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3절과 차이점은 주어가 빛이라는 단어와 소속이 코스모스(κόσμος,세상)라는 것이 다르다.
소금과 빛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소금은 속으로 스며드는 속성이 있고, 빛은 어둠을 밝히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소속도 소금은 땅이고, 빛은 코스모스(κόσμος)이다. 땅이나 코스모스나
다 세상이라고 칭할 수 있지만, 게(γη,땅)와 코스모스(κόσμος)의 차이점은
내적인 것이냐, 외적인 것이냐? 맛의 문제냐, 밝음의 문제냐, 이다.
소금은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얻게 하지만,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게(γη)는 사람의 육체를 비유하는 것이요,
코스모스(κόσμος)는 그 사람들이 사는 어두움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휴메이스(Ύμεις,너희)로 시작하는 것은 소금이나 빛이 같지만, 그 내적 상황은 같지 않다.
소금은 음식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매개체이지만, 빛은 어두움과 대적하는 권능이라 할 수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울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빛의 권능성 때문이다.
양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심령들로 하여금 밝음의 빛을 따라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는 능력이다.
고로 소금과 빛은 절차상의 선후일 뿐 동격이고, 동역자이다. 소금으로 말미암아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으며, 빛으로 말미암아 소금의 효력을 증명할 수가 있다.
14절과 15절은 빛의 불멸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왜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는가?
그 이유는 소금의 한계성 때문이다. 소금은 그 고유의 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지만,
빛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절에 우 뒤나타이(ού δύναται)가 15절에도 우데(ούδε)로 연결되는 것이다.
15절은 "그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그것을 두지 아니하고" 가 아니라
"둘 수가 없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빛은 말 아래 가두어 놓거나 숨겨놓을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 빛이다.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네를 숨길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빛은 빛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인 것이다.
이러므로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니느라" 이 말씀은 빛의 당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빛은 자존하지만 상호 관계성을 단절할 수가 없다.
빛 자체보다도 그 빛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 의미의 존재이다.
물론 빛이 빛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 존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둠 가운데 있는 상대적 존재들이라면 그 빛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본문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요8장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왜 그 사건 뒤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천명하고 나오시는가?
소금의 맛을 모르는 자들이, 육체적 쾌락에 빠져 있는 자들이 곧 간음자들이다.
육체의 쾌락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자들에게 주님은 소금의 맛을 보여주시며,
세상의 빛으로 오신 당신 자신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계신다.
곧 빛이란 따를 자들에게 따라야 할 대상인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며, 따르는 그 대상은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인다'라고 하는 것은 빛의 세계를 모르며, 빛이 계시해 주는 대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통틀어서 "세상과 간음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빛'이란 빛을 따르다가 그 빛을 얻었을 때 외적 빛이 아닌 빛의 속으로 들어가
내적 생명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모든 빛은 에너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에너지라는 엔에이지(en+ergy)는 '내적 존재가 있다'라는 말이다.
내적 존재는 생명이고, 그 내적 존재가 에너지원이 되어서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빛이 된다.
이 빛은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 속에 에너지원이 되어서 그들의 빛이 된다.
이것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빛은 속성적으로 어두움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빛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러면, 그분도 빛으로서의 속성대로 어두움을 찾아오신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악하다, 험하다, 나쁘다, 의 개념, 즉 선악의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밤이 나쁜 것인가? 아니다.
다만, 빛이 필요한 세상일뿐이다. 그는 세상에 물질을 가지고 오지 아니하셨다.
세상에 꼭 필요한 빛으로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루의 반이 낮이고, 반이 밤이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빛이 있는 동안은 낮이고,
빛이 없는 동안은 밤이다. 고로 성경적 밤낮은 '세상의 빛이 있느냐, 없느냐'의 개념차이이다.
빛이란 어둠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두움 속에서도 존재하지 아니하는 때가 있다.
그 때가 밤이다.
밤과 낮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걸려 넘어지느냐, 그렇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낮에는 빛으로 말미암아 가야할 길이 보여지지만, 밤에는 길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방황하다가 걸려 넘어진다. 고로 신앙생활이란 낮에 하는 것이다.
낮의 사람, 빛의 자녀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를 곧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어두움의 실존이 무엇인가?
빛의 실체는 우리가 잘 알지만, 어두움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본문은 어두움을 '사망의 그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사망권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거기에 큰 빛이 임하신 것이다.
본문의 끝 소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빛이 그들에게 떠올랐다"고. 구원이란 사망에서 건짐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의 사역을 통해서 사망을 물리치는 것이
구원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구원사역이란 빛이 어두움 가운데서 빛나고만 있어도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는 구원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빛으로서 어두움 가운데서 빛나고 있으므로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라고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빛으로 존재하는가? 그래서 내 주변이 밝은가?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갔는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에서 세상의 빛, 곧 구주인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빛으로서 세상에 온 것처럼, 너희는 빛으로서 세상에 존재한다.
곧 '나'라고 하신 분과 '너희'라고 하신 복수는 동급이며, 동역인 것이다.
단수가 복수화되어 온 세상을 밝혀 더 이상 어두운 곳이 없이 빛으로 가득 찰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어두운 곳이 하나도 없을 때 빛의 사역은 끝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오기 전에는 율법의 행위가 정죄의 기준이었다.
빛이 온 후로는 율법은 무효하게 되고, 그럼으로 정죄의 기준도 달라졌다.
빛이 온 이후에 정죄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다"
이 말은 어두움이 빛에게 정복당하지 않으려고 어두움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악(惡)이다.
즉, 정죄는 빛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원래 사랑하던 어두움을 그대로 계속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대적이다. 이는 곧 어두움을 고집한다기보다 빛을 대적한 그 행위가
정죄의 기준이 된 것이다.
요한복음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는 행위는 다 악행이다.
빛은 어두움 가운데 와서 그 악행을 드러내고,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악행 하는 자는 빛을 싫어하며, 빛을 미워한다. 그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거짓과 진리는 내용이 아니라 상황이다.
어둠 속에 있으면 어둠 가운데 있는 그 자체가 거짓이요,
빛 가운데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고로 거짓과 진리는 개념의 문제를 벗어나서 행위의 문제인 것이다. 거짓도 행위요, 진리도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 혹은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두움에 있느냐, 빛 가운데 있느냐?"를 주시하신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빛을 첫 번째 위치에 놓고 보는 습성이 있다.
첫째 날에 빛이 있게 하신 이유가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그렇게 하신 분이 빛의 중요성을 도외시하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빛이 빛의 기능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고, 어둠을 밝히는 것만이 그 목적은 아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게하는 역할을 한다.
어두움은 그것을 알지 못하게 가리우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 들어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고로 빛은 밖을 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환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곧 빛이다.
고로 빛을 빛으로 제대로 볼 줄 아는 자는 빛을 보지 않고, 영광을 본다.
에베소서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안 때부터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영광에 대하여 등을 돌린다.
이제는 빛, 곧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서만 삶의 의미를 두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 차이점은 극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두움과 빛이 모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들이요 낮의 아들들이다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제는 과거요, 오늘은 새 날이라는 말이다.
이는 어두움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떤 자이었던 것처럼 빛의 자녀가 됨으로 어떤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말씀이다.
방향이 바뀌어졌고, 가치성이 달라졌으며, 삶의 목표와 의미가 새로워진 새 사람들인 것이다.
혹여라도 뒤를 돌아보거나 어제를 생각하지 말고, 새 사람다운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본문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란 질문에 꼭 그렇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기 때문이다.
빛의 자녀들에게 빛들의 아버지가 제한적으로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이다.
주님은 빛이시고, 아버지는 그 빛의 원천이시다.
고로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은 빛들의 자녀들 외에는 베풀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1서 1:5 우리가 저에게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주님께서 "나는 빛이라" 하셨고, 또 너희도 빛이라 하셨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까지도 빛이라고 하셨다. 결국 빛과 관계가 없는 자는
하나님도 없고, 주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주, 너희는 빛으로서 하나인 것이다.
신분은 다르고 권세와 영광은 차이가 있을 지 몰라도 빛이라는 존재적 속성은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1서 1: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빛의 속성이 같을 뿐만 아니라 속성이 같으므로 삶도 같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간에 나눔을 가지고 있고,
그 나눔을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결국 한 속성, 같은 삶이란 또한 주고받음에 나눔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까지도.
요한1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사랑한다는 것은 나눔에 있어서 조건 없이 한다는 것이다.
속성이 같고, 삶이 같으므로 나눔의 조건이 있을 수 없고, 조건 없는 나눔이 곧 빛 가운데 거함이요,
그럼으로 거리낌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무엇을 아끼고, 인색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본문은 오늘 공부한 소금과 빛의 총체적 결론이다.
본문에 나오는 왕들은 소금과 빛으로 섬김으로 인하여 다스리는 자들이 된 자들이다.
그들은 존귀와 영광을 빛을 통해서 알았으며, 빛으로 말미암아 얻어서 자기 것으로 삼은 자들이다.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성으로 개선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모든 은사와 온전한 선물,
약칭하면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해주는 도구이다.
빛이 필요 없는 그 세계는 오직 존귀와 영광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존귀와 영광이 되라는 말씀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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