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의 본질에 대하여>
오늘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에 대하여 생각해보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씀을 배우고 듣고 자라왔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곧 영적인 죽음이라는 의미라고 배웠다. 그래서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거듭남이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지는 것이므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배우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칼빈의 5대 교리(튤립) 중에서 첫번째인 ‘전적인 타락’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선을 행하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이며, 그 마음에 온갖 부패로 가득 차 있는 존재다. 자력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구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행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실 때 마치 아담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대하셨다. 그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담도 그렇고 이스라엘도 그렇고 오늘의 교회도 그렇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도 아담에 비유되고 참 이스라엘로 비유되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그것을 성경의 용어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전적인 타락의 교리는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위치와 신분에 대하여 설명하는 듯하다. 전적인 타락의 교리는 원죄와 자범죄를 인간이 메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대하시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이 계속해서 그 언약을 깨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새 사람을 대하듯이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유대인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존재의 변화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분의 변화 또는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적인 타락의 교리를 전제하기에 전적으로 새롭게 된 존재로서 이해하는 것 아닐까? 신자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아담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기회가 주어진 것과 유사하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말은 그 앞에 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시 만물을 축복하는 제사장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며,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로마서 8장 29~30절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다시 자신의 대리인과 상속자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도 적용된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현인데, 그것은 보통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받을 영광으로 이해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대리인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선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얻은 그 영광의 직분에 대하여 깊이 감격하지 않는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이르지 못한 영광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상속자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지위와 신분이며, 신자가 이미 얻은 영광도 바로 그 신분과 지위다. 그리고 그런 신분과 지위를 가진 신자는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거기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한다(롬 5:2). 이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는 바로 그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이다(시 27:4).
이렇게 보면, 성경이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계속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다. 그 청지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며, 동시에 이 세상을 맡아 관리하고 다스리는 왕으로서 살아간다. 그것은 예배와 봉사(섬김)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속 그런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기나긴 구약성서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자신을 드리셨다(벧전 3:18).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은 영화롭게 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은총을 세상에 펼치는 왕으로 살아가는 것도 영화롭게 된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이 구원의 서정으로 표현된 로마서 8장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전적인 타락의 교리나 존재의 변화라는 설명은 더 큰 그림 속에서 이해되고 다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신자는 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인 이유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들어섰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즉, 그들이 맡았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갈 특권과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 그리고 특권과 사명을 이렇게 깨닫고 보면 자신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존재가 전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야곱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입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칼빈의 전적인 타락 교리와 원죄의 교리를 배울 때 무언가 불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영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일깨워 주기는 하지만 대신에 인간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단점도 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예레미야의 글과 예수님의 인간 내면에 대한 설명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현재 기독교회의 인간론은 그 색채가 너무 어둡고 암울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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