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3주)
일과 기도의 경계에서
수3:7-17; 살전2:9-13; 마23:1-12
만추입니다. 대지를 적시는 가을비, 찬연한 가을하늘, 들에 핀 코스모스와 억새,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는 바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흩날리는 낙엽, 노을이 지는 하늘 위로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열리고 충만해지곤 합니다. 어머니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계절의 흐름을 따라 대지의 생명력을 받아들이고,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떠나보냅니다. 대자연은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법을 알고 순명합니다. 향심기도를 배우지 않았지만, 자연은 이미 기도가 일상이고 삶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통해서나 무언가를 소유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본래의 자기가 되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전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글귀가 떠오릅니다. “나무는 나무로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것이 됨으로써 나무는 하나님께 순명합니다. 말하자면 나무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동의합니다...나무가 나무다워질수록 그 나무는 그만큼 더 하나님을 닮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늘 분주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일과 기도의 경계 사이에서 우리는 망설이기도 하고, 혼란스러움과 좌절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이럴 때마다, 절망 속에 주저앉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자연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대지를 걸으며 우리 존재의 근원이 흙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겸손을 배우고, 모든 곳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만나면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늦가을의 정취와 원숙한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여러분의 본질이 아름다움이고 성스러움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마음과 몸과 영혼을 통해 경험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여호수아서 본문은 언약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의 삶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년간 광야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라는 첫 번째 난관을 만났습니다. 요단강은 항상 쉽게 건널 수 있을 만큼의 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봄 추수기 동안에는 북쪽에 있는 산에서 눈이 녹아 강을 범람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공교롭게도 요단강이 창일했던 시기에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범람한 요단강은 그들 앞에 놓인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망설이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데 유의해야 할 점들을 미리 알려줍니다. ‘당신들이 이전에 가 보지 않았던 길이기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가는 길을 앞에서 안내할 것이다. 당신들과 언약궤 사이에 거리를 띄우고, 그 궤에 가까이 가지 말라.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주님께서 당신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들어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렸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사람들 가운데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스러움과 온전함이 우리 안에서 미치지 않는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성스러움이고, 아름다움입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이제 요단 강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물에 닿으면, 요단 강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끊기고, 둑이 생기어 물이 고일 것입니다.(수3:13)”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가에 닿았을 때,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단강의 마른 땅을 건너 여리고 맞은편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습니다.
강 한가운데서 제사장들이 발바닥으로 딛고 있는 자리는 바로 흙이고, 땅이었습니다. 겸손을 뜻하는 라틴어 humilitas는 인간을 뜻하는 homo와 함께 흙, 먼지를 의미하는 humus를 어원으로 갖습니다.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3:19a)”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흙은 우리 삶의 토대이자 존재의 근원입니다. 흙은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흙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비하와는 다릅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감추어놓은 절망의 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못하면 즉시 자기비하라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잡초를 키우는 자존심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에 만족할 수 없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낙담과 절망을 합니다. 절망은 자기 사랑의 극치이며, 자존심이 극도로 발전한 것이어서 아주 고집이 셉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 운명을 완성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보다 파멸이라는 불행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자기비하 같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겸손 안에서 모든 이기심은 사라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혼자, 자기 힘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자신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꽃피웁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매순간 동의하면서, 자기 안의 구겨지고 접힌 부분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펼쳐나갑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규율과 율법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온화함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대합니다.
다음 순간에 무슨 경험을 하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손에 달려있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달갑지 않을지라도 그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자각하면서 머물 때, 우리의 본질은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우리의 경험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상황은 그 순간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 됩니다.
요단강 안에서 언약궤가 머물던 자리는 깨끗하게 성별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실 때에 비로소 거룩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자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수없이 좌절하는 하찮고 혼란스러운 곳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하찮고 보잘 것 없어서 우리가 외면하는 가장 낮은 자리인 발바닥과 흙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안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것들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바로 그 자리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데에만 치중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빈곤을 들키지 않으려고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내면의 성스러움을 보지 못한 채 겉으로 거룩한 척 행동합니다. 부드러움과 친절함으로 자기 자신을 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찌질함과 하찮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높은 영적 이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면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을 기억하면서, 존재가 우리 일상의 삶이 되어 가도록, 우리 안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피어나도록, 늘 자신의 가장 낮은 자리인 발바닥과 흙을 접촉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 가운데 머무셨습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의 발바닥과 흙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일이 귀찮고, 지긋지긋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현존을 떠올릴만한 삶의 여유가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그만큼 언제나 너무 바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는 누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있어서 강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로 시간을 내어 이 자리로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강 가운데로 들어가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튼튼하게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잘 느껴지거나 믿기 어려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일과 기도의 경계를 세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매일 시간을 내어 기도와 산책을 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때, 우리는 서서히 존재하는 법을 연습하고 배우게 됩니다. 존재가 우리의 일상이 되도록 온유함과 친절함으로 자신을 대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동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앞에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그분이 하시는 일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당신의 품 안에 머물며, 본래의 나로서 존재하길 갈망합니다. 당신의 창조적 사랑에 동의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시오.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