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의 글] "박정희 못지않은 전두환의 경제성적표"
박정희 못지않은 전두환의 경제성적표
전두환-노태우 시절 한미일 관계가 좋았던 것이 북한의 도발을 막고 서울올림픽과 민주화를 평화 속에서 추진할 수 있었던 기본 조건이었다. 두 대통령의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의 기반이 이뤄졌다.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1981~2015년의 35년간 성장률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해는 한국이 외환(外換)위기를 겪던 1998년 한 해뿐이었다.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공이다. 기획재정부 강만수(姜萬洙) 장관은 당시 ‘이 위기만 잘 넘기면 한국은 경쟁국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적중하였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의 경제통계를 비교하면 1980년대의 놀라운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1. 1979년 1인당 GD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D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 개 국가 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70년대엔 외채 망국론이 강했지만,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대외(對外)자산 253억 달러로 개선되었다가 1989년에는 순(純)채권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19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실로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 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전두환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일성에게 무력보복을 하지 않고(그랬다면 서울올림픽이 날아갔을지 모른다) 외교, 경제 등 다른 대전략으로 대응하여 북한을 고립시켰다. 김일성이 서울올림픽에 대응한다면서 1989년에 개최한 평양축전은 준비하는 데 50억 달러가 들어갔고 이게 재정파탄으로 이어져 망조가 든다. 성경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만인 앞에서 선을 행하여 악을 이긴 전두환의 유골은 지금도 장지를 찾지 못하고 자택에 있다.
'벽을 넘어서'란 시대정신
1980년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전 이후 이 나라가 가장 널리 외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선 민주화의 시대, 국제적으론 공산권 붕괴라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담은 구호가 '벽을 넘어서'였다.
원래 서울 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좀 딱딱한 이 개념을 개폐획식의 기본철학으로 구체화시키면서 아주 역동적인 ‘벽을 넘어서’란 말로 풀어놓은 이는 개폐회식 상임위원 이어령(李御寧) 교수였다.
역대 올림픽 개회식 가운데서도 최고로 꼽히는 서울올림픽은 ‘벽을 넘어서’란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모든 공연과 상징과 동작을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기 때문에 그토록 힘찼고 예언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언어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란 것을 실감케 한 구호였다.
베를린 장벽과 동구권 붕괴를 부른 시위 현장에서 데모 송으로 울려 퍼진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였다.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있는 ‘브레이킹 다운 더 월’(Breaking down the wall)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그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코리아나 그룹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당시로선 동양인이 부른 곡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팔린 노래가 되었다. 1990년 4월 체코 무용단이 김일성 생일에 맞추어 평양에 가서 공연할 때 배경음악으로 연주되었고, 김일성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주제가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주제가를 작곡했던 조지오 모로더가 작곡하고 토머스 R 휘틀록이 작사했다. 국내에선 한국인 작곡가가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이 ‘우리 취향이 아니라 손님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세계 일류 작곡가와 작사가를 고른 것이다.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2021년 10월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문재인 정부는 마지못한 듯 국가장으로 모시면서도 홀대를 했다. 대통령 조문도 없었고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 유족을 훈계하기도 했다. 병중(病中)이던 이어령 선생은 조시(弔詩)를 적어 유족들에게 보냈다.
"몸이 성치 않아서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했다. 이 시(詩)는 개발연대의 지도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문화부문을 챙겨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감사를 깔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고인이) 군사독재와 문민독선의 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굳어진 정치풍토에서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싸우시면서 질기고 질긴 질경이 꽃을 피우셨다"며 "보통사람의 시대, 북방외교 시대, 그리고 문화부를 처음 신설해 문화를 여신 업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회고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 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 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사람과 함께
손잡고 가자고 사릿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 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민주화가 삶속으로 스며드는 1990년대 이후의 일이고 문화 올림픽이기도 했던 1988년 대축제가 계기가 되었다. 군인 출신 박세직과 문인 출신 이어령이 문무(文武)합일로 이룩한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감동! 이게 동구 공산권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게 뭐냐"는 문제의식을 심어 그 이듬해 거리로 몰려나와 공산정권을 차례로 타도했다. 1980년대의 명예회복이 요구되는 한 이유이다.
[ 2023-02-21, 01:01 ]
白丁 2023-02-21 오후 10:58
이래서 우리 나라는 영남출신 장군이 다스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