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수의 「마리오네트」 평설 / 김사리
마리오네트
한영수
이것은 밀물이다
이것은 썰물이다
나는 발목이 바쁜 시녀
지금 묻어오는 달빛을 허락한다
어깨가 당겨지면
손마디를 푼다
팔꿈치를 조금 늘어뜨리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한다
개를 끌고 가다
목줄을 놓고
안쪽으로 돌아도
바깥으로 돌아도
공주는 공주
시녀는 시녀
달빛 계단에
무릎이 꺾인다
주저앉을 때마다
주저 없이 일으켜 세워진다
나를 가둔 이는 등 뒤에 서 있다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는, 어쩌면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내가 만들어놓은 신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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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한영수 시집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을 완독하는 동안 가장 오래 눈길을 사로잡은 시이다. 마리오네트(marionette)란 ‘작은 성모마리아’란 뜻으로 목각인형의 관절 마디마디를 실로 묶어 사람이 줄을 조작하여 움직이도록 연출하는 인형을 말한다. 이 인형극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교회에서 어린이 교육을 위해 끈 달린 인형으로 공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작 교육 목적의 공연은 ‘마리오네트’의 묘미를 살리지 못했고, 세속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활발해졌다고 한다. 당시 유행했던 기사문학이나 시, 민담 등을 소재로 선정적인 내용도 과감하게 끼어들면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마리오네트는 17세기 중반 영국을 거쳐 체코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체코가 ‘마리오네트’의 본고장으로 꼽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인간이란 신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하다고만 말했다면 이 시는 그저 평범한 시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나를 가둔 이는 등 뒤에 서” 있다고 하고 “나를 닮은 모습으로 내가 만들어 놓은 신”이라고 표현하면서 마리오네트는 재탄생된다.
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출신 도가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과 맥이 닿아 있다. 장주(莊周,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그 내용이다. 나비와 장주는 분명 별개이지만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보면 나비도 장주도 꿈도 현실도 구분이 없으며 다만 만물의 변화만 있을 뿐. 내가 마리오네트인지 줄을 쥐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나인지 모르는 순간이 발생한 것이다. 시인의 사유는 장자의 초월적 세계에 입문하는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장자가 나비에서 자신을 발견하듯 마리오네트라는 목각인형에서 문득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마리오네트’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극빈(極貧)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 낸다”라든가 “나는 발목이 바쁜 시녀”이면서 “달빛”을 허락하는 존재이고 운명을 극복하며 살아내는 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생의 비의를 매섭게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깊이 있는 사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이 시집에는 「마리오네트」처럼 삶이 지닌 진실의 최대치에 다가서려는 시인의 지고지순한 노력이 돋보인 시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빛과 어둠이 정반합(正反合)을 이룬 삶을 구도하는 자세로 받아들이고, 시간 속에서 가까이 만나게 되는 생명체 혹은 사물의 존재 방식을 미학적으로 잘 풀어낸 수작들이 많아 시집을 읽는 내내 행복하였다. 시종일관 겉치레 없는 소박하면서도 잔잔한 이미지를 적절히 배치시켜 시 혹은 가야할 길을 조용히 응시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눈송이에 차린 방은 시인이 기거하는 작은 방이다.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본 이 극빈(極貧)의 방에서 시인은 시와 삶의 경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경험을 섬세하고 절제되며 예리한 감각으로 녹지 않는 흰 눈송이의 결정체로 되살리고 있다.
내일을 짐작할 수 없는 이 불우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인생이라는 “정해진 줄 위에서 나는 나를 겪어”내는 실천주의자로서는 물론이고, 지구를 둘러싼 환경과 동, 식물도 공생하는 삶을 조심스레 제시하는 시인과 함께 코로나 19와 같은 팬데믹을 극복하고 소확행으로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래본다.
⸺《시와 편견》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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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리 / 1968년 경남 밀양 출생. 2014년 계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시집 『파이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