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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휴가
송재찬
‘마침내 ’날고 싶은 사람‘, 작업을 끝냈네. 내일부터는 호랑이 깎는 작업을 시작하자.’
나무 공예가 장강구 할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리맡의 조명등으로 손을 뻗었다. 불을 껐는데도 방안은 깜깜하지 않았다.
‘오늘이 보름…. 달이 참 밝구나. 바람이 부네.’
창문에 드리운 살구나무 그림자가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화사한 살구꽃 때문에 그림자가 분홍빛으로 보였다.
‘달구경이나 하고 잘까? 어차피 잠이 오지 않을 텐데.’
할아버지는 요즘 부쩍 불면에 시달렸다. 졸려서 하품을 하다가도 누우면 잠이 달아나 버렸다.
바람이 멎었는지 흔들리던 그림자는 멎었고 창은 더 환해졌다.
오늘도 잠이 안 와 고생하겠지,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며 슬그머니 잠이 몰려오는 걸 느낀 순간 할아버지는 까무룩 잠에 빠졌다.
“장강구 그만 가자.”
얼마큼 잤는지 모른다. 모처럼 몸이 가뿐하다고 느낀 순간 할아버지는 누가 방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을 세 사내. 할아버지는 놀라지도 않고 그들을 보았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들이 왔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한 사내가 손을 내밀어 할아버지를 일으켰다. 할아버지는 그 사내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사내가 손을 내밀긴 했지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할아버지는 다른 때처럼 끙끙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일어난 게 아니라 가볍게 일어났다. 두 다리가 멀쩡했다. 남의 눈에 보이고 싶지 않은, 한 쪽 가는 다리도 튼튼한 다리로 바뀌어 있었다. 평생 독신을 고집하게 했던 부끄러운 다리였다.
‘이게 무슨 조화지?’
이번에는 또 다른 사내가 할아버지 등을 돌려세웠다.
아! 할아버지 입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할아버지는 모든 걸 다 알았다. 자신이 누웠던 자리에 자신과 똑같은 백발노인이 평화롭게 누워있었다.
‘내가 죽은 거구나. 검은 옷의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저,승… 사,자….’
“그만 가자.”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던 저승사자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마음에서 털어내듯 고개를 끄덕였고 저승사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의 세 사내를 따라 장강구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묵묵히 걷기만 했다. 걸을수록 소아마비로 비틀거리는 다리가 아닌 게 신기했다. 숨이 끊어진 게 서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했다. 평생을 얼마나 소원했던 튼튼한 다리인가.
“하늘가는 길은 망자가 정하시오. 육로도 있고 바닷길도 있소.”
“바닷길!”
할아버지는 그 대답을 준비한 사람처럼 뜸도 들이지 않고 크게 외쳤다. 할아버지가 소리친 순간 눈앞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그 바다를 보자 할아버지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정한 마음이 큰 소리로 터졌다.
“이 보시오. 저승사자님들!”
“여기 귀머거리가 없소.”
“왜 그러시오.”
“하루만 바다에서 놀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딱 하루만요.”
“하루 동안 뭘 하려고 그러시오.”
“어차피 갈 길,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낫지 않겠소?”
“제가 평생 소아마비로 살았습니다. 이 짝짝이 다리가 부끄러워 다른 동무들이 다 바다에서 사는 여름에도 저는 멀리서 구경만 했어요. 수영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우리 아버지처럼, 형들처럼 나도 멋진 어부가 되고 싶었는데 이 다리 때문에 바다를 멀리하고 살았지요. 그런데 숨이 끊어지니 제 다리에 살이 오르고 힘이 생겼습니다. 사자님, 하루만, 하루만 바다에서 실컷 놀다 가게 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아니, 부탁이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따라가지 않을 겁니다.”
“별일 다 보겠네.”
“다리를 멀쩡하게 고쳐 주었더니 이제 수영을 하겠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니까. 수영을 하게 해 주면 또 죽은 목숨을 살려내라 할 인간이네.”
“암튼 인간들은 간사해.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오. 자 갑시다.”
저승사자 셋이 와락 달려들어 할아버지 팔을 잡아끌고 등을 밀었다.
“어? 이게 뭐야? 이 인간이 꼼짝도 안 하네. 무쇠 인간이 되었어.”
저승사자들은 재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승에서의 한이 너무 크면 저승사자의 힘으로도 끌고 가지 못하는 무쇠 인간이 된다더니 바로 이 인간이군.’
‘그러네. 어쩔 수 없지.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으니 다음 카드를 쓸 수밖에.’
‘무쇠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결국은 하늘의 힘이니 우리는 순리대로 하세.’
‘그래야지.’
저승사자들이 손을 서로 마주 잡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음을 모아 하늘로 보냈다.
하늘에서 소리처럼 빛이 내려왔다. 그 빛들이 저승사자 몸으로 내려와 쌓였다. 저승사자들은 놀란 눈빛으로 계속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리던 빛이 그쳤고 저승사자들은 손을 풀었다.
약속한 듯 그들이 할아버지 앞에 넙죽 엎드렸다.
“몰라보아 죄송합니다.”
“무,무,무슨 말씀입니까?”
할아버지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하늘이 말씀하시길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착한 사람이니 정중히 모시라 합니다.”
“네?”
다시 한 저승사자가 입을 열었다. 정중하고 깍듯하게 존댓말까지 썼다.
“소아마비 힘든 다리로도 바르게 살고, 있는 힘껏 선행을 쌓으며, 참고 견디며 불평 없이, 불편한 다리도 감사하며 살았으니 하루를 더 살게 한다는 하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정말요?”
할아버지는 펄쩍 뛰어올랐다.
“장강구님은 이제 사람도 귀신도 아닌 반인반신인 영혼입니다.”
“반인반신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할아버지는 공손히 물었다.
“하늘보다는 못하지만 사람으로도, 신으로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먹은 것은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마음먹은 대로 다 될 수 있습니까?”
“무엇이 되고 싶은 겁니까?”
“고래가 되어 세상 바다를 다 구경하고 사자님들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하루 동안에 세상 바다를 다 구경하기는 어렵겠네요. 우리나라 바다라도 다 구경할 수 있음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동네 앞바다라도 실컷 구경하다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루면 됩니다. 소아마비 다리가 아니라 튼튼한 다리로 내 동무들처럼 멋지게 수영을 하다 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더구나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룰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하루를 천년처럼 늘렸다 저승으로 갈 것입니다.”
저승사자들의 눈이 확 빛나더니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쳤다.
“왜 그러십니까?”
“눈치가 빨라서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하늘의 소리도 듣는다더니 벌써 하늘의 소리를 들은 겁니까?”
“그게 무슨?”
“하늘이 허락한 것은 하루입니다. 하늘 시간으로 하루요. 하늘의 하루는 이승의 천년입니다.”
“예?”
“자 어서 물에 들어가시지요. 저희도 착한 사람, 장강구님 덕분에 천 년 동안 휴가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강구님, 고맙습니다. 우리도 장강구님 처럼 전지전능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선물을 천 년 동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강구님을 보필하며. 장강구님의 그림자처럼.”
“이제 장장구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니 종이니 하면서도 저승사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고맙습니다. 착하게, 감사하며 산 사람. 장강구님!”
셋이 똑같이 노래하듯 말했다.
‘착하게 살기는….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천년의 휴가다. 소아마비 육신에서 벗어나 튼튼한 다리의 영혼으로 천년을 누리는 휴가…. 믿어도 될까? 내가 뭐 착하게 살았다고.’
할아버지는 속으로 생각하며 바닷물 속으로 발을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발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몸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물속으로 더 들어갔다. 수영을 해 본 일이 없는 할아버지인데도 몸은 저절로 떴고 온몸에 물이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든 순간 할아버지는 물속에서 힘차게 다리를 찼다.
‘다리가 아니라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였어!’
어느새 할아버지 몸은 고래가 되어 있었다. 물 속 생명체 중에서 가장 거대한 흰긴수염고래. 은회색의 얼룩무늬가 물에 젖어 반들거렸다.
할아버지는 묘기를 부리듯 온몸을 움직이며 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입에서, 아니 흰긴수염고래 입에서 끝없이 감사가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는 부러 천천히 몸을 놀렸다. 자기를 따르는 저승사자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저승사자들도 어느새 물고기로 변신해 있었다.
“나는 날치요.”
“나는 넙치요.”
“나는 리본장예요.”
저승사자들은 서로 다른 물고기로 변해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눈에는 그들 본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기는 흰긴수염고래로 변신한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저승사자들의 눈에는 25미터의 거대한 고래의 몸에서도 인간인 할아버지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래 할아버지는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헤엄쳐 나갔고 저승사자들도 쉬지 않고 따라갔다.
해가 서쪽으로 가울며 바다는 붉게 일렁였다. 이내 밤이 되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저승사자 물고기들은 귀신들이었고 할아버지는 반인반신 인간이지만 이미 이승에서는 숨이 끊긴 영혼이었다.
넷은 천천히 모래톱으로 둘러싸인 무인도에 닿았다. 썰물 때여서 모래톱은 바닷물을 멀리 밀어내고 넓게 자리를 깔아놓은 듯했다. 넷은 모래톱 끝, 물가에 엎드려 밤바다를 보는 사람들처럼 자세를 잡았다.
달빛을 머금은 바다는 신비스럽게 출렁였다. 고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힘없었던 다리 때문에 튼튼한 고래로 변신했지만 저승차사님들은 왜 그런 모습으로 변신한 겁니까? 날치와 넙치는 알겠는데 리본장어는 처음 듣습니다. 어떤 물고기입니까?”
“리본장어는 곰치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성별을 맘대로 바꾸는 생명체지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암수를 맘대로 바꾸는 물고기가 다 있습니까?”
고래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란 소리로 물었다.
“꽤 있습니다. 암컷으로 살다가 수컷이 되는 놀래기, 앵무고기 같은 게 있고 수컷으로 살다가 암컷으로 바꾸는 감성돔이나 나 같은 리본장어가 있지요.”
리본장어의 목소리가 조금 바뀐 듯했다. 달빛을 받은 물결이 찰싹거리며 다가왔다 밀려났다.
“근데 왜 그 많은 물고기 중에서 리본장어가 된 거요?”
날치 저승사자가 무심히 물었다.
“인간으로 살아있을 때는 말을 못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였어요. 늘 두 사람으로 살았지요. 남자로 태어나 결혼도 했지만 내 맘속엔 늘 여자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어요. 그 간절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애써 남자로 살다가 수한이 다 되어 저승으로 갔지요. 리본장어 이야기는 저승에서 들었습니다. 놀래기처럼 살고 싶었던 어느 여자 망자에게 들었어요.”
“원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은 암이요, 수요?”
“지금은 암도 수도 아니오. 지금 검정색이지만 몸길이가 길어져 65센티미터 이상 자라서 주둥이 말고는 화려한 청색이 되면 남자로 살기 시작합니다. 더 자라 100센티미터 쯤 자라면 파란색이 노랗게 바뀌는데 그 때부터는 여자로 살게 된다고 들었어요. 나도 첨이어서….”
“참 신기한 물고기가 다 있네.”
“더 신기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암수를 바꾸는 이야기보다 더 신기한 게 있소?”
넙치 저승사자가 놀란 소리를 냈다.
“있지요. 우리 리본장어들은 수컷 중에서 가장 우수한 한 마리가 암컷이 되는데 번식기가 되면 암컷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이 한 마리만 암컷이 되는 겁니다. 이게 리본장어들의 종족 보존 법칙입니다. 그래 당신은 왜 많고 많은 물고기 중에 날치가 되었소?”
“날고 싶어서.”
“뭐라고 난다고? 돌았소? 물고기가 어찌 난단 말이오.”
“보겠소? 잘 보시오.”
날치 저승사자는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가 헤엄치는가 했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두운 하늘로 날치는 빠르게 날았다.
“와! 난다. 저것 봐. 바다 위를 날아간다.”
고래 할아버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짧은 시간 동안 날았지만 날치 저승사자는 저만큼 날아가 물에 떨어졌다.
“다시 난다!”
날치 저승사자는 몇 번을 더 날더니 다시 날면서 모래톱으로 되돌아왔다.
“대단한 물고기요. 당신은 어째서 나는 물고기가 되고 싶었던 거요?”
고래 할아버지가 물었다.
“인간일 때 내 꿈은 높이뛰기 선수, 세계 제일의 높이뛰기 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승승장구했지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몸에 병이 생기며 그 꿈을 접었습니다. 늘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이룰 수 없는 꿈을 품고 살다 생을 마감했지요. 휜긴수염고래, 장강구님 때문에 물 속 생활을 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날치가 되었습니다. 근데 넙치 당신은 왜 하필 외눈박이 넙치요?”
“모르는 말씀. 세상에 외눈박이 물고기는 없소이다.”
“당신…. 어? 당신 눈이 양 쪽에 다 있네. 어떻게 된 거요. 몸도 더 작아지고. 갑자기 어린 넙치로 변했어.”
날치 저승사자가 놀라자, 리본장어 저승사자가 입을 열었다.
“우린 귀신이오, 그것도 흰긴고래수염 덕분에 전지전능함을 지닌 귀신. 무언들 못 바꾸겠소.”
“아니오. 나를 보시오. 나는 지금 새끼 넙치로 변신했소. 새끼 때는 이렇게 양쪽에 눈이 붙어 있소. 나를 놓치지 말고 잘 보시오. 자 모두 물속으로 갑시다.”
넷은 동시에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물속까지 달빛이 들어와 있었다.
넙치의 모습은 어느새 알로 변했다. 그 알이 말했다.
“넙치는 부화 후 20일까지는 다른 물고기들과 다를 바 없는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부화 후, 20~25일이 지나면 몸의 형태가 바뀌는 ‘변태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몸은 점점 납작해지고 오른쪽 눈이 서서히 왼쪽으로 옮겨갑니다. 부화 후 30~40 정도 지나면 눈이 완전히 왼쪽으로 돌아가지요.”
넙치 저승사자는 말하면서 넙치의 변태 과정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은 넙치의 변신이었다. 전지전능 귀신만이 할 수 있는 변신이 분명했다.
“놀랍다. 그러니까 왼쪽 두 눈이 첨부터 왼쪽 두 눈이 아니고 천천히 움직여 왼쪽으로 몰려갔네요. 근데 왜 그렇습니까? 무슨 특별한 전략이 있는 건가요?”
고래 할아버지가 모래톱으로 나오며 물었다. 넙치는 여전히 왼쪽 두 눈 넙치였다.
“넙치의 왼쪽 두 눈은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넙치만의 영리한 전략입니다. 몸을 납작하게 하고 모래나 펄 바닥에 자신의 몸을 숨긴 다음 두 눈만 모래 밖으로 노출시켜 먹이를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나중에 내가 먹이를 잡는 모습을 보여 드리지요. 나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넙치 저승사자가 말하는데 물결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날씨가 심상치 않아.”
고래 할아버지가 말하는데 바다 물결이 일어서는 것처럼 높아졌다. 달은 이미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숨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한 점 없는 온화한 날씨였는데. 어? 저 보시오. 저 산채만한 파도!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 안전한 피신처로 몸을 숨깁시다. 힘센 태풍이 오고 있습니다.”
밀물이 빠르게 밀려오며 파도의 힘을 보탰다. 고래 할아버지는 다른 저승사자 물고기들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변덕스런 날씨는 첨이요.”
리본장어 사자가 여자 같은 소리를 냈다. 그의 몸은 어느새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수컷에서 암컷으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어부들에겐 심심찮은 일이오. 어부들은 늘 이런 날씨와 싸울 각오를 하며 날마다 바다로 나가는 거요.”
고래 할아버지가 물속 깊이 헤엄쳐 들어가며 말했다.
“장강구님은 소아마비 때문에 물에 안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부 일도 못했을 텐데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내 아버지도 형제들도 모두 어부로 잔뼈가 굵어진 사람들입니다. 이웃들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다리 때문에 어부 일을 못하고 목수 일을 시작했지만 어부의 삶은 다 꿰고 있습니다.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까요.”
“오 저기 굴이 있소. 저리로 피합시다.”
이리 저리 헤엄치며 숨을 곳을 찾던 그들 눈에 나타난 것은 그리 크지 않은 바위섬이었다. 파도는 점점 높아지며 바위섬을 후려쳤다. 바위섬이 입을 벌린 것 같은 굴 안으로도 파도가 들이쳤다. 그들은 파도에 밀리듯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고래 할아버지가 드나들기에도 넉넉한 굴 입구를 지나 깊숙이 들어가자 뜻밖의 세계가 펼쳐졌다. 굴속은 이외로 넓고 아늑했다. 고운 모래를 품은 작은 바다가 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풍의 거친 손길이 미치지 않아 물결은 잔잔했다. 그런데 고래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굴 안이 발칵 뒤집혔다.
“으악! 흰긴수염고래다! 어서 피해!”
거기엔 이미 수많은 물고기들이 피신해 숨어있었다. 거대한 고래 할아버지가 물살을 일으키며 나타나자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빨리 숨어! 고래가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구멍 안으로 숨어!”
조기들이 소리치며 물 속 바위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병어, 준치, 민어, 쥐노래미도 펄쩍 뛰며 숨을 구멍을 찾기 위해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물이 없는 바위 위에 올라 잠들어 있던 늙은 바다거북만이 고래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잠이 덜 깬 눈을 껌벅 거렸다.
“무서워하지 마. 나는 고래가 아니고 사람이야.”
당황한 고래 할아버지가 말하는 순간 고래 할아버지는 어느새 사람으로 변해 물속에 우뚝 섰다. 할아버지가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자 저승사자들도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물 속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변신을 지켜보던 물고기들은 놀라서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요?”
바다거북이 무겁게 입을 열었고 고래 할아버지가 바다거북을 보며 말했다.
“우릴 무서워하지 마시오. 우린 저승으로 가는 중인 귀신들이오. 배가 고프지 않는 귀신들이어서 잡아먹지도 않을 것이오. 다 나오시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이 고래보다 더 무서운데….”
몸을 숨긴 물고기들은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사람 양반들, 그 말 믿어도 되오?”
바다거북이 물 가까이 내려오며 무겁게 물었다.
“믿어도 좋소.”
고래 할아버지는 발은 물에 담그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모두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나는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는 서해안 작은 섬에서 어부의 막내로 태어났소.”
고래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열패감에 시달려 바다를 멀리했던 시절부터, 바다 일터 대신 목수와 목공예 전문가로 살아온 삶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저승사자들이 하늘의 승인을 받아 하루치의 온전한 바다 삶을 살도록 도와준 이야기까지 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고 물고기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실함이 배어 있었다. 숨어있던 물고기들이 그의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바위틈에서 나와 그의 발 옆으로 모여 들었다.
“고래 할아버지! 저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나도 사람으로 바꾸어 주세요.”
아직 어린 쥐노래미였다. 고래 할아버지도 저승차사들도 모두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도 사람이 되고 싶소. 잠깐이라도!”
나이든 웅어가 말했고 그것을 신호로 모든 물고기들이 소리쳤다.
“나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 도 사, 람, 이 되, 고 싶, 소,이, 다. 바다거북은 아주 느리게 말했지만 간절함이 가득한 소리였다.
고래 할아버지는 난감한 눈빛으로 저승사자들을 보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나도 당황했습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요?’
‘우린 저승사자의 일만 하는 귀신입니다. 우리의 전지전능이나 무재부소도 장강구님의 힘에서 나오는 그림자 같은 능력이지만 장강군님의 힘은 하늘에서 직접 내린 것입니다. 반신반인인 장강구님이라면 이 물고기들을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날치 저승사자였다.
‘허나 명심하십시오. 장강구님은 온전한 신이 아니라 반만 신입니다. 이들 물고기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장강구님이 가진 힘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신으로 사는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난 사자님들을 따라 가는 겁니다.’
‘이승 시간법이 아니라 저승 시간 법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참 그렇지요? 그럼 멀었고 무궁무진하네요.’
‘그래도…. 흰긴수염고래로 세상 모든 바다를 여행하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천년은 영원무궁해 보여도 흐르기 시작하면 하루처럼 흘러가는 게 시간입니다.’
이런 눈빛을 보내온 건 리본장어였다. 리본장어는 이제 화려한 노란빛을 선명하게 내뿜고 있었다. 남아있는 청색과 어울려 화려한 리본처럼 보였다.
‘이만큼 산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제 감사를 이 물고기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어요.’
고래 할아버지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 감사를 이 물고기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어요.’는 저절로 입을 통해 말이 되었다.
“제 감사를 이 물고기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요. 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어요.”
“이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어요.”
고래 할아버지의 말이 메아리처럼 굴 안에 우렁우렁 채웠다. 그 소리를 들은 물고기들은 사람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바다거북은 머리가 반백인 노파였지만 온 몸이 곳곳하고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럽고 뽀얗게 빛났다.
사람으로 변신한 물고기들이 일어섰다.
“우와 내가 사람이 되었다.”
“세상 생명체 중에 가장 으뜸은 사람이라며? 나도 사람이 되었어.”
굴 안은 사람들의 벅찬 웅성거림을 가득해졌다. 그런데 그 소란스러움을 뚫는 것처럼 고래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앗 위험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에 쳐해 있어요. 제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립니다.”
고래 할아버지는 어느새 흰긴수염고래로 변해 굴 밖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사람인 채로 굴 밖으로 나가던 저승사자들도 물고기로 변해 굴 밖으로 빠르게 헤엄쳐 나갔다.
“무슨 일이지? 우리도 가볼까?”
사람으로 변신한 물고기 몇이 사람인 채 굴 밖으로 나갔다.
“저기 간다. 그런데 사람으로는 못 따라가겠어. 사람이 되니까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 도로 물고기가 되어야 따라가겠어.”
물고기 사람 몇은 어느새 물고기가 되어 고래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굴속에 남아 있던 물고기 사람들도 하나 둘 물고기로 변신하며 굴 밖으로 헤엄쳐 나갔다.
“사람이 되어 굴속에 갇혀 사는 것보다 물고기로 자유롭게 사는 게 더 나아.”
“암. 사람은 되어 보았고. 그런데 저 고래 인간은 어딜 가는 거지? 이 태풍을 헤치며?”
“그러게. 가 보기나 하자고.”
수많은 물고기들과 고래 할아버지는 하나가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동쪽 하늘 끝이 조금씩 트여오고 있었지만 바다는 더 높아져 있었다.
“저기 보시오.”
고래 할아버지가 소리쳤고 저승사자 물고기들과 굴 안에 있던 모든 물고기들은 사람들이 사는 섬 가까이에서 휘청거리는 배를 보았다. 날씨가 갑자기 변덕을 부릴 낌새를 보이자 황급히 배를 돌렸지만 더는 나가지 못하는 작은 어선이었다. 어선은 있는 힘을 다해 섬 앞까지 왔지만 더는 어쩌지 못하고 폭우와 파도의 공격을 받으며 이리저리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파도는 많이 약해 졌지만 배는 그 파도도 이기지 못했다. 힘을 다 써버린 힘없는 사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가에 나와 서서 발을 동동 굴렸다.
“저 배를 구해야 합니다. 저러다 좌초될지 모릅니다.”
고래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내가 배 밑으로 들어갈 테니 모두 뒤에서 밀어요. 저승사자님들은 더 큰 물고기로 변신해서 배가 옆으로 기울지 않게 해 주세요.”
“좋습니다. 해 봅시다.”
고래 할아버지가 크게 요동치는 배 밑으로 들어갔다.
날치, 넙치 저승사자가 큰 고래로 변신해 배 옆에 붙었다. 리본장어도 큰 고래로 변신해 배 뒤에서 밀었다. 엄마야! 변신한 고래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굴 속 물고기들은 그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안 고픈 귀신들이랬지?”
“맞아. 자 우리도 뒤에서 밀어요.”
굴 속 물고기들이 배 뒤에 붙었다.
배는 천천히 섬으로 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더 크게 불며 바다를 뒤집었다. 뒤집힌 바다는 산 같은 파도가 되어 앞으로 가는 배를 덮쳤다.
“으악! 이제 죽었다.”
어부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 근데 배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가네”
“산채 같은 파도에 요동도 안 해.”
물을 흠뻑 뒤집어 쓴 어부들이 의아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저것 봐. 고래들과 물고기들이 배를 고정시키며 섬으로 가고 있어.”
“저렇게 큰 고래는 처음 봐.”
놀란 것은 바닷가에 나온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것 봐 배가 오고 있어!”
“태풍이 심한데 어떻게 흔들리지도 않고 돌아오지?”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곧 부서질 듯 흔들리더니.”
“저것 봐!”
“저기 배 밑에 그리고 배 옆에!”
누군가가 소리쳤고 사람들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물로 뛰어갔다. 믿기지 않는 장면을 더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물러나요. 배가 들어오지 않소. 방해 말고 다 모래밭으로 올라갑시다.”
“그래요, 모두 물러나서 고래들을 방해하지 맙시다.”
서둘러 바다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래밭으로 올라섰다.
바람이 잦아들고 있었다. 고래들은 배를 모래밭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래들은 다시 바다로 향했다.
배에서 내리지 않은 어부들이 떠나는 고래들과 물고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도 다시 물로 뛰어 들며 손을 흔들었다.
“참 이상하네. 분명 고래가 네 마리였는데 왜 한 마리만 보이지?”
마을 사람들은 더 앞으로 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 날치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요?”
배에서 손을 흔들던 어부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바람은 완전히 물러갔다. 붉은 해가 동쪽 바다 위로 떠오르며 바람을 내쫓는 것 같았다.
천방지축, 사방으로 날뛰던 바람이 얌전히 물러가자 바다는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물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손을 흔들었다.
<약력>
송재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찬란한 믿음>이 당선되었다.
동화집 <무서운 학교 무서운 아이들>, <돌아온 진돗개 백구>, <주인 없는 구두 가게>, <노래하며 우는 새>, <비밀족보>, <우리 다시 만날 때>, <홍다미는 싸움닭>, <새엄마는 허웅아기>, 청소년소설 <비밀에 갇힌 영혼> 외 여러 권이 있다.
세종아동문학상, 이주홍 아동문학상, 소천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박홍근문학상 들을 받았다.
첫댓글 헐... 송재찬 샘을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나...
제가 요즘 쓰고 있는 거, 가제가 천년만의 휴가인데...
물론 내용은 다릅니다만 겹치는 게 많아서 놀랐네요.
어머나! 그렇군요.
이번 시와 동화 가을호에 발표하신 동화인데 제가 허락 받고 여기에 실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이미지는 안샘이 넣으신건가요?
요요마의 첼로 선율과 함께 작품 읽으니 명작입니다요!
예, 처음에 한글파일에 이미지 좀 괜찮게 넣었는데 복사해서 붙이니 업로드가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작업했더니 좀 맘에 안 들게 됐어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