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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장진호 이후에 참전한 한 해병의 수기인데, 본인이 촬영한 생생한 사진들이 매우 많다. 본글의 사진은 모두 글쓴이의 앨범이다.
Harold John Sydnam Jr.
[이 내용은 시드냄의 개인 자서전 "The Fortunate Years"와 인터뷰를 같이 구성한 것이다.]
[입대 전]
내 이름은 해롤드 존 시드냄 주니어이고 현재 아내와 캐나다브리티시 콜롬비아에 살고 있다. 태어난 곳은 오리건으로 생일은 1927년 7월 28일이다. 밑으로 남동생 네 명이 있다.
난 대공황기에 자랐으나 아버지는 항상 직업이 있었다. 먹는것과 입는 것이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굶지도않았다. 난 올바른 성품으로 자랐고 아버지는 낚시와 사냥을 가르쳐 주시는 좋은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1차대전에 육군으로 참전했으나 종전 부근이었고 집안에 2차대전 참전자는 없다.
2차대전 후반부에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혈전이 소개되었고 난 1945년 2월 해병대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그 계약서에는 ‘만약국가가 비상상황에서 6개월을 더 복무연장 시킬 수 있다’는 문구가 있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독립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Boot Camp]
난 1945년 6월 예비군에서 현역 해병으로 전환했다. 훈련을 받으러샌디에고 보충대로 가서 신고했다. 48훈련소대로 들어갔고 DI는 과달카날에서 싸우다 다친 부사관이었다. 그 밑의 후임 조교는 일병으로 주먹을 날리고 발로 차고 훈련소에서 악명이 높았다. 훈련은 8주로 기억한다. 훈련은 ‘전투상황’ 그 자체로 수행되었다. 힘들었지만 이제 내가 해병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세뇌였다. 난 해병으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1950년 10월 캠프 펜들톤. 한국으로 가기 전의 집체교육.
[China Adventures]
처음 받은 자대는 캘리포니아 해병항공단 어이없게 PX 행정병이었다. 그리고 곧 일본의 도시 두 곳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후 헌병임무를 잠시 했다. 그러다가 1946년 1월에 난 중국으로 가는 그룹에 끼게 된다. 해군함정 워케샤를 타고 3월 2일 도착한 곳은 중국 칭타오였다. 거기 탄진의 우리 항공단이 있었다. 이때 우린 일본군 포로 수용과 관리도 수행했는데, 이미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난 이병으로 역시 행정병으로 했고 장교/사병식당 음식도 관리했다. 5월에 우리 주둔지로 일본군 포로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대기하면서 심문을 받고 일본으로 보내졌다. 4월에 일병으로 진급했다. 이때 소총으로 무장한 중국 산적들이 미군 병사를 무작위로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휴가로 궁과 만리장성도 구경했고, 항공단에서는 국민당 조종사들을 P-51 머스탱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휴가를 받아도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도시가 있었고 금지된 곳도 있었다.
결국 9월 1일에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게 된다. 중국에 대한 생각은 복잡한 모험 같았다. 난 중국을 사랑했고 내가 만난 중국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모택동의 군대는 진지하고 사나웠던 반면 장개석의 군대는 군기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난 수송기를 타고 오끼나와로 갔고 괌과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8월 22일 샌디에고에서 제대했다.
이후 몇 달 동안은 혼란스러웠다. 일을 찾다가 전화통신선을 수리하는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47년 가을에 워싱턴 서부교육대학에 등록했다. 그런데 대학에 해병대 모병관이 오더니 해병 소대장반[Platoon Leaders Class (PLC)]을 모병했다. 두 학기 여름방학 동안 콴티고에서 훈련을 받으면 소위로 임관한다는 거였고 나에게는 좋게 들렸다. 해병대에서 장교는 신이다. 결국 내가 통과되어 소대장반 입교가 이뤄졌다.
난 워싱턴 대학의 기계공학으로 가을학기에 등록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신문에 기사가 났다. [All MarineReservists Frozen : 모든 해병대 예비역 징집 대기] 나도 가까운 모병소에 가서 물어보니 현역전환 대상자였다. 내 발령지는 캘리포니아 캠프 펜들톤이었다. 이때 난 아주 품질이 좋은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들어갔다.
1950년 10월 11일 낮 12시 30분, 캠프 펜들톤에 들어가 고등보병훈련과정에 들어갔다. 풍문에 우리 목적지는 1.한국 2.일본 3.인도-차이나로 돌았다. 캠프 펜들톤은 정말 난리가 났다. 훈련은 11주. 훈련은엄청나게 강력했다.
[한국으로]
1950년 12월 20일 우린 수송기를 타고 미국을 떠났고 12월 13일 오후도쿄에 도착했다. 트럭을 타고 일본 Otsu의 기지로 갔다. 거기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일본 오추에서 한국으로 출발하는 장면...
한국의 냄새는 일본과 중국과 비슷했고 특별한 첫인상은 없었다. 나의 자대는 해병1사단 5연대 1대대 Baker Company 2소대 2분대 fire team leader였다. 부산에서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가서 부대로 들어갔다. 사단은 장진호에서 돌아온 직후였고 병사들은 모두 거칠고 술에 취해 있었다. 2주 후에 우린 포항으로 이동했다. 너무 추워서 있는 것은 모두 다 끼어 입었다. 나는 군장 품목 외에 35밀리 카메라와 여분의 필름을가지고 다녔다.
1950년 12월 31일 마산...
[포항 게릴라 소탕]
베이커 중대에 도착했을 때 ‘최선선’이란 없었다. 그냥 사방에 게릴라가 있었다. 1월 초반 15일 동안 우린 마산 일대에 정찰을 나갔고 이후 포항으로 일본군 LST를 타고 이동해 게릴라 소탕전을 시작했다. 이 게릴라 소탕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트럭 타고도 했지만 보통 걸어서 작전했다. 1월 말부터 3월 1일까지 소탕작전을 하고 그 다음 대구로 넘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전선’이 생겼다. 이 불규칙한 게릴라들은 북한인민군들이었다. 소탕작전은 부대에서 중대 규모까지 다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이때 난 과거 사냥을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젊은 사냥꾼이 됨을 의미했다. 카우보이과 인디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주시하라. 그냥 보지 말고. 주시하라!’
예를 들어 나무들이 보이는데 낙엽이 하나도 없고 가지만 앙상하다. 뭘까? 혹시 부러진 가지가 있는가? 나무에 새가 얼마나 있는가? 까마귀나 매가 있나? 거기 새들이 먹을 벌레나 유충이 있는가? 보이는 새가 처음 보는 새인가? 아니면 전에 보던 새인가? 작은 움직임이나 소리는 없는가? 당신이 사냥꾼 이라면 위의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만약 이상한 티를 내면 상대가 날죽인다. 이상한 점이 없나 관찰하면서 절대로 티를 내면 안 된다.
한국에 도착할 때 몸 상태는 아주 좋았다. 첫 교전에 대한 각별한 기억은 없다. 그냥 내 반응은 총을 들어 같이 쐈다. 한 작은 마을 가장자리를 지날 때였다. 다행히 첫 총알이 날아올 때 엄폐할 통나무 더미가 있었다. 오줌을 지리거나 공포를 느꼈던 기억은 없다. 사실 너무 지쳐서 공포를느낄 기운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포항 게릴라 소탕은 상당히 위험했지만 또한 매우 훌륭한 훈련이기도 했다. 난 내 밑의 세 명을 잘 이끌었고 함께 뭉쳐서 잘 했다.
포항 게릴라 평정작전 시절의 필자...
마산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 정찰에서 매복을 당했는데, 상대는 소총수 딱 한 명이었다. 그가 선도 차량에 대고 총을 쏘자 모두 차에서 뛰어나와 도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걸 그 한 명에게 다 쐈다. 적이 산으로 사라질 때까지.
난 처음에 M1을 들었고 몇 달 뒤에 카빈을 들었다가, 30-06 저격총도 잠시들었었다. 중대 첫 정찰을 나갔을 때 난 정말 과도한 실탄을 들고 나갔다.
51년 1월 28-29일, 우리 2분대와 3분대는 트럭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나갔다. 2분대는 거리 페리 병장과, 찰리 닐, 테트 스킬스, 로버츠, 유진 오베딩 등이 있었고, 3분대는 병장 한 명과 상병 두 명, 그리고 일병 7명이었다.
두 분대가 나간 곳은 군산동이란 곳으로 29일 3분대가 적에게 나포되었다.
적을 찾아 규모와 장비 등을 관측해 보고하라는 임무였다. 우린 한국 화폐‘원’도 꽤 받아서 먹을 것 등을 사라고 했었다. 두 분대는 트럭에서 내려 다른 방향으로 전개했다. 우리 분대가 간 곳은 적이 없었고 마을을 점거했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서 ‘심’씨 성을 가진 남한 경찰서장과 꽤 친해졌다. 찰스 닐 일병이 서장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우린 그날 한국돈으로 먹을 것도 조금 사고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런데 히디 병장이 뭔가 "bad feeling"이 있다며 다시 군장을 꾸리라 했고 우린 다시 군산동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섰다. 그런데 우리가 떠난 직후에 갑자기 우리 뒤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릴 추적하는 것 같았고 우린 응사 없이 안전지역을 향해 속보로 이동했다.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토마스 예센코 병장이 지휘하는 3분대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음을 알았고 부대는 작전이 중단되고 비상이 걸렸다. 히디 병장의 육감은 정확했고 우린 똑같이 되기 전에 점프해서 나왔다. 가끔 하이디 병장과 놀란(Nolan)소위는 어리둥절한 일을 시켰고 그래서 난 내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그걸 신뢰했다. 이는 어린 시절 농장에 살면서 사냥을 했던 때의 내 육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어려서 카우보이들과 인디언들과 같이 사냥을 했었다. 한국은 옷만바꿔 입었지 같은 거였다.
예센코 병장의 분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내 일기에 따르면 그들이 실종된 날은 1951년 1월 29일이다. 공식 날짜는 31일로 나온다. 아래는 내가 쓴 일기다.
“예센코 병장의 분대가 처한 운명은 정말 미스터리했다.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핸콕 중위는 예센코 병장의 능력을 아주 각별히 신뢰했다. 아주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 다한 것 같다. 그들은 그 ‘마을’을 안전지역 으로 간주한 것 같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끌려간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선가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웨스트 상병은 탈출을 시도하다 총검에 찔려 죽은 것 같다. 마을사람 둘이 손짓발짓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다른 분대원들은 구타로 사망한 후에 깊은 숲으로 들어가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한국경찰과 함께 병력이 출동했지만 찾지 못 했다.”
추모 : 토마스 예센코 병장. 더글라스 파인리 주니어 상병. 로이 웨스트 상병. 마이클 글루시쉬 상병. 도날드 돈넬 일병. 리 더쳐 일병. 알프레드 로렌스 주니어 일병. 찰스 멜볼드 일병. 조지 래 일병. 폴 워렌 일병.
1951년 2월. "적의 예광탄을 잘 주시해서 보라구..."
윗 사진 왼쪽이 필자의 첫 분대장 하이디 병장이다.
아래 사진의 왼쪽도 하이디 병장. 1951년 3월. 전장은 역시 나이가 아니라 짬밥 같다.
2월 6일, 한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실제로 적을 보며 전투를 했다. 그리고중대장 핸콕 중위가 7일 전사했고 아홉 명이 다쳐 후송됐다. 한 정찰에선 우리가 너무나도 지친 가운데 차가운 비가 내려 모두 비참하고 힘들었다. 옷과 몸에서 썩은 내가 나고 있었다.
이때 대대장 존 홉킨스 중령이 이 복귀행군에 지프를 타고 나와 우릴 맞았다. 내 동료 하나는 바지가 크게 찢어져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를 본 홉킨스 중령이 그 친구를 자기 옆 좌석에 앉혀 같이 타고가게 했다. 우리는 모두 대대장을 존경했다. 대대장은 곤란한 환경이 생기면 지프에 보급품을 싣고 직접 우릴 향해 온다. 그날 나는 여러 가지 이유 로 정말 그렇게 비참하고 힘겨운 날이 없었다.
정찰 중 휴식...
[The Enemy]
난 적의 나이나 군복 같은 걸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적은 정말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병기가 풍부했는데 1949년 미국이 국민당군에게 준 것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군대에 비해 무모할 정도로 생명까지 버렸다. 포로는 북한군보다 중공군을 더 많이 봤다. 또한 그들은 포로나 점령한 전장의 아군을 가차 없이 모두 죽였다.
포켓에 당원증 꼽은 사진이 꽤 많네요.
난 중공군을 북한군처럼 비난하지는 않는다. 북한군은 무장한 짐승과 다름 없다고 느껴졌다. 직접 본 일은 적었지만 횡성 학살의 계곡에서 보면 북한군은 주로 포로를 묶은 뒤에 총검으로 찔러 죽였고 중공군은 그래도 포로를 중시해서 다치지 않은 포로는 잡아서 잘 대우했다. 북한군이 덫을 만들어 예센코의 분대를 모두 죽인 것도 그렇다.
적은 보통 낮에 숨어 있다가 밤에 공격하거나 정찰을 나온다. 밤에는 탱크와 공중폭격이 없기 때문이다. (난 탱크를 소리만 한번 들었고 본 일은 없다) 그들은 탱크나 중화기도 없다. 우리가 조심하는 건 적의 소총, 기관총,박격포와 수류탄, 그리고 가끔 지뢰다. 적은 우리 해병대를 회피했다. (또한 터키군과 프랑스 외인부대 등도 피했다) 적은 주로 한국군과 미 육군의 약한 틈을 노린다. 우리 측면이 뚫리면 포위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적 전사자나 포로를 보면 그냥 텐트천으로 만든 아래 위 군복이 전부다. 거기에 목에 스카프를 하고 쌕 같은 등짐만 있다. 신발을 안 신은 적도 내가 찍은 사진에 보이고 장갑도 없다. 속에 셔츠가 없는 경우도 많고 그 위에 청색 전술조끼를 입는다. 머리에는 철모도 없이 그냥 천으로 된 모자다.
1951년 2월 횡성...
[트럭 사고]
2월에 우린 중대 규모 장거리 정찰을 위해 육군 후방지역에서 작전한 적이 있다. 정말 힘겨웠다. 휴식은 육군 텐트에서 했고 그들의 트럭을타고 이동하며 작전했다. 마산 북쪽의 산들이 많은 곳으로 우린 영천과 하회동에서 작전했다. 한국에 온지 6주. 2월 21일 트럭을 타고 좁고 굴곡이 많은 산길을 가다가 차를 돌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운전병은 차를 꺾어 돌리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바퀴가 도로 턱을 넘어가면서 추락했다. 소대 정도가 트럭에 타고 있었는데, 두 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다.
난 바로 앞 트럭에 있었는데 한 중상자가 "Shoot me!"라고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당시 우리는 추워 트럭 안에서는 침낭에 몸을 넣고 있었다. 완전히 운전병의 부주의라고 몰고 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터무니없는 사고에 우린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4월 중순 우리는 북진해 38선을 화천 부근에서 넘었다.
4월 15일 내가 집에 쓴 편지 내용이다:
“내가 이 부대에 왔을 때, 부대는 장진호에서 탈출한 직후였고, 난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사기도 오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부대를 떠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점차 부대에 대한 신뢰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훌륭한 병사와 장교들이 있고 난 이들과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우리 중대는 훌륭하고 그 일원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3월 초에 우리 분대는 야간정찰을 나갔고 중대급 정찰도 나갔다. 너무 컴컴해서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최대한 정숙을 유지하며 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과 지근거리에 만날 가능성이 높고 만나면 순간적으로 먼저 죽여야 한다. 중대급으로 한번 나갔다가 대열 앞이 적 거점을 만나 그 어둠 속에서 살기 위해 싸웠던 기억이 난다.
2소대원들....
[Operation Rugged]
공중지원은 정말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다. 해병대 전투기의 근접항공지원과 포격 지원은 정말 우수했다. Operation Killer에서는 보급품 공중투하도 있었다. 또한 전함 미조리가 함포지원을 해서 정말 대단했다. 미조리의 거리는 몰랐으나 포탄은 적에게 정확히 떨어졌고 우린 정말 유쾌했다! 11연대 포병도 좋았고 탱크도 쓸 만했다.
1951년 4월 10일, 내가 분대장이 된 가운데 분대원은 아래와 같다. 이름 뒤에 ‘*’ 표시가 된 것은 4월 23일 화천의 313고지 전투 때 북 한군과 싸우다 다친 병사들이다. ‘*’가 두 개인 병사는 전사자다.
분대장: 시드냄 병장
1st Fire team 팀장 - 비팅거 상병. 오하이오 * 소총수 - 오버딩 일병 BAR - 그릭스 일병. 와이오밍 BAR 부사수 - 햄맥 일병. 애리조나
2nd Fire team 팀장 - 스킬스 일병 ** 소총수 - 파이너런. 노스캐롤라이나 * BAR - 귀구에레 일병. 와이오밍 * Bar 부사수 - 마칭톤 일병 *
3rd Fire team 팀장 - 도르시 일병. 텍사스 소총수 - 하트 일병 BAR - 헤일러 일병 * BAR 부사수 - 그렉 일병. 노스캐롤라이나
날씨가 따뜻해지자 이제 롱존(올인원 긴 내복)을 입고는 참을수가 없어졌다.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군화와 바지는 벗고 의무병이 쓰는 가위로 오려내 벗어버렸다.
1951년 4월 23일, 화천...
[Hill 313]
313고지 (저런 고지를 어떻게 공격하나. 그냥 죽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보병은 위대하다.)
중공군은 4월 22-23일 춘계공세를 시작했고 7월 1일까지 우리 5연대 1대대 B중대에서는 총 15명이 전사하고 123명이 다쳤고 이 중 14명만 후송되지 않았다. 화기중대 출신 의무병과 포병관측장교는 이 숫자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2분대에서는 6개월 동안 전혀 안 다친 사람이 4-5명뿐이었고 총 29명이 다쳤고 그 중에는 부상 2-3회도 있었다. 그리고 두 명(테트 스킬스와 돈 로우)은 전사했다.
4월 23일 오후 늦게 우린 화천 북쪽에서 야간방어를 위한 참호를 파다, 소대장이 다시 이동한다고 해서 뒤로 돌아갔고, 화천호 배출구 근처의 북한강 제방의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대본부가 거기 있었다.
어두워졌을 때 도착한 곳이 나중에 알고 보니 313고지였다. 고지 정상에올라가 방어를 구성했고 구름이 잔뜩 끼어 구름 사이 구멍으로만 달빛이 비췄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깔려고 했으나 소대장 놀란 소위가 일단 완전한 정상까지 가야 한다고 해서 다시 올라가려고 했다. 그리고 정상 50미터를 남겨놓고 고함소리 하나가 모든 결 바꿨다. 통역관이소리쳤다. “Gooks!”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아군도 엄폐하여 어둠 속에서 응사를 시작했다. 우린 흩어져 있었고 상황 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경사는 가파랐고 나무는 별로 없었다. 적이 우리를 향해 수류탄들을 굴렸다. 내 분대는 봉우리 왼쪽(북쪽)에 있었으나 내가 길에서 가까웠기에 놀란 소대장 명령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긴 밤이 시작되었다. 우린 강력한 화력과 수류탄에 압도되어 꼼짝 못 했고, 적은 수류탄이 바닥나자 나무 박스까지 던졌다!
즉각 전상자가 생겼으나 다가가기가 불가능했다. 우린 적에게 완전히 눌렸고 포도스 일병의 도와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난 위치가 노출되니 더 이상 떠들지 말라고 소리쳤다. 일병은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으나 난 경상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지나 의무병 멜빈이 기어가 일병을 찾았는데, 나에게 전사했다고 알려왔다. 가슴에 기관총알을 재봉질처럼 맞았다고 한다.
나의 단짝 친구였던 테트 스킬스 일병(2nd fire team leader)도 맞았고 의무병이 스킬스에 다가가 밑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둘 다 전사한다. 내 왼쪽의 루스 비팅거 일병도 엉덩이에 맞았다. 잭 햄맥이 다가가 도와주면서 치료를 위해 후송이 필요한 상태라고 말했다. 비팅거는 치료하고 복귀가 가능한 부상이었다.
놀란 소위도 경상을 당했다. 당시 소대에 맥간 소위가 있었는데, 이는 소대장실습과 같은 임시 배치였고 4월 6일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소대는 7명이 전사하고 26명이 WIA로, 놀란 중위와 맥간 소위도 다친 상태에서 밤새 싸웠다. 이때 쓰러진 대원 상당수를 뒤로 끌어내지 못 했다.
여명이 터오자 적이 천천히 물러났고 우린 정상을 점령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대대장 홉킨스 중령은 탱크를 계곡으로 끌고 와 90밀리 주포로 정상에 포격을 때렸다. 그날의 전투로 놀란 소위는 은성훈장을 맥간 소위는 해군십자훈장을 받았고 둘 다 퍼플하트도 받았다.
탱크와 함께 38선을 돌파하는 장면....
난 테트 스킬스 / 빌리 하이디와 친했다. 빌리 하이디는 일본 요코수가 병원에서 치료를 끝낸 뒤에 새 소대선임하사로 나중에 돌아오게 된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기계공학 중에서 탄광탐사와 지형학을 공부하고 온 뒤라 땅을 팔때 여러 지식을 말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탄광 기계공학으로 학사를 받았음) 광석을 채취해서 하이디와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에 비해 스킬스의 상태는 중상이었다. 놀란 중위는 모든 소대원들의 신뢰를 듬뿍 받았다. 난 우리 연대에서 최고 소대 최고 분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4월 11일부로 해임되었는데, 이 어수선한 지휘관 교체시기를 중공군은 노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맥아더 해임으로 뭐 큰 변화 같은 건 없었다. 당시 우린 몰랐지만 중공군은 한국군 1개 사단을 완전히 돌파해버렸고 우리 해병사단을 포위할 의도가 있었다.
313고지 전투 후에 1-2분대 생존자들은 그냥 2분대로 통폐합되었다. 중공군은 당시 우리 섹터 내에 있던 영국군과 호주군을 돌파하며 엄청난 혈전을 치렀다.
1951년 4월 24일의 313고지와 아래는 적군의 시체... 뒤에도 한 구 보인다.
[장교들]
내 한국전 동안 난 중대장을 여덟 명이나 맞았고, 부중대장은 총 몇 명이었는지 아마 하느님만 알 것이다. 내가 있던 동안 소대장은 다섯 명을 맞았다. 아래는 그 시기의 장교들에 관한 내용이다. 코닌 중위는 핸콕 중위의 전사로 부임해왔다.
1951년 해병5연대 1대대 B중대 장교들
2월 15일 - 코닌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 3월 8일 - 잭 중위가 기관총소대장으로 부임 4월 6일 - 맥간 소위가 도착해 소대장 보조. 7차 보충병 4월 6일 - 피셔 소위 도착해 소대장으로 임명. 7차 보충병 4월 8일 - 잭 중위가 부중대장으로. 4월 11일 - 스튜 라이트 중위가 도착해 기관총소대장 부임 4월 12일 - 파라타스 중위 부대에서 빠짐 4월 14일 - 코닌 중위가 3월 30일 작전으로 은성훈장 4월 23일 - 맥간 소위 부상, 후송되지 않음 4월 29일 - 에이블스 중위. 전사 5월 7일 - 맥도날드 소위 부대에서 빠짐 5월 25일 - 쿠퍼 소위 도착. 8차 보충병 5월 28일 - 케리건 중위가 도착해 부중대장 부임 5월 28일 - 쿠퍼 소위 부상. 후송되지 않음 5월 29일 - 스튜 라이트 중위가 부중대장으로 5월 30일 - 맥건 소위 부상. 후송. 이후 다시 오지 않음 6월 6일 - 갤리 소위 / 페이건 소위 도착. 9차 보충병. 6월 7일 - 크로닌 중위 떠남. 6월 10일 - 케리건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 6월 10일 - 쿠퍼 & 갤리 소위의 주특기 변환 6월 11일 - 잭 소위가 부중대장으로 부임. 같은 날 부상으로 후송. 6월 16일 - 피셔 소위. 전사 6월 17일 - 쿠퍼 소위 / 페이건 소위 둘 다 부상. 둘 다 사라짐. 6월 17-21일 - 윌리 파니어와 내가 임시 소대장과 임시 부소대장 6월 21일 - 심프슨 중위, 베이커 중위 도착. 6월 24일 - 퀴글리 중위 도착. 6월 29일 - 케리건 중위 떠남 6월 30일 - 스튜 라이트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 6월 30일 - 심프슨 중위가 부중대장으로 7월 2일 - 퀴글리 중위 부대에서 빠짐 7월 11일 - 놀란 중위 떠남. 7월 12일 - 파파스중위가 부중대장으로 7월 22일 - 라이트 중위 부대에서 떠남
1월 20일 이전의 장교는 딱히 기억이 없다. 하비 놀란 소위는 내가 2분대 fireteam장을 할 때 소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놀란 소위는 머스탱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2차대전 당시 병사로 참전했던 사람이다. 그 역시 내가 들었던 소대장반 프로그램으로 소위가 되었는데, 나는 수료하지 못 했지만 놀란은 수료하고 대학을 졸업해 장교가 됐다.
[머스탱: 한국전에서 2차대전 참전자를 부르던 슬랭 중 하나. 보통 'salts'라고 불렀음.]
난 페리 병장이 3월 5일 귀국하면서 분대장이 됐다. 분대원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놀란 소위가 우리 분대를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분대가 매우 잘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불평은 못 했다.
소대장이었던 놀란이 중위로 진급했고 그러면서 새로 도착한 맥간 소위가 2소대장이 되었다. 놀란이 떠날 때 나에게 황금색 소위 계급장을 주면서 나에게 전장임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964년 난 알래스카 주방위군에서 임관해 결국 그 소위 계급장을 쓰게 됐다고 놀란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령 계급장 두 개를 보냈다.
중대장 중에 크로닌 중위가 인상 깊었다. 크로닌은 훌륭한 지휘관이었고 사람도 좋다. 부하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는데, 그건 그의 능력과 매너 때문이었다. 크로닌과 놀란 모두 4월에 중공군 공세에 싸웠던 장교다.
부대 통역관 오영복과, 아래는 부대에서 포로를 심문하는 사진...
1951년 2월, 산을 오르다 적의 가벼운 총격을 받고 잠시 휴식하는 장면...
[Tour Continues]
313고지 전투 후에 유엔군은 거의 다 남쪽으로 후퇴했다. 5월 26일 편지에서 보면 우린 38선 7마일 후방에 있었고 우린 10일 동안 해가 뜰 동안은 계속 행군했었다. 이 행군 동안 미 육군의 처참한 장면을 봤다. 침낭에서 혹은 손이 묶인 상태로 총검에 찔려 죽은 병사들을 매우 많이 목격했다. 불침번 없이 그냥 다 잠을 잔 모양이었다.
우린 중공군에게 물리기 전에 빠르게 남쪽으로 이동했다. 춘천 남쪽까지 갔는데 중공군이 계속 공격해 다시 후퇴했다. 주간에는 아군 항공기들이 그들을 저지했다. 이때는 밤에 참호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도 자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건 그냥 쐈다. 놀란 소위와 내가 방어선을 점검하러 돌아다닐 때 총에 맞을까 정말 위험했다. 어쩌다 자는 참호가 있으면 총기를 슬쩍 수거해갔다. 눈을 떴을 때 총 없이 밤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해 보면 안다.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당시 작은 에어 매트리스가 보급되어 유용하게 썼다. 병사들은 일종의 공포감으로 침낭의 지퍼를 완전히 잠그지 않았다. 나 역시 잘 때는 가슴에 대검과 수류탄을 놓고 잤으며 총을 바로 뺄 수 있도록 구멍을 침낭에 뚫었다.
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우리 소대가 한 능선에 들어갔는데 물이 없어서 정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choking mad with thirst”란 표현. 이때 계곡의 탱크부대 엄호를 위해 우리 분대가 내려갔을 때 작은 시냇물이 있었고 재빨리 물을 채웠다. 그렇게 모처럼 물을 먹고 참호를 팠는데 그날 밤 적의 75밀리 비반충포가 우리 탱크를 향해 사격했다. 쏘는 섬광이 보인다. 개활지에서 우린 납작 엎드렸고 탱크 밑으로 점프해 들어간 분대원도 있었다. 한 명은 논의 물에 뛰어들었는데 쇼크를 받은 상태였고, 이제 고참이 된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 진정시켜야 했다. 탱크에 맞은 건 없었으나 탱크 지휘관은 후방으로 빠지기로 결정했다. 우린 소대로 복귀했다.
Operation Strangle가 지속되면서 우린 인제로 향했고 날씨는 점차 나빠졌고 깊은 산악에서 물자는 공중재보급으로 받았고 우린 싸우면서 이동 하느라 극도로 피로했다. 만나는 적마다 격렬하게 맞섰다. A중대에 공중지원 오폭도 있었으나 다행히 부상자 몇으로 끝났다. 지켜보던 우리는 간이 철렁했다. 찰리(C)중대는 610고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1951년 4월 28일, 시드냄의 분대...
작전지역에 나타난 한국 피난민들...
6월 1일이 되자 우리 B중대 차례였다. 적의 방어는 여전히 살벌했다. 가장 큰 위협은 경사면 앞쪽에 나와 있는 적의 기관총 벙커와 밑으로 굴리는 충격수류탄이다. 도르시 뒤에서 하나가 터졌고 밥 그레그는 그걸로 인해 눈이 멀었다. 나도 엉덩이에 파편을 맞았고 더 큰 게 몸을 때렸으나 군복과 셔츠에 막혀 살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울리 파이너 하사와 난 총류탄으로 정상을 쐈다. 오른쪽 앞의 벙커 하나가 3일 동안 우리 대원들을 절구질하고 있다. 거기에 막히자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중간에 박혀 있고 퇴각도 힘들어졌다. 난 기관총에게 총구를 들어 엄호를 부탁했고 그러자 파이너도 카빈을 들어 자동으로 갈겼다. (파이너는 총을 잘 닦지도 않는데 기능고장이 한번도 없었다) 그 틈에 난 백린수류탄을 들고 벙커로 뛰어가 안으로 던졌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clear.” 선언하고 다시 능선으로 올랐다. 우린 안전핀이 뽑히지 않은 채떨어진 우리 수류탄들을 봤다. 우린 그런 수류탄들을 모았다. 그 고지 측면에 적의 야전병원이 있었고, 아마도 그래서 적이 더욱 더 맹렬하게 나선 것 같기도 했다.
정상에 올라가고 놀란 소위가 지쳐 쉬고 있는 게 보였다. 해군 의무병이 다가갔다. 의무병은 아내가 보내온 작은 미니어처 스카치 위스키가 있는 데 먹겠냐고 물었다. 놀란 소위가 달라고 했고 주자 곧장 마셔버렸다. 밤에 누워 고향에서 플라잉 낚시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난 어차피 여기서 쓰러질 것으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밤이었다. 아침이 되자 난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나는 내적인 외상을입었는데, 경찰관을 하면서 알았다. 내 안에 어떤 panic이 좀 살아남아 있었다.
내 분대 네 명이 후송되었고 남은 네 명도 경상이었다. 잭 햄맥은 두 번째부상이다. 정말 힘든 시기였고 날씨도 정말 안 좋았다. KIA와 MIA 외에 신체고갈과 병으로 몇 명이 또 떨어져나갔다. 우린 펀치볼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육체적인 상태는 간단히 글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1951년 6월 1-18일 동안 우리 Baker Company는 안 좋았다. 우린 캔사스라인과 펀치볼을 향해 공격해 가고 있었다. 우리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으나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게 믿기 힘들었다. 6월 13일, 우린 풀이 많은 계곡을 지나고 있었고 전입 온지 5일 된 페이건 소위가 있었다. 우리는 계곡 위쪽에 포격을 요청했고 이어 백린 지시탄이 떨어졌다. 그러자 소위가 곧 “clear”라고 통보했고 거리는 약 1천 야드였다.
이때 적은 우리 무전을 듣고 있었다. 그날 무선 암구호는 “shackled”였다. 직후에 우리 위치로 C중대가 들어왔는데 적이 곧장 기관총을 발포했고 사람과 긴 풀이 낫으로 치듯이 쓰러졌다. 내 친구였던 도날도 톨이 내 바로 앞에서 맞아 즉사했다. 이때 톨의 벨트에 수통이 두 개 달린 걸 봤고, 사격이 잠잠한 틈을 타 기어가 수통을 꺼내 물이 떨어진 내 분대원들에게 줬다. 톨이 맞을 때 페이건 중위도 동시에 맞았고 소위는 그 부상으로 다리 하나를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린 계속 고지를 오르며 목표를 향해 갔다. 오르기 시작할 때 아이스노글 일병은 적 기관단총에 열세 발이나 맞았다. 난 그를 오버딩 일병에게 맡기고 계속 올라갔다. 아이스노글은 놀랍게도 일본에서 치료로 회복하여 한국으로 다시 와서 헌병으로 근무했다.
6월 18일 우린 2대대와 교대했고 당시 우리 B중대는 윌리 파이너 하사가 임시중대장을 맡았고 임시부중대장으로 나 해롤드 시드냄 병장이 맡게된다. 모든 장교가 죽거나 다쳐서 빠졌고 이제 중대는 전투제대 기능이 상실되었다. 최근에 기록을 보고 알았는데, 우리 베이커 중대는 4월 23일 부터 7월 1일까지 총 15명이 전사하고 137명이 부상당했다. 64%의 전상률이다. 게다가 가파른 지형과 비참한 날씨와 도달하지 않는 보급품 때문에 우리 병사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예비대로 빠졌을 때, 장교용으로 나온 위스키를 우리가 받아먹었다. 예비대로 빠지면 그 주변에 높은 전초에만 나가고 쉬면서 보충병을 기다린다. 6월19일 프랭크 다케야마(Frank Takeyama)가 치료를 끝내고 복귀했다. 장교와 보충병들이 들어왔고 파이너와 나는 원래 임무로 돌아갔다. 장교용 위스키는 이미 우리가 다 마셔버렸다. 파이너와 난 텐트에서 위스키로 천국을 맛 봤다.
6월 중에 놀란 소위는 내가 한국에서 맞기 전에 계속 장교사관후보생(OCS)에 보내려고 노력했다. 7월 11일 놀란 소위는 중위로 진급했고 화기중대로 갔다. 그리고 7-8월에 개성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양쪽은 오히려 전선을 증강했다. 회담은 어차피 가망 없었다. 북한은 "peace talk"를 주장하고 그 동안에 병력을 보충하며 재무장하는 시간을 가졌다. 충분히 준비되자 회담을 거부하고 다시 전투에 나섰다.
이때 나는 3.5인치 로켓 분대장이 되었고 조 아렌스 상병이 로켓에 관해 모든 걸 가르쳐주었다. 또한 나는 파크스 심프슨이 소대장으로 있는 3소대 선임하사를 겸임했다.
[Hostilities in the Punch Bowl]
펀치볼...
우리 지역에는 한국군과 여러 나라 군대가 있었다. 한국군은 전선이 심각해지기 전에 재빨리 후방으로 빠지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다. 한국 해병대는 충분히 좋았으나 그래도 우리 측면을 맡기기에는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난 한국군이 우리 측면을 맡으면 불안했다. 그래도 측면에 영국군이나 터키군이 있으면 걱정은 덜 했다. 우리 측면에 미 해병대가 있어야 든든했다.
한번은 프랑스군을 교대해서 들어간 일이 있었다. 꽤 덥고 축축했던 때로 기억한다. 그때 프랑스군을 보고 굉장한 인상을 받은 것이, 그들은 무장도 좋았고 훈련도 잘되어 있었으며사기도 높아 보였다. 그들은 자기 간수를 잘 했기 때문에 적도 프랑스군 때리는 걸 꺼려했다.
시드냄의 부대와 교대하러 들어온 프랑스 외인부대 병력들과...
8월 22일 북한군은 평화회담장 밖으로 걸어나갔고, 26일 이른바 펀치볼 일대 에서 전투행위를 재개했다. 날씨는 뜨겁고 비가 많이 내렸다. 이때 난 비공식적으로 중대본부에 부사관으로 있었고 한국인 노무자들은 나를 “Number One Sergeant”이라 불렀다. 이때 난 시키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다 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대부분의 정찰에서 빠졌고, 난 의무병 한 명과 벙커에서 충분히 자며 쉬었다.
1951년 9월, 보급품을 날라온 한국인 노무자들...
1951년 9월, 단장의 능선 동쪽 끝 지역...
[주 : 단장의 능선에서 그 '단장'은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당시 위치는 정말로 유별난 상황이었다. 우리 왼쪽에는 완전히 비어 적이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그들은 아침과 저녁에 우리를 내려다보며 76밀리 비반충포를 2-3발씩 쐈다. 그들은 은폐가 워낙 좋아서 그걸 그 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침과 해질 무렵에는 항상 잠시 엄폐했고 탄이 떨어지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갔다. 밤에는 비반충포와 함께 120밀리 박격포를 쏜다. 밤에 슬금슬금 이어와 수류탄을 굴리기도 한다. 당시 명령은 야간에 참호 밖 이동 불가, 움직이는 건 무조건 발포였다. 침투자를 막기위해 철조망 지뢰 조명지뢰를 설치했다. 한번은 사슴이 갑자기 뛰어 올라와 정상을 지나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9월 11일 해병 두 명을 데리고 한국인 노무자들과 보급품 운송을 엄호하는 일을 했다. 철조망, 탄약, 수류탄 등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찰리 중대를 오른쪽에 두고 나무 밑을 걷는데, 갑자기 적 76밀리 비반충포 탄 두 발이 날아와 우리 위 나무를 때리며 파열했다. 워낙 탄이 고속으로 날아오는 무기라 징후도 못 느꼈다. 해병 두 명이 심하게 다쳤다. 난 노무자들과 둘을 돌봤고 찰리중대 의무병도 달려왔다. 헬기 운송을 요청했지만 어두워져서 조종사가 거절했다. 결국 우리 중대로 데려와 아침에 후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밤 동안 둘은 모두 숨졌다.
3일 후 대대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지뢰와 포탄/박격포 불발탄이 너무 많았다. 이로 인해 중대 최고참 부사관이 다쳤고 내가 중대 부사관 선임이 되었다. 우린 펀치볼 북쪽으로 갔다. 거기서 한 달을 있었다.
[Navy Corpsmen - God Bless Them!]
내가 해병대원들은 깊이 신뢰하듯이 해군의무병도 같은 존재다. 그들은 정말로 유일무이하며 우리와 같은 종족이다.
내가 2소대에 있을 때 의무병은 멜빈 웨그스터프와 멀레 슈톤이다. 포항 게릴라 소탕에서 춘계공세까지 갔다. 슈톤은 4월 23일 313고지에서 전사했다. 의무병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적의 사격 속에 앞으로 나가 전사했다. 멜빈은 근무하다 의무대대로 빠졌다. 멜빈은 어떤 환자도 절대로 죽게 하지 않겠다고 나에게 맹세까지 했다.
그 다음에 온 의무병은 사무엘 메인과 찰스 스택이고 마빈 앤더슨도 나중에 합류했다. 이 세 명은 아쉬운 이유로 해서 후방으로 사라졌다. 9월 17일 모닥불을 피웠는데 그 밑에 있던 불발탄 혹은 지뢰가 폭발해 셋 모두 다쳐 후송되었다.
왼쪽에서 두번 째가 의무병 슈톤이다...
[Going Home]
1951년 10월 12일 7연대대 3대대는 5연대 3대대에 전선을 인계하고 빠졌다. 이때 5연대가 헬기로 기동했는데 사상 최초로 알고 있다. 3마일 후방으로 빠져 텐트에서 생활하며 뜨거운 식사도 하며 쉬었고 이후 훈련정찰을 나갔다. 이때 나를 대신해서 이스마엘 파워스 상사와 존 베르고피아 병장이 소대로 들어왔다.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 왔고 중대는 나에게 정찰 명단에서 뺐다. 마지막에는 중대에서 행정일과 보급일을 도우며 지냈다. 11월 13일에는 새로운 거점으로 들어가 벙커와 참호를 개량했고 정찰과 매복이 이어졌으며 점차 또 추워진다. 다시 벙커 생활이 시작되었다. 찬바람이 불자 레이션 박스 종이와 모포로 벙커의 빈틈을 가렸다.
귀국 전 3주 동안 글쓴이 시드냄이 머물렀던 벙커.
11월 27일 귀국자들이 대대에 모여 준비했다. 이때도 재입대와 전장임관 이야기가 또 나왔다. 우리가 나가려는데 11차 보충병력 장교 5명과 병사 135명이 들어왔다. 만감이 교차했다. 떠나는 게 기뻤지만 다른 병사들을 보니 그러 곳에 있는다는 건 결코 행운이 영원할 수가 없다. 병사들은 그냥 산적과 같은 모습이다. 트럭을 타고 해안으로 이동했다. 배를 타고 일본 오추에 도착한 건 11월 30일이고 일본을 떠난 것은 12월 1일이다. 그리고 샌프랜시스코의 금문교를 드디어 봤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샌디에고로 향했다.
한국전 참전자들이 귀국할 때 감동으로 바라보던 샌프랜시스코의 금문교... 직접 찍은 사진... 석양이 질 무렵 너무나도 아름다워 자기도 모르게 자살하는 곳으로 유명했음.
[Post-Korea]
민간인이 되었을 때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한 동안 배에 수류탄과 대검을 놓지 않으니 잠이 안 왔다. 게다가 여러 폭발로 내 왼쪽 귀가 청력 제로였고 1년이 지나자 부분적으로 돌아왔다. 난 대학으로 돌아가 탄광 엔지니어링을 더 배우려고 했다. 그러다 알래스카의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패시픽 노던 항공사 알래스카 지사였다. 내 해병대 총 근무는 4년 10개월 3일이었다. 알래스카에서 아내를 만나 1953년 결혼했다.
1959년 항공사에서 나온 뒤에 알래스카에서 주립경찰이 되었다. 이는 미군 계열이었고 1979년에 난 중령이 되어 알래스카 주방위군 부 작전관이 되었다. 1983년에 은퇴해 난 캐나다에 정착했다.
1951년 크리스마스...
[마지막 회상]
난 한국 참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아직도 미군이 한국에 있는 게 옳게 보인다. 만약 북한이 돌아온다면 미국은 막아줘야 한다. 개인적으로 해병으로 한국에서 싸운 건 날 변화시켰다. 그 이전에 난 내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고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난 한국에서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다. 경찰로 일한 24년 동안 범인에게 총을 꺼낸 적은 없지만 난 오만하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감과 신뢰가있었다. 내 인생에서 한국 참전은 자랑스럽다. 한국의 경험은 끔찍했지만 세계는 그걸 잊으면 안 된다. 한국전을 "the Forgotten War"라 부른다지만, 난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 생각에 전쟁의 진짜 영웅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료를 구하고 자기를 희생했다.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1951년 6월 1일, 1소대 선임하사였던 프랭크 다케야마 병장은 고지에서 다쳤지만, 양팔에 해병 부상자 둘을 끼고 나왔다. 그런 사람이 진짜 전쟁영웅이다. 1989년 동남아시아로 가다 항공기가 서울에 급유를 위해 내린 적이 있다. 난 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리-보딩을 하지 않고 그냥 타고 떠났다.
난 한국에 총 475,200분 동안 있었다. 일부는 잠을 잤고 지루하게 보낸 시간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항상 일정한 공포의 상태로 있었다. 가장 강한 기억은 그 사람 미치게 만드는 산악과 훌륭한 전우들이다.
도로를 따라 긴 행군으로 걸으면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믿는가? 행군 중에 C-레이션 깡통을 따서 얼어붙은 내용물을 대검으로 파서 먹었다. 수통이 얼까봐 코트 안쪽에 넣고 다녔다. 행군은 끝이 안 보였고 완전군장에 미끄러지면 부리나케 따라 잡아야 한다. 타고 갈 트럭도 없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그 한국의 산들!
부록 : 시와 노래들
네가 계곡 아래로 걸어 내려갈 때, 주변 능선이 확보되었다고 확신하는가?
만약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네 인생은 이제 곧 끝장난 거다
네 항문이 움찔하기 시작하면, 그건 파편이 휙 하고 날기 시작하는 거야
박격포탄들이 잠잠해지면 이젠 지뢰가 다발로 너를 기다린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면, 이제 곧 적 기관단총들이 애처롭게 흐느낄 거야
이 녀석들의 기관단총이 끝나면 이젠 지뢰가 다발로 널 기다린다!
- 하비 놀란과 프랭크 맥도날드 중위 글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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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위는 덩치 큰 아일랜드 개자식이라네 소위 중위들은 삐뚤어지고 사악한 놈들! 모든 부사관들은 다 머저리라네 오 하느님, 우리 부대가 왜 이래! 바보, 멍청이, 나도 병신이 되어가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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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생아 무리들 우리는 진짜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사생아 무리들 From Baker Com-pa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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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이커 산적 떼, 정찰을 나간다 그리고 몇 명은 아마 통행세로 지불된다! 우리는 베이커 산적 떼, 많이 들어봤을 거야 gook들은 원숭이처럼 숨었다가 언제라도 나타나!
우리는 모든 걸 훔치는 걸로 유명한 도둑들이다. Most gooks hate us - we hope you hate us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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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늘 밤 낙동강을 따라 맑은 달빛이 비춘다 저기 벌판을 따라 똥냄새들이 새롭게 번져온다! 거길 따라 놈들 기관단총 섬광이 어렴풋이 반짝인다 낙동강의 제방은, 너희들에게 너무 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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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ate to see you go! We hate to see you go! We hope to Hell you never come back - We hate to see you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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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거무스름한 텐트 안, 인제 북쪽 20마일...
- (This one was never finished.) - HJS
1951년 추수감사절 식사 사진 두 장...
동계 도로정찰....
소대 warming up 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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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장의 좋은 글입니다...
차~암 재미있는 Nick Name에서 그만... 뒤로 발라당 나자빠집니다... *^_^* ...
귀하신 발걸음과 정겨운 흔적 감사드려요~... !!! ... *^_^* ...
과찬이십니다~^^;
항상좋은자료잘보고있습니다앞으로도유익한자료부탁드립니다~
더운날씨에항상건강하십쇼해병~
선배님 한편의 6.25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해 병!!!
한국의 전쟁에서 젋은시간을 보내고 싸워준 이들이 있기에 오늘날 이땅에있는 행복일것입니다 참전중 고인들의 희생이 없어다면
어찌되었을까요? 희생으로 이따에 평화를준 영령앞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필~승!!
더이상 할말이 없내요.......고개숙여질뿐입니다
미해병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해병대의 작전은 늘 앞서갔군요,,,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이름없는 영웅입니다. 병 26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