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현대시문학 청소년문학상 대상
이은영(경민고 3년)
(시) 나의 주름진 바다에게
회색 방, 뒤돌아 앉아있는 할머니의 척추를 본다
창백하고 건조한 시멘트 빛 피부, 그 사이로 솟아오른 수평선을 본다
반지하 창문으로 걸러진 햇살이 등허리에서 부서져 후두둑 떨어진다
온점만이 쌓인 곳, 문장의 마지막들이 넘치는 곳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침묵과 뭉뚱그린 꿈결이 불어오는 이 방에서
할머니는 바다를 만들고 있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척추의 경계를 본다
바다의 주름살을 물고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본다
푸른 치마를 입고 함께 일렁이는 할머니를 본다
묵묵히 반짝이는 나의 고운 바다를 본다
(시) 밤을 쫓는 드라이브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속도를 올려!
너는 페달을 밟았다
요란한 펑크 음악이 시트에서 새어나왔다
터널의 끝
밤이 검정 재킷을 흔들었다
도시는 파랗게 빛났다
머리칼 사이로 흔들리는 불빛들이
아스팔트를 향해 떨어졌다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부딪히는 바람은
쉽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활짝 열어놓은 트렁크에서
너를 볼 때마다 부서졌던 문장들과
다음 날로 넘어가지 못한 일기들이 쏟아졌다
충분히 불러주지 못한 이름과 어긋난 채 달려온 우리의 뼈들이
아스팔트 속으로 가라앉았다
자동차가 가벼워졌다
공중을 떠도는 마른 바람들이 파삭, 부서졌다
훌쩍이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라지는 밤을 쫓아 달려야 했다
해가 뜨면 아픈 단어들을 담담하게 나열해야 하기에
(시) 구름의 그림자가 덮는 것들
구름의 그림자가 잔디를 덮고
나무를 덮고, 병원을 덮고, 병실을 덮을 때면
넌 이불을 덮고 얼굴까지 덮을 때면
난 내 귀를 네 배에 덮고 숨 쉬는 일
너의 심장은 왜 거꾸로 뛰는 거지?
-그림자가 심장의 눈을 가렸거든
넌 어디에 있니?
-난 구름의 뱃속에 있어
구름의 그림자가 너의 얼굴을 덮는다
이불 밖으로 먹구름이 피어오르면
어쩐지 비가 올 것만 같아
우산을 폈다
2017 경민문학공모전 대상
(시) 어린 몽상가로부터-몽상가에게로
3년 이은영
다섯 살짜리 그릇은 이가 빠진 나를 바라보고
동병상련이라며 깔깔거렸지
베라 베르토 베라 베르토
유리컵이 되지 못한 까마귀는
곰팡이 핀 벽 구석으로 모습을 감추었어
슬픔에 젖은 나는
꾸중으로 부풀어 오늘 볼을 방충망에 대고
허락되지 않은 바깥 세계를 훔쳐보고는 했지
정사면체로 우수수 떨어지는 176개의 나를
누군가 주워 마법세계에 데려다 주는 상상,
격자무늬가 새겨진 양 볼을
그 증거라고 들이밀면서 유난히 자랑스러워 했어
꿈으로 피어나는 아이라며 나를 쓰다듬던
사람들 손가락에는 나비의 파편이 깊숙이 박혀 있겠지
가짜의 품 안에서 허우적대지 않기로 약속해
이제 사라진 그들을 위해 애도의 춤을 출거야
제22회 둔촌문학상 운문부 차상 작품
(시) 떨어진 벚꽃 잎에게 보내는 편지
경민고 3학년 이은영
때 이른 벚꽃 잎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교실 구석에서 슬프게 맴돌던
네 이야기를 어금니에 묻었다.
바스러진 웃음소리와
이따금 부풀어 오르는 눈꺼풀을
지우개로 지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흩어지던 아픔들
어쩌면 우린 너의 봄을 밀어내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아지랑이로 피어난 너와의 마지막 호흡
네 사진과 네 모든 것들이 운동장을 돌아 빠져 나갔다.
우린 이 봄이 못 견디게 따스해서
숨이 막혔다.
우리들의 얼굴 위로 벚꽃 잎이 하나, 둘 쏟아졌다.
온통 만개한 벚꽃들
네가 보지 못하는 봄이 오고 있었다.
(시) 슬픈 일기장
경민고 3년 이은영
밤마다 천장에서 자라나는 미모사와
내 머리칼에 빛나고 있던 죽어가는 별을
아빠의 발바닥에 박혀 있는 가뭄의 흔적과
엄마의 무릎에서 들려오던 딱따구리 소리를
장판에 주리를 틀고 물방울을 낳는 방울뱀과
젖은 벽지에만 피는 검은 꽃을
새카맣게 물든 하루를 구두에 닦아내던 아저씨와
주인 없는 동네에 무너져 내린 아카시아나무를
어린 나의 일기장에
슬픔이라 기록된 것들이 지난 꿈처럼 떠올랐다.
어쩌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야기
눈물로 뭉개진 그때의 사람들이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손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밤
첫댓글 이은영은 고 임경자 선생님께서 운영하던 문예샘터 행사에도 시 낭송 등 출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