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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三十八.
나주목사 이갱생 묘표(羅州牧使 李更生 墓表) - 임상원(任相元)
옛날 도 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이 맹장사전(孟長史傳)을 지으면서 그가 어머니에게 효성하기를 생각한 것을 기록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는데, 군자(君子)들이 과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외조(外祖)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51년이 되었는데, 우리 표형(表兄)이 비석을 세워 그 행적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려고 나에게 비문을 짓기를 명하므로 나 임상원(任相元)은 이렇게 쓴다.
우리 외조부께서는 어버이를 효성으로 모시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淸廉)하였으며 신의(信義)로써 벗을 사귀었고, 기꺼이 남 돕기를 급선무로 여기는 등 그 아름다운 행실을 다 들기가 어렵다. 훈공(勳功)을 사양한 한 가지 일만 해도 고금에 뛰어나 족히 일세에 요행스레 공을 바란 자를 부끄럽게 할 만한데, 세상에 그런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으니, 자손된 자로서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대개 공은 평소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와 친하게 지내 심공이 반정(反正)할 계획을 몰래 알려주었다. 공은 말하기를, “그 말이 이미 내 귀에 들어왔소. 비록 따르지 않더라도 죽게 될 것이니, 차라리 의롭게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하였다.
심공이 이로 인하여 소개하여 인조(仁祖)를 한번 뵙고 물러 나와 더는 찾아가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나무라자 공은 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우리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미천한 자가 친하려고 하는 것은 은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인조가 그 말을 듣고는 어질게 여겼다.
반정을 도와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즉시 광릉(廣陵)의 전사(田舍)로 물러나 숨으니, 인조가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불렀지만 힘껏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녹훈(錄勳)하기에 미쳐서 여러 훈신(勳臣)들이 공이 남다르게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굽혀서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하였다.
아! 공(功)을 탐내어 무릅쓰고 나와 부귀를 탐내는 자들이야 어찌 부끄러움을 알겠는가? 공은 이름을 얻는 데 염치가 있고, 이익을 구하는 데 겁을 낸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우뚝한 큰 절의(節義)는 개자추1)(介子推)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겠다고 하겠다.
공의 휘(諱)는 갱생(更生)이고, 자(字)는 숙향(叔向)이다. 선원(璿源)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아홉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휘 공(玒)의 아들은 사산군(蛇山君) 휘 호(灝)이고, 사산군의 아들은 동성군(東城君) 휘 순(詢)인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금성 도정(錦城都正) 휘 위(褘)이며,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휘 담령(聃)이요, 아버지는 휘 수(綏)인데, 용의가 장려(壯麗)하고 문행(文行)이 준걸스럽고 아름다웠다. 젊어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는데 선비들이 매우 추중(推重)하고 복종하였다.
음직(蔭職)으로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되고, 만력(萬曆)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 53세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즉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는데 다음 해 돌아가셨다. 대개 선조조(宣祖朝)에는 유아(儒雅)를 숭상하여 음계(蔭階)로 벼슬한 자는 학행(學行)의 명성이 있지 않으면 청선(淸選)에 들 수 없었는데, 공이 처음으로 그 청선에 들어 벼슬을 얻었으니, 인망(人望)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공의 공훈(功勳)으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 민철명(閔哲命)의 딸이다. 부인은 청아하고 단정하여 평소에 지행(至行)이 있어 의리에 통하고 시비를 논하면 비록 명철한 유자(儒者)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었는데, 승지공이 돌아가자 상복(喪服)을 입고 채소만 먹으면서 무릇 30년 동안 그렇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으며, 아들을 매우 법도 있게 가르쳐 공이 이미 장성하였어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를 때렸다.
천계(天啓)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에 부인이 맏아들을 따라 온양군(溫陽郡) 관아에 있었는데, 공이 공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들이 어찌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하였다. 그 후 심명세(沈命世)가 문후를 올리자 부인은 정색(正色)하고 꾸짖기를, “이는 바로 나라의 불행이다.
그런데도 자네는 스스로 공이라 생각하고 다시 내 아들을 꾀어 함께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심공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물러 나왔다. 아! 규중(閨中)에서 이런 큰 의논을 냈으니, 훌륭하지 않은가? 공은 17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탈상(脫喪)하고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에게 예서(禮書)를 배웠으니, 사계는 승지공의 친구였다.
공은 사부(詞賦)를 하면서 기고(奇古)함을 좋아하여 뛰어났지만 여러 차례 과거(科擧)에 떨어지고 얼마 후에는 과장(科場)에 사정(私情)이 많이 쓰이자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과거를 그만두었다. 이때 간흉(奸凶)이 모비(母妃)를 폐해야 한다는 의논을 내자 공은 홍무적(洪茂績)공과 함께 상소하여 모비를 폐할 수 없으며 이원익(李元翼)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여 홍공은 귀양을 가고, 공 역시 호서(湖西)로 물러가 숨어살면서 감히 성중(城中)에 머물지 못하였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처음에 공이 조속(趙涑)과 김원량(金元亮)에게 말하기를, “혼암(昏闇)한 임금을 내치고 간신(奸臣)을 제거하는 것은 참으로 큰 경사이다. 공신 가운데 김자점(金自點)이 들어 있으니, 국가에서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김자점이 듣고는 크게 화를 냈는데, 공 역시 사과하지 않고 종신토록 절교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에 곧장 금화 현감(金化縣監)을 제배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돌아왔다.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에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으로 어가(御駕)를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고,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에는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이듬해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적의 기병(騎兵)이 깊숙이 쳐들어오자 완풍군(完豊君)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가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러 열읍(列邑)에서 곡식을 모으도록 하니, 공이 호우(湖右)와 영동(嶺東)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곡식 1천여 석을 얻었다.
난리가 끝나고 조정으로 돌아와 7월에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제배하였는데 이듬해 버리고 돌아왔다. 다시 상의원과 형조의 벼슬을 역임하고, 임신년(壬申年, 1632, 인조 10)에 풍덕 군수(豊德郡守)를 제배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하면서 죽을 먹고 여묘(廬墓)를 살았으며 몸소 제구(祭具)를 마련하였는데, 비위(脾胃)의 병을 얻어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가 1년을 지나서 비로소 나았다. 복을 벗고 한성 서윤(漢城庶尹)ㆍ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제배했으나 병으로 면직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는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청도 군수(淸道郡守)에 임명되어 관사(館舍)를 수리하고 병기를 수선하였으며 모든 관아 안의 폐단을 한결같이 경신(更新)하였는데, 그런 일이 보고되자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이해에 서울의 친구들이 병란(兵亂)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온 자들이 매우 많았다. 공은 일찍이 곡식 수천 석을 비축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늦추어 주고, 또 그 흘러온 자들을 넉넉하게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도와주니, 손으로 공에게 의탁하였던 자들은 모두 피난한 신세임을 잊을 수 있었다. 임기가 차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사모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642, 인조 20)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제수하였고, 9월에는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겼는데, 나주는 땅이 넓고 일이 많아서 전임자들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떠났으나 공은 부임하여 위엄으로 아전들을 제재하였다. 그러자 죄를 얻은 자가 칼을 품고 밤중에 공의 침소(寢所)에 들어와 다리를 찔러 상처를 냈다.
이튿날 아침에 공은 여러 도적을 다 붙잡아 가두었다. 방백(方伯)이 파직(罷職)하기를 아뢰자 인조(仁祖)가 노하여 방백을 특별히 추고(推考)하게 하고 공을 잉임(仍任)하게 하였는데, 공 역시 스스로 버리고 돌아왔다.
공은 만력(萬曆) 을유년(乙酉年, 1585, 선조 18) 10월 13일에 출생하여 인조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 24) 3월 27일에 돌아가니, 춘추(春秋) 62세였다. 원종훈(原從勳)으로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공은 풍채가 준엄하고 의론이 명백하였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고,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함께 교유했던 자는 모두 당시의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가장 가깝게 지낸 자는 홍무적(洪茂績)ㆍ허국(許國)ㆍ황일호(黃一皓)로서 뒤에 세 사람은 모두 명절(名節)로 일컬어졌다.
공은 외모로는 비록 엄냉(嚴冷)하였으나 내심은 너그러웠으므로 어진 자들은 존경하여 나아오고 불초(不肖)한 자들 역시 용납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선비들이 사모하여 이르는 곳마다 빈객이 모여드니, 세상에서 항상 이 북해2)(李北海)에게 비견하였다.
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상례(相禮) 이득원(李得元)의 딸이다. 19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매우 효성스럽게 모시고 여종들을 은혜로 부렸다. 공이 손님을 만나면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술상을 차렸는데, 부인은 의복과 화장대까지 팔아 마련하면서도 술항아리가 비었다고 알리지 않았다.
공은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지만 돌아올 때에는 옷상자 하나뿐이었다.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 24) 12월 21일에 돌아가시어 처음에는 공과 함께 광주(廣州) 동면(東面) 성아리(成阿里)에 합장(合葬)하였는데, 후에 양주(楊州) 풍양현(豐壤縣) 도장동(道藏洞) 정좌 계향(丁坐癸向)의 언덕으로 개폄(改窆)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이명하(李鳴夏)는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군수(郡守)이고, 사위는 한유경(韓有慶)과 지평(持平) 임중(任重)이다. 서자(庶子)는 이광하(李光夏)와 이만하(李晩夏)이다. 이명하는 4남 2녀를 두었으니, 이사영(李思永)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고, 다음으로 이사성(李思省)과 이사현(李思賢)이며 이사제(李思齊)는 일찍 죽었다.
사위는 진사 구문주(具文周)와 진사 김일경(金一鏡)이다. 한유경은 2남 4녀를 두었으니, 한세상(韓世相)은 주부(主簿)이고, 한세신(韓世臣)은 군수이며, 사위는 이후저(李后著)ㆍ이여상(李汝相)ㆍ유수(留守) 이인환(李寅煥)이다. 임중은 3남을 두었으니, 임상원(任相元)은 좌참찬(左參贊)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고, 임찬원(任贊元)은 봉사(奉事)이며, 임익원(任翊元)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이다. 이사영은 아들 하나인데 어리며, 이사성의 아들은 이백기(李伯紀)이다. 내외 손자와 증손이 모두 90여 명이다.
[각주]
1) 개자추(介子推):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문공(晉文公)의 신하. 문공이 즉위하기 전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고생할 때 충성을 다해 섬겼는데, 문공이 귀국
하여 즉위하여 논공 행상(論功行賞)할 때 잊고는 빠뜨렸다. 개자추는 부끄럽게 생각하여 면산(緜山)으로 숨었다. 뒤늦게 깨달은 문공이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면산에 불을 질러 나오게 하였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타죽었음.
2) 이 북해(李北海):북해는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의 명신(名臣)인 공융(孔融)을 지칭한 말로, 그는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일찍이 이
르기를, “좌석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한데 단지에는 술이 비어 있지 않다[座上客恒滿 樽中酒不空]”고 하였다는 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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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更生 墓表[任相元]
昔, 陶靖節作《孟長史傳》, 而志其寒泉之思, 揚厲其美, 君子不以爲夸也。 吾外祖歿已五十一年矣, 今表兄思永, 命余而文其墓碣。 相元復曰:
吾外祖事親孝, 居官廉, 信於交遊而喜周人急, 他美行不可以盡擧也。 其辭勳一事, 卓冠古今, 足以愧夫一世倖功者, 而世無述焉, 爲子孫者, 其可以無傳乎? 蓋公素與靑雲君沈命世善, 沈公密以反正之謀告之。 公曰: “言旣入吾耳, 雖不從當死, 毋寧其死義乎?” 沈公因紹介而見諸長陵, 一謁而退, 不復往焉。 或譙之, 公曰: “是當爲吾君, 而求親於側微, 庸非其希恩者乎?” 長陵聞而賢之。 旣翊長陵登大寶, 卽遁居廣陵田舍。 長陵三遣使招之, 力辭不赴。 及錄勳, 諸勳臣惡其爲異也, 遂絀爲原從。 嗚呼! 貪天冒進, 以饕富貴者, 豈知有羞恥也? 公廉於取名, 怯於求利如此, 其挺然大節, 可謂視之推而不讓矣。
公諱更生, 字叔向。 系出璿源, 世宗大王第九子義昌君諱玒, 子蛇山君諱灝, 子東城君諱詢, 是爲公高祖。 曾祖錦城都正諱禕, 祖副司果諱聃齡。 考諱綏, 容儀莊麗, 文行俊美, 少遊泮中, 甚爲士類所推服。 蔭爲古阜郡守。 萬曆庚子年五十三, 擢第卽登弘文錄。 翌年而卒。 蓋穆陵朝, 敦尙儒雅, 其以蔭階進者, 非有學行之名, 不得爲淸選, 公始中選而得之, 其有人望可知也。 後以公勳贈承旨。 妣驪興閔氏, 判官哲命之女。 夫人淸令端淑, 雅有至行, 其通義理, 論是非, 雖哲儒不能過也。 自承旨公沒, 而服麻咬菜凡三十年, 終其身焉。 訓子甚有法度, 公旣長, 有不稱意者, 輒受杖焉。
天啓癸亥, 夫人從長子居溫陽郡衙, 聞公之立勳, 不悅曰: “吾兒何至爲此事乎?” 其後沈命世候之, 夫人正色而責之曰: “此乃國家不幸。 君敢自爲功, 乃復誘吾兒而共之何也?” 沈公大赧而退。 嗚呼! 閨閤中而倡此大議論, 豈不韙哉? 公年十七而遭外艱。 旣免喪, 從沙溪金先生受禮書, 沙溪乃承旨公友也。 公爲詞賦, 篤好奇古, 雖得俊而屢困於公車, 未幾, 場屋多私, 遂斂跡廢擧。 時奸凶議廢母妃, 公與洪公茂績, 抗疏言母妃之不可廢、李元翼之不可罪, 洪公被竄, 公亦屛居湖西, 不敢留城中焉。 返正初, 公謂趙涑、金元亮曰: “黜昏鋤奸, 誠爲大慶。 功臣中有金自點, 未知國家何以待之。” 自點聞而大恚, 公亦不謝, 終身絶之。 癸亥, 直拜金化縣監, 未幾, 罷歸。 甲子, 以尙衣判官扈駕公州。
丙寅, 爲刑曹佐郞。 丁卯, 敵騎深入, 完豐君守禦使李曙, 辟公爲從事官, 令募粟列邑, 公遍巡湖右、嶺東, 得穀千餘石。 難已還朝, 七月, 拜牙山縣監。 明年, 棄歸。 復歷尙衣、刑曹。 壬申, 拜豐德郡守, 未幾, 丁大夫人憂。 啜粥廬墓, 躬親祭具, 得脾疾幾危, 經一年始痊。 服闋, 拜漢城庶尹, 除襄陽府使, 病免。 丙子, 以工曹正郞, 拜淸道郡守, 葺廨宇, 繕戎器, 凡官中弊壞, 一更新之。 事聞, 特賜表裏奬之。 丙子, 京中親舊避兵南徙者甚衆。 公嘗儲羨穀數千石, 以寬民役, 且以贍其流寓, 親疎如一, 賓之依公者, 無不忘其亡焉。 及瓜棄歸, 民立碑思之。 壬午, 拜仁川府使。 九月, 移羅州, 州地廣事繁, 前莅任者, 皆不振而去矣, 公至則威制吏胥。 其得罪者, 懷刃夜入公寢舍, 斫傷脚脛。 明朝, 公悉捕諸賊囚之。 及方伯啓罷, 長陵怒之, 特推方伯, 俾公仍之, 公亦自棄歸。
公生于萬曆乙酉十月十三日, 以長陵丙戌三月二十七日捐館, 春秋六十二。 以原從勳追贈承旨。 公風稜峻整, 議論明闓, 尙氣節, 喜賓客, 所與遊者, 皆當世聞人。 而最密者, 洪茂績、許國、黃一皓, 後三人皆以名節稱焉。 公外雖嚴冷, 內實寬恕, 賢者敬而進之, 不肖者亦得以容焉。 以此衣冠懷之, 所至, 賓客騈集, 世常以李北海比之。 夫人咸平李氏, 相禮得元之女也。 十九, 歸于公, 事姑甚孝, 御婢使有恩。 公見客, 雖夜必設酒, 夫人斥賣衣服、奩具以辦, 而未嘗以罍恥告焉。 公累典州郡, 歸則只一衣篋而已。 丙戌十二月二十一日卒, 初與公合葬于廣州東面成阿里, 後改窆于楊州豐壤縣道藏洞丁坐癸向之原。 有一男二女: 鳴夏, 通政、郡守。 女韓有慶, 持平任重。 庶子: 光夏、晩夏。 鳴夏四男二女: 思永, 黃海道觀察使: 思省: 思賢: 思齊, 早夭。 女進士具文周, 進士金一鏡。 有慶二子三女: 世相, 主簿: 世臣, 郡守。 女李后著、李汝相、留守李寅煥。 任重有三子: 相元, 左參贊、弘文提學: 贊元, 奉事: 翊元, 兵曹佐郞。 思永一子, 幼。 思省一子伯紀。 內外孫曾九十餘人。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