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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6화 - 다시 그곳으로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6
어머니는 어떡하든 중국에서 성공해서 잘 정착하고자 애쓰셨다.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도 시키고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이방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 살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러나 뜻밖에 상황은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2002년 6월 초여름이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오! 필승 코리아”가 중국에서도 울려 퍼졌다.
나는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새 응원하고 싶어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국이 폴란드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그 열기에 나도 덩달아 들떠 있었다. 그런 열기속에 그날도 하교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나를 사업 미팅자리로 데리고 가셨다. 중국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어머니를 도와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5분 정도 흘렀을까... 그 곳에 갑자기 공안(公安)들이 들이닥쳤다. “움직이지마!” 라고 소리치며 순식간에 공안들이 엄마와 나를 에워쌌다. 나와 어머니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우리는 개처럼 끌려 봉고차 에 태워졌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처지를 경험했다.
잡혀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들은 공안국(公安 局)에 가면 알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너무 놀란 가슴은 쿵쾅거렸고, 무서워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공안국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어머니는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24시간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의 죄목은 불법체류였다. “너희는 북조선에서 왔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불법적으로 거주하고 돈을 번 죄가 크다”고 했다. 우리는 돈을 써서 호구를 만들었기 때문 에 끝까지 중국인이라고 우겼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항변은 제대로 듣지 않고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거리더니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왔다. 너희를 신고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공안들은 우리의 정체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너희 같은 사람을 신고하면 나라에서 포상금도 주는데 너 같으면 신고 안하겠는가?” 그렇다. 어머니가 맘에 들지 않았던 동업자 부부가 사업을 독차지하고 포상금을 받겠다고 우리를 신고해버렸던 것 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중국에 살면서 만났던 분들 대부분은 우리를 신고하지 않고 눈 감아 주시거나 불쌍히 여겨주신 좋은 분들이었다. 그렇지만 악한 사람들의 함정을 언제고 운좋게 피해갈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돈으로 호구까지 만들었건만 우리는 결국 이 땅에서 불법 채류자와 이방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짜 호구를 만들어서 중국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그 시각, 공안들은 우리 집을 샅샅이 훑어 쑥 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가족사진을 우리에게 들이밀고는 사진에 있는 여동생과 남동생의 행방을 물었다. 그 사진은 비록 신분도 불안하고 갈 곳도 없지만, 그럼에도 낭만과 희망을 가지고자 애쓰는 그 순간의 우리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찍어둔 가족사진이었다.
중국에서 사는 그동안 어머니는 우리들의 모습을 종종 사진으로 담곤 했다. 길림시 송화강변은 겨울이면 버드 나무가 하얀 눈꽃이 피어올라 아름답고도 신기할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희망을 담은 그 사진이 이제는 내 동생들을 위협하는 단서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남동생은 다른 도시의 기숙사 학교에 있었고, 여동생은 전교회장으로 늦게까지 학교활동을 하느라 마침 집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둘러대었다.
그 사진과 함께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모두 중국공안이 압수해 갔다. 고향에서 부터 간직해 온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 사진도 그날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우리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와 어머니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조사에 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중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미련도 사라졌다.
다만, 미친듯이 우리를 엄습해왔던 것은 북한으로 가면 우리는 총살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평생 바깥구경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여 동생은 붙잡히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밤새 진행된 취조가 끝나고 아침이 되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서 봉고차에 태웠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창밖으로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가 눈에 들어왔다. 여동생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여동생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아마도 여동생은 쑥대밭이 된 집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하였을 거야. 만약 여동생이 다른 이모들 집으로 피신을 가 있으면 함께 북송 되지 않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집 앞에 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있는 여동생을 발 견했다. 동생은 엄마와 언니를 찾으며 아파트 1층에서 밤새 울고 있었던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공안이 눈치채기 전에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몸짓을 취해 봤지만, 내 모습을 본 동생은 그런 신호는 보이지 않았는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와 안겼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동생을 잡으러 온 공안은 그 모습을 보고는 별일 아니니 울지말고 차에 타라고 했다.
그리고 “속상하겠지만 너네는 중화인민이 아니어서 너희가 살던 고향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며 너희 고향에 가서 살면 되지 왜 여기 와서 사는 거냐고 했다. 그들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우리의 노력이 모두 헛것이 되었다는 허탈함과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셋은 도문 변방대 구류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길림역에서 기차를 통해 도문으로 가는데, 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커다란 트렁크에 들어있는 수갑들이 보였다. 별의별 종류의 수갑이 들어있었는데, 어린 마음 에 그 수갑들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공안들은 우리를 보며 아이들도 수갑을 채우네 마네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동할 때는 수갑을 차고 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는 수갑을 하지 않는다는 배려 아닌 배려를 받았다. 마침 오후 5시쯤으로 퇴근시간이어서 역에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 수많은 인파 사이로 중국 연변 도문시에 위치한 공안 변방대대 변방 구류심사소. - 도문변방수용소라도고 불리며 북송 예정 탈북자들이 주로 수감된다.
참고 기사: “중 도문변방수용소에 탈북자 수십 명 구금 중”, 자유아시아방송, (2021.08.04.) -에 수갑이 채워져 탑승구로 끌려가는 그 길이 그렇게 치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넘어올 수밖 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절망한 우리는 기차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식사도 거부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와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던 옥이 이모는 우리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을 팔아서 라도 손을 써서 도와주시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풀려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또 신고하면 다시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처지라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옥이 이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를 숨겨주시고 보살펴 주신 이웃들 덕분에 위험을 넘기고 이렇게 살아왔는 데 결국은 북한으로 강제송환 당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빠지면서도 우리를 도와주셨던 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우린 세 모녀는 물 한모금 넘기지 못했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문 변방대에 도착한 우리는 약 10일 정도 그곳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두 달 넘게 머물기도 했지만, 우리는 중국에서 별다른 불법을 행하지 않았기에 조사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한 이모님은 십수 번이나 북송을 경험하셨다고 한다. 그분은 북송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죽지는 않지만 많이 힘들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북한에 가면 굶으니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미 넋이 나가버린 우리는 여전히 음식이 있어도 잘 먹지 못했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고 음식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며칠을 먹지도 않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잠도 못 자는 우리 가족을 보며 변방대원들마저 우리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들은 갓 군에 입대하여 변방대로 배치를 받았는지 딱 봐도 나이가 어려보였다. 그들은 중국말에 유창한 나와 동생에게 자주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너무 걱정 말라며, 북조선에 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니 다 살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북조선에서 북 송된 사람들에게 집도 주고 먹고 살게 해 준 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는 순진무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곳에서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했다.
하루는 변방대 군인이 나를 불러 외부 청소 일을 시켰다. 하루 종일 방에만 갇혀 있느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설의 높은 벽을 바라보며 어린 마음에 ‘이 벽 을 사이에 두고 바깥세상과 단절이 되었구나, 자유가 없는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거울을 닦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 건물을 벗어나면 얼마나 좋 을까’ 하며 되뇌었다. 청소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인솔 군인이 시설의 다른 곳들도 구경시켜 주겠다며 바로 방으로 가지 않고 이곳 저곳 둘러서 갔다.
그러다 변방대 한 구석에 있는 방에서 아이들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그 곳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부터 5살 정도 되는 아이들까지 모아놓은 방이었다. 왜 저 방에는 아이들만 있냐고 물었더니 군인이 하는 말이 기가 막혔다.
중국 공안들이 탈북 여성을 잡으러 갔을 때, 탈북자 엄마들이 도망갈 때 놓고 간 아이들이나, 보호자 없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잡혀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한 눈에 봐도 아이들 상태는 좋지 못했다. 이들 중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아이 들은 북한으로 보내진다고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중국 친척들이 보석금을 주고 빼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의 방치 상태였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는 중국인이 매우 야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우리 가족 에게 호의를 베풀고 친절하게 대했던 변방대 군인일지라도 다시는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지만 북한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또 그들의 자녀들이란 이유로 이렇게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그들의 태도와 말투, 인권 침해와 차별, 그 이면의 잔인함과 미개함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먹지 못했던 것이 나중에는 그들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단식투쟁이 되었다. 다시는 중국에서 살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을 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북한으로 가야 할 날이 왔다. 예상보다 빠른 북송이었다.
아침 일찍 부터 변방대 안은 시끌벅적했고 분위기도 여느 때와 달리 살벌하게 느껴졌다. 명단과 이름이 불린 사람들 순으로 들어올 때 입었던 반팔에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니, 다시 수갑을 채워 봉고차에 태웠다. 차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매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렇게 중국 도문과 북한 온성을 잇는 도문대교 중간 경계선에 차가 도착했다.
이제는 중국에 남고 싶은 생각도 북한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모조리 없어지고 그냥 사라지거나 죽고 싶었다. 이것이 제발 꿈이길 바랐지만 이미 다리 중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모습은 이것이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명단을 받고 인수인계가 되면 북한 쪽으로 한 사람씩 넘겨졌다. 넘어갈 때는 수갑을 풀어서 중국 측에서 다시 가져간다. 수갑은 중국 것이니까. 보위부의 수갑은 녹이슬고 사람 수 만큼 충분치도 않아 보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보위부원들과 북한 군인들이 우리를 한 건물 앞마당으로 인솔해 갔다. 우리는 무릎 꿇고 쪼그리고 조용히 앉아있어야 했다. 옆 사람과 말이라도 하거나 기웃거리면 군화 발로 사정없이 채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 가늠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떨구고 있길 한참이 흘렸다.
한 간부가 우리에게 모두 신발 끈을 풀라고 했다. 신발 끈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자, 그 신발 끈으로 옆 사람의 손목을 묶으라고 했다. 그 변 변찮은 끈 하나 없어 신발 끈으로 손목을 묶으라고 하는 꼴을 보며 열악한 북한의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래된 목탄차에 실렸다. 시속 15킬로 로나 달릴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운 그 목탄차는 덜덜거리며 느릿느릿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중 한 남자가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를 잡으려고 보위부원들이 추격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제발 잡히지 말고 무사히 도망갈 수 있길 빌었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그 아저씨는 잡히지 않은 듯 했지만, 열이 바짝 오른 보위부원들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다. 얼마나 산길을 달렸을까... 이윽고 커다란 대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보위부원들이 각목을 하나씩 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는 잡혀 온 사람들 중 남자들을 피가 철철 날만큼 때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반쯤 죽여 놓는 것이다. 동생과 나는 그렇게 맞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광경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웠 다.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머리를 때리면서 쳐다보라고 했고 눈을 감고 있다 들키면 보라고 했는데 안본다며 따귀를 맞았다.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죄수복은 지급되지 않았다. 잡혀올 때 입고 온 그대로 지내야했다.
우리가 잡혀 온 시기가 여름이었기에 우리는 나중에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었지만, 우리는 계속 여름옷으로 난방도 없고 창문도 창살만 남아있는 감옥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잡혀온 다른 사람들 중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거나 씨스루 옷을 입은 여성들도 있었다. 노랑머리나 빨강 머리로 염색한 이들도 있었다.
(목탄차 -유류 대신에 목탄 등을 연료로 사용하여 운행하는 차를 말하는 데 주로 화물차의 적재함 앞부분에 보일러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동력을 얻게 된다. (참고: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www.korea.kr))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국에 살면서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염색을 한 것인데 그대로 북한에 잡혀 온 것이다. 다양한 옷과 머리를 보며 보위부원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온갖 욕을 해댔다. 그 중 한 여자 분은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는 데, 하필 그것이 눈에 띠었는지 그 여자는 그 들의 폭력의 먹잇감 신세가 되어 머리채를 잡혀서 벽에 쿵쿵 찍히는 등 말도 안되는 폭행을 당해야 했다.
그곳에서의 학대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임산부에게도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의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죄였다. “이 간나 새끼, 다른 씨를 배왔구나!” 라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강제로 유산을 시키는데, 약으로 안 되면 배를 발로 차서라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강제 유산을 하게 되면 임산부 역시 생존하기 힘들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북한 보위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중국 변방대는 야만적이라면 북한 보위부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한시도 있으면 안되겠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어린애들이라 많이 맞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상당히 고통을 당하셨다.
왜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냐며 어머니를 심문하기 시작한 이들은, 어머니에게 한국 사람을 만났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썅간나 새끼, 도강이나 하고 말이야! 거기서 남조선 새끼들 만났어 안만났어?!” 어머니께서 만난 적이 없다고 답을 해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 드라마를 봤는지 선교사를 만났는지, 목사를 만난 적이 있는지, 교회를 갔는지 끈질기게 추궁을 했다. 우리가 도문변방대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절대 북한에서 남조선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면 안된다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북한은 그 무엇보다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기독교인들을 만나는 것을 혐오하고, 그것을 가장 큰 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위부원들이 자백하라고 어머니를 구타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셨다. 이미 과거에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사서 보위부에 잡혀간 적이 있으셨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교회는 가본 적도 없고, 성경책이 무슨 책인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또 시골에만 살아서 한국 드라마는 접하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K-pop 의 팬이었다. 그때 유행했던 HOT, 터보, SES, 핑클을 나도 너무 좋아했고 디바의 “왜 불러” 라는 노래나 터보의 “검은 고양이 네로”를 즐겨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한국 음악을 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절대로 그것들을 안다 고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다.
보위부 사람들이 의심하고 열받아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와 동생의 북한말이 어눌하다는 점이었다. 어려서 탈북을 하고 중국말을 배우다 보니 말투가 북한 말투와 달라졌다. 조선족 이모들이랑 어울렸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길림시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그 조상들이 남한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말투도 남한 쪽에 가까웠다. 우리는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지만, 보위부에서는 림수경이 북한에 넘어왔을 때 쓰던 말투 같다며 수상해했다. 그 때문에 아무리 봐도 한국 사람하고 같이 지냈을 것이라며 더욱 철저하게 조사를 받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꼬투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은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개구멍만한 문이 있는 3평 정도 되는 방이 세 개가 있고, 그 뒤로는 긴 복도가 있었는데, 방 두개에는 여자들이, 마지막 방에는 남자들이 수감되었다. 좁은 방에 40명 가까이 수감되었기 때문에 다들 서서 자거나 서로 기대어 서 있어야 했다. 누구 하나가 넘어지면 우르르 넘어지기도 했다. 복도에도 약 200명의 사람들이 조르르 누워서 잠 을 잤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약 한 달 동안 복도에서 지낸다.
방의 환경도 매우 열약했지만, 복도는 음침하고 빛도 더 안 들어오는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서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빨리 조사를 마치고 단련대로 가기를 기다렸다. 방에 사람들이 단련대로 이송되면, 복도에 사람들이 방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지낼 동안에는 조사도 받지 않았다. 수감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자 그곳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그곳은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사람이 굶어죽기도 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는 밥이라고 나눠주는 한줌도 안되는 양의 죽을 옆에 할머니께 드리곤 했다. 예전에 중국에서 음식을 잘못 먹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던 후로 음식을 함부로 먹지 못했기 때문 이다. 보위부가 주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더러운 음식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온갖 스트레스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약했던 여동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장티푸스로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나는 동생의 건강이 매우 걱정되었지만, 간호는커녕 제대로 된 동생의 병세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세 식구가 함께 있으면 조사 받는 동안 말을 맞춘다는 이유로 나를 엄마와 동생과 다른 방으로 수감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으로 옮겨지고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이루어졌다.
내가 있던 방에는 특이한 아줌마가 두명 있었다. 그들은 방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배식을 받으면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고, 늘 앉아서 중얼중얼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정신병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이미 처형이 확정된 중범죄자들이라 다들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불쌍하게 그들을 쳐다보곤 했지만 정작 그들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후에 이들이 한국인 선교사와 성경공부를 했고 더군다나 한국으로 가기 위해 몽골로 가던 중 붙잡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붙잡힌 순간부터 북송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죽음을 앞둔 이들이 보여주는 평온한 모습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에 대해서 또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은명이 이모도 기독교인이셨고, 이모 옆에 있으면서 이모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을 뿐 같이 신앙 생활을 하거나 교회를 방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신앙에 대한 이해, 영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나에게도 이들의 평온한 모 습이 이례적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저들에게 두려움의 공포를 이겨내고 평안을 가지도록 하는 것일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지금에서야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 천국소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북한 땅 가운데 이러한 성도들의 희생이 있고, 또 그들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고, 나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귀한 그분 의 자녀들을 만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절망적인 그곳에서도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짙은 어둠에 갇힌 그 땅의 영혼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