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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혼문의 제 17대 문주인 구정문은 이제 18대 문주가 될 차례인 제자의 모습
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어설 힘도 없는지 엉금엉금 기어서 동굴을 향해 가는 제자가, 존재하되 존
재하지 않는 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만상금쇄진이 가진 힘을 이기고 스스로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때가 언제 올 것인지를----.
모르긴 몰라도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가능해질
것이다.
이 안은 모든 것을 안과 밖으로 나누고 가두는 공간이었다. 가두지 못한 것
은 시간뿐인 이 장소는 하늘로도 땅속으로도 만상금쇄진의 힘이 작용하기에,
이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자신과 제자 단 둘뿐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것이 없는 대지와 공간 그리고 바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정적의 이
공간에서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난 지금 미쳐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여기 머물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인
가----?'
혼천문의 모든 무학을 극으로 익혀버린 구정문은 자신도 사부에게 이야기만
듣던 혼천경에 자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
꾸만 보게 되는 환각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의식은 환각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런 상황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고 몰아치는 무학 강의 속에 제자의 성취는 일
취월장하고 있지만 그래도 구정문이 보기에는 속도가 미흡했다. 좀 더 빨리 배
우지 않으면 안돼는 것이다.
구정문의 나이는 이제 백오십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제자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줄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구정문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나이에 제자를 들인 것이다. 제자를 구해서 혼천문의 대를
잊는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다.
사문이 규정한 혼천경에 들어서 죽음의 때조차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때가 죽음이 찾아올 때 보다 빨리 오지 않는 한, 제자에게 혼
천문의 무공을 다 가르치는 데에는 요원한 시간인 것이다.
'이제 수업의 형식을 바꿀 시간이 되었지---.'
백오십세의 노인 구정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두막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육과 뼈마디에서 움직일 때마다 절로 비명이 나올 정도로 고통이 찾아오는
상태였지만 소구는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책자들이 있다는 동굴을 향해 기어갔
다.
걸어갈 수 없으니 기어서라도 저 안에 들어가 피할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오
늘 같이 날마다 두들겨 맞는 일만 계속 벌어질 것이 뻔한 일이었다.
족히 수만권은 되어보이는 장서들이 줄지어 늘어선 책장 속에 가득 꽂혀 있
는 동굴 안을 보게 된 소구의 눈은 아픔이 아닌 다른 이유로 찡그려졌다.
책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거기에다 일정한 종류별로 구분이 된 상태로 놓
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다 책이라니---, 도대체 경공과 보법에 대한 책은 어디에 쳐 박혀 있
는 거지?"
현재의 사부에게서 도망칠 꿈을 꾸고 있는 소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경공
이었다. 한참을 서가를 뒤지던 끝에 한권의 책을 꺼내든 소구의 얼굴엔 실망이
드리워졌다.
"구파일방의 경공분석? 이런 건 사부한테서 도망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될
것 같은데---, 혼천문의 경공은 도대체 어디에---?"
책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소구는 밤새도록 책장을 뒤지고 소구가 원하던
책자를 손에 넣은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드디어 원하는 책을 꺼내 손에 쥘 수 있게 된 소구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손에 든 책을 쳐다보았다.
<혼천경- 경공편>
제목이 그렇게 써 있는 두툼한 책을 끝내 찾아낸 소구는 입이 찢어질 것 같
은 기쁨을 맛보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 순간----.
"소구야, 식사하자꾸나."
원수 같은 사부의 목소리가 소구의 귀를 때리는 것이다. 밤새 책을 찾느라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구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에 든 책을 쳐
다보다 다시 서가에 올려놓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미친 사
부의 구타가 또 시작될 것이다.
하루에 한알의 벽곡단, 그것이 이 사제의 하루 식사의 전부였다. 책장들이
늘어서 있는 동굴 바로 옆에 있는 동굴 안에는 수십개의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
고, 그 안에는 벽곡단이 수북히 들어가 밀봉되서 두 사람의 식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소구는 벽곡단이 지겨웠지만, 이나마라도 먹지 않으면 하루 종일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니 이 시간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식사가 끝나고 오두막의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바위에 사
부는 앉고 그 앞에 땅에 제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또 하루의 수업이 시작되었
다.
"물 속에 들어가서 음한지기를 흡수하는 일은 어느 정도 된 것 같구나."
"사부님의 덕택입니다."
소구는 속으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아부성 발언을 하고 있었
다. 한 대라도 덜 맞으려면 아부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 너도 고생했다. 일단은 어느 정도 몸의 문제가 해결 된 것 같으니 오늘부
터 초식에 대해 가르쳐주마."
잠시 말을 멈추고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를 바라보
며 구정문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확실히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졸기만 하던 제자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이다.
" 일단은 내 동작을 따라하면서 초식을---, 아니구나. 너 구파일방의 무공들
의 초식과 구결을 배우고, 소림사에서는 그 금강나한인지 금강존자인지 하는
중들에게서 초식의 운용을 배운게 있지?"
"조금 배운게 있습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소구는 자신이 과거에 배웠던 구파일방의 장문이나 장로들
이 찾아와 가르쳐 준 것과 금강존자들에게서 배운 권법과 보법 같은 것들을 사
부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은근히 많은 초식과 구결들을 배운 상태인 소구였
는지라 그것들을 모두 펼쳐보이는데 에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전에 배웠던 것을 모두 펼쳐 보인 후 소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
부 구정문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트집을 잡아 구타를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소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 미소짓는 사부의 모습을
----.
"허허, 제대로 배웠구나."
사부의 말을 들으면서 소구의 마음속에는 기쁨이라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
곳에서 와서 처음으로 사부에게 칭찬을 들은 것이다.
" 좋아, 다시 이리와 앉도록 하거라. 구결만 알면 웬만한 초식은 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마."
사부의 말은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이제 구타를 당할 시간인데 대신에 앉아
서 초식에 대한 설명을 한다고 하니 소구는 이 기적 같은 사태가 정말이지 믿
어지지 않았다.
"초식이란 것은 보다 효율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만
들어진 형 즉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본래 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라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동물이나 곤충들의 모습에서 그 강
한 부분을 따와서 사람의 몸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
소구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사부가 무서웠다. 질문 하나를 잘못했다가 이
좋은 분위기가 깨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 제자의 마음 상태를 읽은 구정문
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물어보도록 하거라."
"예, 사부님."
그저 그렇게 대답하고 사부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소구였다. 몸 속 깊이
침투한 사부의 무서움은 질문 할 것을 소구에게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동물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초식을 만들었다고
말했지?"
"예."
"그렇게 동물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들어진 무공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소림
오권이라 칭해지는 학권, 사권, 표권, 호권, 웅권 같은 것이 있지. 제자야, 너
는 소림사에 있었으니 그것을 배웠겠구나."
"아니오."
소구가 소림사에서 배운 권법은 나한권 단 하나뿐이었다.
" 그래---? 이제는 많이 고쳐졌다만 네 게으름으로 좋은 것을 배울 기회를
잃었구나."
소구의 생각에 동물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무공을 펼치던 소림사의 무공 교두
들의 실력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익히고 있던 무술들을 배울
생각도 안한 것이고---, 당시에는 잠이나 자는 게 속편한 일이었다.
구정문에게는 다른 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제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설래 설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자야, 넌 이해 할 수 없나보구나. 예를 들어 똑 같이 힘이 열인 사람이
맞붙어서 싸운다고 해보자. 그럼 누가 이기겠느냐?"
"모르죠, 결과는 하늘만이 알겠죠."
"후우--, 무공에는 사량발천근이라는 말이 있단다. 넉냥의 힘으로 천근의 힘
을 발휘한다는 의미이지."
"사량--발천근---?"
"그래 바로 초식이 가진 힘을 극으로 표현한 것이지."
"초식을 사용하면 천배의 힘을 더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구정문은 아직 어리기만 한 제자를 바라보며 그날은 하루종일 초식의 운용과
공격과 방어에 응용되는 방법 같은 것을 설명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되었
다.
그렇게 석양 무렵까지 지칠 줄 모르는 사부의 강론이 계속되고 소구는 다리
가 저려오고 있었지만 꾹 참고 사부의 강론이 끝나길 기다렸다.
해가 빨갛게 물든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사부의 입에서는 소구가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설명하마."
소구는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오늘은 맞지 않고 하루를 보낼 것이라는 생각
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걸 가르쳐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걸 배우게 되면 이 녀석의 마음
을 읽을 수 없게 될 터인데---.'
구정문은 마지막으로 혼천문의 내공심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이 엉뚱한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 할 때인 것이다.
"소구야, 너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본문의 무공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지
금부터 혼천문의 모든 무공의 근간이 되는 심법에 대해 설명할 것인 즉 잘 기
억 해 둬야 만 할 것이다."
"지금요?"
소구는 우거지상이 되어서 사부를 쳐다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이제 잠을 자
도 될 시간인줄 알고 좋아했던 소구는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지금. 혼천문의 내공에 대해 설명할테니 잘 듣도록 하거라. 네가 배
울 무공은 여섯가지이나 또한 서른 여섯 가지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맨 처음
혼천문을 연 여섯 분의 조사들께서 각기 한 방면의 무공에서는 하늘이라 불리
던 분들이었고, 그분들 여섯의 무공을 합쳐 하나의 하늘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 내 대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하나의 하늘로 만들지 못하였다. 대신에 여섯
개의 무공은 뒤섞였다. 여섯 개의 무공을 모두 익혀야만 혼천문의 무공은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한가지라도 배우지 않으면 여섯 개의 혼첨문
의 무공 모두가 죽어 있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혼천인 것이지."
소구는 새삼스레 사부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무공수련을 하게 될는지도---.'
그렇게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맞고 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소구였다.
"오늘 내가 너에게 첫 번째로 가르치려는 것은 혼천일원공이라 명명된 심결
이다. 태극은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삼재를 낳고 삼재는 사상을-----."
소구가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눈을 지긋이 감고 사부 구정문의 입에
서는 혼천일원공이라는 내공의 구결에 대해 설명을 계속했다.
" -- 그렇게 세상만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지만 혼천문의 무공은 거꾸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혼천문의
무공이다. 태극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이전의 상태를 혼천경이라 규
정하고 그 상태로 가는 것 그것이 혼천문이 추구하는 무도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사부 구정문은 입도 안 아픈지 지칠 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하는 가운데 해는
서산 너머로 훌쩍 넘어가고 사위가 어둠에 물들어가면서, 소구의 고질병은 발
작했다.
날이 저물면 바로 찾아오는 수마라는 이름의 고질병이-----.
한참 흥이 나서 혼천문의 내공에 대해 강론을 하던 구정문은 문득 입을 다물
고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구
정문의 마음속에서는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이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의 마음
속까지 보이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
서 혼천문에는 이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만상을 가두는 절대의 금진 만상금쇄
진이 둘러쳐져서 그 누구도 올 수 없는 이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 공간마저 없다면 혼천문의 역대문주들은
결코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구정문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공간
안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보는 능력으로 제자의 마음을 보게 된 구
정문은 허탈한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정문은 뒤로 돌아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제자를 가르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자면 안돼! 자면 맞는다! 소구야, 잠들면 안돼!'
졸고 있는 제자의 마음속에서는 그런 고함이 터지고 있었다.
사부 구정문의 몸이 오두막 안으로 사라지고 얼마 후 제자인 소구의 몸 역시
둥실 허공으로 떠올라 오두막 안으로 사라졌다.
허공섭물이라 불리는 무공의 기술을 사용해 제자를 침대에 눕힌 후 구정문은
오두막 안에 있는 의자에 앉은 다음 잠든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을 자는 일은 오늘로 마지막이니, 침상에서 잘 수 있게 해 줘야지. 내일
부터는 호수 속이 네가 밤을 보내는 장소가 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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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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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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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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