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앞바다에서 발굴되고 있는 청자자기를 가득 실은 난파선의 유물을 보면서 한국사학계에서는 고려자기를 제작하여 개성의 왕도에 운반하려던 유물들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강진이나 목포에서 흐르는 해수의 흐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강진에서 돛을 사용하지 않고 해류에 의지하여 자연 부유(浮游)하면 중국 강소성 염성이나, 절강성 영파에 도달한다.
두 번째로 왜 산동성 蓬萊에서 고려의 평저선이 발굴되었나 하는 것이다. 고려사 인종조에 나오는 당시 북송이 망하고 楊子江 以南으로 쫓겨 가 南宋의 金나라 공격을 위한 고려의 침공로 협조를 고려가 반대하는 이야기부터 약 5가지의 증거자료가 나오는데 五代時에 고려는 사신이 뻔질나게 하남성 개봉이나, 고려왕이 元의 上都에 드나든 기록이 나온다.
특히 원에는 거의 한달에 한번정도 사신이나 고려왕이 드나든다. 이를 한반도 개성에서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으로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이제 그 사서적 증거를 보기로 하자.
1. 자료 <高麗史> 인종.무신6년(1128)기록
상략 ,本國,自祖宗以來,事大以誠,故自神考,至於太上道君皇帝,視同一家,其異恩厚禮,豈易名言,
惟天地,不責其報,而區區感激之意。庶幾萬一,伏聞二帝遠征,擧國憂憤,雖不能應時,奔問官守,而臣子之心,豈遑寧處,
且皇帝孝悌,群公忠義,必也動天地感鬼神,天地鬼神,共相協贊,豈使二聖,久勞沙漠,
每祝早還京闕,以副天下之望,皇帝,初登寶位,首遣侍臣,就傳詔命,欲令小國,津發,前去迎請二聖,使副,又於傳詔曰,一一面諭,繼以公牒,懇意備至,敢不拜命,然,女眞之始也,分居部落,未有定主故,嘗臣屬我國,或隨我使人,入貢上國,此後,漸致强盛,常爲邊患,近者陷沒大遼,侵犯上國,自此兵威益大,抑令小國稱臣,仍約定禮數,一依事遼舊例,小國,不得已而從之,然后,
其俗好戰,常疾我,樂率上國,近於疆界,修葺城壘,屯集兵士,意欲侵陵小國,如聞使節,假道入境,必猜疑生事,非特如此,必以報聘爲名,假道小邦,遣使入朝,則我將何辭以拒,苟知海道之便,則小國之保全,難矣,
而淮南兩浙,緣海之地,得不慮其窺覦耶,苟爲不然,小國,豈敢恬不從命,玆事實大,非敢飾言,惟使副,曲察情衷,少回雅意,歸奏闕下。하략
[본국이 조종 조 이래로 대국을 정성으로 섬긴 까닭으로 신종황제로부터 태 상도군황제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생각하여 그 특이한 은혜와 두터운 예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천지 같은 은덕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뜻은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삼가 듣건대, 두 황제께서 멀리 가시어 온 나라가 걱정과 울분으로 지내는데, 비록 직무상 제때에 달려가서 위문하지는 못할지언정 신하된 마음에 어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황제의 효성스러움과 공경하심과 여러분들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서로 도와서 협조할 것이니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처음 즉위하시어 먼저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우리나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여 가서 두 황제를 맞아오게 하고, 또 사신과 부사(副使)가 조서를 전하던 날에 낱낱이 직접 말씀하였고, 계속 공한을 보내어 간절한 뜻이 상세하고 극진하니 감히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상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이 뒤로 점점 강성하여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요(大遼)를 함몰하고 상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고, 의례를 약정하는 데 일체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상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사절을 보내어 입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안다면 우리나라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淮南)과 양절(兩浙)의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보는 우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태연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실상 중대하여 감히 말을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사절과 부사(副使)는 충심을 곡진히 살펴 당초의 생각을 조금 돌이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2. 자료 <五代史> 기록
중국 역사상 907년 당(唐)이 망한 뒤부터 960년 송(宋)이 건국되기까지의 다섯 왕조 또는 그 과도기. 이 시기에 중국 북부에서는 중앙 왕조를 자칭하는 5개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시기는 또한 대륙남부에서 10국, 즉 전촉(前蜀)·후촉(後蜀)·형남(荊南)·초(楚)·오(吳)·남당(南唐)·오월(吳越)·민(岷)· 남한(南漢)·북한(北漢)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10국시대라고도 한다.
5개 왕조 가운데 최초의 왕조는 후량(後梁)이었는데, 이는 반란군 지도자 주온(朱溫 : 朱晃 또는 朱全忠)이 907년에 당을 무너뜨리고 세운 것이었다. 주온은 912년 자기 아들에게 살해되었고, 후량은 923년에 후당(後唐)을 세운 이존욱(李存勖 : 蔣宗)에게 멸망당했다. 장종은 13년간 비교적 성공적으로 통치했으나, 부하 장군 석경당(石敬 : 高祖)이 반기를 들면서 후당은 멸망했다.
고조는 내륙 아시아의 반(半)유목민족인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을 세웠다. 고조의 아들이 946년에 거란족에 대한 공납을 중지하려 하자 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거듭 침입하여 그를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후진은 멸망했다. 다음해 후진의 장군이었던 고조 유지원(劉知遠)이 후한(後漢)을 세우고 거란족을 내륙 아시아 쪽으로 몰아냈다. 후한은 또 다른 장군 곽위(郭威)가 왕조를 찬탈하고 951년 후주(後周)를 건국함으로써 4년 만에 망했다.
후주에 들어와서 좀더 안정된 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황제가 죽는 바람에 어린 아들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결과 조광윤(趙匡胤 : 太祖)이 황제자리를 차지하고 송을 창건했다. 송의 건국과 더불어 오대시대는 끝났다.
예나 지금이나 원문을 보면 개봉지역에 할거하던 10년도 못 버틴 조그마한 藩主가 고려왕에게 작위를 제수하고, 조공을 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허장성세다.
夏四月, 癸亥,以延州忠义军节度使、太原西面招讨应接使、检校太师、兼中书令、渤海王高万兴兼鄜、延两道都制置使,余如故。
[여름사월계해일 연주충의군절도사로서 태원서면소토응접사, 검교태랑 겸 중서령 발해왕고만흥겸녹, 연양도제직사 여여고.]
贞明五年 丁亥,以延州节度使、鄜延两道都制置、太原西面招讨应接等使、渤海郡王高万兴为检校太师、兼中书令,充保大忠义等军节度、鄜延管内观察等使
[919년 정해일 연주절도사 인연양도제직,태원서면초토응접등사 발해군왕고만흥을 검교태사,관찰사에 제수하다.]
贞明六年夏四月,癸丑,鄜延节度使兼西面招讨接应等使、检校太保、兼中书令、渤海郡王高万兴进封延安王,赐号匡时定节功臣
[920년 여름4월 계축일, 발해군왕고만흥에게 연안왕에 봉하고 굉시정절공신의 시호를 사하다.]
九月庚寅,以供奉官郎公远充契丹欢好使。晋王遣都将李嗣昭、李存审、王建及率师来援同州,战于城下。我师败绩,诸将以余众退保华州罗文寨。
[동년9월 진왕이 도장 이사소,이존심을 파견하고 왕건 또한 장수를 이끌고 동주에 지원하러와 성아래에서 싸우다. 우리의 장수가 패하여 모든 장수와 남은 무리들이 보주, 화주로 퇴각하였다.]
贞明7年二月丙寅,以荆南节度使、检校太师、兼中书令、渤海郡王高季昌 为守中书令,依前荆南节度使。
[921년 2월 형남절도사, 검교태사,겸 중서령 발해군왕 고계창을 중서령으로 하였다.]
3. 자료 <金史> 기록
금사의 주된 내용을 보면 건국초기부터 같은 조상이라고 거란족일부와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세를 규합하여 요(遼.거란)를 공격합니다. 발해를 망가트렸던 요는 금나라에게 망하게 된다.
이후에 같은 조상을 가진 고려와는 거의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지 않고 한차례 전투만 한다. 즉 나중에 이른바 <낙타餓死사건>으로 촉발된 元나라 사신을 죽인 저고여 사건이다. 고려가 대륙에 있지 않았다면 낙타사건이 발생할 수 없고 元과의 즉각적 전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金나라는 宋의 싹을 없애기 위해 西安을 정벌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성공했다. 1041년 南宋의 흠종과 휘종이 金에 잡혀가 있으매 宋이 金에 복수하기위해 고려에 길을 비켜달라고 하는데 金史에 보면 金의 남쪽 邊境이 淮河(화이허)로 기록되어 있다.
4. 자료 <元史> 기록
元史 卷 208 外夷傳 第 95편에 보면 고려에 대한 위치가 나타난다. 그 원문을 보기로 합니다.
高麗本箕子所封之地. 扶餘別種嘗居之其地,
東至新羅南至百濟皆誇大海西北渡遼水接營州 而靺鞨在共北.
其國都曰平讓城卽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綠江...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토를 받은 땅이다. 부여와 다른 종족으로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동쪽에 신라, 남쪽에 백제가 있으며 큰 바다(황하)서북을 건너 遼水에 접한 瀛州에 말갈과 북쪽에 같이 있다. 그 나라의 수도는 평양성 즉 漢의 낙랑군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천산)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하는데...]
益廣倂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爲一,
其主姓高氏自初入國至唐乾封初以國 ?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後稱能自立至五代時代主.
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自建至燾凡二十七王,歷四百餘年.
[옛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일한 후 땅이 넓어졌다. 그 나라의 주성은 고씨인데 당나라 건봉 초(AD666) 나라를 세워 같이 손을 맞잡은 이래 자손들은 그 땅에서 다시 봉토를 받은 후 五代時代에 주인으로 일어섰다. 그 나라는 왕건으로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모두 27왕을 세웠으며 사백년이 넘었다.]
원사에서 고려의 위치를 표시한 글귀를 보면, 고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 했으며 남으로는 백제가 있고 큰 바다(여기서 큰 바다라 함은 황하를 일컫는 것) 서북을 건너 요수에 접한 營州에 말갈과 같이 있다 하므로 지금 식민역사서에 기록된 바라면 경상도와 백제의 윗부분인 충청, 경기도 부근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즉 신라, 백제는 적어도 말기 고려를 중심으로 할 때 하북성 영주를 중심으로 남과 동에 위치한 것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북에 위치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고려는 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만리지국이라는 문구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위의 송나라 추리도를 보면 영주는 바로 황하이북 하북성의 갈석산과 같은 지역위치로서 고려는 한반도 고려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고려를 오대시대에 흥기하여 주인으로 일어섰다는 글귀로 보아 대륙의 상당한 지역을 점거하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5. 자료 <明史>기록
明史 - 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 明玉珍 (홍건적의 난 기록들 )
명사원본에 보면 원말 <명옥진>의 무리가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 같은 한반도의 고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내륙 사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그와 그의 아들<명승사>가 배를 타고 반도고려로 간다는 것은 분명 난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