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아내까지 함께 늦잠을 즐기는 날씨 흐린 휴일의 오후이다. 어디어디 지방은 어제부터 대설 경보가 내렸다며 한 걱정인데, 이곳은 겨울답지 않게 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지금껏 물 잔뜩 먹은 구름이 하늘을 채우고 있다. 예로부터 비 오는 구질구질한 날에는 부침개에 막걸리가 제격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도 불쑥 부침개 생각이 난다.
‘비 오는 날은 왜 하필 부침개가 생각날까?’ 라며 하릴없이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비 오는 날이 곧 쉬는 날인 농경생활에서 술 좋아 하는 농부의 지어낸 얘기라는 사람도 있으며, 빗소리와 부침개 익는 소리와 비슷해서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절로 부침개를 생각해 낸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비가 오는 날은 체온이 떨어지고 열량 소모가 많아서 생리적으로 부침개와 같은 음식물이 당긴다는 과학적인 의견까지 이유가 분분하다.
거기에다 흘러간 유행가 중에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가사처럼 부침개는 호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생각해 내는 첫 번째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침 날씨도 궂고, 시간도 많으며 돈 없는 오늘, 부침개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난 가을부터 뒷 베란다에 보관해 둔 감자를 미처 다 먹지 못했는데, 얼마 전부터 새 싹이 숭숭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순이 더 자라기 전에 얼른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오늘이 딱 좋은 그 날인 것 같다. 그것도 한 번에 많이 먹을 수 있는 감자 부침개가 적격이었다. 열 두어 개의 감자를 바가지에 담아내고 보니 감자 싹은 상자에서 본 것 보다 훨씬 웃자라 긴 것은 한 뼘 이상 되었다.
우선 새싹을 싹둑싹둑 잘라 낸 다음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그러고 보니 몸체가 단단해야 할 감자는 하나같이 사들사들 곯아서 말랑말랑했으며 껍질은 쭈글쭈글하였다. 칼집을 낸 다음 껍질을 깎으려 했으나 고무같이 질겨진 탓에 껍질은 칼에 밀려 다른 때 보다 서너 배는 더 힘들었다. 아마 말랑말랑하고 껍질이 질겨진 것은 새싹을 키우기 위해 감자 속 영양분과 수분을 새싹에게 주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 감자 싹이 돋은 밑 부분에 칼이 돌아가자 주변 조직과는 좀 다른 딱딱한 부분을 발견했다. 웬일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딱딱한 부분은 주변의 조직과는 다르게 심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추측컨대 이 감자는 새싹을 틔우느라 몸통의 영양분을 거의 다 소진했기 때문에, 추가로 생명을 이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뿌리를 만들기 위한 변화로 보였다.
순간 새싹을 위해 온 몸으로 희생하는 감자의 모성애를 보는 듯하였다. 후손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애를 동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시고기부터, 문어이야기, 토종 우렁이처럼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아낌없이 제 몸 희생하여 끝내 죽음까지 자초하는 모성애가 그렇다. 그러나 식물에서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만난 감자를 보니 새싹을 키우기 위해 온 몸으로 희생하는 모성애를 보는 것 같아 신기한 그들의 세계를 엿보는 듯 했다.
감자를 통해서 우리 사람도 늙어 가며 생기는 주름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주름을 자연스런 생리적 노화현상이며, 일생을 살아오신 어른들의 단순한 연륜만 보아왔다. 그러나 감자의 주름처럼 어르신의 주름살은 한평생 자식을 키워 내느라 당신들의 한 몸을 아낌없이 주고 난 희생의 징표임을 깨달았다.
새로 태어난 감자 싹이 제 어미의 희생으로 자라면, 이미 없어져 버린 제 어미의 희생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나 역시 부모님의 몸을 빌려 잉태되어 자랐고 이만큼 장성하였는데, 그간 부모의 몸을 양분으로 삼아 살아 온 감자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고 보면 한 줄 두 줄 늘어나던 부모님의 주름살이 당신의 희생임을 모르고 살아 온 나는 감자와 닮은꼴이다. 나에게도 벌써 훌쩍 커버린 두 아이들이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버이에게 받은 것과 같은 헌신적인 희생을 하고 있는지 지금 질긴 감자껍질을 깎으며 되돌아본다.
껍질 벗겨낸 감자를 채 썰고 난 다음, 고추 마늘을 썰고 찧어서 조금 넣고 밀가루로 반죽하여 소금으로 약간 간했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준비된 감자 부침개 재료를 올렸다. 감자전이 프라이팬에서 자글자글 익는 소리가 창밖의 빗소리처럼 들린다. 이미 새순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이 감자로 만든 부침개의 맛은 과연 어떨까?
첫댓글 저도 감자로 부침개는 많이 했는데 이렇게 좋은 글 .감동입니다.
싹이 길게 자란 감자를 보고 부모님을 떠 올리는 심정은 비숫한가 봅니다. 저도 '늙은 감자와 인생' 이라는 글을 하나썼지요~ 이 작품을 읽고나니 감자부침개가 무지 먹고 싶은데 어쩌지요~ㅎㅎ
감자부침개 굽는 냄새가 솔솔나는 듯 합니다.
강판에 갈아 윗 물을 걷어 내고 부추와 청량고추를 넣어 부쳐 낸 강원도 감자전 인줄 알았답니다. ^^ 처음 결혼해 감자전이 먹고 싶다는 남편을 위해 친정 엄마가 해 주신 감자전과 님의 감자전이 닮았어요~집으로 돌아 오는 길 남편 왈 '무슨 감자전이 그래?" 하던 말이 생각나 미소 지어 봅니다. ^^* 잘 읽었습니다.
박선생님 글을 읽으니 감자전이 먹고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맞아요 ^^* 지금은 남은 주름감자가 싹이 텄어요 ㅎ 규수선생님 이 감자전 부치는시는 모습이 자상해 보입니다 ^^*
선생님 감자 부치미 먹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삼 감자전이 먹고 싶네요. 비 오는 날엔 한결 더 맛있죠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