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 출연 58명 설문조사 해보니
알려진 스타는 아니었다
가장 웃기는 동료 1위엔… 무명에 가까운 안일권
"개콘 최고의 까불이"
조윤호도 공동 2위 '이변'
세상 웃겨도 이들은 못 웃겨
후덕한 몸매 유민상 1위
'인기없는 男' 김기열 2위
둘의 특징은 아이디어 맨… "본인이 짠 것 외엔 시큰둥 "
웃음 뒤엔 피눈물 있다
16년 개콘, 원년 멤버는
박성호·김준호·김대희뿐
못 웃기면 사라지는 정글…
그래도 이들이 있어 웃는다
며칠 전 한 무명 개그맨의 눈물이 공중파를 탔다. "데뷔 4년차지만 1년째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남을 웃기는 게 행복하지만 개그맨이 내 적성인지 고민이 된다." 울음은 웃음보다 울림이 컸던 것일까? 그가 출연한 예능 프로의 시청률은 평소보다 1% 가까이 올랐다. 그가 다시 서기를 갈망한 무대는 '개그콘서트'(이하 개콘) 였다.
1999년 9월 첫회 이래 개콘은 16년간 시청률 1위 개그 프로그램이었다. 굵고 긴 성공의 궤적 뒤엔 '웃기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철칙이 있었다. 웃음은 장수에 좋지만, 장수하는 웃음을 만들려면 피눈물이 따르는 법. 개콘은 열여섯 살이지만 지금 무대에 오르는 개그맨들의 개그 이력은 평균 4년. 단명(短命)한 멤버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원년 멤버는 박성호·김준호·김대희뿐이다.
해마다 개콘 제작진엔 250개의 새 코너가 도전장을 내민다. 그중 20개 정도만이 무대에 오르고 다시 그 가운데 통째로 편집돼 방송을 못 타는 비운의 코너가 생긴다. 성공률 10% 미만. '무대에 서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던 4년차 개그맨은 실패한 90% 속에 있었다. 매주 TV화면을 통해서 시청자를 만나는 개콘 출연진은 그래서 '개그계의 메이저리거' '국가대표 개그맨'이라고 불린다.
일요일 밤 한국 개그계 최고수들의 경연을 보면서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대한민국을 웃긴다는 개콘, 그 개콘 내부의 최강자는 누구인가? 더 좋은 웃음을 위해 경쟁하는 라이벌로서 평가하는 시각은 시청자의 것보다 더 깐깐하고 냉정하지 않을까. 개콘에 출연 중인 개그맨들에게 물었다. 당신의 동료 중 누가 가장 웃기는가? 그리고 누가 가장 웃기기 힘든가? 설문에는 개콘 16년차 원년 3인방부터 1년차 막내 개그맨들까지 모두 58명이 참여했다.
- 개그콘서트 멤버들이 ‘가장 웃기는 개그맨’ 1·2위로 뽑은 안일권(오른쪽)과 조윤호. 두 사람은 “개콘 연습실은 개구쟁이, 악동들투성이 중학교 교실”이라며 “그곳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KBS 신관 뒤뜰은 놀이터였다. / 이덕훈 기자
몸개그, 말장난, 반전, 풍자, 개인기 등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웃음 고수들이 모여서 그런 것일까. '가장 웃기는 동료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몰표는 없었다. 1표 이상을 받은 개그맨이 37명이나 될 만큼 표가 분산됐다. 설문 전 예상 1위는 개콘의 간판 김준호·박성호. 오늘 웃겼던 얘기가 내일은 썰렁해지는 세태를 16년이나 버텨낸 이들의 내공은 자타 공인 최강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각 5표를 얻어 2위에 머무른 것은 뜻밖의 결과였다. 대선배를 밀어내고 1위에 오른 건 7표를 얻은 9년차 중견 개그맨 안일권이었다. 개그맨 조윤호가 김준호·박성호와 공동 2위에 오른 것도 의외였다. 많은 시청자에겐 둘은 아직은 낯선 얼굴이다.
안일권과 조윤호는 새해 개콘의 새 코너 '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하고 있다. 식당을 하며 살아가는 선량한 부녀를 괴롭히는 어리바리 조폭 이야기다. 그 부녀는 알고 보니 초야에 묻힌 무림 초고수들. 폼을 잡고 있던 안일권은 부하들이 나가떨어지자 "애들이 많이 다쳐서……"라며 달아나는 '찌질한' 조폭 보스, 조윤호는 입으로 무술을 하며 깐죽대는 행동대원 역이다. 슬로비디오 같은 동작으로 "당황하지 않고, 내 몸이 기억하는 대로 몸을 낮춘 후 명치를 팍!"한 뒤 외치는 "끝!"이라는 조윤호의 대사는 연초부터 유행어 반열에 올랐다. 고수에게 일격을 당한 뒤 "맞은 데 또 맞아 아프지만 참고 ……"하며 능청스레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폭소를 자아낸다. 이 코너는 코너별 시청률 1~2위를 다투고 있다.
스타와 거리가 있지만 이들은 '개콘 작가실의 러블리'로 통해왔다고 한다. '작가실'은 KBS 내 연습실을 일컫는 개콘 내 은어. 안일권에게 표를 던진 개그맨들은 그를 '개콘 최고의 까불이, 익살끼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한 개그맨은 '디테일하고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가 압권'이라고 평했다. 불량스럽게 굴다가도 상대방이 강하게 나오면 바로 꼬리를 내리는 비굴 연기가 탁월하다. 동료들이 "그 비굴함, 본인의 진짜 성격 아니냐"고 의심할 만큼 리얼하다. 특징을 잡기 힘든 동료 개그맨, 개콘 제작진의 목소리와 표정까지 판박이로 흉내 내는 '모사의 천재'로도 통한다.
개그 경력 8년차의 조윤호는 '깐죽거리 잔혹사'에서 역할이 사실상 첫 주역이다. 한 선배 개그맨은 "아직 뜨지 못한 그가 스타가 된 듯 짐짓 허풍을 떨 때 가장 웃긴다"고 말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개콘은 막내 기수가 매주 연습실을 돌며 새 코너를 짜는 팀을 파악해 제작진에 보고하는 게 전통이다. 지난주 한 막내가 조윤호에게 다가왔다. "윤호 선배님, 이번 주 새 코너 짜신 것 있나요?" "야, 나 '깐죽거리'의 조윤호야! '끝!'하고 있는 사람인데 새 코너를 짜야겠니? 회의 마치고 나면 MBC 건너가서 (유)재석 형이랑 회의해야 해!" 밉지 않은 허풍쟁이 조윤호에 대해 동료들은 "개콘 작가실 내 최고의 러블리. 그냥 지나가도 웃긴다"고 말한다.
박성호는 엽기적인 화장을 하는 일본 '갸루상' 분장을 하고는 "사람이 아니무니다!"를 외쳐 전국민을 웃겼던 주인공. 후배들은 '나이·기수·체면을 다 던지고 웃긴다. 웃음을 위해 태어난 사람' '삶 자체가 개그'라고 평했다. 개중엔 '기수가 가장 높은데도 가장 철이 없어 보인다'는 촌철살인도 있었다.
김준호에 표를 던진 한 개그맨은 '그가 가장 웃기다는 데 누가 반대하는가'라고 했다. '연기력과 아이디어, 진지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지닌 면모가 웃긴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에게 표를 준 한 베테랑 개그맨은 "15년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가 웃긴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들 외에 권재관이 3표를 받았다.'절묘한 타이밍에 툭툭 터지는 애드리브가 압권'이라는 평.
표가 분산됐던 '가장 웃긴 동료' 설문과 달리 '가장 웃기기 힘든 동료'에선 유민상(11표)과 김기열(8표)에게 표가 몰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는 '찌질한' 노총각들의 넋두리 '안 생겨요', 졸부들의 행태를 코믹하게 그린 '누려' 등에 출연 중인 유민상은 뚱뚱한 몸매에 후덕한 인상.
그의 한 선배는 그러나 '유민상은 개그계의 히스레저, 염세주의계의 큰별'이라고 답했다. 히스레저는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포커페이스의 냉혈 살인마. 유민상의 평론가적 면모를 콕 집어 '개그계의 임진모'라는 답변도 있었다. 임진모는 대중음악평론가. 한 후배는 유민상에 대해 '혼자만 개그 박사'라고 했다.
가장 웃기는 개그맨 1위 안일권과 공동 2위 박성호 역시 유민상을 가장 웃기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유민상 본인조차도 자신을 '가장 웃기기 힘든 사람'으로 뽑았다.
웃기기 힘든 개그맨 2위 김기열은 '네가지'(종영)에서 인기 없는 개그맨 역할로 인기를 끌었다. 사회의 루저(loser·패자) 취급받는 남자 네 명이 돌아가며 항변하는 형식의 스탠딩 개그였다. 그에 대해 동료들은 '자기 개그 외에는 다 재미없어한다' '본인이 짠 거 아니면 웃음을 참는다'고 평했다.
유민상과 김기열은 개콘 내 '아이디어 맨'이라고 한다. 한 후배는 '유민상 선배는 가장 아이디어가 좋은 선배로 그가 웃으면 (흥행)되는 코너'라고 답했다. 김기열은 KBS 연예대상에서 우수아이디어상을 거푸 수상했다.
그 까다로운 유민상과 김기열이 '가장 웃기는 개그맨'으로 꼽은 이는 누구였을까. 유민상은 조윤호, 김기열은 안일권이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선택과 같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안목이 간접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가나다 順〉
김기리·김기열·김나희·김대희·김병선·김재욱·김정훈·김종은·김준현·김준호·김현기·김혜선·류정남·박성호(13기)·박성호(28기)·박소라·박소영·박영진·박은영·박지선·복현규·송영길·송준근·송필근·신고은·신보라·신윤승·안소미·안일권·유민상·윤한민·이동윤·이문재·이상호·이상훈·이수지·이예림·이종훈·이찬·임우일·장유환·장윤석·장효인·정범균·정승환·정윤호·정진영·정찬민·정태호·정해철·조수연·조윤호·허민·허안나·홍나영·홍순목·홍예슬·황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