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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칼럼] 뉴딜체제 금가며 레이건·공화당 치고 올라와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미국의 민주당은 진보정당일까? 1930년대의 뉴딜 이래 민주당은 ‘리버럴(liberals)’이라 불리면서 미국 진보의 중추임을 자임해왔다. 그러나 1992년 클린턴 이래, 2008년 오바마, 그리고 지금의 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은 이도저도 아닌 이중적 정체성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클린턴은 IT 기반의 신경제로 성장을 이끌었으나 금융시장 자유화 조처로 2008년 금융공황과 세계적 경기침체(Great Recession)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즈음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는 문제의 원인을 고치는 금융개혁이 아니라 대증요법에 치중했고, 대외적으로는 공약과 달리 강경노선을 취해 정치적 배신자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바이든 정부는 그 뒤를 이어 전쟁중독에 빠진 미국의 민낯을 지금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우경화한 미국 정치판
흔히 미국의 정치판을 진보 민주당, 보수 공화당 식으로 구분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다. 지난 해 3월, 사회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는 미 의회의 이념성향 변화추세를 담은 자료를 발표한 바 있다. 그 내용 중에, 1971-72년부터 2021-22년까지 50년 간, 회기별 법안 투표기록을 기초로 의원들의 이념성향을 전수조사한 뒤, 매 회기별로 평균을 낸 도표가 있다. 상원은 짙은 색 선, 하원은 엷은 색 선으로 된 표가 보여주듯 두 선은 해가 지날수록 진보의 왼쪽(more liberal)에서 점차 보수의 오른쪽(more conservative)쪽으로 이동한다. 특히 80년대 이후 시작된 정치판 전체의 우경화는 9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더욱 빨라졌고, 이후 하나의 틀로 굳어졌다. 진보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정치 지형도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중도우파와 극우의 간극 정도다. 이 같은 변화의 본격적 출발점은 1980년이다. 민주당은 그해 레이건부터 시작, 80년대 내내 공화당에 정치적 패배를 겪는다. 사실 그에 앞선 68년 닉슨부터 88년 아버지 부시까지 20년 동안 민주당은 76년 카터를 제외한 6차례의 대선에서 모두 졌다. 연이은 패배 속에서 당은 새로운 노선과 좌표를 찾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당은 드디어 정치인 클린턴과 ‘제3의 길(Third way)’이라 불리는 새 길을 찾았다. 그러나 그 길은 새 길이 아니라 레이건 신자유주의의 민주당 버전(Democratic neo-liberalism)이었다. 그를 통해 선거에서 일부 승리하기도 했으나 승리는 짧았고, 빈부격차, 인종문제, 정당 간 대립, 지지층의 불신과 반목은 더 심해졌다.
민주당 노선 전환의 구체적 경과와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먼저 80년대 전개된 정치적 변동의 거시적 배경과 맥락을 짚어보자.
당선자 레이건의 타임지 표지. 오른쪽은 레이건 승리의 선거결과를 표시한 지도. 붉은 색이 레이건, 파란색은 카터를 지지한 주.
레이건 혁명
1980년은 미국 사회 전반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그해 11월, 대선과 총선에서 공화당 후보 레이건, 일반투표에서 51퍼센트의 지지율. 850만여 표 차이. 선거인단 538명 중 489명 지지로 압도적 승리. 민주당의 카터는 조지아, 미네소타, 로드아일랜드,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 하와이 등 6개 주, 고작 49명. 상원에서는 1952년 이래 27년 만에 공화당의 다수당 승리. 하원에서는, 다수당이 되지는 못했지만, 같은 기간 동안 가장 큰 승리. 큰 틀에서 보면 이는 뉴딜 이후 그 시점까지 민주당이 겪은 가장 큰 패배다. 1984년 공화당은 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은 미네소타 주 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 49개 주를 석권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레이건을 ‘위험한 극우 정치인’이라고 몰아세웠던 민주당은 물론 진보개혁 진영은 낙담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미래를 우려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뉴딜은 어제를 기해 사망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주식시장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카터는 대공황 때 후버보다 낮은 표를 얻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카터 낙선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두 자리로 치솟은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계속되는 석유 위기, 대출 이자율 상승,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태 등이었다. 경제와 외교 분야에서 방파제가 무너진 듯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가 나서더라도 민주당의 승리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레이건 당선의 의미를 두고, 뉴딜에 버금가는 ‘레이건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이 바뀐다거나 의회나 주지사 선거에서 우세한 성과를 냈다거나 하는 현실 권력의 재배치 정도를 넘는다는 것이다. 즉,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이 나름의 이론적 틀과 정책 프로그램을 갖추었으며(예: 조세, 복지, 사법정책, 냉전 문제에 대한 대안)—실현 가능성과 실제 성과와는 별개로—이후 전개되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확보했다는 뜻이다. 거시적으로 말하면, 케인즈주의를 요체로 하는 뉴딜 체제는 후퇴하고 신자유주의를 요체로 하는 보수 체제가 등장했고, 민주당도 그 자장 안에 묶여버린 것이다. 레이건의 당선을 두고 ‘뉴딜의 사망’이라고 평한 것은 그런 차원의 탄식이다. 이후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보수의 이데올로기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미국을 좌우하는 지배적 사조가 되었다.
뉴딜이라는 기둥
레이건 혁명 이전까지 미국은 뉴딜의 사회였다. 뉴딜은 1932년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 후보가 대선공약을 집약해 내세운 구호지만, 정치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1970년대 중후반까지 대략 50여 년간, 미국 사회를 경영하는 기본 원칙이자 구조로 작동했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나, 60년대 후반~70년대 초·중반 닉슨-포드 행정부 역시 공화당이었지만 뉴딜의 기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뉴딜체제는 한마디로 미국식 복지국가의 틀이다. 핵심은 정부 역할과 위상의 대폭적 전환이며, 그래서 ‘새로운 판’, 즉 뉴딜이다. 이전의 자유방임적 최소주의 정부와 달리, 재정지출을 통한 사회기반시설 확충, 강한 누진세 제도를 통한 소득의 재분배 정책, 사회보장제도의 구축,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조합 위상 확립 등,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통해 보다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핵심 임무임을 분명히 했다. 금융규제의 틀(예: 일반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영역 분리 및 규제방식 구분), 노동자 권익 보호(예: 최저임금제, 단결권, 단체교섭 및 행동권 보장), 사회안전망 구축(예: 국민연금제, 실업보험, 의료보험)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운용하고 감독하는 주체로 정부가 나선 것이다.
한편 정치적 차원에서 뉴딜은 민주당이 진보개혁 정당의 위상을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그 이전까지 민주당은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인종차별-백인종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뉴딜과 2차 대전을 통과하면서 민주당은 북부, 도시, 노동자 계층,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흑인들까지로 지지기반을 확장하게 된다. 흑인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층이었다. 공화당이 노예해방의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폭넓은 지지층 확산에 힘입어 민주당은 뉴딜을 뛰어넘는 뉴딜을 추진하고자 했고 그 주체는 1960년대의 케네디와 존슨 정부였다. 존슨이 내건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들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 각종 민권 및 참정권 법안, 인종차별 관행과 제도의 철폐, 빈곤 혁파, 소득의 재분배 정책 등을 통해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뉴딜의 민주당‘을 ’미국의 노동당‘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다.
뉴딜을 통해 미국은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하고 국민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2차 대전에서 압도적 성공을 거두며 전후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적 리더 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을 포함해, ‘자본주의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경제적 풍요의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뉴딜은 1980년까지 50여년의 민주당 주도시대를 연 주춧돌이었다.
‘나라가 망가져버렸어‘라고 쓴 잡지 MAD의 1971년 4월 표지. MAD는 1952년 창간된 격월간 풍자 코미디 잡지. 특히 젊은 세대에 큰 인기를 누렸고 1970년대 초반에는 200만 구독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장.
거대한 도전에 흔들리는 민주당
그러나 풍요로운 사회 미국은 60~70년대 큰 혼돈에 빠진다. 견고한 뉴딜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과 뉴레프트 운동은 60년대의 혼돈, 석유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은 70년대의 혼돈을 대표한다. 여기에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같은 해 6월 상원의원 R. 케네디 암살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이 더해진다. 74년에는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대통령 닉슨의 탄핵 시도와 사퇴사태가 벌어진다. 정치적 혼돈의 극치에 가까웠다.
베트남 전쟁은 명분도 거짓이었고, 추악한 미군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미국의 도덕적 정당성이 무너졌다. 지지부진한 전쟁, 늘어나는 전사자, 대대적 반전평화 운동의 와중에서 미국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었으나 전쟁은 결국 1975년 치욕적 패배로 끝났다. 한편, 석유위기의 직접적 계기는 1973년 10월의 이집트·시리아-이스라엘 전쟁이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아랍 산유국들은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이스라엘 지지국가들을 대상으로 유가인상과 수출금지 조처를 단행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은 1968년 20세기 최초로 무역적자를 기록하면서 물가상승, 달러가치 하락 사태에 직면한다. 미국은 결국 71년 달러-금 태환을 정지한다. 석유위기는 거기에 더해 유가폭등 사태를 낳았으며,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투자와 소비의 위축, 실업증가 등의 경제위기를 한층 덧씌운다. 미국이 흔들리고 세계정치와 경제가 흔들렸다.
같은 기간, 노동운동 중심으로 전개됐던 미국의 사회운동은 이제 뉴레프트와 반문화 운동으로 진화하면서, 뉴딜적 진보보다 전에 없던 새로운 급진적 주장들—여성, 환경, 성 소수자 문제, 반전평화, 제3세계 지원, 제국 미국에 대한 비판, 성해방, 포스트모던 문화 등—을 담아낸다. 다양한 주장과 이슈에 기초한 각각 다른 내용과 형식의 투쟁이 전개되면서 세대와 인종, 지역과 계급, 이념 사이의 간극과 분열은 더욱 심해진다. 보수성향의 기성세대는 진보적 사회운동과 그들의 행태를 이해하지 못했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주당과 진보세력도 갈라진다. 이미 존재하던 반공 리버럴과 온건 리버럴 간의 균열에 더해 뉴레프트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가 또 다른 분열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국내외적 범위에서 전개되는 정치, 경제, 사회적 혼돈은 거대한 도전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국내적으로는 뉴딜체제에 금이 가고 있었다. 도전의 기세는 나아가 기존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미국이라는 국가의 위기로까지 치닫는 듯했다. 혼돈 속의 미국민들은 이정표를 찾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뉴딜체제의 주도세력인 민주당은 아무런 비전을 내놓지 못했다. 그 빈자리로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레이건과 공화당이 치고 올라섰다. 레이건은 민주당과 미국의 진보세력을 향해 문제해결 능력이 고갈된 집단, 전통과 도덕을 외면하는 방탕한 집단이라는 식의 맹공을 퍼부었다. 선거는 물론 여론과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민주당은 수세에 몰렸다. 그제야 비로소 민주당은 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경과와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출처 : 신자유주의 앞에서 길 잃은 미국 민주당 이야기 ①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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