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 11월 여행
광양역사바로알기 입니다 ♥
☞ 언제
11월1일 일요일 오전9시 광양읍 로타리 육교 출발 - 9시30분 광양시청 육교
☞ 모집기간
10월30일 금요일까지
☞ 회비
가족 4인기준 20,000원 / 개인 5,000원 (식사비, 체험비 포함)
☞ 준비물
필기도구, 역사에 대한 호기심
☞ 참가 문의
010-2639-3012
☞ 일정
9:00 광양읍 출발
09:40 ~ 10:40 가야산에서 보는 광양시
10:40 ~ 12:00 쌍의사 형제의병장
12:00 ~ 13:00 점 심
13:00 ~ 14:00 봉양사 최산두
14:00 ~ 16:20 쉬어가는 박물관 / 아이들과 체험
16:20 집으로
* 일정은 사정에 따라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광양사랑공동체“햇살”
역사여행동아리 민들레
쌍의사 형제의병장
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일으키다
강희보(형)와 강희열(동생)은 1560년 경에 봉강면 신촌마을에서 강천상(진주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강희보는 광양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서 그때 당시 영호남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인 단성(지금의 경남 산청)에서 적과 싸우고 있던 백부 강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 갔다.
무과에 급제한 동생 강희열은 그때에 역시 영호남의 군사요충지인 구례군 토지면의 석주관을 지키던 중에 휘하 군사를 이끌고 단성으로 달려가 백부을 구원 하였으며 싸움이 끝나자 다시금 돌아와 석주관을 수비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
임진란 초기에 위세를 떨치던 왜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권율장군에게 크게 패한 후 위세가 꺽이어 1593년 4월 부터는 경성(서울)을 철수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6월에는 경상남도 진주쪽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편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들은 10만이 넘는 왜군이 밀어 닥치자 많은 장수가 흩어졌으나 김천일 장군이 분연히 일어나 휘하 군사를 이끌고 의병과 합세하여 진주성 수비에 나섰다. 진주성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들은 강희보, 강희열은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김천일 장군의 지휘아래 들어와 싸우다 593년 6월 27일(강희보 전사)과 29일(강희열 전사) 각각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당시 진주성 싸움은 아군병력이 1만여명인데 비해 왜군은 1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9일간의 혈투 속에서 아군은 물론 왜군 또한 많은 전사자를 내는 등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때 아군의 강력한 대항으로 병력손실을 크게 입은 왜군은 결국 진주성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뒷날 조정에서는 희보,희열 형제를 진주 창열사에 배향하였고, 영조 40년에 강희보에게는 형조좌랑(정6품), 강희열에게는 병조참의 (정3품)가 추증되었다.1970년에는 강씨문중과 광양의 유지들이 [강희보,강희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창립하여 봉강면 신룡리에 묘소와 묘비를 보수하였고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98년 동재,서재 삼눈등을 신축하고 사당과 관리사를 이축하여 규모를 갖추었다
봉양사 최산두선생
신재 최산두선생유허비는 조선시대 후기인 1775년에 건립되었다.
선생은 기묘명현으로 점필재 김종직과 한훤당 김굉필의 학맥을 이었으며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등 당대 거유들을 배출한 조선시대 호남의 대학자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임란 이전 이곳 광양에 봉양사가 세워져 광양출신으로 광양현감을 지낸 바 있는 박세후와 함께 배향되었으며 중수한 1775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선생의 유허비는 순천부사인 김약행이 찬하였고 인물의 행적과 봉양 사의 연혁은 물론 정암 조광조 등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어 조선전기 사림문화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의 이해, 그리고 봉양사 및 지역문화의 이해를 돕는데 훌룡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선생의 행적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옛 생활용품을 모으고, 또 '쉬어가는 박물관'의 터를 직접 닦은 조홍헌씨.
▲ '쉬어가는 박물관'의 내부. 전시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전남 광양시 옥룡면 초암마을에 있는 '쉬어가는 박물관'도 개인이 만든 박물관입니다. 아니 생활유물전시관의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백운산자연휴양림에 다녀오다가 해질 무렵 우연히 만난 이 박물관은 찻집을 겸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경이 잘 돼 있는 수목원 같기도 합니다.
집 안팎에 전시된 물건들을 돌아보면 생활사박물관이고 유물전시관입니다. 전시물품이 수천 종은 거뜬히 넘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근대 물건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더 오래된 옛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물건들은 박물관 터를 잡은 조홍헌(68)씨가 공직생활을 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씩 모은 것이랍니다. 조상들이 쓰던 물건이 하나씩 사라져가는 게 안타까워 취미 삼아서 했다는 것입니다. 골동품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시나브로 옛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게 그의 얘기입니다.
이렇게 조씨가 모은 유물들은 장롱과 반닫이에서부터 떡살, 절구통, 도자기, 농기구 등 조상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던 생활용품이 대부분입니다. 옹기에 삼 무늬를 새겨 멋을 낸 술독, 사고 판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주 반닫이, 곡식을 담아 놓는 뒤주 등도 있습니다.
종이로 만든 안경집, 조선시대 서당에서 먹물로 쓰고 지운 서판(칠판), 떡방아를 찧고 떡을 만들었던 돌 떡판, 폐종이로 만든 갓집도 보입니다. 조상들의 섬세한 예술성과 작품성이 돋보이는 멱서리와 소쿠리, 대 반짇고리함도 있습니다.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마구 버려지고 태워졌던 물건들도 많습니다. 숯을 넣고 찻물을 끓여냈던 차화로, 나무로 만든 가방, 땅에 묻어 변기통으로 썼던 항아리, 놋쇠로 만든 상, 60년대 계산기, 각양각색의 호롱불도 보입니다. '셈본', '여러 곳의 생활'이라 이름 붙은 195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와 '진달래', '희망', '나비'라 적힌 옛 담배도 있습니다.
나막신, 먹통, 경대, 담뱃대, 재봉틀, 붕어빵틀, 맷돌, 기름틀, 축음기, 물레, 물지게, 주판, 각종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수집물품은 셀 수도 없습니다. 전문 박물관에서조차 눈독을 들일만한 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전시품도 일반적인 박물관처럼 유리상자 안에 가둬놓지 않았습니다. 집 안과 밖, 계단, 그리고 갖가지 꽃과 나무, 조경석이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는 야외 곳곳에 소박하게 배열해 놓았습니다. 생활용품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유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 임시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답니다.
전시품의 둥지가 된 정원도 지난 20년 동안 조씨의 땀방울로 꾸며진 것입니다. 불모지였던 산 중턱에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냥 차 한 잔씩 대접했답니다. 그러나 손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지난해부터선 차와 간단한 다과를 팔고 있답니다.
집 안팎을 거닐며 옛 물건들을 보노라니 금세 옛 추억으로 젖어듭니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을 만져보면서 마냥 즐거운 표정입니다. 조씨는 "이름처럼, 누구나 편히 쉬어가는 박물관이고,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쉬어가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광양시 옥룡면은 통일신라 말 고승이자 풍수지리 대가인 도선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도선국사의 얼이 스며 있는 옥룡사지가 있고, 산세 수려한 백운산과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 예쁜 박물관 하나 더해졌으니, 앞으로 백운산으로 향하는 발길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