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장도감敎藏都監 : 고려 시대, 대장경의 판각을 맡은 관청
* 교장총록(敎藏總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중심이 되어 ‘초조대장경이 완성’된 뒤 편찬한 불교 장소(章疏)를 모아 만든, 소위 ‘속장경(續藏經)’으로 일컬어지는 ‘불경 해석서’이다. 원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고, 줄여서 ‘교장(敎藏)’이라 한다. <교장총록>은 서역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의 정본(正本) 이외의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해 편찬했으므로 정식 대장경은 아니다. 총 1,085부 4,858권을 기록하였으며, 3권 1책이다.
고려 문종(文宗) 27년에 <대세자집교장발원소(大世子集敎藏發願疏)>를 지은 이후 선종(宣宗) 7년 8월까지 25년간 장구한 시간을 두고 국내는 물론 송(宋) · 요(遼) · 일본(日本) 등지까지 산재한 주석서를 최대한으로 수집한 대단한 ‘불경 해석서’이나 몽고 침략 때 모두 소실돼 현재 전하지 않는다.
____고려에서는 두 번의 대장경이 조판되었다____
1)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엄밀하게는 ‘초조대장경’을 가리킨다. (1차 - 소실)
이 거대한 역사(役事)는 불교를 흥왕(興旺)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타개함으로써 호국(護國)하겠다는 대발원(大發願)에서 이룩된 것이다.
대장경 조조(雕造)는 오랜 시일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일 처음 조조된 것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또는 《초판고본대장경(初板古本大藏經)》이라고 한다.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내침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 · 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 《화엄경(華嚴經)》 · 《금광명경(金光明經)》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그 후 문종(文宗)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각종 장서 3,000여 권을 모아 가지고 돌아왔다.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이 ‘교장(敎藏)과 불서(佛書)’ 모은 것을 엮었다. 이를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인간(印刊)한 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흩어져 있는 불서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그 일은 의천이 입적하기 2년 전인 1099년(숙종 4)까지 계속되었다. 모두 1,010부 4,740여 권이 인가되었다.
제1차로 완성된 이 정장(正藏)은 그 경판이 부인사에 이관되어 소장되었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초조대장경》은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고 《속대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신후쿠사[眞福寺] 등에 각각 흩어져서 겨우 47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 2차
몽골군의 침입으로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호국(護國)을 위한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자, 이 외침을 물리치기 위하여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의 가호를 빌기로 하였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재조대장경》은 구목록(舊目錄)의 천(天)∼동함(洞函)에 이르기까지 639함(函)에 엮어져 부수는 1,547부(部), 6,547권(卷)이며, 추가목록의 동(洞)∼무(務) 및 중복된 녹(祿)∼무함(務函) 24함에 들어있는 15부, 231권(혹은 236권)을 합하면, 모두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이며, 경판의 수는 8만 1258판이 되고, 이것이 안팎으로 새겨져서 16만여 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칭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다시 조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저본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송·거란본과도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은 보완하였다. 그리고 초장경 때에는 없었던 《송조신역경(宋朝新譯經)》과도 대교(對校) · 고감(考勘)하였고 《개원록(開元錄)》, 《속정원록(續貞元錄)》 등의 불서목(佛書目)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이 ‘재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조조되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충실하며 오탈(誤脫)이 적다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정평(定評)이다. 일본에서도 이 ‘재조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다.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대장경》의 조조는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시기에 초조판부터 헤아려 실로 240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을 통하여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으로,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