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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58년생의
“ 개 ”같은 삶의 이야기...
난 ,1958년3월..
그러니까 6.25전쟁이 끝난 몇 해쯤 뒤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오수물이라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내 58년생 의 첫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현재는 춘천시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과 5남매 가족으로서 의 춘천박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거죠..
(할아버지:1902년생, 할머니: ?, 아버지: 1922년 개띠, 어머니: 1930년생)
위로는 53년 ,55년생 누나 둘 과 아래로는 쥐띠의 남동생 ....
제 위에는 2명의 형님이 있었다는데 그만 전쟁 통 에 둘 다를 잃어버렸다고
아버진 늘 눈가에 보일 듯 말듯 한 물기를 머금고 말씀을 하시곤 했답니다..그러니 네가 우리 박 씨 가문 을 잘 챙겨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한 참후에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저희 어머닌 늦둥이 70년생 딸을 낳았습니다.
어느 누구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거의 비슷 비슷 하긴 하지만 . 난 53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맞아, 저는 이제 제인생의 2막을 올리려는 는 이 순간 내 인생의 전반기 삶의 계산서를 한번 작성하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오는3월31일이 저의54번째 생일이니까요....
사실 저는 이렇게 글을 쓴다는 자체를 희안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일기도 한번 안 써가서 매일 선생님께 혼났던 일이 허다했는데...ㅎㅎㅎ
이렇게 글을 써보겠다고 나선 자체 가 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글쎄.....끝까지 마무리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작은 마을 이지만 동네에선 남부럽지 않게 그저 먹고 사는데 그리 애로사항이 없었던 듯합니다.
논도 몇 마지긴지는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모내고 추수 할 때면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 산판 한다고 하면 넓은 마당에 리어카와 일꾼들과 나무로 가득 했었거든요.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이지만)에 입학할 즈음, 우리 집엔 일하시는 분이 두 분 계셨는데, 그때 는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며 따라다닌 기억 이 있습니다.
그 나이 많은 형이 저를 호롱불 아래서 ㄱ.ㄴ.ㄷ.ㄹ.과 가.나.다.라 를 다 가르쳐 주었기에 난 초등학교 에 콧물손수건을 매달고 입학해서도 선생님께 많은 칭찬 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춘천에 있던 미군부대(CAMP PAGE)가 제가 어릴 적엔 우리 집 앞에 있었답니다.(현재2군단근처쯤)
그래서 커다란 우리 집에는 양색시라 불리던 미군가족이 세 가족이나 살고 있었죠..
저와 우리 친구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모두 우리 집으로 모이곤 했습니다,,
왜냐면 우리 집엔 그야말로 먹을 것 천지였거든요~
모두가 처음 보는 음식들,, 쵸콜릿. 할로끔(껌). 사탕. 우유. 미루꾸(요즘의 밀크캬라멜) 슈가(설탕)등등. 그야말로 배고픈 시절엔 꿈만 같은 나날이었죠.
그렇지만 워낙 시골 동네다 보니 미군은 많고 수용할 가구는 얼마 안 되다 보니, 사실 웬만한 집 마다 미군이 한 가구 정도는 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기억이 납니다.
우리 동네 가구 수 가 약 100여 가구 정도 되는 데 ,그 중에 우리 집이 유일한 기와 집이였으니까...당연히 인기가 있었을 법 하네요~~
그리고 추수 감사절 이라던 가 독립기념일 같은 땐 우린 하루 온 종일 미군부대에 초대 되어서 만화영화도(디즈니랜드. 미키마우스) 보물찾기 도 계란인형도 선물 받고 하면서 즐겁게 지냈던 추억이 아련합니다.
웃긴 일 이 하나 있었답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쯤 인가 동네어른들은 거의 미군부대 에 일하러 다니셨는데.. 내 친구 중에 별명이 셋째(김상준)라고 있어요,, 삼형제 중에 셋째라서,,아마 그 친구 아버지가 미군부대 전공으로 다니셨던가? 그런 기억이 나네요.
아침을 먹고 애향 단 (당시에는 등. 하교 때 마을에서 제일 고학년의 지휘) 에 줄 맞추어 학교를 가다가 셋째네 집 앞에 다다라서는 “셋째야!! 학교가자~!!” 했더니,,
셋째가 입 안 가득 음식을 쳐 박고는 하는 말 “들어와~~소자지 먹고 가 !!” 하는 겁니다. 하하하..
사실 그때는 우리가 뭘 알고나 먹었을까?? 아님 생김새가 비슷해서였을까?
셋째는 우리나라 말로 소세지 를 “소자지”라고 생각했던 거 아니래요??ㅎㅎ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기억나는 일 이 있군요~~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작은 라디오가 (쏘니라구 아버지가 알려주셨음.) 한 대 있었습니다.
물론 TV는 아예 없었던 시절이구요.
라디오도 우리 집하고 아랫마을 누구네 집하고 2~3 집만 있었던 시절입니다.
해가지고 어둑해 올라치면 동네 아주머니들께선 얼른 저녁 밥상치우시곤 우리 집 으로 전부 모이셨답니다.
그때 라디오 연속 극 으로 “안개 짙은 새벽길” 이라는 프로가 있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주제곡은 이미자 씨가 불렀던 걸로 생각이 나고 ,저도 지금 그 주제곡이 언뜻 언뜻 생각이 나서 가끔 씩 흥얼거리기 도 합니다.
안개~~지~이~튼 ~새~~애~벼~ 억~길 이라구...ㅎㅎㅎㅎ
그리고 3학년인지??오학년인지?
난 기성회비를 타가지고는 학교를 갑니다.
그때 돈으로 5환 인지? 10환인지?
암튼 집에서 기성회비를 받아 가지곤 학교에 준다는 것이...
동네 하얀 할머니 구멍가게 집 에서..친구들 ,,, 눈깔사탕 파티를 해 줍니다..ㅋㅋㅋ
미쳤어~~(그 당시 화폐단위가 환 이였음)
난, 집에와서.. 포도나무에 묶인채 로 그야말로 존나 터졌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날 무지 좋아하셨나봐요~~
치~~누가그래?? 빙신 속으론 존나 섞였으면서,,
여름이면 아이스께끼 장사가 옵니다,
아~~이스~~께이끼! 하면서 말이죠...
아~~!! 먹고시픈데.. 도니가 없자나요?? ㅋㅋㅋ
그땐 어찌 그런생각을 했는지..... 아부지 고무신을 언능 생각합니다.
당시엔 아이스 께끼장사는 고무신도 받았으니...ㅎㅎㅎ
그걸 같다주고는 아이스께끼 하나 사먹었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 그 아저씨 아마 잘살고 계실거란 생각이 드네요?
왜냐면? 고무신이 너무 새거라서 다시 저한테,, 같다 주시고는 ... 다시는 아부지 신발 팔아 먹지 말라구............................
그럭저럭 저학년을 지나 6학년이 되었습니다.
6학년이 되던 해에는 전기불도 들어 왔고요 .. 전기불이 들어오는 날 할아버지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던 가 봅니다.
약주가 얼큰해 가지고 집에 오시는 날이면 입으로 전등불 을 호야 불 마냥 푸우~~푸우~입으로 불으시면서, 불 꺼 !! 하고 호야 불 끄시는 시늉을 하시며 저에게 장난을 하곤 하셨죠.ㅎㅎ
당시 울 아버님 도 미군부대에 다니셨는데..
어느 날 미군부대에서 커피를 몇 초롱 (지금의20리터 통) 을 얻어다가 광에 보관해 두고 출근 을 했다가, 저녁에 퇴근 을 해서 집에 오니 할아버지 말씀이,
얘!!아범아!!!하고 부르시니, 아버지..예 ! 아버님 ,, 대답하니 할아버지 말씀 이 .. 그 광에 있는 거름 어디서 구해다 놨냐?? 아~~논에 갔다 뿌리니까...아주~~씨~~뻘겋게 잘 우러 나드라~~ 하시는거~!!!
할아버지는 커피를 거름으로 아시고 전부 다 논에다가 뿌리신 겁니다.
아마, 아버지는 아마 잠간 까무러 치셨다 깬 듯 했습니다.(*당시 커피가 뭔지도 모르던 시대이니 뭐..)ㅎㅎㅎㅎ
그런데 그리 건강하시던 울 할아버지는 제가 6학년을 졸업할 즈음으로 이
세상 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전 그때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슬픔보다는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이 저를 슬프게 했기에 작은 상 옷을 입은 저는 아버지를 따라 펑펑 울어댔지요.
동네 어르신들은 그런 내용도 모르고, 야~~장손이 틀린데? 어린 녀석 이 말이야,, 하시는 목소리가 귓전에 스치곤 했지요.
바로 엊그제 2009년2월2일(음1월8일)이 할아버지 제사였답니다.
그 후 아버지는 3년 상을 꼬박 치르신 후 상을 내셨고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께 그리하지 못 해드린 것에 가슴이 아픕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아부지 께 편지를, 아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본지가 언제인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안 써봤는지도 모르지요,
아님 군대 가서 교관님이 집에 편질 쓰라고 했지만 아버지 앞으론 안 쓰고 엄마에게만 안부 편질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어려서부터 끔찍이 나 날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기억이 눈앞을 아련히 스쳐 지나갑니다.
아버지 ,
저도 이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지만 , 아버지 가 저를 그렇게 끔찍이 사랑해 주신만큼 저는 제 아이들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 나이...네 살적엔가?
아버지 손잡고 과수원에 올라갈 때, 사과나무 꽃이 새 하얗게 피었던 어느 날
양지바른 언덕아래 썩은 나무등거리 안에 있던 새집의 새알을 발견 하시고는 , 옆에 있던 대파를 한쪽 뜯어가지고 그 안에 새알을 담아 집에 와서 부엌에서 밥을 짓는 엄마에게 , 여보! 이거 밥솥에 쪄서 얘 먹이라고 .... 하신 기억이 납니다.
미군부대에 다니실 때 엔 퇴근길에 커다란 봉지에 먹을 것을 한 아름 안고 오셔서는 저에게 안겨 주시기도 하셨지요.
일요일이면 앞마당 엔 늘, 미군 찌뿌차 하고 미군 두 서너명이 아버지 와 함께 엽총을 들고 사냥 을 하러 가시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인걸로 기억나네요.
뒤란에 있는 오리나무에 콩새가 까맣게 앉아있었지요.
그러자 아버지는 절보고, 얘!! 그 다락에 있는 아버지 총 좀 같고 오렴~~ 하셨지요..
저는 그때 총이 그렇게 무거운 줄은 몰랐습니다, 낑낑 거리며 저보다도 더 긴 총을 끌다시피 해서 아버지께 날라다 드렸지요.
울 아버진 정말 사냥꾼이 셨나봐요.
잠시 후,,, 꽝 !!! 소리와 함께 그 오리나무에 까맣게 안아있던 콩새는 한 마리도 날아가는 걸 저는 못 봤으니까요...
집에서 커다란 광주리에 콩새를 가득 담아 오셔서 는 할머니하고 엄마가 제사음식 준비를 하시는데, 할머니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이걸로 산적 하세요!! 하신 겁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16년이 넘어가네요...
아버지가 그렇게 이뻐 하시던 손자 준화가 엊그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때 준화가 100일이 채 안되던 해였기도 하지만 ,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날이 둘째아이 신화 생일인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신화 생일날 아침 아버진 저에게 만원을 주시며, ,시내에 가서 신화 생일케익 을 사오라고 하셨지요.
저는 아버지“ 돈은 저도 있으니 그냥 넣어 두세요,, 라고 했더니 아버진,
야!! 임마 ! 네가 돈이 없어서 그런줄 알아!! 하고 저에게 호통을 치셨지요.
그렇게 해서 저는 차를 몰고 시내에 케잌을 사러 나갔답니다.
가는 저의 뒤통수에 아버진,, 휴~~재가 언제 사가지고 올런지 나원~,, 하고 말씀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저는 철원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었지요.(제록스대리점)
그래서 거의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 사람과 함께 아버지 집에 오다시피 했었답니다.
그날은 춘고(춘천고등학교운동장) 마당에서 강원 도민 체전이 있는 날 이였습니다.
저는 케익 을 사서 차안에 두고는 춘고 마당에 철원선수들을 응원하러 갔지요.
한참을 신나게 응원도 하고 이야기도 하다가~
아!!참!!참!! 이구 ~이거 또 아부지 한테 한방 먹겠구나 !!싶어 불이나케 집으로 차를 몰았죠..
그런데. 다행이 아버진 안 보이시더 군요.
혹시~ 경노당 에 가셨나보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점심때 가 되었지요.
큰애 송화는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경로당으로 보내고 , 이리저리로 아버지를 찿고 있었죠.
근데,,, 잠시 후에 작은애,, 생일의 주인공인 신화가 ~~아빠!!! 할아버지 화장실에 누워계셔~~1!!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표현이라고 할까요?? 쓰러져 계신 것을 누워 계신다고 하니....
아부지!!
그날.. 전 잿더미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고통스러워 했던, 잿 강아지가 된 아부지를 차에 모시고는 ,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게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콧구멍 다리를 지나 동면 솔밭을 달리고 있는데, 친구 세혁이 가 앞에가고 있더군요.
쌍 라이트에 비상깜박이를 켜고 가는 저를 세혁이 는 장난인줄 알고는 앞에서 비켜주지 않는 겁니다. 난 클락션 을 울리며, 빨리 비켜 새꺄~ !!! 하면서 다급한 상황임을 알리기 바빴죠.
그담에야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세혁이 는 앞에서 서 제 차를 에스코트 하면서 달리기 시작했지요.
순식간에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부지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는 순간 이였어요.
온몸이 잿더미 속에서 , 온통 까맣게 되어 있는 울 아부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몇 시간동안, 내가 춘고 마당에서 응원하며 노닥거리는 시간에
고통스러워 했을 울 아부지... 손톱 아래며, 얼굴이며, 어디 한곳이 성한데가 없었습니다.
온통 까맣게만 보일뿐였어요...
그러나 챙피하진 않았습니다.
결과만 좋게 나오길 기도 할 뿐이었지요.
그냥 눈물만 흐를 뿐 , 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아부지 속 썪인것만 생각이 납니다.
그리곤 한참 후,,
담당 의사가 절 보자고 하네요,.
아버지는 뇌출혈 이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미 연세도 있으시고, 또 출혈이 된 곳이 뇌의 제일 깊은 속이라 수술도 힘들고 어렵다고,,,
집으로 모시고 가서 편안하게 해주시라고,,,
아부지!!
전 아직 어리다고요!!~
아부지는 저의 기둥이신데..
아부지가 안계시기엔 제 나이가 아직 어리다고요!
아부지..오늘은 여기까지만 쓸래요.. 술이취해서 카보드를 두드리기가 힘이드네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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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6학년 시절은 지금의 고3수능생 보다 더 혹독했지요.
하루에 변또 (도시락) 2개(하나는 점심, 하나는 저녁)로 , 요즘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과 비교하면 맞는 말이겠지요.
그때는 그야말로 변또(도시락)도 없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답니다.
그럼 그 친구들은 누런 놋쇠 밥주발 에 밥을 싸 오고는 했지요.
밤 11시까지 공부를 해야 했으니 어린 아이들로서는 여간 힘든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야간에는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먹곤 했는데..왜 그리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그런 라면 맛을 잊을 수 가 없답니다. (최초로 라면이 나온 해던가 합니다??)
암튼 그 당시 우리네 58년 개띠는 중학교를 시험으로 들어가야 했거든요. 참으로 운도없는 개띠시끼들이야...(우리를 마지막으로 이후엔 뺑뺑이입학 제도시행) *참고 :난 58년생이지만 생일이 빠른 관계로 57년생하고 같이 입학동기 라는 것.
선배가 우리 동기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 했어요.
시험에 낙방되면 유급으로 다시 다음해에 시험을 봐야 하니까....마찬가지로 우리 동기들도 우리학교 후배가 되는 일도 많았죠.
그 당시 제 중학교 입학 수험번호가 104 번 이였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104번이 없는 게 아니겠어요?.
난 울먹거리며 친구에게 애기했죠..내 번호가 없다?? 나 떨어졌나봐??
그러자 친구는 네가 떨어졌으면 우리 다~~떨어졌어 임마!! 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찾아 보자구..1,,2,3,부터103,,104번이 있는게 아니겠어요..
수험번호를 한문으로 써서 발표했던 시절이니깐..ㅎㅎㅎ 헸 갈렸던 거였지요.
암튼 합격이 되어 기뻤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발바닥에 땀나게 집으로 달려와서, 엄마한테 합격했다고 하니 별 반응이 없으시더라구요. 씁쓸했습니다. 서운하기도 하구....
그래~~어이구~우리아들 잘했다! 축하한다! 하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나~~참..
그럼 이제부턴 더 어였한 제복을 입고 , 까 까 머리를 한 중학생 시절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1970년 3월5일 드디어 중학교 입학식이 있는 날 !!
우리 동네 에서 학교까지는 약 4Km (10리)정도 되는 거리 인데 입학식 날
우리는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당시엔 마이크로버스(어른이 타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미니버스) 라고 있었는데, 우리 동네엔 시내에서 하루에 서너 번 정도 다니는 편이었고 ,
그나마도 우리가 학교 갈 시간엔 시간이 맞지가 않아서 리..(나중엔 시간표가 조정이 되긴 했지만 워낙에 버스가 작아서 윗동네 (버들개) 애들이 타고나면 아랫동네(오수물)에선 만원버스 를 탈 엄두도 못 냄) 거의 매일이다시피 학교엘 걸어서 다녔지요.
요즘은 이상기온이라 2월 중순이면 얼음이 다 녹아버리지만 그 당시엔 날씨도 왜 그리 추웠는지 3월에도 얼음이 남아 있곤 했죠.
겨우내 내 우리가 놀던 얼음판을 지나며 우리는 장난기가 발동이 되어서 얼음판 출렁다리(일명 고무다리) 건너기 내기를 했답니다.
룰렛게임마냥 한 놈 지나가면 다른 한 놈 이런 식으로 장난하다가 결국 내 차례가 되었는데,, 세상에 이런일이 !!! 하늘도 무심하시지?? 끄악 !! 난 그만 그 생전 처음 입어보는 새 교복에!! 새 책가방에!! 새 신발이!! 온통 물속에 빠져 버렸지 뭡니까??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가 아닌 강아지? 꼴이 됐으니...ㅠㅠㅠ..
아!! 이를 어쩌나!!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친구들도 모두들 난감해 하고....
어쨌든 물에 빠진 건 난데... 난! 이제 어쩌나?? 입학식은 어떡하지? 집에 가서 엄마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
온갖 생각에 어린 58년생 개띠는 그렇게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처음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입학식은 사복을 입고 지각 참석 했지만요..
지금도 우린 만나면 그때 그 이야길 하며 낄낄 거리면서 한잔 의 소주에 한 절음 의 삼겹살을 씹으며 그 시절을 되새기기 도 하지요..
다~~그런 것이 추억이라나??
얌마!! 추억이고 뭐고 그런 이야기 는 다시는 하지 말아달라구 내가 투정조로 말하곤 하죠..ㅎㅎㅎ..
그 당시 울 중학교 땐 학생 수가 워낙에 많아서 한반에 보통 64명 이상 이었습니다.
우리 학교도 6반까지 있었는데 저는 2반에 배정을 받았죠. (1반이 제일공부 잘하는 반 2반이 두 번째 그 담이 세 번째,,뭐 그렇다고들..쩝..ㅎㅎㅎ)
그땐 관내 (춘성군) 학생들은 모두 춘성중학교로 가야만 하기에 사방팔방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다 우리 학교로 오게 되었죠.
가까이는 신북면으로 해서 멀게는 강촌, 창촌, 사북, 북산, 동면, 신남, 동산, 등 등 하여튼 춘성군 관내 우리 또래들은 모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은 그렇게 탐색전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모인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즐거웠고,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영어를 배운다는 것 이었지요..
영어공부를 참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때 배운 수준밖에 안되니 내가 참!~~기막힌 일이지,,,ㅋㅋ.
그 당시에는 무슨 학원이고 뭐고 가 있던 시절이 아니 였지요.
부모님들은 민생고가 우선이고,,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 먹여 살리고 공부도 시켜야 하는 판국인데 . . . .
지금 생각하면 우리네 부모님들 참 대단하신 분들이십니다........존경 합니다.
정말로,,,그렇죠?
그런데 우린 그 당시 과외를 받았다~! 이거 아닙니까??
어떻게 받았냐고요?
어느 날 우리 친구 집에 군인한사람이(하사였던지?) 하숙으로 들어왔답니다.
2군단 소속 모 부대라고 했는데...
하숙을 맡은 친구어머님이 우리아들 공부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 ?
그러면 하숙비를 조금 감해줄테니..뭐 이런 조건으로 말이죠..
그래서 군인아저씨가 OK 한 것입니다.
근데 ,이 친구 얼마간 우리 모르게 과외를 받긴 받았나 싶은데,,, 하루는 엄마에게 과외공부를 안 받겠다고 투정을 부린 겁니다 .
그래서 친구 엄마가 왜냐고? 왜 과외를 안 받겠다고 그러냐? 고 하니까..
이 친구 왈 ~ 혼자서는 공부도 안 되고 친구들 노는 상상에 자꾸 나가 놀고
싶은 생각 때문이라고 대답 했네요~
그러니 친구 어머닌 얼마나 속이 답답 하시겠어요?
아무도 모르게 자식 공부 좀 더 시켜 볼려구 , 하숙비 까정 깍아 주면서리 군인 아자씨 께 부탁을 해놓은 판국인데 이제 와서 과외를 안하겠다구 ??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하고 친구에게 물으니까 , 우리들하고 같이 과외공부를 하면하고, 아니면 자기도 그만둔다고 그래 버린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차칸 칭구죠??ㅎㅎㅎㅎ,,,
그 바람에 친구 어머니도 할 수없이 우리의 과외를 떠맡으신 격이 되어버렸지요~~
우린(崔.崔.羅.朴.李.친구들 性) 다음 날부터 공부 열심히 하겠노라고, 친구엄마에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그야말로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과외공부를 어부지리로 시작 했습니다. 선생님이 재미도 있었구요...
공짜 과외이라선지 무척 신바람이 났답니다.
모두들 집에서도 좋아 하셨지요.
매일 말썽만 피우던 녀석들이 공부하겠다고 열심이니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짐작이 가시죠??
아마 그때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효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성적도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올랐고 반에서 항상 중 상? 아니 중 중권 아래로는 내려가 본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과외공부를 했다 이겁니다..ㅋ
우리의 과외선생님은 지금은 정년퇴임해서 오수물 에 정착을 하셨더군요.
이제서 알았지만 군인선생님 보직이 공보실 소속 카메라맨이란 것을 ...
*.그랬던 우리 친구어머님은 2008년4월26일 97의 연세로 작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 아들만 둘 낳고 현재 춘천시청에서 공직생활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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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무르익고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 ,
여늬 때 와 다름없이 우린 또 걸어서 학교엘 가고 있었습니다.
미군부대 정문을 지나 좀 내려가면 미군 헬기장이 있었습니다.(지금 소양댐 가는 왼쪽 편 육묘 장 자리)
그곳엔 늘~~헬기로 북적 북적 대던 곳이거든요.
학교에 갈 때면 잠시서서 구경도 하던 곳 인데,,,
그런데 마침 마~~악 미군헬기 한대가 이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전에 말하던 그 잠자리비행기 말이죠.
그때 동네 3학년 李 0 0 선배가 일명 짱돌을 들고선 “내가 저 잠자리비행기 떨어뜨린다!! ” 하면서 들고 있던 짱돌을 헬기를 향해 냅다!! 던지는 순간!! 어~~어!! 하면서 우린 모두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헬기가 거짓말처럼 짱돌을 맞는 순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추
락 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야말로 큰일 났습디다!!!,
어린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학교까지 어떻게 뛰어 왔는지도 모르고 ..
미군 M P(헌병)와 2군단 헌병대에서 학교에 와서 수색을 하고 그야말로 학교가 온통 아수라장 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형은 학교로 오지 않고 산으로 내 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지만, 우리는 모르는 형이라고 발뺌만 할 수밖에 없었지요.
학교가 끝난 후 나는 부지런히 집으로 와서는 그 형이 도망간 산으로 주변의 눈치와 상황을 보면서 조용히 올라갔습니다.
왜냐면 아직도 주변에 M P 들이 잠복하고 수색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데 그때.. 이미 산에도 가기 전에 옥수수 밭의 옥수수 낫 가리 속 에서 야..승제..야~아,, 하고 나지막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난 얼른 그 형 인줄 알아채고 그 자리에 서서 딴청을 피우며 작은 소리로 그 형과 대화를 시작 했습니다. 나 ~~아 배고파 죽겠다 . 이따가 밤에 먹을것 좀 같다주라! 라고 ,,,,난 일단 알았다고 하고..그 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뒤로하고 난 집으로 왔습니다.
해가지고 어두운 틈을 타 MP도 철수 한 것을 확인한 후에 , 나도 엄마 모르게 밥과 먹 거리를 가지고 그 형에게 갔습니다.
그 형은 너무나 놀라고 무서운 나머지 날보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난,,, 형! 당분간 학교에 오지 마, 먹을 건 내가 챙겨다 줄께!
그리고 내가 학교 갔다 오면 그날 있었던 일 모두 애기 해 줄께! 하고 둘이 한참 울 다가 집으로 내려왔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군 M P 들은 마운틴(*산에서만집중수색?!!) 만 알았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은폐물 인 옥수수 낫 가리 속에 숨었으리라고는 상상 못했던 거죠. ㅋㅋ
우린 술래잡기 할 때 늘 거기에 숨었 었 거 드~~~~은~~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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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날 아침 또 그 자리를 (헬기장)통해 학교를 가는데 커~~다란 트레일러 가 폐차된 헬기를 싣고 갔습니다. 난 생각 했습니다. 어떻게 저 커다란 비행기 가 짱돌 한방에 떨어질 수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다행이 그 미군 조종사는 큰 부상 없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야! 그 형 대단하다~라 구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다음날 그 형은 어쩐 일인지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형의 아버님 은 그 시절에 “통일주체 대의원”(지금의 국회의원급?) 이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계셨었는데,,,아마 그래서 일이 잘 풀렸나??
하는 생각으로 ,,,,,,,,,,,,,,,,
그렇게 세월은 흘러 그 형은 지금 춘천시청 모 간부로 근무하고 있답니다.
별명이 헬기 떨긴 사나이 라고,,,,,ㅋㅋㅋㅋ
가끔 만나서 소주한잔 기울일 때면 우리의 대화는 자연히 그 시절에 가서 그 이야기로 이젠 약간은 주름진 얼굴로 웃음을 짓곤 하지요.ㅎㅎㅎㅎㅎ
그런 식으로 해서 나 의 중학 초년생 시절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겨울은 금새 다가 왔답니다.
중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겨울방학!
난 친구들과 함께 미군부대 스케이트장 (일명 언매기)에서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서 외발 스케트 를 즐기며 하루를 보내곤 했지요.
그 당시에 는 스케이트가 엄청 귀할 때 라 우리는 주로 날만 어디서 구해다가 판 대기 에 외날만 박아서, 양손엔 스키폴처럼 긴~~막대기에 끝엔 못을 박아 얼음을 찍어가며 속도를 내면서, 마치 폭격기마냥 쌩쌩 달리며 급!!정거 급!!회전 등 온갖 기술을 부리면, 미군들이 원더풀 에 뭐라 솰라 대는지 박수도 쳐주고 미루꾸 도 주고는 했었답니다.
그러다가 우쭐대는 마음에 더 잘 보이려고 까불다가 실수로 물에 빠져 메기 (물에빠진꼴) 라도 잡으면 이것 참! 난감하지요.
지푸라기 모아 불 해놓고 메기 잡은 나일론양말 말린다고 불가에 들이대는 순간~!! ,나일론 양말은 흔적 없이 녹아버리기 일쑤 였죠 , 집에 가면 또 죽음이다~~~~!! ㅋㅋㅋㅋㅋ
그 당시 우리학교는 전국에서 스케이트 제일 잘 타는 학교로 정평이 나 있었거든요,
대표선수로 이름을 밝혀도 될지 모르겠지만 무슨 복희라고 우리나라 대표선수로도 지냈었고 지금은 한국빙상연맹 모 간부로도 활약 하고 있습니다,
저와는 초등학교 동기이기도 하구요.
스케이트 정말 잘 타는 선수 였어요, 지금 의 김연아 처럼 그 시절엔 그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 에서는 으뜸이었지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눈오는날!!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논과 밭에다가 새를 잡는다고 북데기와 지푸라기를 잔뜩 펼쳐서 , 창애(예전의사냥도구)를 놓고는 멀리서 새가 창애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는 언 손을 비벼가면서 어둑어둑 해가 질 때까지 제발 잡혀주라 새야!! 하며 엉뚱한 기도까지 해 본적도 있지요.ㅎㅎㅎ
꽁꽁 언 손으로 집에 오면 울 어머닌 눈을 한번 흘기고선 “차~암 !! 너두 사서고생이다.!! 이놈아” 누가 시켜서 해봐라 ,
그 시간에 공부를 하지 왜 개 떨듯 떨고 다니냐 !! 고,,,하시면서도 “얼른와 밥먹어라~하며 차려주는 밥상엔 내가 젤 좋아하는 구수한 시레기 국과 된장찌개 에 밥 한그릇 뚝닥 해치우면 어머닌 그래도 내심 밥 잘 먹고 잘 뛰노는 내가 좋았던가봅니다 .
그리 말썽만 피우고 지지리도 속만 썩이던 녀석이 웬일로 이런 글을 쓸 생각 했을까?
참으로 인생 아이러니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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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 학년 즈음
아직도 먼 산엔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있는 3월에,,,
우리는 또 그 토끼길 같은 길을 따라 여전히 등교를 하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형제보다 더 부딛기며 뒹구는 우리 다섯 명 崔.崔.羅.朴.李 동네에서도 아주 혀를 내두르는 그런 친구들...
그나마 겨울 방학동안 아무 일 없이 보내고 학교로 향한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러워 보이는지 동네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신다.
“야~~이눔 들 어째 올겨울 엔 조용히들 보냈냐? 나~참 거 희안할세~~
이젠 중학생이 되더니 사람 색갈 좀 내려나보다? 허허허”
아~징말 우리가 무슨 동네 깡패냐 뭐냐? 열심히 공부 좀 하려는데 저 아저씨 왜 아침부터 시비냐 ?? 그치 ??
야~야 ! 그냥가자 ...그냥 가.. 학교 늦었어 , 임마...하고 조잘대며 학교로 향해 갔습니다.
학교운동장은 그야말로 돗대기 시장 같았죠.
워낙에 씨가리가 많다보니 교정은 참새 떼들이 가득한 듯 했습니다.
10명모인 참새 ! 30명모인 참새 !
아마 제각기 같은 초등학교들 나와서 방학 끝나고 만나니 반가움 의 인사소리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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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휑~~하니 비어 모두들 교실로 들어가 버렸죠,
조금 있다가 교실 문 이 열리는 가 했더니,,,,
자~~조용!!··조용히 하라구!!!
잌크!! 모두들 쥐 죽은 듯 고요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2학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그 유명한 미술선생이신 그 이름도
또한 이상하고 무서운 “조 진 무” 선생님이셨거든요.
선배 형들이, 야 !! 너네 2학년 때 “조 진 무” 선생 만나면 반 죽는다!!고 그랬었는데,,,,
성질나면 무 로 막 조진다 는, 조 진무 선생님이,
왜 하필 우리 담임이냐??/아~~하나님..ㅠㅠㅠ
어쨌거나 그 유명세에 따라 담임선생님 의 기선 잡기는 일단 통했습니다.
자~~자~~!! 이제부터 2반 번호를 정한다.
모두 나와 한 줄로 서봐! 키순서로 ,,,,빨리!!빨리!!
누가 갈켜주지 도 않았는데 우리는 알아서 키순대로 줄을 섰죠....
1번은 제일작은애..난 17번으로 정해졌습니다,
18번은 경기춘 ,,,16번은 이정진
기춘 이 와 정진이 와 나는 1학년 때 도 도낀 개낀 거의 지금번호와 별반 특이함이 없이 그대로 2학년으로 같이 올라 온 거죠.
기춘 이 는 오동국민학교를 나왔고, 정진이 는 청평국민학교 를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죠. * 청평초등학교 는 소양댐에서 배타고 청평사 가는 길목, 물속에 수몰된 학교임.
그때는 소양강댐 수몰지구 수몰민들이 많이 이곳 춘성군 으로 이주를 했는데, 정진이 가 바로 그런 케이스지요.
근데,, 정진이 와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지요.
그때 우리는 밀가루포대 실 에 촛물 먹여서 소양강 청평사 골자기(수구동) 정진이네 동네까지 한나절 은 걸어가서 굴낚시(메기낚시) 하러 다녔었거든요. (지금생각해도 거기가 어딘데 걸어서,,,하여튼 영악한 놈이야..ㅎㅎㅎ)
그래서 정진이 하고는 잘 어울렸답니다.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해서,,,
지금도 자주 만나곤 하는데 이놈 요즘 기분이 별로라..왜 그러는데? 물으니,,
강원대학병원 원무과에 다녔는데, 명퇴신청하고 쉬는중(노는중..학교?)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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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커다란 기억이 없이 그냥...그렇게 흘러 한 학 기를 보냈는지??
집에서는 농사준비 하느라,, 막! 농번기를 시작할 즈음,
울 아버님이 느닷없이 저에게 선물을 하나 주시는 겁니다.*당시 농번기는 6.10작전 이라고 해서 6월10일 이전에 모내기를 끝내는 사업(통일벼).
전..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님 이 주신 선물은 ~!!! 그야말로 그 당시엔 자가용으로 통하던 디럭스(derux) 신사용 자전거 였습니다. 우~~화~~~하하하하
그때는 우리 동네 에 재록이 하고 나하고 단, 두 대 뿐 이였으니 그야말로 환상 이었지요.
그때부터 재록이 하고 나 하고는 또 다른 친구가 되었습니다.
원래 재록이 는 나보다 한 살 위 였는데,, 진로를 미리 선택해서 동도 기술 중학교 로 진학을 한 관계로 기계적인 학식이 나 보단 엄청 앞서 있었답니다.(*재록이는 현재 1군지사 소속 군무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음)
자가용>?? 을 가진 친구로서,,,말이죠.
근데..웃긴 건 ,,, 내가 자전거를 탈줄 모른다는 거~~있져??
그래서 다음 날부터 난 자전거 렛슨을 받기로 했지요,
재록이 한테..인생 의 두 번째 과외를 시작한 겁니다. ㅋㅋㅋ
그 과외는 멀리 가지 못한 채 , 단 이틀 만에 끝났습니다.ㅎㅎㅎ
친구에게 배우는 과외는 엄청 쉽더라구요~~
그담부턴 나~~안... 그 토끼길 을 자전거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야~~!!! 나좀 ~!! 태워주라~하면서 울(崔.崔.羅.李) 친구 시키들 이 뒤따라
붙으며 애원 아닌 애원? 을 했지만 누가~태워 준다구~??ㅋㅋㅋ
얌마!! 느네들 도 자장구 사 달라구 해라~~!!(지금 애기지만 그땐 자전거가 참 귀한 시절이 였지요?)
학교에 갔다오면 재록이 와 난, 늘 자전거에 매달려 있었죠.
닦고 , 조이고 , 기름칠 을 해가면서 그야말로 항상 새것 같았습니다.
리무도(*휠) 항상 반짝!! 반짝 하게 빛이 났었지요.
내 동생이 형~한번만 태워줘~~응?!! , 해도 어림도 없었습니다. 아니 만져보지도 못하게 했으니까요.ㅋㅋㅋ
지금 생각해보면 애들이 다 그렇듯이 , 금방 싫증내고 말 것을....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자연스레 그 자전거는 내동생도 타고, 친구들도 타고, 뭐 그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그..자전거 때문에 여러 번 다치기도 했지요.
나중엔 선수가 다되어서, 두 손 놓고 타기, 뒤로타기 , 발 끼고타기, 등등,,
그야말로 , 외발스케이트 탈 때처럼, 생 쑈!! 를 해가면서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쯤 인가 ?
학교 가는 길 에 친구들이 기다리는 교회 앞 의 다리발에 발을 기댄 다는게..그만 다리발 밖을 헛 디딘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잠깐의 순간인데도...느낌은 한참~!!! 떨어지는 듯 했지요.
난... 다리 아래도 그냥 쳐 박히고.....그다음 에 자전거가 내 위로 떨어졌는지? 어쨌는지? ,,, 하여튼 아무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아!~이게 무슨 망신이람~(*당시엔 아~쪽팔려~!!이런말이 없었슴!)
그때 친구들이 다리아래 로 뛰어내려 왔고, 동네아저씨도(학교갈때마다 참견하던 그아저씨) 내려 와선, 아~이 눔아 한눈팔지 말구 잘 타야지~!!! (우~쒸.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랬나?속으로,,) 하면서 내 자전거를 다리 위로 올려다 주셨는데,,,
난 ,,,내가 다친 건 생각도 안나구 ,,,,
아~쒸!! 이게 모야~~...내 자전거 다 망가졌잖아~~어케~~ㅠㅠㅠ
하면서 막 울었죠.(사실 아파서도 자전거도 아닌,챙피함 을 중화하려는 의도.ㅋㅋ )
진정하고,,,자세히 보니 자전거 는 호구(*핸들)도 부러졌고, 리무(*타이어휠)도 휘어져버렸고, 살도 몇 개 부러지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친구들 여럿이서 자전거를 학교 앞 자전거 포 까지 끌고 가서, 자전거포 아저씨께 보여주니,,, 아~! 좀 잘 타지 이 녀석아! 그래,, 다친 덴 없구??
하시는 그 말씀 한마디에 감동 먹곤 고등학교 때 까지 그 아저씨네 자전거포 단골이 되었습니다,(물론 견적은 좀 나왔지만요~~ㅎㅎ)
아마 그때 자전거 수리비로 쌀 한 두어 말 정도 나왔을 걸요~~~ㅎㅎㅎㅎ
또,,, 혼 날수밖에 없는 일~ 이라 생각하구 집으로 왔는데 이상하게, 울 아부지와 , 엄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다~??
그야말로 쳐다도 안보시고,
다친데 없냐구?? 물어도 안보고.....
이야~~ 이~상하다...생각했는데,,,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동네 아저씨가 자초지종을 우리 집 에 다~~아 설명을(일러바침! ㅎㅎㅎ) 하고는 (애 학교같다 와도 아무 말씀 하지말라구, 얼마나 아프고 놀랬겠냐구, 맘고생 많이 하구 있을 거라구,,,나참!) 그랬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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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졸업반 ~
그동안 나도 모르게 키도 훌쩍 커 있었습니다.
코 밑 수염도 거뭇 거뭇 해지면서 어느새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내 동생도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진달래꽃이 만발한 어느 날(崔.崔.羅.朴.李) 우리는 뒷산에 새집 찿기 를 하기로 하고 마을 뒤 야산으로 갔습니다.
한참 이리 뛰고 저리 뛰고 , 먹이를 물고 있는 어미 새를 잠복근무 하며 지켜보곤 하다가, 양지바른 묘지 앞에 앉아 있는 옆집 형이 부르기 에 좀 쉴 겸 해서 그, 형 옆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습니다.(55년생이니까 울 작은누이 동창이지요.)
그런데 그 형,,,주머니 속 에서 뭔가 부스럭 거리며 꺼내 놓는 것은 새마을
담배 였습니다.
거침없이 불을 붙이곤 야~!! 너희 이거 한 모금씩 돌아가며 빨아봐~!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호기심스럽게, (명령에)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피워 보기로 했죠.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헥~!! 켁! 켁! 와~~매워 !! 하며 뒤로 나가 자빠졌죠.
근데, 영환이 녀석은 뭐가 매워? 하면서 아주 골초인 냥 태연하게 피워 대는거 아니겠습니까?
야~넌 안 매워?
응 ,,,안 매운데 머..
그때 영환이 아버진 봉담배(*봉지에 담겨있는 담배를 종이에 말아서 피우는 담배) 를 태우셨는데, 아마 이 자식 그 담배를 몰래 훔쳐다가 피워본 모양입니다.
그 봉 담배는 무척 독하다는 애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암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른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 하게 되는 것 이었습니다. (*되지못한 개 엉덩이에 뿔 난다고...)
그리곤 그.... 한참 후,, 한 놈 ,그리고 또 한 놈 씩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게 됩니다.
학교에 갈 때 한 대, 집에 올 때 한 개피 씩 ,,,,,,
담배는 학교가 는 길목 짚가리 에 숨겨 놓고는..ㅋㅋㅋ
그것도 아주 수법이 다양 해 지더군요.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학교에도 가지고 간다. 이겁니다.
성냥 개피 와 황은 허리 바(*혁대) 속에 감추고, 담배 갑 은 성경책 한가운데를 담배 갑 이 들어가도록 재단해서 칼로 파서 그 안에다가 감추고,,,
서서히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죠.
담배 종류도 다양합니다.
스포츠. 희망. 파고다. 청자. 환희. 새마을. 등등. 그때도 담배가 여러 종류가
있었죠.
어쩌다가 양담배라도 어디서 생기면 생 난리를 칩니다 . 서로 먼저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 보겠노라 구 ....
긴~~꼬리......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죠.
조 용기!! ,,, 이 새끼 가 걸린 겁니다.
학교 화장실에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몰래 피우다가 , 똥 싸고 나오던 조 진 무 선생님 에게 딱!!! 걸린 거였죠.
완~~죠니.. 황천길인거야~~!!!ㅋㅋㅋㅋ
그야말로 무지막지 하게 패 대더군요. 울지도 못합니다. 울면 더 패니깐요.
용기,,,새끼~~불쌍해서 더는 못 보겠습디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인 겁니다.
우리 반 모두가 따리(*몸 검사 가방검사를 받는일)를 받게 된 거죠.
엄지와 검지손가락 까지 검사합니다, 니코친이 배어있는지 말이죠.
맨 앞줄에서 세 번째까지는(*좀 작은애들) 별로 걸린 애들이 없었는데,
뒷줄 에 등빠리(*덩치) 좀 있다는 새끼들 은 거의가 따리에 걸려들었습니다.
조 진무 선생님 눈이 반쯤 뒤집혀 지는 게 보였습니다.
걸린 새끼 들은, 일단 교단 앞에 일렬 대기상태로 죽을 순서만 기다리는 꼴이 되었죠..(*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지금도 소름이 쳐짐)
선생님은 우선 이 새끼들 을 무엇으로 패야할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약간은 도 신게 아닌가? 하고 보일지경이었으니...
자!!~우선은 대나무 자를 칼날같이 세워서 손바닥 이 아닌 손등을 무자비 하게 후려 갈기 는 겁니다. 한방~! 두 방 ! 세 방 !에 모두들 나 가 떨어집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없는 현실인거죠.
지켜보는 우리도 등줄기에서 조용히 땀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한,,, 여나무 명(*열명이상) 을 후들 겨 패는 조 진무 선생님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무자비한 조 진무 선생님은 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시기 시작합니다.
한참 후, 선생님은 “ 너희들은 공부하는 학생이고 아직도 더 자라야 할 나이인데, 담배가 얼마나 머리를 나쁘게 하고, 자라나는 데, 얼마나 해로운지?
아느냐! “ 고 하시고는 걸린 새끼들을 끌어안고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당부를 받으셨습니다.
근데..이상하게도 난.. 맞은 새끼들 보단 돌아서서 우시던 조 진무 선생님이 더 애처롭게 느껴 졌 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담배 사건은 마무리가 되어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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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중학교 3학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난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나봅니다.
떨어지는 낙엽만 보아도 눈물이 날것 만 같고 .....
지는 해를 보며 괜 시리 한숨도 쉬어보고, 싯 감이 생겨났다고, 노트를 들고 시를 쓰겠노라고 꼴값을 떨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엄마한테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된통 야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야단맞을 일이 있었기에 혼쭐이 났겠지만 서도, 맘은 반항기이고 사춘기 인
때라,
은근이 심통이 났습니다. (뭐 한 놈이 뭐 한다고)
이럴 때 술을 마시는 거라며??ㅎㅎㅎㅎ(슬슬....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
그런데...술을 살 돈이 없다 이거 아닙니까??
그때! 딱 ! 돌아가는 잔머리!!!ㅋㅋㅋㅋ
마을 가게(일명 반가게)라구 반에서 돌아가면서 운영하는 가게가 있는데,
요번 참 은 조 봉희네 집이지?
거긴 외상으로 쓰고 나중에 갚는 곳으로, 엄마 외상 심부름으로 자주 다니곤 했었고, 다!~동네에서 아는 사이인지라..
난~~ㅋㅋㅋㅋ.. 바지 주머니에 손 푸욱~찔러 넣고 는 슬슬 가게 집 으로 향했죠.
아줌마~~아~!!
응!! 그래 너 왔구나?? 엄마가 뭐 사오라든??
네~!! 소주 한병(녹향소주) 이랑요. 제 심부름 값으로 “라면땅” 하나 먹으래요~!
글구 달아놓으시래요~ 그래 알았다!!.
안녕히 계세요~~그래...잘 가거라.
이래서 난 ,소주 한병을 난생처음으로 챙겨 가지고는, 내가 잘 가는 뒷동산 에 올랐습니다.
지가 무슨 낭만파나 된 다구... 일단 이빨로 소주병을 따고는 한 모금 넘겨보았습니다.
근데..뭐 별 맛도 없고 ,그저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병째로 나팔을 불고 말았지 뭡니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기에 사람들은 이런 걸 왜 마실까?
하고 있는데, 뒷집 의 광희가 왔습니다.
나!! 뒹 그러져 있는 술병을 보더니 이 새끼 하는 말!!
야~~이 자식 !! 저 혼자 다~아 마 시구, 아~쒸~ 좀 냉겨 놓지 새꺄~~하며 아쉬워 하 는 겁니다.
광희는 술을 곧잘 마셨던 가 봅니다.
왜냐하면 광희도 수몰민으로 우리 마을 로 이사를 왔는데,,
당시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진학을 못한 친구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러니 어린 나이에 농사일 하러 다니면서 일찍 술을 배우게 된 거죠.
그리고 잠시 후 에...
소식이 오는 겁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춥고 , 어지럽고 , 하늘이 노
랗고 , 울렁거리고 .......
그러자 광희가 야~!!!빨리 재록이방 으로 가자!! 얼른~~!!
광희 의 부축으로 재록이 방으로 갔습니다. 우선 추운 김 에 아랫목으로 기어 들어가 이불을 덮어 썻 지 뭡니까??
방은 금방 소여물을 끓여서인지 절절 끓고 있었지요.
채~일분도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 아마.,,,
속에선 울 커 덕~!! 울 커 덕!! 하면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 하는 겁니다.
미쳐,,방안을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방안 가득히, 그야말로 오바이트를 시작한 겁니다.
토함 질 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나중엔 나올 것 이 없으니. 노오 란 똥물 같은 위의 점액 같은 것 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죽는 줄 알았죠,, 혼수상태 였었 으니까...
광희가 , 나 죽는 줄 알고 집에다 알리고 , 엄마 ,아부지, 동생까지 와서 날 집으로 델구 갔습니다.
그렇게 난 처음 마셔본 술 에 대한 신고식을 처절하게 치룬 셈 이 되었죠.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 “녹향소주는 32도” 로 엄청 독 했다는거 ,,,
지금 소주는 “19”도이니깐 아마 애주가들은 비교가 되실 겁니다.
그렇게 담금질을 하고 난 후엔 웬만큼 술을 마셔봐야 아무렇지 도 않게 넘어가곤 하죠.....ㅋㅋㅋㅋ
지금도 소주 3병을 마시고 왔지만 말이죠..(현재나이53살)
우리는 빠방을 (천막을 뚫고 들어가는것)결정합니다!!
그해 가을엔 , 우리 동네에도 가설극장 이 들어왔지요? (지금여러분들은 잘 모르는 극장??)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는 챠~~르르르 필림 돌아가는 소릴 내며 ...
이 동네~~저 동네 떠돌면서 영화 보러 오라고 온통 동네가 시끄러웠 지요~~~
그런데,,우린 극장구경 할 금전적인 여유가 없잖아요?? ㅋㅋㅋ
결국 , ㅎㅎㅎ
우리는 그냥 영화를 봅니다.
왜? 우리 동네 최고형들이 알아서 해 주니깐...ㅋㅋㅋ
빠방 을 못 뜬 친구는 미루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는 영화를 보겠다고 생 난리 를 치기도 했죠...ㅎㅎㅎ
매표소 입구에 둘이 섭니다. 애 덜 둘이요~~!!
누구? 누구? (물어보면 더, 손해를 봅니다.!!)
예!! 뒤에 있는 애덜 이요!!
암튼 글케 우리들의 사춘기 는 또..그렇게 지나고 있었지요.
그렇게 중학교3학년시절은 꾸역 꾸역 지는 해처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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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썼습니다.
저는 춘천기계공고 자동차과 를 가기로 맘먹었고 또, 그 학교로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崔.崔.羅..李) 모두 춘천농고로 원서를 냈다~고, 하데요~
이~~야~~이거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야 하는데,, 그렇다고 친구들과 헤어져 각자 다른 학교를 다닌다는 것도 그렇구,,
그래서 저도 춘천농고(임업과)에 원서를 다시 냈습니다.(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나와 준수 , 광혁이 , 웅호는 임업과 로 용운이 는 원예과로 ......
그렇게 해서 또 우리는 다시 몰켜 다니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버지도 별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았고 ,,내심 좋아 하시는 눈치 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쏘니” 라디오를 팔아서 산을 사셨거든요.
자그마치 15,000평 을 말입니다.
산에 나무 심으러 엄청 다녔습니다.
잣나무, 낙엽송 , 등 을 리어카로 몇 리어카 씩 싣고 와선, 동네사람들과 우리 친구들까지 모두 동원 되어서는 몇날 며칠 씩 나무를 심고는 했지요.
그러니 제가 임업과를 나와서 산을 가꾸어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계셨던 거였지요.
고등학교 1학년 ~!!!
그리고 3월5일 나는 춘천농고 1학년 임업과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2.1:1로)
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이 원량 선생님이셨는데 , 엄청 온화 하신 분이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또 , 중학생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아침에 등교 하면 정문에서 군기 잡는 건 일도 아니였죠 .
두발상태 라던가? 호꾸는 (*일본식 교복) 제대로 채워졌는지?
모자는(* 평창~ㅋㅋㅋ 모자 창을, 일자로 평평하게 세워서 쓰고 다님!) 제대로 쓰고 다니는지, 하의는 나팔바지가 아닌가? 책가방 끈은 있는가? 등등..
그야말로 군대 정문에서 군기 잡히는 듯 하는 겁니다.
또한 중학교 때엔 없었던 “교련” 시간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교련선생님 별명이 찐 삐라 라구 불리웠는데요.
아마 중학교 때 조 진무 선생님보단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 됩니다.,,,,,ㅎㅎㅎ
가끔씩 제식 훈련을 잘 못한다고, 목총 들고 선착순 시키면 그야말로 숨이 목젖까지 턱!!턱!! 차오르곤 했죠.
합창부에 들어간 나!!
그러던 어느 날 난 합창부에 차출이 되었습니다.
음악선생님이 직접 면담 을 하시고는 ,
내일부터 4교시 끝나면 바로 음악실로 나와!! 라고 하시는 겁니다.
원래는 밴드부에서 먼저 찍었는데, 저는 극구 사양했답니다.
거긴 들어갈 땐 내 맘 이지만 나올 땐 내 맘대로 못나온다??
반 죽어야 나온다>? 빠따 50대 맞아야 나온다는둥..뭐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었기에~~,,
합창 부 는 4교시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음악실로 연습을 하러 가야합니다.
제가 합창부나 밴드부에 차출이 되려했던 것은 , 초등학교 에서 부터 중학교때까지 유일하게 “수” 를 받은 과목이 음악 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음악하나 만큼은 타고 났던 거였지요.ㅎㅎㅎ
저는 합창부에 열심히 나갔지요.
왜냐하면 여학생이 반도 넘었거든요??(잠업과 원예과 이런 반은 거의가 여학생 이 었으니..)
노래하는 것도 좋고 , 여학생들도 많고 해서 난 열심히 참석했죠...
우리 음악선생님 별명은 “곰”이셨습니다.
손이 워낙에 커서 그런 별명이 붙으신 듯합니다.
나중에, 그..곰 선생님 에게 그, 큰 손으로 팽이 돌아가듯 터졌지만...ㅠㅠㅠ
그 당시 우린, 춘천 육림극장 무대에서 강원도 고등학교 합창 대회 가 있을 무렵이기에, 선생님도 우리도 열심히 연습을 했지요.
그때, 지정곡은 “목장의 노래” 인가 그랬고, 자유곡은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힌구름~~머억구름 ~시원한 바람에 양떼들,,,!~~)
그 얼마 후 , 합창대회 는 열렸고, 우리 학교는 강원도 고등학교 합창 대회에서 “준우승” 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입상을 했지요.
선생님도, 우리도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 곰 선생님은 私費를 들여서 명동입구에 있는 “금수강산” 이라는 중국집 에서 우리를 위해 “자장면 과 탕수육” 파티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 자장면 정말 맛있었답니다.
암튼 그렇게 해서 대회는 잘... 끝났는데..
난, 그 다음날부터 합창부엘 안 나갔습니다.
상도 타고 , 뭐 이제 연습 끝났나보다??하고 일방적으로 안 나간거죠?ㅎㅎㅎㅎ
근데,, 그게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몇 번 애들이 부르러 오긴 했었는데, 내가 그냥 묵살해 버린 거죠?
4교시 끝나고 합창부 간다고, 하곤 맨날 땡땡이를 친 거였죠~~!
그러던 어느 날!!
4교시 수업이 막~~끝날 무렵..... 으악~!!!입니다.
창밖에... 우리의 음악선생님이신 “곰” 선생님이 손수 저를 뫼시러?? 오신 겁니다!!
오라! 가라! 말도 안하십니다. 손가락 만 까닦 !! 하실 뿐입니다.
난 선생님의 우람한 손에 멱살을 붙들린 채 음악실로 개 끌려가 듯 끌려 들어갔습니다.
너무 무서웠지요!! 맞을 생각에~~으이구~~우 !!
똑바로 서라!! 하는 선생님 말씀에... 난 이제 죽었구나.
아~ 이게뭐냐 ?? 여학생들도 다 있는데서, 음악실은 쥐~죽은 듯 고요 했습니다.
이빨 꽉!!물어~!! 하는 순간 ~ 머리통에서 별이 번쩍!! 했습니다.
한 순간 그..곰 같은 손에 맞은 난 그야말로 예배당 종 치듯이 터지고 있었
습니다. 한 두어 바퀴는 돌았을 겁니다. 제자리에서...ㅠㅠㅠㅠ
이 자슥 이 잘했다고, 자장면 사 줬더니 바로 배신이야?? 하시면서..
한방 더 맞았다,, 이겁니다.(아~~치사하다.자장면한그릇!!)
그렇게 벌어놓은 매를 한방에 해결?? 하고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꼼짝없이 합창을 다시 하게 됩니다.
거대한 소양강댐 의 준공식!!~~!!!
그 무렵,, 소양강댐 건설 공사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때 였습니다.
동양 최대의 사력댐! 그 웅장한 댐이 우리 동네에서 준공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인거죠 .
“박정희 대통령” 이 준공식 때 오신다고 마을이고 학교고 죄다 비상소집 이 되었습니다.
길가 청소는 물론이고 집 앞 ,마을안길, 길옆에 보기흉한 것들은 모두 철거 시키고, 난리 아닌 난리였지요.
우리도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가 운동장 청소며 교실청소며,
마루바닥 도 기름칠을 해가며 반짝!!반짝!! 광을 냈죠.
그 바람에 지금 의 소양강댐 가는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었지만....
드디어 1973년 12월의 어느 날 !!!!
6년6개월인가? 7개월인가의 긴~공사를 끝내고 준공식이 있는 날 입니다.
우리는 비상소집 이 되어 모두들 학교에 나왔습니다.
손 에 손 에 태극기와 만국기를 들고 연도에 나와, 대통령 일행을 향해 열렬
히 환호를 하고, 우리학교 밴드부도 연도에 자리를 잡고, 힘차게 빰~빠라 를 해 대고 있었죠.
그렇게 해서 우리 동네엔 또 하나의 세계적인 명소가 하나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소양강 댐이 없을 땐!!!
장마철만 되면 온통 물난리 였죠.
여름철 장마 때면, 우린 모두 강가로 갑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강으로 물 구경 을 가는 거지요.
그~~넓다 란 강은 무엇이던 삼킬듯 한 기세로, 넘실대며 거세게 흘러갑니다.
소양강은 무서웠습니다.
설악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강은 인제를 지나, 양구, 내평이며, 강가에 있는 마을 들을 마구 쓸어내려 오는 가 봅니다.
그러면, 떠내려가는 초가집 지붕위에는 사람이.. 서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며 떠내려가는 사람 !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죠. 발만 동동 구를 뿐!)
커다란 황소도, 돼지도 떠내려가고, 굵은 통나무와 뱀과 닭들과 온갖 것들이 그야말로 둥~~둥 떠 내려 갑니다.
그~~와중에도 ,어떤 어른 아저씨 는 온몸에 밧줄을 감고는, 그런 것 들을 꺼내오려고 , 그 무시무시한 강 물속으로 뛰어들고는 했답니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들 때니깐, 그런 무지한 일도 두려움이 없이 했을 거란 ...
생각이 듭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리곤, 소양강 댐이 생긴 후로는, 그러한 물난리를 다시는 볼 수없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지요.
협업 농장에서 고 2학년~!!!
우리는(崔.梁.羅..李) 2학년 때 모두 협업농장으로 자진해서 입소했습니다.
농장은 학교에서 실험, 실습도하고 누에 와 작물도 키우고 젖소와 비육돈(돼지) 도 키우곤 하는 곳이죠.
그곳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에겐 마치 천국 같았죠.
학교에서도 아주 내놓은 곳이니깐, 아마도 농사꾼 취급하는, 뭐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딱! 일겁니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공부 도 하며 일주일에 학교는 한번만 다녀오면 되는 (얼굴도장,ㅋㅋ)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기숙사 사감 겸 농장장 선생님이 김 석중 선생님 이셨는데,
무척이나 부지런 하셨던 분이라는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볼 땐 전형적인 농삿 꾼 이였어요.
군대식 입니다.
아침6시면 기상에다, 구보하구 세수하고 밥 먹고 동물들 먹이주고 청소하고,,,, 하여튼 간에 무척 분주하게 하루가 지나곤 했죠.
근데..3학년 선배들 중 한사람 “이응호” 라는 선배가 있었죠.
“뚜하리” (*현 강원대학교후문쪽) 패 라구, 정말 요즘말로 꼴통? 이였죠.
선생님이 농장에 안 계신 날 에는 우린 비상입니다.
잠실(누에 키우는 방) 로 집합시켜 놓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기강이 헤이 하다나? 뭐라나? 하면서 무조건 까고 봅니다.
낮엔 좀 나은 편이지만 , 밤엔 그야말로 공포의 천국 이지요.
밤에는 맨 정신 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디서 구해다 놓고 마시는지 ,술에 잔뜩 취해서는 폭군으로 변합니다.
그야말로 眼下無人 ? 이라고나 할까요.
동기들이 말려도 안 통합니다. 나중엔 자기 네 끼리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산속에서 특주(特酒), 술을(그 당시에는 샘표간장병에 특주라고 담아서 파는 술이 있었음.) 사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지금이야 가로등도 환하고는 하지만 ,
그때는 산속에서 신동삼거리(현 102보충대근처) 까지 술을 사러 갔다 오려면 한 시간 은 족히 걸리는데,,,(돈이나 주면서 그러면?.ㅎㅎㅎ)
그 어둑하고 깜깜한 길을 혼자 다녀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러면 그 술 사러 갔다가오는 한 시간쯤 지나면 잠이 좀 들던가, 해야 되는데,
이런~ ..쒸 잠도 안잡니다.
오히려 늦게 왔다고 또 , 행패(지랄)이지요.
환장 합니다~~징말,,
그랬던 그 선배, 지금은 춘천에서 커다란 세탁공장을 하고 있답니다.
이제는 같이 늙어 가는 마당에 옛날 그 시절 이야기 하면 ,
야~내가 언제 그랬냐? 하면서 발뺌을 한 답니다.(그런것이 추억인지?.ㅋㅋㅋ)
특주나 한잔 하자면서요...
그런 우리 농장엔 관리인이신 李 氏 아저씨하고 , 朴 氏 아저씨 라 고 두 분 이 계셨는데요.
이 씨 아저씬 연세가 조금 많으셨습니다.
친구 아버님이시기도 하구요.
그 아저씨 는 밤에 저희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 地方 쓰는 법! 과 祭祀지내는 방식(즉, 홍동 백서 이런것) 등을 가르쳐 주시곤 했는데,
우리들 (崔.梁.羅..李) 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長男 이었으므로,
지금도 이 씨 아저씨께 서의 가르침을 늘,,감사히 여기곤 했지요.
(*후에 우리는 친목회 를 만들었죠. 長男會 라고,)
朴 氏 아저씨는 아마 그때 신혼이셨던 가 ? 그랬습니다.
사모님이 매일 간난아이를 혼자 돌보곤 하셨는데..
어느 날 朴 氏 아저씨와 우리는 돈사에서 돼지 거세를(부랄까기) 하고 있었는데,,
李 氏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 오셔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 이봐!!!!
朴氏!!! 얼른 집으로 가보세!!! 클 났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함께 집으로 마구 달려갔지요,
그런데,,, 아~~ 이건 정말 큰일이 난겁니다.
글쎄~~...사모님이 빈혈인지? 영양실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러지면서 아기를 깔고 실신 하신 겁니다.
朴 氏 아저씬, 금새 얼굴이 사색이 되어, 사모님을 깨우고 아기를 들추어 보니 , 이미 아기는 숨을 안 쉬는 상태가 된 겁니다.
다행히 사모님인 목숨을 건지셨지만요~~ㅠㅠㅠ
우리 친구들 은 모두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그렇게 귀여워하고 예뻐했던 아기가,,,엄마, 아빠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ㅠㅠㅠ
그리고는 얼마 후... 朴 氏 아저씨 부부는 농장을 떠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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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응호 선배 는 졸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을 힘겹게 보내던 중,
어느덧 3학년 이 응호 선배 도 졸업을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제일 고학년이 된 거죠.
얼마 후 에 축산과 동기 이 석기 도 농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후배들도 맞이하게 되었죠.
1학기를 후배들 과 그렇게 보내고 우리는 2학기 때 실습을 나갑니다.
김포군 검단동 (국립가축검역소) 로 우리 모두가 함께 실습을 간 거죠.
그곳은 우리 농장보다 더,,깊은 산속에 있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엘 어떻게 찿아 갔는지도 모르겠고,,ㅎㅎㅎㅎ
얼마 전 에 김포 친구 집(양곡면 양촌리) 엘 갔다 왔는데, 검단동이구 뭐구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게 변해있더군요.
하기사 벌써 34년이 지난 세월이니, 아니 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검역소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학교농장에서의 일과 별반 다를게 없었죠.
수입 들어온 가축(소 ,돼지 등) 검사하고 ,예방주사 놓고, 사료주고, 똥 치우고, 뭐 그렇게 보내는 게 일상생활 이었습니다.
어쩌다 소나 돼지가 죽으면 약품처리해서는 땅 파고 묻어버리곤 하긴 했지만,
저녁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 한통 사가지고 우리한테 옵니다.
왜냐하면 ? 얘들아.. 그..낮에 죽은 소 어디다가 묻었니?? 하는 거 있죠...
그거라도 캐다가 드시려는 요량이었나 봅니다.
먹고살기 힘들고, 고기구경 하기도 쉬울 때는 아니었던 시절이니,,,
지금은 광우병이니, 무슨 멜라민이니 해서 정말 마음 놓고 먹을 만한 것이 없지만,
그 시절엔 굶어서죽기 아니면 무엇이든 먹고살기, 둘 중에 하나 !!!
참으로 삶의 몸부림인 셈 인거였죠.
암튼 그렇게 해서 우리의 짧은 실습생활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얼마 후 졸업을 앞두고 우리는 귀향을 했습니다.
귀향~~
그것~!!
참말로 아무것도 아니 옵더이다............
그야말로 실업자가 된 인 셈 인거죠.
어차피 대학은 포기한 터이고.. 대학가려고 공부 한것도 아니기에...
졸업식엔 우리는 아무도 안갔습니다.
대표로 준수만 갔다 왔죠,
농장대표로 말입니다.
농장에 불이 났어도, 아무도 말하지 도, 보고도 없었는데..
졸업장도 우리 농장학생에게는 .. 커다란 의미도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삐풀린 망아지 같은 ,,그런 생활이라고나 할까??
뭐<<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지냈습니다. ㅋㅋㅋㅋ
그럴 즈음 .난 재록이 동생 재철이 에게 기타를 배우게 됩니다.
난 .기타를 금방 배우게 됩니다.
먼저 말했듯이 음악은 타고 났다고나 할까요??
인기 끝내 줬지요.ㅋㅋㅋ
울 과수원은 밤이면 언제나 여학생들로 넘쳐 났습니다!!
옵빠~~기타 갈껴!!달라고~~ㅋㅋㅋ
여기까지가 1부..2부.3부는 계속 있습니다..현책속에서는 군대 자대배치 빋았고요~~ㅋㅋ재미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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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련한 옛 추억이네요
오늘하루도
님이 내려놓으신 글 한참을 읽어 내려갔네요 ....
아유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
남은오후 더
옛 추억을 소설화 하셨네요
잘 보구 갑니다
동변상련
그시절 똑같은 경험 많이 하였지요.
긴글 올리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글..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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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글이 너무 많아서 다 읽으려면 시간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로 나눠서
참 정성들여 쓰셨는데, 1부, 2부 이런식으로 제목을 붙여서 날짜
쓰시면 좋겠다는 생각....그리고, 여기에만 올리지 말고,책으로 아예 자서전을 남기면 좋겠지요...
57년새미니같은시대를살아 매사에 동감이고 추억이되살아나는군요 멋진삶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