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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木)
[1947년] 트루먼 독트린 발표
← 1947년 3월 12일, 트루먼(가운데) 대통령이 미국 상하양원합동특별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 12일 미국 상하양원합동특별회의에서 ‘그리스·터키 원조 법안’ 승인을 위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터키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내외로부터 위협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국가를 지키기 위해 양국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트루먼은 "무장한 소수 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국가 국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2차대전 중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반소 반공 입장의 냉전정책을 보다 확고히 한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외무장관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마샬 국무장관이 본국에 전화를 걸어 트루먼에게 발표배경을 묻자, 트루먼은 "법안통과를 위해 공산주의의 위험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이들 국가를 원조하기 위해 4억 달러의 기금을 책정했다./조선
[1925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사망
←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민당 당수인 쑨원이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58세였다. 동지들은 별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부인 쑹칭링(宋慶齡)만이 이 위대한 혁명가를 보냈다. 쑨원은 중국의 혁명을 이끌어 공화제를 창시함으로써 국부로 일컬어지는 혁명가이다.
1866년 중국 광동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한 쑨원은 14세때 하와이로 건너가 서양학문을 배우다 18세에 귀국, 홍콩의 서의서원(의학교)을 졸업하고 마카오와 광주에서 개업해 의사로 일하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하와이에서 홍중회를 조직, 이듬해 광동에서 혁명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다시 1905년 러일전쟁때 중국 동맹회를 결성, 반청 무장봉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돼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을 건국했으나 힘의 열세와 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권력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다시 제2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수많은 좌절 끝에 쑨원은 1918년 국민당을 조직하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다시 결단을 내려 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는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을 1924년 성사시켰다. 물론 쑨원은 확대 개조된 국민당의 총수로 선출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날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조선
[1980년] 니진스키 Vaslav Nijinsky 출생
←<장미의 정 Le Spectre de la rose>에서의 니진스키
1890년 3월 12일 태어남 / 1950년 4월 8일 죽음
"나는 노래를 사랑하지만, 부르지는 못한다. 나는 당신이 비록 목소리를 잃었어도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중략) 나는 춤이 목소리인 예술가이다. "
- 바슬라프 니진스키
니진스키는 '춤의 신'으로 불릴 만큼 유명한 소련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이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발레학교를 졸업한 뒤 마린스키 극장에 독무자로 입단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 파블로바와 크셰신스카 등이 그의 상대역을 맡았다. 1909년 능력을 인정받은 니진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에 들어가, 파리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이후 엄청난 도약과 뛰어난 연기 등으로 세계 최고의 남성무용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12년에는 안무를 시작했는데,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를 위해 <목신의 오후 L'Aprés-midi d'un faune>·<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을 창작했다. 1919년 정신분열증으로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용계에서 은퇴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본격화
←레닌(1918)
1917년 3월 12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시민 봉기에 대다수의 수도경비대가 참여함으로써 러시아 2월혁명이 본격화되었다. 영하 20도의 추위를 견디며 식량배급을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니에트', 즉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들려왔고 이는 2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봉기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제위승계를 거절함으로써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소비에트는 같은 해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출범시키는 데 모태가 되었다./브리태니커
[1910년] 독립운동가 이창용(李昌用) 출생
1910. 3. 12 황해 신천~1955. 4. 28.
아버지는 광희(光熙)이다. 1931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손기업(孫基業)·이상일(李尙逸)·박민항(朴敏杭) 등이 일제 밀정과 고관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혁명당총연맹(朝鮮革命黨總聯盟)에 가입했다. 1932년 10월 손기업 지휘하에 박민항·최윤식(崔潤植)과 같이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를 습격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박민항·최윤식과 더불어 만주 일본전권대사 무토[武藤信義]를 암살하고, 관동군사령부를 폭파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파견되었다. 중국 구국군(救國軍) 장쉐량[張學良]의 협조로 폭탄을 확보하고 거사자금 7,000원을 마련하여 박민항 등과 함께 창춘[長春]·펑톈 등지를 전전하면서 무토의 암살기회를 엿보다가 창춘 중앙여관에서 무기가 발각되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33년 5월 창춘 일본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고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만기 출옥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30년] 한국의 영화배우 문정숙(文貞淑) 출생
1930. 3. 12 평북 선천~2000. 3. 1.
전형적인 농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뒤 월남해 보성여학교를 다녔고, 유현목 감독의 발굴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권영순 감독의 〈흙〉(1960), 이만희 감독의 〈귀로〉(1967)·〈시장〉(1969)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주요 성격배우로 자리잡았다. 대표작으로는 1966년 김지헌 극본, 이만희 연출로 만들어진 〈만추 晩秋〉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복역중 일시 외출한 여죄수 역을 맡아 한계시간 내에서 갈등하는 여자의 성격묘사를 훌륭히 해내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지적인 연기자로 자리잡았다. 그후로도 이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루어 많은 문제작에 출연해 1960년대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의 은사이자 생활의 동반자인 이만희 감독의 사망과 더불어 그녀의 연기생활도 급속히 쇠퇴기에 접어들어 1970년대 중반 이후 은막에서 은퇴했다.
단언컨대 60년대의 가장 뛰어난 성격배우라고 해도 좋을 문정숙은 음영이 드리워진 섬세한 표정과 심리적인 깊이가 엿보이는 몸짓으로 무대출신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영화적인 연기를 구가했다. 연기의 첫출발은 극단 아랑에서였다. 문정숙은 열일곱이 되던 해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입단했고 이후 예술극회와 신협을 거쳐 일급연극배우로 명성을 얻게 된다. 스무살 무렵 연극극회에서 남편 장일을 만났다. 상대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48년 결혼한 후에는 영화제작과 기획을 했으며 이만희 감독과의 관계로 헤어지기 전까지 17년간을 함께했다. 스크린에 처음 데뷔한 것은 신상옥 감독의 16미리영화 <악야>(1952)지만 사람들은 영화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세 번째 작품인 <유전의 애수>(1956/유현목)를 더 많이 기억한다. 그러나 소박하면서 불안한 애수를 예민하게 그려낸 선희역의 문정숙은 멜로드라마가 제 1장르이던 시대에 멜로드라마의 순종적인 여주인공으로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평결을 받는다.
제작자 황영빈의 걱정 어린 찬사처럼 "멜로드라마에는 맞지 않는 코게티시한 연기파"여우였던 것이다. <종각>(1958/영주남)에서는 1인 3역을 너끈히 해냈고 <흙>(1960/권영순)을 전후하여 문정숙은 "안티 멜로" 연기파 배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은 그간 조연급으로 맴돌던 문정숙을 주연급 스타로 올려놓은 영화이다. 레코드 음반 표지사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검은 이브닝 드레스의 문정숙을 발견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유명한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로 만든 <꿈은 사라지고>91959/노필)에서 레코드 음반으로 발매된 주제가 "나는 가야지"(손석우/작곡)는 그에게 문화주택을 선사할 정도로 인기였는데 이 다재다능한 배우는 <심야의 부르스>(1960/노필)와 <그 이름을 잊으리>(1960/노필) 등에서도 주제가를 불렀다.
인물의 성격을 포착하는데 있어 문정숙은 메서울 정도로 예리했다. 역할의 비중에 관계없이 예컨대 <서울의 휴일>(1956/이용민)과 <낙화유수>(1958/안현철)에서 분열증에 시달리는 미친 여자의 허탈감을, <세 번째 남편(살아야 한다)>(1959/조긍하)에서는 폭음하는 바걸의 심리를 날카롭게 연기했다. 문정숙은 캐릭터 표현에 중점을 두는 연기방식을 취했는데 복합적인 성격화로 인해 때로는 번민하는 여인처럼 비치기도 하는, 다면적인 체취를 갖는 캐릭터였다. 문정숙의 영화 가운데 고독의 히로인을 연기한 <홀로 우는 별>(1959/이원경)에서 유도 2단의 여장부로 분하여 남자들과 대결하는 <언니는 말괄량이>(1961/한형모)와 변화무쌍한 연기를 보여준 <내 청춘에 한은 없다>(1961/박상호)도 기억할 만한 영화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기생리에 가장 잘 맞는 역을 맡은 영화는 동성애의 심리를 다룬 <질투>(1960/한형모)였다. 문정숙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던 <흙>과 <질투>는 강렬한 캐럭터일수록 문정숙에게 더욱 적합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평론가 김종원은 문정숙의 영화경력을 이만희 감독 이전(내성적인 순응형)과 이후(적극적인 자아실현의 캐릭터)로 나눈 바 있다. 그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만희"라는 기준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사실 그간 다양한 진폭의 연기를 해온 문정숙은 이만희 감독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만희 감독과의 첫 작품은 미모의 상속녀 조현주를 연기한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였다. 월간잡지 <아리랑>에 연재된 소설 <야간열차의 미녀>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극과 멜로드라마만으로 과식상태였던 당시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한 미스테리 스릴러였다. 섬세한 감정선을 그리면서도 공포와 불안을 애호하는 양성적인 스타일로 연출된 영화 <돌아보지마라>(1963), <마의 계단>(1964), <7인의 여포로>(1965), <시장>(1966), <만추>(1966), <귀로>(1967), <망각>(1967) 등에서 문정숙은 이만희 감독의 분신처럼 모순의 무게를 부여 받았다.
때로 이만희 감독의 밀실공포적인 미장센은 문정숙의 신체에 필름누아르의 엄밀하게는 팜므 파탈의 음영을 새겨넣었다. 남성에게 버림받는 여자이지만 곧 이를 반전시키고 음모의 중심이 되어 남성을 위험에 몰아넣는 그 이미지는 어쩌면 "복수의 페르소나"라 이름 붙일만하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있는 여자의 신경증적인 그런 얼굴로 문정숙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문정숙은 20대에 출연한 영화들에서 창녀부터 댄서, 바걸, 미친 여자, 교사, 여대생, 직업여성, 정숙한 부인, 서민층의 억척스런 아내까지 다양한 폭의 연기변신을 거듭했고 <시장>이나 <만추>에서 내면으로 파고드는 억제된 연기로 극찬을 받기도 했으나 30대에는 주로 스릴러의 권력을 소유한 "히로인"으로서 완전무결함을 보여주었다. 그후 96년 <학생부군신위>(박철수)까지 세월에 마모되어가는 자신을 얼굴을 기피하지 않고 거의 쉼 없이 카메라와 함께했다. 이는 문정숙이 스타이기 이전에 연기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렬함 속에 권태로움마저 묻어나는 일면 모순적인 눈빛으로 자연주의의 연기를 모색함으로써 스크린 배우로서의 진정성을 획득한 문정숙은 명실공히 "한국의 마리아 셀"이었다. 물론 "요염"한 외모와 자연스러운 연기를 견주어 "한국의 마리아 셀"이라 불리운 여배우는 많았지만 문정숙만큼 그 이름에 값하는 영화배우는 드물었다.
[1923년] 한국 사학자 노명식(盧明植) 출생
1923. 3. 12 평북 의주~.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1975년 〈불란서 제3공화정 확립과정의 연구〉로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2~68년 경북대학교 강사·조교수·부교수로 재직했고, 문리대학장을 역임했다. 1959~61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 연구소 객원교수로 재직했다. 1968~76년 경희대학교, 1976~79년 성균관대학교, 1979년부터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연구분야는 프랑스 최근세사를 주로 하고 있다. 저서로는 〈프랑스 제3공화정 연구〉(1976)·〈서양사학사론〉(1977)·〈현대역사사상〉(1978)·〈프랑스혁명에서 빠리콤뮨까지〉(1980)·〈전환의 역사〉(1978)·〈현대사의 길목에서〉(1978〉·〈민중시대의 논리〉(1979) 등이 있다. 그밖에 역서로는 〈역사의 연구〉(토인비 저, 서머빌판)·〈세계사편력〉(네루 저)·〈현대세계사〉(톰슨 저)·〈미국과 소련〉(P. 홀랜더 저) 등이 있다.
[1923년] 미국 우주비행사 시라(Schirra, Walter Marty, Jr.) 출생
1923. 3. 12 미국 뉴저지 해큰색~.
1962년 머큐리 계획의 일환인 시그마 7호에 탑승했으며, 우주공간에서 최초로 랑데부를 기록한 제미니 6호(1965)의 지휘조종사였다. 13세 때 비행을 시작했으며, 1945년 메릴랜드의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의 항공기 조종사가 되었다. 6.25전쟁중에는 90회나 출격(出擊)했다. 시험조종사인 그는 1959년에 임명된 최초의 우주비행사 7명 가운데 한 명이다.
1962년 10월 3일 시그마 7호를 타고 지구 주위를 6번 선회(旋回)했다. 토머스 P. 스태퍼드와 함께 제미니 6호를 탑승할 예정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로 2번 연기되어 결국 제미니 6호는 7호보다 11일 뒤인 1965년 12월 15일에 발사되었다. 제미니 7호와 성공적으로 랑데부하여 이 우주선의 받침대까지 접근했다. 돈 아이젤, R. 월터 커닝엄과 함께 아폴로 계획중 최초의 유인비행을 한 아폴로 7호를 지휘했다(1968. 10. 11~22). 그들은 유도(誘導) 및 제어 장치와 미래의 달 비행을 위해 로켓 기관의 재시동능력도 시험했다. 1969년 해군과 우주계획에서 은퇴한 뒤 콜로라도에 있는 개인회사의 중역이 되었다.
[1784년] 영국 지질학자, 목사 버클런드 (Buckland, William) 출생
← William Buckland, ca. 1845
1784. 3. 12 잉글랜드 데번셔 액스민스터~1856. 8. 15 런던.
지질학적 발견들을 성서 및 창조론(創造論)과 조화시키려는 선구적인 노력을 했다. 그는 하천작용(河川作用) 이론을 부인했고, 지구상의 모든 침식·퇴적 작용은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에 기인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고생물(화석)을 포함한 지층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국에서 처음으로 빙하작용의 증거에 대해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대홍수의 유물 Reliquiae Diluvianae〉(1823)을 저술했고 〈자연신학 관점에서 본 지질학과 광물학 Geology and Mineralogy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Natural Theology〉(1836)을 브리지워터 보고서의 하나로서 발간했다. 그는 1808년 영국국교 사제로 임명되었고 1813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 광물학교수로 임명되었다. 1845~56년에는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장으로 재직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2004년 오늘 노무현(盧武鉉, 1946~ )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56년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박관용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표결을 저지하는 열린우리당 의원과 국회경위들간의 격렬한 몸싸움 직후 실시된 이 날 탄핵안 표결은 의결정족수를 12표나 넘겨 재적의원 271명 가운데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가결됐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됨에 따라 국회는 청와대에 탄핵소추 의결서를 전달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권한행사가 정지되면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을 대행하게 됐다.
탄핵심판을 맡은 헌법 재판소는 두달에 걸친 탄핵 심판 과정을 거쳐 5월 14일 국회가 청구한 선거법 위반 등 탄핵 사유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박탈 시킬 정도로 중대한 위반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탄핵안 기각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정지 63일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톨릭의 2000년간 과오에 대해 참회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가톨릭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의미깊은 미사가 진행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annes Paulus II, 1920~2005)가 2000년 3월 12일 미사를 통해 가톨릭이 지난 2000년 동안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 것이다. 교황은 사순절을 기념하기 위한 보라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성당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성직자와 교인 1만여명이 참석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까지의 40일간을 가리키며, 예수가 광야에서 금식 등을 통해 악마의 유혹과 고통을 이겨낸 40일간을 기리기 위한 것. 교황은 특별히 `용서의 날`을 사순절 기간 중에 택해 참회의 뜻을 강조하고자 했다. 교황은 "우리 가톨릭은 기독교도들 사이의 분파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대적인 의식 등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강론했다. 교황의 강론 중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이란 표현은 종교재판과 십자군원정, 그리고 강제적인 개종 요구 등의 과정에서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박해를 의미하는 구절로 사용돼 왔다.
교황은 이어 3월 20일부터 역사적인 중동 순방길에 올라 3월 27일까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의 성지를 돌아보며 종교적 화해를 호소했다.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은 1964년 교황 요한 바오로6세 이후 36년 만으로 예수탄생 2000년을 기념해 이루어졌다.
[1978년] 뮤지컬 <레미제라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빅토르 위고(Hugo, Victor, 1802~1885)의 소설을 뮤지컬화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은 나폴레옹 제국 시대 이후 동맹국이 프랑스왕으로 추대한 샤를르 10세의 시대가 멸망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뮤지컬로 만든 사람은 프랑스인 작곡가 알랭 부빌과 클로드 미셀 숀버그이다. 1967년 이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 계획을 세우던 중 1972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관람하고는 오페라와 팝을 조화 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잡은 이들은 우선 앨범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 그 앨범은 프랑스에서 발매후 골든 앨범을 기록하였고 무대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오페라와 뮤지컬의 장점을 조화시킬 수 있는 주제를 가진 작품을 찾았고, 그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었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서사적인 이 작품을 9개월이나 걸려 3개의 막과 6개의 극적 장치 그리고 하나의 에필로그로 대사없이 노래와 음악으로 만들어냈다.
레미제라블은 공연보다 음반이 먼저 발매되었고, 1980년 10월 파리에서 초연이래 3개월 동안 연일 매진되었다. 영국의 뮤지컬 제작자인 카메론 매킨토시는 파리에서 공연이 끝난 지도 한참 뒤에야 음악을 듣고 프랑스로 이들을 찾아왔다. 매킨토시는 이들과 원작을 부분적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1985년 10월 드이더 런던 바비컨 극장에서 [레 미제라블] 이 공연되었다. 이후 이 레미제라블은 뉴욕 브로드 웨이 공연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는 뮤지컬이 되었다.
수상경력은 1987년 뉴욕 공연 후 그해 토니상에서 작품상, 조연남우상, 조연여우상, 연출상, 극본상, 작사.작곡상을 비롯한 8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1963년] 울산정유공장 착공
1963년 오늘,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이 착공됐다.
우리 나라에서 외국과 합작투자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진 정유공장이다. 미국의 거대 석유회사인 걸프가 5백만 달러의 투자금과 2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듬해 5월 준공된 울산정유공장은 하루 3만5000배럴의 원유를 정제했다. 원유정제과정에서 LPG가 생산되자 1966년 교통부가 6개월 동안 LPG버스를 시험운행한 데 이어 1969년에는 LPG버스를 700대로 늘려 본격운행했다.
울산정유공장이 생기기 전까지 미국은 정제가 다 된 석유류를 무상원조하면서 우리 나라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YTN
그밖에
2003년 세르비아 총리 조란 진지치 피살
2003년 프랑스 교도소서 무장강도 페라라 ‘바주카포 탈옥’ 사건
2002년 유엔 안보리,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 채택
1994년 영국 성공회, 최초의 여성사제 서품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1993년 천주교 지학순 주교 사망
1992년 대전 도매시장 화재
1990년 강호동, 18대 천하장사에 최연소 등극
1985년 미-소 군축협상 제네바에서 재개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으로 선출
1983년 구소련의 경제학자 예브세이 그리고리에비치 리베르만 사망
1979년 칸핀스 베네주엘라 대통령 취임
1979년 이란, 중앙조약기구(CENTO) 탈퇴
1978년 프랑스 총선 우파 승리
1976년 정일권 국회의장 피선
1973년 9대국회 개원
1971년 국군, 서부전선 미2사단 지역 20km, 155마일 휴전선을 국군이 전담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차관, 관리부실업체 정비 지시
1968년 모리셔스,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집권
1966년 인도 식량 폭동 발생
1965년 한·미 기관차 도입 차관협정
1964년 제6차 한일회담, 2년 만에 재개
1960년 왜관에서 미군 집단린치사건 발생
1955년 미국의 알토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사망
1955년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 사망
1952년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단행 1951년 신문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첫 발표
1948년 유엔한국위원회, 가능한 지역의 선거안 재가결
1943년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 사망 - 오슬로의 프로고네르 공원의 분수광장으로 유명
1938년 독일군, 오스트리아 침공
1928년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 출생
1923년 포노필름(Phonofilm) 기자회견장서 첫선.
1920년 이집트 독립선언
1917년 러시아체제 폐지
1912년 미국 걸스카우트 창단
1911년 멕시코의 대통령(1964-70) 디아스 오르다스 출생
1898년 핀란드 역사 소설의 아버지 토펠리우스 사망
1885년 우리나라 최초 병원 광혜원, 제중원으로 개칭
1858년 ‘뉴욕타임스’ 발행인 옥스 출생
1838년 아닐린 염로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퍼킨 출생
1832년 프리델-크래프츠 반응을 발견한 프랑스 유기화학자.광물학자 프리델 출생
1790년 다니엘 출생 - 초기의 전지(電池)인 볼타 전지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다니엘 전지를 발명한 영국의 화학자·기상학자
1787년 스페인의 극작가. 시인. 비평가 가르시아 데 라 우에르타 사망
1685년 영국 철학자 버클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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