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샤워 부스 안에서 샤워를 하다 멈춘 나정희는 벽에 기대어 주르르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떨어졌다. 그녀는 소리 죽여 울었다. 알몸으로 욕실에서 나온 나정희는 침실을 먼저 살폈다. 양동탁이 순한 양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정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로 나온 나정희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7223.' 그녀는 번호를 확인한 후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강호씨…. 당신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나요?' 나정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그녀의 알몸 위로 달빛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 시각, 서울로 돌아온 변강호는 오랜만에 이소정의 집으로 향했다. 머잖아 이천에서 같이 근무를 하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가끔은 자신이 이소정을 제2의 나정희 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미친 놈, 정희는 잘 살고 있을 텐데…." 변강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나정희의 얼굴을 서둘러 지웠다. 그리고는 이소정의 집 대문 초인종을 눌렀다. "오늘은 삼촌이 안 계신데요?" 이소정이 난처한 듯 말했다. "어디 가셨습니까?" "매주 금요일이면 오후 늦게 나가셔서 밤 늦게 들어오세요. 모르셨어요?" 변강호는 처마 위의 가로등을 올려다보며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고 문전박댑니까? 오랜만에 왔는데." "밤이 늦어서 그렇죠. 삼촌도 안 계시고." "조금 있으면 오실 거 아닙니까. 멀리서 달려 왔으니까 차나 한 잔 주세요." 변강호는 막무가내로 이소정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사님, 어디 다니세요?" "저한테도 잘 말씀 안하세요. 아무튼 어디 강연을 가시는 거 같은데 꽤 수입이 짭짤 하시다고만 하세요." "궁금하네. 다음 주엔 어딜 가시나 미행이라도 해 봐야겠는데요."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고 올라오세요. 마침 지리산에서 차가 올라왔는데 한 잔 하세요." "진즉에 그럴 거지." 변강호와 이소정이 마루에 찻상을 두고 마주 않았다. "대일 전자 사장 아직도 못 봤습니까?" "이야기만 들었어요. 공미라라는 분인데, 하버드를 졸업한 수재라나 봐요" "여자?" "네!" 그때까지도 힐끔힐끔 이소정의 가슴을 훔쳐보던 변강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몇 살이랍니까?" "삼십대 중반이라고 들었어요." 변강호는 단숨에 찻잔을 들이켜는 바람에 사레가 들어 연신 기침을 해댔다. 변강호는 이소정의 집에서 자정까지 머물렀다. 박무달을 만나고 가겠다는 핑계로 주저앉았지만 자정이 넘자 더 이상 핑계 댈 말도 없었다. 자정이 넘은 후에야 변강호는 이소정의 집을 나섰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지.' 이소정을 마음껏 보고 나왔지만 그럴수록 나정희에 대한 그리움만 더욱 사무쳤다. 변강호는 전동차 역사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지만 건너지 않고 망설였다. 마침 변강호 앞에 택시가 와서 멈추었다. 변강호는 무작정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현동으로 가주세요." 변강호는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랐다. 아현동은 나정희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행선지를 바꾸고 싶었지만 오늘 만큼은 그냥 마음이 닿는 대로 가고 싶었다. 택시가 아현동으로 향하는 동안 변강호는 아직도 속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사표를 만지작거렸다. 대일을 그만 두는 일에 대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왜 늘 우유분단하지?' 변강호는 품속에 들어있던 사표를 꺼내 발기발기 찢었다. '이젠 끝까지 가 보는 거다.' 그는 창문을 열고 찢어버린 사표를 바람에 날려 보냈다. "손님, 사는 게 쉽지 않죠?" "네?" "저도 IMF 터지기 전까지 대기업에 다녔죠. 그때 잘렸어요. 그래도 대기업 과장까지 했는데 뭐든 못할까 싶었습니다. 이것저것 손댔다가 그나마 가진 퇴직금 다 말아먹고. 방황 참 많이 했습니다. 웬만하면 지금 다니는 직장 그냥 다니세요. 구관이 명관이라고 요즘 다니던 직장 그만 두면 다시 취직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혹시 어디 다니세요?" "대일에 있습니다." "그럼, 대기업이네요. 누가 뭐라고 해도 버티세요. 요즘 대기업 입사 경쟁률이 몇 천대 일 아닙니까? 그런 델 그만 두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택시 기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었지만 더 이상 변강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택시가 아현동 고갯길에서 멈췄다. "힘내세요.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변강호는 택시 기사의 충언에 보답하느라 잔돈을 받지 않고 내렸다. 눈앞에서 택시가 사라진 후 변강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추계예대 담 길을 따라 걸었다. 나정희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변강호는 그런 자신을 향해 피식 웃었다. 나정희를 집에 바래다주었던 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네.' 변강호는 어느새 나정희 집 앞에 이르렀다. 빨간 벽돌 집. 가로등이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그녀가 살던 집엔 불빛 한 점 없었다. 변강호는 적막한 심사를 달래려고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변강호는 가로등 곁에 서서 나정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나 한번 들어보자.' 왜 그런지 위기에 처하면 처할수록 유독 나정희가 떠올랐다. '그냥 목소리만 한번 듣는 거다.' 몇 달 전에도 전화를 했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도 말 한 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었다. 길게 울리던 휴대폰 발신음이 사라지고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정희였다. 그 시각,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양동탁과 함께 누워 있던 나정희는 발신번호를 확인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정희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막고 잠든 양동탁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의 몸을 부셔버릴 듯 두 차례나 거칠게 섹스를 치른 후라 그런지 그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나정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강호야, 아직 있지?" 나정희는 자꾸만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휴대폰 저쪽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좀 해봐." 변강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정희는 변강호가 골목 어딘가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변강호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듣고 끊겠다던 마음과의 약속을 잊은 채 변강호는 입을 열었다. "…결혼했니? 지난번 호텔에서 보니까…." 한숨이 가득 섞인 변강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결혼 안 했어. 그 사람은…." 나정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변강호에게 양동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다." "잠깐만!" 변강호는 다시 침묵했다. "잘 살지?" "실은 네 얼굴 한번 보려고 네 집 앞에 와 있다." "아현동?" "그래." "이젠 거기 안살아." "그랬군. 그럼, 이제 끊어야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변강호는 선뜻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한 가지만 물을 게. 왜 나를 떠난 거지?" 나정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에게만큼은 끝까지 순결한 여자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변장수는 아버지의 변강호에 대한 입장을 짐작해봤다 변승우는 네 명의 부인들 중 유독 변강호의 어머니만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렸다. 세 번째 부인까지는 가문도 있고 재력도 있는 집안의 여자였지만 변강호의 어머니는 그저 고급 술집의 마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변강호가 입사를 했다. 그렇다면 변강호 어머니의 은근한 협박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함부로 자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미우나 고우나 동생 놈이니까. 신경 좀 써." 변장수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변승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변강호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던 변승우였던 터라 변장수는 적잖이 놀랐다. '이 노인네가 망령이 나기 전에 변강호를 정리해야 할 텐데.' 변장수는 변승우에게서 멀어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온 일행은 아침 식사를 위해 '긴자'라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긴자'는 흔한 일식집이 아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이 'ㄷ'자로 배치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작은 연못이 딸린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정원 이편에서 저편의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제법 조경이 잘되었고 규모 또한 컸다. '긴자'로 들어가자 산 중턱의 휴게소에서 만났던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간 청색 치마에 흰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청색 치마는 옆이 한 뼘쯤 찢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건강하고 탄력적인 허벅지가 보였다. "회장님, 전복죽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내가 요즘 양 마담 덕에 아침이 즐겁다니까." 그녀는 엷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산에서 볼 때완 달리 화사하면서도 육감적이며 또한 수수한 느낌을 자아내는 묘한 여자였다. 누구든 반할 만한 여자였다. 변승우 일행은 정원을 지나 뒤란에 있는 별채로 안내되었다. 별채는 화려했다. 변승우가 앉은 뒷면은 십장생 그림이 전면을 채우고 있었다. 테이블 앞에는 비단이 씌워진 좌식 의자가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번들거렸다. 전복죽이 나오는 동안 주방장이며 종업원들이 특실로 찾아와 인사를 했다. 모두 여자였는데 하나같이 평균 이상의 미모를 지닌 여자들이었다. 변승우에 대해 꽁해 있던 변장수의 마음이 어느새 훈훈하게 풀어졌다. "회장님께서 언제 이런 데 계발을 하셨습니까?" 변장수는 변양수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한 세 달쯤 됐을 걸." 변장수는 수발을 들기 위해 변승우 곁에 앉아 있는 양 마담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모르는 친구들도 있지, 인사해." 변승우가 곁에 앉아 있는 양 마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무릎걸음으로 일어났다. "긴자의 여주인 양 초선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회사 중역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겸손하고 윗사람 모실 줄 아는 센스도 있는 여자였다. 변장수는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중역들은 입을 헤 벌리고 그녀의 절을 받았다. 여러모로 괜찮은 여자지만 경계해야 할 여자이기도 했다. "형님들, 이따가 저 좀 봬요." 변장수는 변양수와 변일수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나정희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제 와 변강호에게 용서를 빌거나 재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휴대폰을 접은 나정희는 거실 창가에 서서 화려한 야경의 서울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에서 깬 양동탁이 어둠속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양동탁은 먼저 나정희의 얼굴을 살폈다. 나정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몸을 작게 말고 자는 나정희가 애처로워 보였다. 양동탁은 나정희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은 양동탁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나정희의 휴대폰에 가 닿았다. 양동탁은 침실 쪽을 한번 쳐다본 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수신번호, 수신번호…' 어제 자정 무렵에 수신된 전화번호는 없었다. '발신번호?' 발신번호도 없었다. 나정희가 수신과 발신 내역을 모두 지웠다는 말이었다. '정희가 내게 뭘 숨기는구나.' 양동탁은 창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얼굴을 맡긴 채 씁쓸하게 웃었다. 양동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저, 강잽니다." "기다려."양동탁은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옷을 챙겨 입었다. 그때까지도 나정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 나정희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건물 앞에 이강재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장님, 얼굴이 핼쑥하십니다." 이강재가 양동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뒷좌석에 앉은 양동탁은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사장님, 출발할까요?" 이강재가 물었지만 양동탁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내 여자는 내가 지키는 게 옳은 일 아닌가. 그래, 정희를 감시하는 건 치졸한 일이 아니다.' 양동탁은 운전기사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차 안에는 양동탁과 이강재만 남았다. "강재야. 여기 믿을만한 놈으로 하나 붙여라." "여기 말씀입니까?" 이강재는 차창 밖으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발 빠르고 눈치 빠른 놈으로 하나 붙여." "작은 사모님께 붙이라는 말씀이신지…." "절대로 소문나면 안 된다. 너랑 나 그리고 그 놈만 아는 거야. 알겠지?" 양동탁이 품에서 나정희의 사진과 10만원 권 다발을 꺼내 이강재에게 건넸다. "사장님, 어제도 받았습니다." "어젠 네 수고비고 이건 이번 일에 대한 수고비니까 받아!" 이강재는 두 손으로 공손히 돈을 받았다. 양동탁은 집으로 전화를 걸려다말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우리 집은?"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아침에 들여다봤는데 큰 사모님 술에 취해 계셨습니다. 아드님이랑 따님은 유치원에 갔습니다." 양동탁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양동탁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을 와이프를 떠올리자 진저리가 났다. '염병할 년!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차가 출발했다. 양동탁은 삼성동 사무실 앞에서 내리며 재차 이강재에게 지시했다. "강재야, 누구도 절대로 눈치 채선 안 돼.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이강재가 머리를 조아렸다. 양동탁이 사무실로 들어간 후 이강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10분 안에 와!" 통화를 끝낸 이강재는 양동탁이 들어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10층짜리 건물이었다. 건물의 소유주는 양동탁이었다. 인근의 여느 건물보다 세련되고 조형미가 넘치는 건물이었다. 건물 10층에 '대양컨설팅'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형 음식점들이나 대형 술집들의 주류를 납품하는 회사였다. 이강재의 꿈은 양동탁처럼 성공하는 것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번듯한 건물을 갖는 것, 그리고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게 이강재의 꿈이었다. "형님!" 작고 땅딸한 몸매의 사내가 이강재에게 다가오며 알은체했다. 사내는 생김새와 달리 별명은 날새였다. 발 빠르고 입 무거운 놈이었다. 이강재는 나정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소와 사진 그리고 휴대폰 번호 적은 쪽지를 건넸다. "뭡니까?" "오늘부터 좀 알아 봐. 통화내역도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고." 이강재는 양동탁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알아내려고 했다. "통화내역은 힘든데…."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이강재는 양동탁에게서 받은 돈의 절반을 날새에게 건넸다. "어이쿠,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넣어 둬." 날새의 입이 귀에 걸렸다. "형님, 이 냄비 죽이게 생겼는데요." "얌마, 입 조심해. 양동탁 사장님 세컨드야. 말 함부로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 있어." 날새가 제 입을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깔끔하게 일처리 해야 돼. 그래서 내가 널 부른 거니까." "형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날새 아닙니까. 날새!" 날새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후 이강재는 담배를 꺼내 물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이천을 떠나 양동탁 밑으로 들어왔을 때 이강재는 술집 문이나 지키는 똘마니에 지나지 않았다. 이강재가 자신의 수하들과 처음 서울로 입성했을 때 그야말로 촌놈에 지나지 않았다. 사채자금의 자본주를 했던 정 마담의 소개로 양동탁을 찾아갔을 때 양동탁은 쓰다 달다 말없이 이강재와 그 수하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강재의 기대와 달리 그와 수하들은 술 상자나 나르며 하루하루를 소일했다. 이강재는 묵묵히 참았다. 그런데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놈들이 종종 있어. 강재 자네라면 어떻게 할 건가? 그 놈 때문에 조직이 무너지게 생겼다면 말이야. 꼭 회수해야할 물건이 하나 있어.' 양동탁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강재에게 '밀월 사건'을 두고 협박했던 수하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강재에겐 기회였다. 이강재는 지난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봐도 보스들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했다. 훗날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빠져나가기 위한 대비라는 걸 이강재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강재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떡하든 최소한 넘버 스리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가야만 했다. 이강재는 수하들과 놈의 집으로 찾아가 가스 폭발 사건처럼 위장하고 빠져나왔다. 이강재가 저지른 최초의 살인이었다. 하지만 양동탁이 말한 물건을 찾지는 못했다. 그 물건은 이미 검찰에 넘겨졌고 그게 다시 변장수의 손으로 넘어갔음을 이강재는 알지 못했다. 그 일로 이강재는 양동탁의 보디가드가 되었다. 이강재가 다 피운 담배를 발로 비벼 끌 무렵 양동탁의 오른팔인 독고가 사무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강재는 허리를 절반 굽혀 그를 맞이했다. '더러운 새끼!' 독고는 양동탁과 달리 냉혹하고 이기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욕심도 많고 야망도 컸다. 동물적인 직감으로 생각해 보건데 양동탁을 배신한 배후엔 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님, 오셨냐?" "네, 형님!" 순간 독고가 느닷없이 이강재의 뺨을 후려쳤다. "이 새끼가! 우리가 조폭이냐?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네, 부사장님!" "그래, 부사장, 듣기 얼마나 좋냐. 안 그래?" 독고가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수하들이 키득거렸다. 대양 컨설팅의 덩치가 커지면서 서서히 파벌이 생기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고였다. 독고가 사무실로 사라진 뒤 이강재는 그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며 침을 퉤 뱉었다. 이강재는 하루 종일 양동탁과 함께 서울에 있는 대형 술집과 음식점들을 돌아다녔다. 양동탁의 일이 끝난 건 자정을 훨씬 넘긴 후였다. 이강재는 양동탁을 본가로 모셔다 드린 후에야 왕십리의 허름한 원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과거 이천에서부터 이강재를 뒤따랐던 수하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방바닥은 먹다 남은 음식 그릇들과 맥주 캔들로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다. 이강재는 닥치는 대로 똘마니들을 발로 걷어찼다. "이 새끼들아, 동네 양아치로 살고 싶어? 이렇게 빈둥거리지 말라고 했지?" 이강재는 자신의 수하들도 일류 건달이 되기를 바랐다. 일류 건달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강재는 양동탁이 몇 시간을 자는 지, 얼마나 많이 운동을 하는지 그리고 먹물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개의 신문은 물론 경제 잡지나 문화 잡지까지 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모와 학식은 이제 일류 건달이 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었다. 이강재는 더 이상 똘마니들을 닦달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이강재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한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이천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직도 시장좌판에서 생선을 팔고 있을 어머니가 떠오르자 코가 시큰했다. '빌어먹을! 이강재, 마음 약해지면 끝장이야.' 이강재는 집으로 올라오는 골목 초입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포장마차로 막 들어섰을 때 날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양 사장님 세컨드 분의 통화내역을 보다가 재미난 걸 발견했습니다." "뭔데?" 이강재는 소주와 매운 오징어볶음을 주문했다. "최근 한 달 동안 전화를 받거나 건 내역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게 뭐가 재미있어?" "그래서 세 달 동안 통화 내역을 쭉 뒤져 봤습니다. 어머니와 몇 차례 통화한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딱 두 번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내역이 있습니다. 세 달 전에 한번 전화가 걸려왔고 바로 어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제?" 이강재는 오늘 아침 양동탁의 얼굴이 밝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수고했다. 그 놈에 대해 자세히 좀 알아 봐." "뭐, 이름 정도는 지금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말해 봐." "변강호라는 작잡니다." "변강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이강재는 낯설지 않은 그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알았으니까, 계속 지켜 봐. 오늘 그 여자는 별 일 없었지?" "잠깐 마트에 다녀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수고했다. 나중에 또 연락해라." 이강재는 날새와 통화를 끝낸 후 변강호의 이름을 입안에 굴려보았다. 도무지 어디서 들은 이름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변강호라는 작자 때문에 양 사장 심기가 불편했던 것일까?' 이강재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통통한 살집의 여주인이 어묵 탕과 오징어볶음을 들고 왔다. "강재 오빠!" 포장마차로 들어서던 세 명의 여자가 이강재를 보며 알은체했다. 인근 싸구려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는 술잔을 주문하고 여자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요즘, 왜 한 번도 안 와?" 많이 먹어봐야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됐을 법한 나이의 어린 여자들이었다. 그래도 제법 화류계 여자티를 내느라 짧은 치마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블라우스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희고 보드라운 여자의 살이 이강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변강호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 역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골프란 해가 지면 끝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해가 진 지 두 시간은 지난 시각이었다. 여기저기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장님, 배가 고파서 도저히 못 참겠네요. 우리 먼저 시작하죠." 고길수가 말했다. "고 대리,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잖아. 여기 누군 배 안 고픈가? 조금?참아. 우리 새롭게 출발하는 첫날인데 지사장도 없이 치를 순 없는 거 아냐." 임달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변정아가 나타난 건 두 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식당을 한번 휘 둘러본 후 임달호를 불러 그에게 봉투를 건넸다. "다들 수고했어요. 워낙 일이 많다보니까 늦었네요. 난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니까 재미나게들 노세요." 변정아는 그 말을 남긴 후 휑하니 식당을 나가버렸다. 여기저기서 낮게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임달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뒤돌아서서 봉투를 뒤졌다. "자, 자. 여러분. 늦었지만 이제 시작합시다. 그래도 지사장님께서 금일봉으로 정말 두둑이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서 1차 끝내고 2차는 좋은데 가서 먹읍시다." 임달호가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달랬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째 부인의 자식이든 변정아는 어쨌든 변승우 회장의 고명딸이었다. 건설 쪽 직원들까지도 그녀의 심기를 거슬려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에이, 술이나 먹고 풀자." 윤장미가 잔에 술을 따르고 일어나 건배를 청했다. "여자들이 한번 움직이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들 풉시다. 자 건배!" 윤장미가 호기롭게 선창을 했다. 그녀의 호탕한 제안에 회식 장소에 모인 직원들의 심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설왕설래. 어차피 상대가 없으면 뒷말이 무성하기 마련이었다. 직원들은 한결같이 변정아를 두고 온갖 구설을 만들어냈다. "변 회장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겠지. 고명 딸 아닌가." "우리 회장님 성격에 마흔 가까이 그냥 놀고먹도록 내버려뒀다면 애정이 각별한 게 틀림없어. 입단속들 잘 하라고." 변강호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술이란 게 어떤 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이 있다. 직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건설 쪽 인부들은 윤장미와 따로 2차를 나간 후 전자 지사 직원들만 뭉쳐 이천 호텔 나이트로 2차 술자리를 가게 되었다. 지방이라고는 하지만 호텔 나이트클럽답게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자, 자. 우리 이번 기회에 대일 전자를 확실히 살려보자고." 임달호는 신이 난 얼굴이었다. 지사장이 여자라 자신이 적당히 구워삶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대구에서 서울 인근으로 올라온 일이 곧 재기의 발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변강호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모두 무대로 춤을 추러 나간 사이 변강호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 변장수는 일수, 양수와 함께 효자동으로 옮겨 '맥'이라는 전통찻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두바이에서 바이어 오기로 되어 있는데 샤워하고 준비하려면 시간 빠듯해. 용건이 뭐야?" 변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양쪽 눈이 축 처진 게 사람 좋아 보이지만 매사 날카로운 대일 그룹의 장자였다. "형님들은 일하는 데는 열심이고 정확하지만 사람 관리는 엉망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변양수가 물었다. "저야 사실 형님들 밑에서 일만 열심히 하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형님들 제 심정 아시잖아요." 변일수와 변양수는 찻잔을 들고 홀짝이며 이렇다 저렇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능구렁이들!' 변장수는 속으로 중얼거린 후 테이블에 바짝 당겨 앉았다. "아까 그 일식집의 양 마담이라는 여자 말입니다. 혹시 그 일식집도 회장님이 차려준 게 아닐까요?" 변장수의 말에 변일수와 변양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연세에 또 여자를 꼬시려고 그러셨겠어." 변일수와 변양수 역시 양 마담과 변승우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러셨건, 아니건 앞으로 경계를 해야 할 겁니다. 우리 회장님께서 저토록 여자 좋아하는 게 오랜만이잖아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회장님께서 부인으로 맞아들이기라도 하는 날엔…." 그제야 변일수와 변양수가 테이블 가까이 바짝 당겨 앉았다. "솔직히 저는 평생 일만 하는 걸로 족합니다. 하지만 형님들은 회장님 재산 물려받아야 하잖아요. 양 마담한테 일부 물려 주지야 않겠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형님들 재산 주는 겁니다. 정말 양 마담에 대해서 전혀 모르세요?" "아버지 연세가 아흔이 넘었잖아. 그래서 설마 하는 거야. 그 나이에도 여자를 후리시기야 하겠냐 싶은 거지." "형님도 참, 남자는 거시기만 서면 씨를 뿌릴 수 있다잖아요. 오늘은 저를 불러서 강호 자식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데 속이 다 타더라니 까요. 그 놈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씀 드렸는데도 동생이니 신경 좀 쓰라는 당부를 하시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이게 있을 법한 이야깁니까? 단칼에 잘라버리셨지." "그래?" 변일수와 변양수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형님들도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엄한 놈이 받아간다고 그런 꼴 날지도 모릅니다." 변일수와 변양수가 바짝 긴장이 되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나저나 전자 쪽도 계열사 해보시겠다는 꿈은 접으신 거죠?" "접으셨으면 진작 부서를 없애라고 하셨겠지." 변장수는 변장수 대로 변일수와 변양수는 그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