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캄보디아
시차 -> 2시간 느림
기후 -> 연평균 27도로 년중 일정한 기온을 유지한다. 밤의 습도가 매우 높아
90%정도이고,낮에는 80%를 유지한다. 11월부터 2월까지 이어지는 건기에는
22-31도,평균 강수량은 47mm이다.
일조시간이 평균 8시간 3월부터 5월까지는 캄보디아에 매우 무더운 날씨가
찾아온다.
평균 기온 24-37도, 평균강수량 70mm. 특히, 4월은 북동 몬순의 영향으로
기온이 상승하고, 강수량이 현저히 줄어든다.5월부터 10월에 이르는 우기에는
남서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
지리 -> 총면적 181,305km으로, 북쪽으로 태국,라오스,동쪽과 남쪽으로
베트남, 서쪽으로 캄보디아만으로 둘러싸여 인도차이나 반도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해안을 따라 태국만이 만나는 곳에는 충적토(흙과모래가 떠 내려와
쌓인 편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변은 산과 동쪽은 메콩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야의 중심에는 메콩이 만들어낸 수장원이 풍부한
톤레삽호수가 있다.
음식 -> 캄보디아의 음식은 태국,라오스,베트남 등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음식문화가 형성되었다. 프놈펜과 씨엠립의 음식점의 증가는
중국음식과 베트남음식을 즐길 수 있겠끔 되었고 쌀은 주재료이며
Battanbang Region은 전통 밥그릇이다.대부분의 캄보디아음식은
chnang rhtear이라는 중국식 요리용 팬으로 요리를 한다.
종교 -> 고대시대로부터 캄보디아는 인도로부터 힌두교와 불교를 받아들였다.
힌두교가 보다 폭넓게 퍼져,앙코르사원에서는 대부분의 유적이 힌두양식을
보이고 있고, 불교양식 또한 같이 혼재되어 남아있다.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로 자리매김 하였다.
프놈바켕(Phnon Bakeng)
9세기 후반 야소바르만 1세때 지어진 프놈바갱은 앙코르 왓 북쪽 1,300m / 앙코르톰 남쪽
400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67m 높이의 언덕 위에 위치한 사원이다. 동쪽편의 언덕으로
오른다(계단이 일부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 왓의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똔레쌉 호수 옆에 있는 프놈 끄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복의 북동 방향, 프놈 꿀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석양이 질 무렵의 모습이 아름다워 저녁나절에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이곳은 시바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서기 889년 야소바르만 1세가 즉위한 뒤,
야소하라프라라는 자신의 도시를 롤루오스 북쪽에 세우면서 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 바켕 사원을 지었다
바켕 사원은 바위를 깨어 축조하면서 사암으로 외부를 쌌다. 이 건축 방법의 흔적을
북동 및 남동쪽 모서리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진보된 기술과 더 내구성이 강한
건축자재를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앙코르 유적중 층으로 쌓은 최고층에 5개의 신전을 지은 것으로는 이 곳이 최초로,
이러한 설계는 이후에 많이 적용되었다.
또한 기초 층에도 다른 탑들을 세웠던 배치 구조로는 첫 번째다
프놈바켕사원의 벽면조각
프놈바켕의 일몰
만행수행중인 스님과
바이욘사원
앙코르 톰 중심에 위치한 바이욘 사원은 ‘크메르의 미소’를 대표하는 석상들로 앙코르와트
만큼이나 유명한 사원이다. 12세기 자이바르만 7세에 의해 불교사원으로 건축되었는데
앙코르톰의 중심사원으로 약 5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바이욘사원에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을한 자야바르만 2세의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처와 동일시된 왕의 위력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동서남북을 향해 엷은 미소를 내뿜고 있는 석상들은 관세음보살상 혹은 자이바르만 7세,
누구든 간에 그 신비스런 미소는 앙코르 톰의 백미임이
틀림없다. 처음에는 54개의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37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햇빛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석상들의 표정은 그저 신비스럽기만 하다.
앙코르톰의 중심에 있어 크메르 우주론의 메루산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코끼리 테라스 (Elephant Terrace)
12세기말 자야바르만 7세때 축조된 앙코르톰의 왕궁 정원을 마주보고
있으며 이곳은 왕궁 터였지만 실제로 왕궁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코끼리 테라스에는 왕궁을 증축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왕궁의 중 개축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자야바름반
7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코끼리 테라스는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데, 바푸온 사원에서 문둥이 왕 테라스까지 뻗어있다.
이 테라스의 외벽은 세 단으로 나뉘어져서 아주 깊게 부조되어 있다.
남쪽의 계단에는 머리 셋 달린 코끼리가 코로 연꽃을 모으는 조각이
새겨진 기둥이 받치고 있다. 각 단의 벽은 중앙 계단을 받치고 있는
사자와 가루다의 조각이 있다.
문둥이왕 테라스 (Leper King's Terrace)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때 지어진문둥왕 테라스는 코끼리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이 테라스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외벽과 나란하게 안쪽에 겹으로
벽이 되어 있다. 프랑스가 이곳을 보수하면서 바깥벽과 비슷한 구조의 부조가 된
두 번째 벽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부 건축 전문가들은 이 두 번째 벽이
건축 설계를 변경하여 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역사 학자들은 이것이
지상의 메루산과 똑 같은 지하의 메루 산자락의 일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전설의
내용을 앞세우기도 한다.
현재 이곳에 있는 문둥이 왕(Leper King)의 상은 복제품이다.
실물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있다. 문둥이 왕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앙코르에서 보기 드문 조각으로 학자들 중에는 이것이
'자바'의 스타일이라고도 말한다. 이 특별한 조각의 또 다른 특징은 문둥이 왕이 옷을
거의 벗고 있고, 남성 심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조각이 문둥이
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역사 학자는 이 조각이 부의 신인 '쿠베라'를
의미한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쿠베라가 문둥병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조각에는 14-15세기의 문자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뜻은 '야마의 심판'이란 의미로
야마(염라대왕)는 죽음의 신 또는 심판의 왕으로 불렸다.
따프롬사원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장소로 잘 알려진 따프롬은 건물을 뚫고나온 나무들이 기둥과 벽을
감싸는 특이한 모습이다. 2세기에 왕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불교사원으로 앙토르톰의
외곽에 있으며 정글에 오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이다. 지야바르만 7세때 건립되었으며
당시에는 3천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살던 대 사원이었으나 그 후에 방치되었다.
이제는 돌기둥과 천장이 무너져 고색창연한 기운이 감돈다. 앙코르 유적중에서 가장 신비로움을
풍기는 곳으로 어떤안내서에는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미지의 공간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톤레삽 호수 (Tonle Sap Lake, 'The Great Lake' )
크메르인들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호수다.
크리스탈처럼 맑거나 옥빛을 띤 호수는 아니다.
메콩강은 황토흙을 실어나르기 때문에 탁한 황토색을 띤다.
해질녁에 물빛이 황금색으로 물들 때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호수 주변에서 배를 빌릴 수 있다.
똔레삽 호수는 캄보디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지리적인 경이물 중의 하나이다.
똔레삽 호수는 길이가 160km이고 너비가 36km에 이른다.
건기에는 3,000km2의 면적에 수심 1m 정도를, 우기에는 10,000km2 면적에 12 m 수심이 된다.
똔레삽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어류가 있고,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우기가 시작되는 6월 이전까지는 습지에서 고기를 잡는 많은 물새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잉어나 메기, 담치, 청어, 민물농어, 구라미 등의 어류가 서식을 하며,
담수량도 동남아 최대라고 한다.수 세기동안 이 호수주변의 사람들은 1km2당 10톤의 어류
을 잡을 수가 있었고, 크메르의 주요 자원으로 공급되었다. 또한 이 호수는 수도인 프놈펜과의 주요 수로로 이용되었으며, 호수 주변의 다섯 지방과도 통한다.
앙코르왓은 캄보디아 북서부 시엠릿市 근교에 있다. 앙코르와트란 크메르어로
<사원(에 의해 세워진)도시>라는 뜻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통치 아래 1113년 무렵부터
약 30년에 걸쳐서 건립된 사원이다.
이 사원은 해자(垓字)의 길이가 5.4㎞, 나비가 190m, 사원의 서쪽 진입로가 540m이고,
3중회랑, 본전의 높이가 65m나 되는 중앙사당을 중심으로 둘러싼 5기(基)의 탑당(塔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의 규모가 매우 크고, 크메르건축의 정연한 기하학적 평면과 탑당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조화와 원숙미를 보여주는 웅대한 가람이다. 서쪽 진입로에는 포석이
깔려 있고 양쪽에 나가(큰 뱀)의 난간이 있으며 진입로의 좌우에 경장(經藏)과 성지(聖池)가
있다. 동쪽 진입로는 흙으로 쌓은 성채 그대로 남아 있고 남북 진입로 자취도 남아 있다.
사원건립의 사상적 배경은 크메르적 신의 세계(우주관)를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5기의
탑당이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메루산)을, 주위의 벽이 히말라야의 영봉을 모방하였고,
해자는 깊고 무한한 대양을 상징한 것이다. 이 사원의 주신은 비슈누신이며, 왕과 비슈누신을
합체(合體)한 특별한 신상(비슈누신왕)이 안치되어 있다. 그 당시 왕은 생전에 시호(諡號)를
가졌으며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고, 이 사원은 신의 현재(顯在)의 의미를 지닌 왕이 죽은 뒤의
무덤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분묘사원설로 추측되고 있는 근거는 제 3 회랑이 장례의 순례용으로
보인다는 점, 중국인 주달관(周達觀)의 <노반(魯般;앙코르와트)의 무덤(眞臘風土記)>의 기록,
그리고 진입로가 서향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의미하는 점 등이다. 제 1회랑(200m×180m)
에는 띠모양 내벽에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입체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같다.
제재는 주신 비슈누와 그의 화신 크리슈나, 라마왕자, 신과 합체한 수르야바르만 2세 등이다.
부조의 화면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취재한 대전쟁그림(서면 남측), 크리슈나가
폭풍우에서 목자와 가축을 지키는 장면(南西隅塔), 수르야바르만 2세의 위업을 칭송한
역사이야기(남면 서측), 천국과 지옥의 장면과 죽음과 재판을 다루는 신 염마천(閻魔天, 남면
동측), 천지창조에 관한 유해교반(乳海攪拌)의 그림(동면 남측), 가루다(독수리신)의 어깨에
타고 적을 공격하는 비슈누신(동면 북측), 크리슈나와 괴물 바나의 전투(북면 동측),
라마야나에서 채화(採話)한 라마군과 악마 라바나군의 치열한 전투장면(서면 북측) 등이
볼 만하다. 이 회랑부조는 구도·묘사·도상 등에서 솜씨의 차이는 있지만 약동적인 묘사와
파도치는 표현으로 서면과 남면의 회랑이 미술적으로 특히 우수하다. 먼 곳을 화면 상부에
겹치는 방법을 썼고, 2중·3중으로 그려서 입체감을 주는 기법 등으로 수㎞에 달하는 회랑의
벽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새겼으며 전체적으로 웅장·절묘하다. 3층으로 쌓은 흙 위에
제 1 회랑이 세워져 있고 십자형 중회랑(프리아 포앙;千體佛)의 계단을 올라가면 약간 높아진
제 2 회랑이 나타난다. 안뜰을 빠져나가면 급경사의 큰 계단이 나오는데 높이 솟은 5기의
탑당과 제 3 회랑으로 연결된다. 앙코르와트의 조영에 이르기까지는 약 10차례에 걸친
건축양식의 변천이 있었는데, 건축기술의 개량과 경험을 축적하여 미술양식이 발전하면서
이 대가람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이 건물벽의 공간을 메운 아름다운 모습의
네바타(여신)상 및 문미·합각(合閣) 등의 아름다운 조각, 줄지어 늘어선 기둥과네모기둥에
새긴 정교한 장식무늬, 원주창(圓柱窓)과 포탄형(砲彈形)의 탑당 등 독창적인 조형과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방대한 석재(회색사암)는 북동쪽 약 40㎞ 떨어진
푸논쿠렌구릉의 채석장에서 채취하였다. 이 사원의 건축에는 수십만 명의 인부와 포로가
동원되었고, 또한 수천 명의 석공과 불사(佛師)·대경사(大經師) 등 기능인들이 동원되었다.
1432년 앙코르왕도가 다른 곳으로 천도된 뒤 상좌부(上座部;소승)불교의 사원이 되었고
중앙사당에는 5m 크기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앙코르와트는 1908년부터 프랑스의
극동학원에 의해 보수가 시작되었으나 71년부터의 내전으로 중지되었으며, 이 내전으로
회랑벽에 탄흔이 생겼고 일부가 파괴되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유적 가운데에서 백미를
이루는 사원이다.
Angkor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
지금의 시엠레아브 북쪽 6㎞ 지점에 있다.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아바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함)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근대 이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친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바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 자체의 관계는 도시의 주요거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또는 피라미드나 사원은 '데바라자'라고
불리는 신격화한 왕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위대한 절대적 신격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을 왕의 개인
장례용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심부 사원을
새로 짓지 않은 왕이나 실질적 통치자가 아니었던 왕가 구성원, 또는 몇몇 경우에
특정 귀족들이 시바 신이나 왕국에서 섬기던 다른 주요신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숭배장소로 세워졌다. 예를 들면 앙코르
유적의 사원 가운데 가장 거창하며 유명한 앙코르와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자신의 유해를 안치하고 상징적·종교적으로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의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앙코르의 역사와 생활을
이끈 흥미진진한 종교와 정치체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
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1960, 1970, 1980년대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도굴당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방치되었다는
점이었다. 적절한 관리 부족으로 건물들은 급속하고 무성히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으로 황폐해졌다.
포이펫으로 향하는 붉은 황토길
첫댓글 지난 3월 23일 부터 29일까지 정글속에 방치되었었다던 찬란한 유적 '앙코르'에 다녀 왔습니다. 건축과 조각에 매료되어 짧은 관람이 아쉬웠습니다. 약 한달 이상은 출근하다시피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습니다. 고몽님 떠나시는 것도 못 보았습니다. 고몽님 안녕하시지요? 곡차는 종종 하시는지요?
앙코르에 다녀오셨군요.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보다 차화로님의 모습이 원조인것 같네요.저도 6년전 혼자 배낭여행으로 캄보디아를 여행했었는데 그때 보았던 앙코르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사진을 보며 잊고 있었던 그때의 감동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상세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흥미 있습니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멋있는 곳을 다녀오셨네요. 유적 위에서.. 스님들과 함께 앉아 계셔도.. 전혀 이화감없이 바로 그림이 되어버리는군요... ^^*
5/2의 개통일정으로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없네요. 요즘은 아침에 2시간 정도의 산책으로 아쉬움을 대신합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곡차 한잔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