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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건설 사람들에게 접대를 하겠다는 변강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난감하게도 저녁 식사비용마저 동해건설의 오주영이 계산을 했다.
경포대에서 만났던 과장이나 대리와는 달리 부장인 그녀는 '빌트밥'에 대해 시큰둥했다.
변강호는 커다란 벽을 마주하고 앉아 밥을 먹은 기분이었다.
빌트밥에 대해 침이 튀도록 설명했지만 오주영은 건성으로 들었다
그들과 헤어진 다음날부터 변강호는 오주영에 대한 정보를 먼저 파악하기 시작했다.
동해 건설의 오주영 부장은 동해건설 상무이사의 고명딸로 프랑스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한
수재였다. 오주영은 미혼이며 매사 꼼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 살며 일주일의 절반은 강릉에서 절반은 서울에서 지냈다.
술을 싫어하고 운동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녀에게서 결재가 떨어지면 사실상 동해 건설에서 결재가 떨어진 거랑 다르지 않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도통 그녀와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밥솥을 뭐 하러 빌트인해?'
'밥솥은 밥솥다워야지.'
변강호가 찾아다닌 다른 업체들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해 건설에 납품 한다.'
임달호와 이소정, 고길수도 나름대로 건설 업체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천 지사는 빌트인 밥솥을 팔기 위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변강호는 가람 건설 담당자와 통화를 끝낸 후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일주일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사무실을 둘러보던 변강호의 눈에 넋을 놓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임달호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임달호는 요즘 좋아하던 맞고도 안치고
매사 의욕이 없어 보였다.
지사장인 변정아가 사무실에 들어와도 눈치를 못 챌 정도였다.
변강호는 넋 놓고 앉아 있던 임달호를 훔쳐보며 휴게실로 향했다.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막 담배를 꺼내 무는데 임달호가 휴게실로 들어섰다.
"변 대리 시간 있어?"
"또 출장가라고요?"
그는 흥분한 사람처럼 얼굴이 발그스름하면서도 걱정이 있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임달호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더니 이내 담배를 꺼내 물곤 한참을 망설였다.
"부장님 혹시 무슨 고민 있으세요?"
"그, 그게 저…."
임달호가 뜸을 들였다.
"혹시 여자 문젭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전문인데."
"아니, 변대리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변강호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임달호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뭐야, 정말인가 보네! 소심한 공처가께서 여자문제로 고민이 있다…?'
변강호는 임달호보다 더 놀랐다.
임달호는 속이 타는지 줄담배를 피웠다.
"진짜 여자 문제예요? 혹시 사모님께서 바람이라도…."
"그런 거 아냐."
임달호는 입을 달싹거렸다.
"소장님, 그러지 말고 확 꺼내 봐요. 소장님하고 저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야 되겠어요?
사모님 취향에서부터 소장님네 집 밥숟가락 수도 다 아는 사인데."
임달호가 여자문제로 고민을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변강호가 은근한 어조로 그를 달랬다.
"그렇지? 우리끼린데….
그리고 자네라면 날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하구."
시간이 지날수록 임달호의 표정이 진지했다. 얼굴만 봐서는 제법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 듯했다.
그래도 천하의 공처가께서 섣불리 외도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지 요즘 들어 부쩍 넋 놓고 지내시더라. 게다가 혼자서 잘 웃기도 하고."
"내가 그랬나?"
임달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실은 내가 말이야…. 만나는 여자가 있어."
임달호는 담배 연기를 푸푸 뿜어내며 말했다.
"아,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가려구 이러나. 우리 소장님 같은 분까지 바람을 피우시다니…."
변강호는 분위기를 편하게 해 주려고 일부러 깝죽거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임달호가 바람을 피운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아내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놀리지 마…. 난 요즘 인생을 다시 사는 것 같단 말이야.
마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자네가 아나?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지 몰라. 정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임달호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참 나, 도대체 어떤 여자가 착한 우리 소장님을 이렇게 만드신 거죠?"…
"변 대리, 말은 그렇게 해도 나 이해할 수 있지?" "너무 깊이 빠지면 안 좋은데…."
"난 이미 늪에 빠져버렸어.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구….
우린 서로 너무 사랑하고 있어."
"음, 정말 심각하군요.
그러시니까 어떤 여자인지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안 그래도 지금 그녀가 친구와 함께 이천에 와 있대. 지금 당장 만나자는데…
변 대리에게 그녀를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어."
변강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신 분인지는 알고 가야죠."
"나 대구에 혼자 내려가 있을 때… 너무 심심해서 허구헌 날 맞고를 쳤거든. 그때 맞고 치다가
우연히 채팅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 말이 잘 통하는 거야.
그래서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한 건데…."
"참 나, 소장님 맞고의 달인이라는 소리 들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모두들 퇴근하고 난 뒤, 두 사람은 이천 변두리의 한 야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공장 직원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이강재 패거리가 경찰에게 끌려가자 속 모르는 직원들은 변강호에게 박수를 보냈다.
변강호는 쑥스러웠다. 회사 생활하면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동네 양아치들이라 다시는 안 올 겁니다. 일들 하세요."
변강호는 다소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변강호를 무시하는 것 같던 신정하의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반면 백두산의 얼굴은 어두웠다.
"변 대리님, 원래 3류 양아치들이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차라리 일류 건달들이라면 깨끗이 물러나지만 저 놈들은 안 그래요. 돈을 갚지 않는 한 다시 올 겁니다."
변강호는 더럭 겁이 났다. 이강재 패거리들이야 며칠 구류를 살면 다 나올 터였다.
그땐 이 공장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생활할 변강호한테 까지 괜한 불똥이 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변강호는 골이 쑤시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영웅 흉내 내려다 괜한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공장장실로 들어온 변강호는 앞뒤를 계산하지 않고 나선 자신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신정하가 당하기 일보 직전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돌아온 백두산이 공장 안내를 시작했다.
일단 회사 일을 처리한 후 이강재 문제를 고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이천 공장에는 40명 남짓 되던 인원이 17명만 남고 감축된 상황이었다.
직원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처져 있었다. 변강호는 수첩에 사기 진작을 위한 야유회 등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밥통과 청소기를 찍어내는 기계들도 약간씩 이상이 있었다.
신정하는 변강호의 곁에 찰싹 붙어 다니며 공장장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 대일 밥통이지만 디자인도 영 꽝이고 조잡하네요."
신정하는 변강호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귀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런 와중에도 변강호는 뒷골이 짜릿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이천으로 내려올 때완 달리 갑작스레 친근하게 굴었다.
하지만 변강호는 그녀에 대한 욕망보다 이강재 패거리를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변강호가 엉뚱한 생각을 하건 말건 신정하는 변강호에게 바짝 달라붙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전 사실 우리 회사 밥통은 여기 와서 처음 봤어요."
그건 변강호도 마찬가지였다. 투자를 안 한 결과가 역력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창고에 있는 재고량이었다.
서류상 밥통의 재고는 1만 개인데 반해 공장 창고에는 고작 2천개가 전부였으며 청소기의 경우는
더 심해서 서류상 재고는 2만개가 넘는데 실제 재고는 3천개에 불과했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공장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원단이나 의류도 가끔 서류와 실재고 상에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건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누군가 노골적으로 빼먹었다는 말이었다.
변강호는 그때 문득 이천에 살고 있는, 해병 특수수색대 동기 방대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도 없이 절친했던 동기였다. 변강호의 노력으로 보급품도 남들보다
세, 네 배는 더 타먹게 해주었고 담배도 넉넉하게 태울 수 있게 서류를 조작해 주곤 했다.
휴가 또한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 그를 자주 내보내 주었던 일이 있었다.
변강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미스예요?"
변강호는 운전을 하며 물었다.
"미스는 무슨, 유부녀야."
변강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 일 나가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고스톱을 치거나
채팅을 하고 그도 아니면 인터넷 쇼핑이나 하는 그저 그런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임달호가 입을 열었다.
"변 대리, 첫 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자넨 모르지?"
변강호는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그녀처럼 우아하고 세련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임달호의 눈이 꿈을 꾸는 듯했다.
변강호는 얼마 전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꽃뱀이 떠올랐다.
"소장님,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지 모르시죠? 조심하셔야 돼요.
저도 한 달 전에 꽃뱀한테 한번 당했거든요."
"변대리가 생각하는 그저 그런 여자 아냐."
임달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상태가 심각했다.
변강호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변강호는 임달호가 말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차를 주차시켰다.
변강호와 임달호가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뒤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더 들어왔다.
"사장님, 그 동안에는 별 다른 변동 사항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작은 사모님과 변강호가
만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화 통화도 그 후로 없었구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변강호의 뒤를 미행하던 이강재가 양동탁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이강재는 오늘로써 변강호 뒤를 밟는 일을 수하에게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 변강호와 마무리 지을 일이 있었다.
이천 공장에서 당한 수모를 한번은 갚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변강호란 녀석은 보면 볼수록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별 매력도 없어 보이는데 주위에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의외의 장소에 나타나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그랬다.
이강재는 똘마니를 대기시켜놓은 후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사방을 둘러보던 이강재는 변강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가려다 순간 멈칫했다.
변강호 앞에 앉아 있는 여자들 중 한 여자가 무척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많이 본 여잔데….'
이강재는 슬슬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여자를 훔쳐봤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이강재는 깜작 놀라 곧바로 등을 돌려 레스토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니, 저 새끼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강재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창 쪽으로 가서 변강호를 살폈다.
이강재와 눈이 마주칠 뻔한 여자는 다름 아니라 양동탁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매일 술에 절어 양동탁을 향해 술잔을 내던지던 그녀가 왜 변강호와 함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동탁의 정부인 나정희가 변강호와 얽혀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된 미행이 이상하게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강재는 이 사실을 양동탁에게 보고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이강재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네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이강재는 다시 그들을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그들은 온천으로 향했다.
이강재는 똘마니를 온천으로 들여보냈다.
"형님, 년 놈들이 수영복 입고 노천 온천을 하고 있습니다.
방은 두 개를 잡았는데 여자들끼리 쓰진 않겠죠."
이강재는 어쩔 수 없이 양동탁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변강호 그 새끼가 숙희하고도 연관이 있단 말이야?"
양동탁이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양동탁이 입을 열었다.
"네 사람 같이 있는 사진 한 장만 찍어. 그리고 돌아와."
이강재는 똘마니를 시켜 수영복 차림의 네 사람을 찍은 후 온천을 떠났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네 사람은 수영복 차림의 상대들을 쳐다보며 흥겨워하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숙희씨랑 지금 나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이 양반이, 쇼팽까지…. 얌전한 줄 알았는데 선수 아냐?'
변강호는 마냥 웃고 있는 임달호를 슬쩍 쳐다봤다.
가로등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임 소장님이 쇼팽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전 눈물이 다 났었어요.
제 주변엔 쇼팽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천지거든요."
그 말을 하는 숙희의 눈이 촉촉해보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변강호는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쯤에서 임달호를 말려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흘러가는 감정을 막기에 숙희는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유유상종이라고 그녀의 친구인 선영 역시 바늘로 찌르면 터질 듯 훌륭한 몸과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숙희를 바라보는 임달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토록 생기 있는 그의 눈을 본 건 처음이었다.
뜨겁고 깊게 얽힌 두 사람의 눈빛을 보면서 그 두 사람은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녀들과는 다른 여유와 기품이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이었다.
변강호는 임달호가 새롭게 보였다.
'이 양반이 제대로 연애를 하고 있네.'
"변 대리님은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요?"
선영이 변강호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물었다.
따뜻한 물결이 변강호의 가슴 부근으로 밀려왔다.
희고 윤기 나는 풍성한 가슴이 변강호의 눈에 들어왔다.
"외로움이요?"
전 같으면 술로 풀거나 섹스로 달랜다고 말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죠."
선영이 피식 웃었다.
"외로움, 그걸 달래는 데 최고는 이성의 살 아닌가요?"
차분하게 깔리는 음성이 노골적이면서도 전혀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변강호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다 달라. 천 명의 여자가 있다면 천 개의 우주가 있는 거야.
단순한 남자들과는 천지차이지. 사랑하는 방식도 섹스하는 방식도 달라.
내가 가르쳐주는 방중술은 기본일 뿐,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대처를 해야 하는 거야.'
지난 번 박무달을 찾아갔을 때 그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을 쉽게 실감하게 만드는
여자들이 바로 숙희와 선영이었다. 지금껏 만난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자들이었다.
뻔히 외도를 하는 상황임에도 다른 사람의 눈을 전혀 꺼리지 않는 대범함까지 갖춘 여자들이었다.
변강호는 수영복으로 다 감추지 못해 옆으로 살짝 살이 비어져 나온 선영의 유방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반면 임달호는 숙희와 가깝게 붙어 앉아 손을 만지작거리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처럼 야외에 나온 부부처럼 두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이 올라가고 허벅지 위로 손이 스쳐지나갔다.
변강호의 파트너가 된 선영 역시 그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긴장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편했다.
변강호에겐 연상인 선영이었다. 연상이었던 하성애와는 달리 기대고 싶을 정도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여자들이었다.
'이거 내가 왜 이러지. 나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온천을 끝낸 네 사람은 가운만 걸친 채 미니바에 모였다. 웨이터가 안주와 양주를 가져왔다.
"알몸에 가운만 걸친 채 술 마시는 기분도 나쁘지 않네요. 기분도 묘하고."
"그러게."
두 여자는 솔직했다. 첫 인상이 좋아서인지 역시 천박하게 들리지 않았다.
"선영씨도 그런 말 할 줄 아세요?"
임달호는 선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이 사랑의 빛으로 윤기가 흘렀다.
"저는 사실 인간들을 몸부림치게 만드는 욕망 중에 가장 강한 게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은 너무 억압받아 왔어요."
말 함부로 꺼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숙희씨도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발그레한 얼굴로 임달호를 쳐다보는 숙희의 눈길도 따뜻했다.
변강호는 임달호만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변강호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서 자리를 마무리하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테이블 아래에서 가운을 들추고 손 하나가 변강호의 허벅지를 슬며시 만지며 안으로 들어왔다.
선영의 손이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지는 세상은 이제 지났죠.
여자들도 새로운 욕망을 즐길 자유가 있지 않나요?"
선영의 손이 점점 변강호의 중심으로 밀려들어왔다.
"맞아요. 우리나라 여자들 너무 억압 받으며 살아왔죠. 이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강호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임달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물컹, 뜨거운 손이 변강호의 물건을 잡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돌려 선영을 쳐다봤다.
대일 전자의 제조 공장이 생길 때부터 백두산은 이천 공장의 공장장이었다.
그는 내막을 훤히 알고 있을 텐데 묵묵부답이었다.
"밥통하고 청소기 영업 담당했던 팀장이 김기만 팀장이죠?
신정하씨 본사에 전화해 봐요. 그 양반하고 통화 좀 해야겠네요."
신정하가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명퇴했다네요."
변강호는 막막했다. 전략영업부의 앞날이 깜깜했다. 공장의 미래도 어둡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공장 직원들은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공장장님, 잘하면 제가 어떻게 그 놈들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드린다면 진실을 말해 줄 겁니까?"
"어떻게요? 변 대리님이 또 그 놈들 찾아가서 맞짱이라도 뜨실 건가요?
혼자서 해결이 되시겠어요?"
신정하는 신이 나서 물었다. 정말 철없는 여자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변강호는 방대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변 대리님 같은 화이트칼라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변강호는 내심 화가 났다.
"공장장님, 저 이래 뵈도 해병 특수수색대 출신이란 말입니다."
"어머, 그게 뭐예요? 싸움 무지 잘하는 부댄가요?"
"뭐, 그렇다고 봐야죠."
그래도 백두산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악으로 깡으로! 안 되면 될 때까지! 제가 제대한 부대 신조고 제 신조이기도 합니다."
변강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힘주어 말했다. 신정하는 엉뚱하게도 박수를 쳤다.
희극적인 두 남녀를 보던 공장장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변 대리님께서 안 도와주셔도 말씀 드리죠."
대일 전자의 밥통과 청소기의 재고량이 차이가 나는 건 유통을 책임진 사원들과
전결권을 가진 누군가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대일의 밥통과 청소기는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지방의 중형 독립 마트나 중소기업 전시장, 지방 노래 자랑 행사장, 장이 서는 시골 장터
등에나 납품되었다. 보통 100개를 납품하고 서류상으로는 50개만 납품한 걸로 기록했다.
나머지 50개는 영업사원이 챙기거나 그보다 윗선 누군가의 비자금으로 조성했던 것이다.
기강이 해이하자 너도 나도 제품을 납품하고 서류를 위조했다.
선심 쓰는 양 50개는 현금으로 받고 50개는 어음으로 받아 주기도 했다.
어음은 회사로 입고하고 현금은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동안 그렇게 일을 해도 들통이 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A업체에 납품한 물건 대금을 슬쩍하고 B업체에서 받은 돈으로 메우는
식으로 돌려막기를 하니 터지기 전에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변강호는 비로소 조금은 대일 전자가 망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그 피해는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한테 돌아갑니다."
본사에서 전략영업부를 급조한 건 어찌 보면 큰 탈 없이 잘 정리하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변강호는 이가 부서지도록 앙다물었다
첫댓글 즐독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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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돌려막기를 잘하면 망한다 ~~
중소기업 이였으면 망해도 벌써 망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