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골 제대의식
8월 9일 일요일.
광인, 캐이, 하늘재, 단풍, 여름 산행.
이날 산행은 길게 욕심내지 말고 용조봉을 지나 신선봉까지만 찍고 내려와
'조계골에서 비빔면 먹기' 아주, 무척 거창한 목표아닌가 모르겠네요? ^^
산행은 짧게, 계곡 피서는 길게.
조계골에 내려와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식히는 알탕 후, 술 한잔 곁들이니,
그제야 "오늘 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조계골은 예전 군부대 유격훈련장으로 쓰였던 골짜기입니다.
철조망과 시설물이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군부대 지역이라는 흔적은 곳곳에서 보이지만,
현재는 상주하는 부대 근무자가 없어 이날만큼은 사람 그림자보다 산꾼 4명 그림자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잘 놀고 난 다음입니다.
조계골에서 나가려면 마지막 관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제대 철문.
37.553291, 127.582001
※ 위도, 경도 사이는 쉼표로 구분, 지도 검색 시 생략해도 됩니다.
대문처럼 활짝 열고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내보내 주는 철문이 아닙니다.
사진에서 보듯 철문 아래쪽에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갈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산행이 체력시험에서 신체검사로 바뀝니다.
배낭을 먼저 밀어내고,
몸을 낮추고,
허리를 접고,
배를 집어넣고,
철문 아래를 통과해야 합니다.
옛날 놀이 중 막대기를 점점 낮춰가며 허리를 뒤로 젖혀 통과하는 "림보"가 있었는데,
조계골식 림보는 조금 다릅니다.
허리를 뒤로 젖히는 게 아니라
납작 엎드려 기어서 통과해야 합니다.
젊을 때야 별것 아니겠지만,
세월 따라 배가 앞으로 조금씩 진출한 사람은 문제가 달라집니다.
머리는 통과했는데 배가 철문에 걸리면
조계골에서 강제 복무 연장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철문을 우리는 거창하게
"조계골 제대의식" 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광인 통과,
캐이 통과,
하늘재 통과.
마지막 저까지 철문 아래를 빠져나오면서
네 사람 모두 무사히 제대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캔맥주와 막걸리에 술약한 저는
철문을 빠져나와 주머니를 뒤지다
"어라, 셀폰이 어디 갔지?"
그제야 "아 제대의식 내 셀폰 떨궜나보네?"
다른 분들은 어렵게 제대를 마쳤는데
저 혼자 제대하자마자 다시 입대하게 생겼습니다.
결국 철문 찾아 셀폰 찾았죠.
만약 조계골에 떨꿨으면 자진 재입대할 뻔 했습니다.
용조봉, 신선봉을 넘어 땀 한바가지 흘리고,
조계골 계곡물에서 더위를 식히고,
술 한잔에 여름 산행의 맛을 즐긴 네 사람.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문 아래를 기어서 빠져나오는 특별한 제대식까지.
광인, 캐이, 하늘재, 단풍의
2026년 여름 조계골 피서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다만 저에게 조계골은 앞으로 계곡 이름보다
"두 번 제대할 뻔한 곳"으로 더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제대 의식
제목이 좋네 ^^
그날 나도 좀 취했나! 저거 통과한 거 기억이 없었는데 새삼 그림을 보고...
이제 지는 해(?)들이라 이런 것들도 소중한 추억일세 그려
광인님도 끊겼군요. ㅎㅎ
저는 군부대 철문 빠져나온 건 기억나는데
상봉역 호프 뒤풀이부터 창동녀 집 찾아가는 구간은 통, 반통째로 블랙아웃입니다.
캐이님도 물어보니 음주 후 종종 끊긴다 하고...
가만 보니 이날 조계골 제대의식은
철문을 빠져나오는 게 제대가 아니라
기억이 끊겨야 진짜 제대였던 모양입니다. ㅋㅋ
이제 지는 해(?)들이라
사진 없었으면 우리 넷이 뭘 했는지도 서로 증명 못 할 판입니다. ^^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딱 저 철문 통과만 기억이 나지 않고 나머지는 다 뻔해
체 했는지! 속이 불편해서 전철에서 잠을 잤고 난 상봉역까지 가지 않고 신내역에서 6호선 환승
의학적으로 따져보니 술 마시고 필름 끊기는 건
전두엽보다 기억 저장 담당인 ‘해마’가 주무부처랍니다. ㅎㅎ
술이 들어가면
전두엽은 “오늘은 그만 마셔라”라는 판단 업무를 먼저 포기하고,
해마는 “이후 상황은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저장 업무를 중단한다네요.
그러니 광인님, 캐이님, 저까지
캐이님은 확인 못했으니? 여튼
그날 조계골에서는 몸만 제대한 게 아니라
전두엽은 조기퇴근,
해마는 기록폐기,
다 같이 업무 종료였던 셈입니다. ㅋㅋ
사진이 남아 있으니 망정이지
사진마저 없었으면 그날 산행은 역사학자들이 복원해야 할 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