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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0 삶의 길목에서
 
 
 
카페 게시글
◆삶의 길목에서 남산에서 날 부르다
심마니 닉 추천 0 조회 130 24.12.15 11:58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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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12.15 12:14

    첫댓글 나도 1980년에 남산에 간적이 있지요.
    업무적으로 갔는데 정식으로 초대받고 갔으니
    공포감은 없었으나 그래도 의시시 하더군요.
    정문에서 출입증을 받고 안내원이 따로 나와
    인도를 하더군요.

  • 24.12.15 12:58

    업무적으로 정식 초대를 받으셨지만
    으시시한 기분.
    이해합니다.

    군사독재의
    공포정치로 온 국민의
    숨줄을 틀어쥐던 시기였으니까요.

  • 24.12.15 12:51

    제 청춘시절.
    동아일보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여고 3학년 때였던가?
    2학년 때였던가
    장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신 정부의 압력으로 기업이 광고를 내지 않았을 때
    동생과 용돈 모은 것을 털어
    동아일보 힘 내라고, 시랑한다고
    짧은 광고도 실었는데.....

    왜 조중동으로
    보수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전향했는지
    이유를 잘 몰랐거나,
    당시엔 알았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척 궁금합니다.

    언제 그 이유를 들려주셔요.

  • 24.12.15 12:56

    노태우 대통령으로 하여금
    결국
    온 국민을,
    특히 대학교수까지도
    길거리로 나오게 만들어
    6.29선언으로
    정부를 항복하게 했던 사건.

    서울대 박종철 청년의 죽음.

    물태우 대통령과
    경찰 고문을
    물고문으로 형상화한
    선생님의 만화.

    정부가 가만 두지 않았겠습니다.

    그 시절.
    저런 만화를 싣게 하신 편집장님도
    대단하시네요.

    때론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국민들처럼
    시류에 적당히 타햡하시기도 하지만
    선생님도 이 땅의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문화계의 민주투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 24.12.15 15:21

    고문 기술자 이근한 경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김근태 도 고문을 하였고
    고문 사단의 총수가 박 ㅊㅊ가 이근한을 도피 시키고 도피 자금을 주었습니다.

    고문에 대해 저도 좀 알고 있습니다.
    변기에 물고문을 할 때는 2 인 1조가 정상입니다.
    박종철은 4 인 일조 였습니다.
    3 명이 붙잡고 한 명이 머리를 변기에 넣으니 쇼크 질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이도 버틸 여유도 주어야 합니다.

  • 24.12.15 18:31

    저는 괸계 하나도 없는데
    눈물만 엄청 흘렸어요
    집이 용산 이었는데 대학가였거든요

  • 24.12.16 00:47

    에고고
    그래서요?
    어떡해 됐어요?
    그다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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