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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콜로 3,1-11
복 음 : 루카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오늘의 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 내용인 루카 복음서의 행복 선언은 군중을 대상으로 한 마태오 복음서의
행복 선언과(5,1-12 참조) 달리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도 가난하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가난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가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주시는 하느님, 참으로 가난하시고
그래서 행복하신 하느님을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형제들에게 부족한 것을
자신들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여기기에 배고픈 이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배부름,
곧 삶의 충만함을 알며 그것을 누리기에 행복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며 겪는 제자들의 지금 상황은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고 웁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흘리는 눈물이기에 위로가 따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실 것이라는 희망이 그들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복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할 때, 세상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며 모욕하고 중상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박해와 미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박해받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임을 깨닫고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저의 손톱을 무심코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꽤 기네. 깎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 일주일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자란 것입니다.
제 몸의 일부인 손톱인데 말입니다.
아이들 크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2년 전, 우리 본당에 부임해서 처음 만났던 복사 아이들은 분명히 저보다 작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중학교 올라가면서 지금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나의 몸도 또 남의 몸도 잘 모릅니다.
이것만 모를까요? 그 밖에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 안에 살 때가 참 많습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으니 세상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하느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만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이 행복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겸손 안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야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 선언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우는 이, 박해받는 이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것이고,
불행 선언은 부유한 이, 배부른 이, 웃는 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이에게
내려지는 “불행하다”라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하시지요.
세상의 질서를 뒤집으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약한 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의 눈으로 불행해 보이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상에서만 즐거움과 위로를 찾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돌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불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또한 눈치보고 비위맞추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나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조욱현 토마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 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신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가치관이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 데 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생의 황금기 60세부터 75세’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4세라고 합니다. 여성은 87세, 남성은 81세라고 합니다.
저는 인생의 황금기를 막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잘 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건강수명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재산이 많아도, 시간이 많아도, 친구가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하면 인생의 황금기는 계속 늘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달라스가 덥지만, 저는 아침이면 동네 공원을 걷습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하고, 성경 듣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맨몸 운동도 함께 다닙니다.
안 쓰는 근육을 풀어주고, 스트레칭을 하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한국인의 40%는 하루에 30분도 운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가 오면 숲이 무성하듯이, 운동하면 몸에 활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는 ‘독서와 명상’입니다.
나이가 들면 아집과 편견이 늘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집과 편견으로 남의 일에 참견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곰팡내 나는 아집과 편견을 버리는 방법은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목적지를 모르면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지상 최대의 힘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도 많습니다.
요즘은 전자책도 있고, 듣는 책도 있습니다.
책 한 권에는 30년의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매일 책을 읽는 사람은 지혜와 지식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편견과 아집을 버리기 마련입니다.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사람이 됩니다.
사목이 바쁘다는 이유로 명상과 독서의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셋째는 ‘홀로서기’입니다.
95세 어르신이 ‘수필집’을 발간했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30년 동안 하는 일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홀로 있을 때 시간을 허비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인 105세가 되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어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면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습니다.
악기를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머니는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 글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야학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성경도 읽고, 성경 필사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서예를 배웠습니다.
제가 사제서품 받았을 때 저의 서품 성구를 액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밤하늘을 지키는 북극성도 홀로 있습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도 홀로 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신독(愼獨)’하라고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새벽 홀로 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에게 필요한 인생의 황금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그
것은 건강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홀로서기와도 상관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생의 황금기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옛 인간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을 입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가난할지라도,
지금 굶주릴지라도, 지금 헐벗을지라도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황금기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부유하더라도,
지금 배부를지라도, 지금 화려한 옷을 입을지라도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빛과 어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면 편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피부색과 지역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철학과 사상은 그렇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마니교도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편을 가르고, 구분하면 이해하기 쉽고, 적과 우군을 구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를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부유한 이에게는 소유를 넘어 존재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소유를 넘어 존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부유함도, 가난함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행복, 안주하지 않고 추구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얘기하면 불행하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좋게 하는 얘기를 들으면 왜 불행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어야지
나쁜 사람이라고 평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빛을 함지로 덮어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좋은 평과 칭찬을 사람들에게 들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는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그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하고
더 나아가 수치를 당하려고까지 하는데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더더욱 칭찬받아 마땅한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래서 불행하고,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이나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서 부유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난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웃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슬퍼하기에 행복합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려고 하는데도 다시 말해서 소유욕이 있는데도
가난한 것은 천상적 가난이 아니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아
가난해야지 천상적 가난이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며,
이를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과 연결하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지 않는 가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지 마시오.”
사실 땅에 살면서 어떻게 땅에 있는 것을 생각지 않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욕망이 절망과 허망이 되는 과정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땅에 있는 것을 생각지 않고 위의 것을 추구하는 빛나는 행복은,
그러므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보석입니다.
이 말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있듯이 행복도 급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키 위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는 행복이 최고 등급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최고 등급의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잃는 고통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행복을 욕심 부릴 것은 아닙니다.
행복 욕심보다 큰 욕심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안주하지 않고 추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후
군중들 틈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치유도 해 주십니다.
그러시고는 제자들을 향해 참행복을 선언하시네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물질 숭배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또 도전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지요.
혹 잉여 자산이 넘치는 이라면
에둘러 마음의 가난, 영의 가난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고 싶을 수도 있고,
혹 실제로 가난하기는 한데 그게 왜 복인지 모르겠을 만큼
가난이 진절머리 나는 사람이라면 반감도 들기도 하는 말씀일 겁니다.
이 행복 선언에 대해 묵상하고 연구한 영성가, 신학자들의 주해와 풀이는 차고 넘칩니다만,
이 말씀의 의미를 진실로진실로 깨닫는 이는 사실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과, 소유와는 별개의 가치인 행복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알아듣고 동의할 수 있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은총을 진짜로 체험한 이는
대개 감사와 사랑 가득한 침묵으로 들어가 소리 없는 언어로 말을 하기에,
어쩌면 이 행복은 아무에게나 알아듣도록 허용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이기도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이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는 말씀처럼,
세속의 유형 무형적 재물로 빼곡한 상태에서 마음은 온통 그곳에 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재물이 들어차지 않은 빈자리만큼이 곧 하느님의 자리가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어느 쪽이 먼저인지가 중요합니다.
욕심을 부려도부려도 재물을 모으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빈자리가 생겨 버린 이들의 박탈감 가득한 가난과,
먼저 하느님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해 떼어놓고
남은 곳을 생존을 위한 소박한 재물로 채우는 이들의 가난은
외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일지라도 내적으로는 차이가 상당하지요.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참행복의 가난은 아무래도 후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옛 인간과 새 인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속적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혔던 옛 인간이 이미 죽고,
"하느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콜로 3,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인간은 지상에 살되 지상의 질서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에게는 물질과 권력이라는 중력이 미치지 않거나,
혹 방향성에 별 영향이 되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자극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께서 차지하실 빈자리를 먼저 마련해 두고 남은 자리에 재물을 두지만
결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손에 달려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참행복 선언의 포문을 "가난"으로 여신 까닭은
이어지는 굶주림, 울음, 미움과 박해, 모욕과 중상 등이
모두 가난의 범주로 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충만함으로 넘어가는 비움의 관문이고, 새 생명을 얻는 죽음의 문지방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다면 가난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입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 세상이 비록 가난을 악이라고 멸시할지라도,
가난은 세상이 잃어버린 하느님의 자리를 되찾는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하느님을 소유한 이들의 가난 덕분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아직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가난은 나누고 양보하고 희사하면서
타인의 빈 곳을 채워주려는 선한 이들의 손끝을 타고 옮아가 행복의 자취를 전염시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향해 내달리는 이 세상에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공존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매료되어 가난을 선택하는 이들 역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집니다.
이 행복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있다면 아직 정점은 아닌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이 세상에서 부를 탐하고 누리는 사람은 왜 불행할까요?
이 지상 나라에서는 나름대로의 행복을 누리면서 위로를 받겠지만,
안타깝게도 참행복인 하느님 나라는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가난하십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다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은 몫을 떼어놓는 훈련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좀 넉넉하십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내가 좀 넉넉하다 느끼시면 얼른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조금 아쉽다 할 정도로 만든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얻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제 수도자요 사목자로서 절정기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밤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며 너무 힘들다고 투정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이 호시절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힘겹다 할지라도 살레시안으로서 아이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세월 지나면 이 순간이 정말 그리워질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고통도 컸지만,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꿈결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행복 불행이라는 것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 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 원리는 사랑이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엎는, 충격적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아니, 어떻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이 왜 불행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세상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설적인 진실을 두 사람의 삶을 통해 똑똑히 목격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세상의 모든 부와 쾌락, 명예를 손에 쥐었던 남자,
바로 플레이보이 제국의 창시자 휴 헤프너입니다.
그는 수십 개의 방이 딸린 호화로운 저택에서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잠옷 차림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쾌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깊은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이 누렸던 모든 쾌락의 잿더미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평생을 울며 살았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칭송받는 프랑스의 에디트 피아프입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가난, 질병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과 배신,
그리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 찬 ‘우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고통을 넘어,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휴 헤프너와 에디트 피아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가 더 행복했습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유일한 행복의 길이지만, 대부분 길을 잃고 맙니다.
세속-육신-마귀라는 삼구(三仇)에 사로잡혀,
가장 중요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행려인들의 어머니셨던 ‘왕초 수녀님’, 최 소피아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수녀님은 ‘세속’, 즉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요셉의 집’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행려인들을 돌볼 때,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날로 필요한 것을 모두 사서 나누어주고 통장을 텅 비워버리셨습니다.
어느 날, 한 방송국 PD가 인터뷰 중에
“수녀님, 내일은 당장 쌀이 없는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느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예.
오늘 필요한 만큼 주셨으니, 오늘 감사하며 쓰면 됩니다.”
그녀에게 돈은 쌓아두는 재산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흘려보내는 강물과 같았습니다.
둘째, 수녀님은 ‘육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KBS의 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수녀님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는 욕을 하며 거칠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수녀님의 얼굴은 할퀴어져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며 그를 씻기고 먹였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몸은 아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셋째, 수녀님은 ‘마귀’, 즉 세상의 인정과 명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한번은 조계사의 한 스님이 수녀님의 헌신적인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불교 방송을 통해 수녀님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후원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녀님은 스님을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스님! 왜 제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제가 하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 아시면 됩니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세상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만 살았던 분입니다.
이처럼 삼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기에,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그녀는 진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행려인들에게 욕을 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야단과 매질 속에, 뼈 속까지 시린 진짜 ‘사랑’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직후,
그 전 재산을 익명으로 형제들과 예술가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의 정원사, 병원의 잡역부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이름 없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돌보던 부인에게 그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
그는 세상의 모든 부를 버렸지만, 그 대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과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행복합니다. 삼구를 사랑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사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