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기다림’이란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덕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말은 흔히 한자어로 믿을 신(信)자에 우러를 앙(仰)자를 사용합니다. 우러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가 나보다 높이 계신 분을 향하여 눈을 들어 본다는 뜻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선이 늘 언제나 우리 위에 계신 분,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며, 잠잠히 그분을 기다리는 것! 비록 지금 주어진 현실은 암담하지만, 그러나 눈을 들어 바라봤을 때,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인자와 긍휼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러한 신앙이 갖는 거룩한 ‘의존감’ 혹은 거룩한 ‘의연함’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기다림’의 자세가 오늘 하루 우리 삶에도 깃들어서, 우리 역시 본문 속 선지자처럼 우리의 시선을 여호와께로 고정시키고, 오직 그분의 인자와 긍휼하심을 바라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를 잠깐 근심하게 하시나, 끝내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반드시 긍휼히 여겨주실 것입니다(32절). 이러한 소망으로 오늘 하루 우리 주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