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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16~27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2024. 8. 18.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라는 거대한 문명과 문화의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정이 같고 모습이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결론에서 늘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가자면 은혜를 입은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말씀 앞에, 주의 복음 앞에 삶에 대한 열정과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말씀이라도 들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소화하고, 지키고 전할 수 있었던, 그렇게 열정이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을 상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열정을 품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신앙을 달리기에 비유를 합니다. 오늘 본문 뿐 아니라, 그는 자주 믿음의 길을 달음질과 경주로 비유했습니다. 여러분, 왜 경주를 할까요? 상이 있기 때문이고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린다는 표현을 많이 쓴 이유는 당시 이미 마라톤이 성행했으며 거기서 우승하면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본인이 속한 공동체와 국가까지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올림픽의 클라이막스가 무슨 종목입니까? 마라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거리가 아니고 마라톤과 같습니다. 초점은 언제나 그에 따르는 상입니다. 딤후4:7~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상 받기를 소망하면서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렇기 때문에 부름의 상을 위하여 걸어가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finish라인까지, 끝까지 테이프를 끊으려고 힘써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정과 태도가 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질 상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신앙의 경주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지막에 받을 상을 뼛속 깊이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받을 상 때문에 태도가 달라지나요? 큰 상일수록 임하는 마음가짐이 진지하고 간절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상은 어떤 상이든 시간이 지나가면 의미가 퇴색됩니다. 노벨상도 오래 기억되지 않고, 그 영광도 얼마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슴에 담고, 본 것은 썩지 않을 상, 썩지 않을 면류관입니다. 잠깐의 박수로 끝나는 순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모든 것을 내어 던졌습니다. 인생을 던지고 지식과 공회원의 신분까지 던졌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 상을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대하고 가슴에 품은 이 상을 받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를 말씀합니다. 특히 본문은 권리포기라는 훈련과 단거리가 아닌 지속 가능한 성실과 목표한 방향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 표현이 무엇인가요?
1. 권리포기라는 훈련입니다, 여러분, 상을 받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는 상도 없습니다. 골프의 천재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도 하루 3000타 이상을 쳤습니다. 그냥 우승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finish라인을 통과 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우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 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썩을 관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관을 얻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 훈련의 내용이 무엇이냐? 바로 절제훈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분야에 있든지 무엇인가 조그만 것 하나라도 이루려면 훈련이 필요한데, 그 훈련이란 것이 대부분 절제 훈련 아닙니까? 국가 대표가 되면 선수촌에 들어가는데, 일단 선수촌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자고 싶은 대로 잠도 못 자고, 마음대로 외출도 못 하고, 밤에 라면을 끓여 먹어도 안 됩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 안 가 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 이상한 풍조가 들어왔습니다. 문명의 도시이면서 향락도시이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이 넘쳐났습니다. 제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세상이나 믿음의 사람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절제훈련이란 것을 알고, 절제가 되어야 상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교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똑같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바로 절제이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 테크닉을 연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와 달란트가 많았습니다. 더불어 받은 은사와 달란트를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테크닉이나 달란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절제훈련입니다. 27절.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것은 복싱 용어인데 그것은, 제 맘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완전히 KO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언제든 그렇습니다. 육체와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하면 얼마 못 가서 아웃이 됩니다. 이제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좀 익숙해 졌습니다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면 아! 오늘 하루만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누워있고 싶은 욕망을 쳐서 복종시켜야 조그만 것 하나라도 이룰 수 있고 교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계속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믿음은 성숙해야지요. 하지만 이 것 또한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말씀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벌어지는 것 같고, 그 간격을 메우기란 여간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 싶은데 마음뿐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서 결심하더라도 훈련되지 않으면 날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삶은 절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9;1-에서 사도의 권리에 대하여 말씀을 하는데 자유자라고 하면서 절제를 말씀합니다. 4절에 먹고 마실 권한이 없느냐?, 5절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느냐? 6절에 일하지 않을 권한이 없느냐? 12절에 다른 사람도 이런 권한을 가졌는데 우리도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절제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인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살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절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절제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절제 훈련은 삶을 좀 가볍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삶을 가볍게 만들 때 말씀이 들려오고 순종하기가 쉬워집니다. 나비를 보세요! 내려앉고 날아오를 때 꽃잎 하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볍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꼭 필요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인생의 무거운 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집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과하게 융자를 끼고 집을 마련하지요. 그러나 그때부터는 거기에 매여 전혀 여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파서 눕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일에 치여서 꼼짝도 못하고 경조사가 생겨도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순위가 아닌 것에 칭칭 감겨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꽃잎도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가 있으면 그것마저 떨궈내야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뼛속까지 비워서 자기를 날게 하듯이 삶을 무겁게 하는 것을 떨쳐내야 합니다. 여러분, 물 흘러가듯이 세상 따라가는 삶에 집착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절제하는 이유는 절제하는 만큼 새로운 힘과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즐거움이 따라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여러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려야 인생의 경주,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 이루고 싶습니까? 영적 달음질에 속도가 나고 있나요? 아니면 그 자리에 있습니까? 이전이나 연초나 지금이나 삶이 반복되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쓸 데 없는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쳐 냈습니다. 아닌 것에는 잔인할 만큼 No를 했습니다. 어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다 하고, 불러주는 대로 다 가고, 박수 친다고 거기 현혹되고,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목적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많다면, 내 무거운 짐을 떨쳐내지 않는다면 매일 그 자리가 됩니다.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통제하지 않고, 엄중하게 다루지 않는 한 결심뿐입니다. 그래서 바보는 늘 결심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 자신의 무거운 짐을 떨쳐내는 자기 절제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말씀은 말씀대로만 있고 삶에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애착을 갖고 계십니까? 무엇에 삶의 힘을 빼고 있습니까? 신앙은 기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절제입니다. 힘을 사용할 때와 뺄 때를 적용하는 완급 조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방만한 것들을 정리하고 정말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때에 건강한 경주가 됩니다. 절제 훈련을 통하여 예비 된 상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경주는 단기 속성이 아닙니다. 단거리가 아니고 속성이 아닙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꾸준한 성실이어야 합니다. 영적 성숙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성실함과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산책을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살기로 달렸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그 아픔과 그 관문을 지나가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한 싸웁니까? 42.195 키로 미터의 마라톤에서 찾아오는 유혹과 끊임없는 유혹은 어떤 것일까요?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 입니다. 중도 포기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삶을 현실 속에서 살아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예배와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 부딪히면 어떻습니까?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그냥 다 내려놓고 눈 딱 감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말씀을 내려놓은 채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신앙인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은 정말 지뢰밭 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작정하는 순간, 숱한 세상의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광야입니다. 들짐승이 있고,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가 있습니다. 길을 내어주지 않고, 가로막는 아말렉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의 저항을 받습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고 하면 죽을 것 같고, 밥도 못 먹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닥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처절한가? 어느 때는 안쓰럽고, 측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감당할 수만 있다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함부로 말씀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시간의 간격이 있고, 그 안에서 맞닥뜨릴 영적 싸움은 제 몫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그럴 때에 무엇을 느낀다구요? 그만 두고 싶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10번씩이나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전진하던 것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파리 올림픽이 매듭되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메달을 손에 넣은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 속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을까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숱한 힘든 순간이 있었을까요?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얼마나 많이 자주 맞이했을까요? 하나의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서도 수백, 수천 번의 아픔을 참고, 꿈 많은 남녀로서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그것들을 이겨가면서 버티는, 눈물의 세월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감동이 됩니다. 이 분들이 이겨낸 것이 무엇일까요?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이겨 냈습니다. 조금만 더 했더라면,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갔더라면 후회하지 않았을 텐데… 신앙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마라톤입니다. 단거리가 아닙니다. 골인지점까지 가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에서 바른 결정을 했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선한 길이고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끝까지 완주하시는, 도중에 쉽게 하차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지점은 후회가 찾아오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신앙의 경주를 완주해서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방향입니다. 인생도 방향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에서 방향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26절.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마라톤은 산책과 다릅니다.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다. 복싱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허공을 치면 아니 됩니다. 타겟이 정확해야 합니다. 어느 분들은 눈동자가 풀려있습니다. 시선이 분산돼서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을 삽니다. 사람은 삶의 초점을 잃는 순간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삶은 머뭇거리게 되고 당연히 능력과 용기도 없어집니다. 방향을 잃어버리면 집중력과 삶과 능력과 힘, 모두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삶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훌륭한 선수들의 특징은 언제든지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합니다. 아무리 상대편의 관중이 야유를 보내고 교란해도 골대만 바라봅니다. 여러분, 신앙은 집중력이 중요합니다. 주변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평안을 유지하는 집중력,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다윗의 고백입니다. 산을 바라 본 사람만이 산을 오르지요.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이룰 것이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 것 아닌 손짓에도 넘어갑니다. 방향이 없는데 어찌 내 안에서 열정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목표점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아비 집을 떠나 텐트를 치며 돌아다녔지만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돌아갈 본향을 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후에 광야로 쫓겨 가서 40년을 방황하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의 목표는 가나안이었습니다. 다윗 역시 10년을 넘게 피신하며 다녔지만 자기가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냈습니다. 스가랴는 성곽 없는 들판을 제시했습니다. 척량 줄을 잡고 뒤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이 분명한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의 사면에 불 성곽이 되어주고 그 가운데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다 이렇게 하나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목표에 정확하게 시선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지구 밖에서 보는 지구와 발 디디고 서 있는 자리에서 보는 지구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 조금 더 벗어나서 나와 내 현실을 한번 관조해보는 그런 시각도 필요 합니다. 높이 나는 새가 많은 것을 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신앙의 세계를 어느 높이에서 보고 있습니까? 사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여러분, 각각 여러분의 고유의 이름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 부름의 방향을 향하여 가시고 계십니까? 여러분! 인생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붙들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내가 서 있는 곳이 정말 있어야 될 곳인가? 그 이유를 수도 없이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헛된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목숨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만의 얘기일까요? 내가 무엇 때문에 땀을 흘리는지, 내 인생이 왜 존재하는지? 이런 생각 안 하면 그 사람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본질과 인생의 분명한 초점을 놓치면 인생은 하염없이 초라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삶은 언젠가 평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허공을 치는 삶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고 영원한 가치와 절대 가치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은 충분히 넉넉하게 주어집니다. 얼마든지 기대해도 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절제하고, 끝까지 완주하며, 목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면 경주 끝에 영원히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게 됩니다. 이 거룩한 경주에 온 맘 다하여 열심히 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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