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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元均) 1540∼1597(중종 35∼선조 30) 조선 선조 때 무신. 자는 평중(平仲). 본관은 원주(原州).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되었고,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원병 지원으로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심했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94년 충청병사로 전출되었고 다시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그 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97년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삼도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삼도수군을 이끌고 칠천량해전에서 왜적과 싸우던 중 대패, 전사하였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좌찬성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이순신에 비해 원균 장군이 상대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건 당파싸움도 원인이지만, 해전에서 장군으로 이순신보다 뛰어나지 못해서다. 여기에 당파싸움에 휘말려 이순신 장군을 백의종군시키고, 대신 지휘권을 갖게 된 원균 장군이 이순신 장군 혼자 힘으로 만든 수군을 파멸시킨데 기인 한 바 크다. 이순신 장군은 어느 당파에 속하지도 않고 어느 쪽에도 치우쳐 처신하지 않았다. 다만 장군과 친한 유성룡이 동인이고 이순신을 모함한 서인 세력 우두머리가 윤두수였다. 원균 장군은 다혈질이고 따라서 급하게 결정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육전에서는 소규모전투에서 그 성격이 큰 실수를 하는 법은 없었지만, 해전에서 지휘관의 결정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므로 원균 장군은 깊이 있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장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해군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택해서 주로 적군을 죽이기보다는 적선을 격파하거나 획득하는 전략을 택했다. 적병을 무리하게 육지까지 쫓아가 죽이기보다는 해군력을 소모시킴으로써 병참선을 차단하려고 했다. 당시 왜군은 수세기에 걸친 군벌세력간의 전쟁으로 싸움에 능해서 단병접전 즉 근접전에 아주 능했다. 따라서 훈련이 모자란 수군을 육지에 상륙시켜 전투를 하려했다면,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반해 원균 장군은 적선을 격파하고 일일이 적병을 죽이려고 했던 것 같다. 적의 대부대를 공격하기보다는 소부대를 공격해 전과를 얻어려했고, 이순신 장군처럼 일관된 전략도 없이 단지 전술에만 능한 장군으로 보인다. 원균 장군의 업적이라면 해전초기 세척의 전함이지만, 이순신 장군 함대와 연합함대를 구성해서 적선을 격파했고 적이 수급을 많이 베었다 . 1952년 왜군이 침입하자 원균은 장군은 자신의 함대 100여척을 자침시켰고 수만 명의 수군을 해산시켜 그 이후 해전을 아주 힘들게 했다. 해군 전략가들은 당시 원균이 신속하게 함대를 모아서 전라좌수영으로 갔거나 부산으로 오는 왜군을 바다에서 결전을 했더라면, 상당한 시간을 벌었거나 적에게 피해를 입혔을 거라 한다. 배는 신속성이 떨어지는지라 일단 함대가 한곳에 모이기가 힘들며, 당시 경상우수영의 함선을 가까운 거리에 모아 항전했다면 임진왜란은 많이 달라 졌을거라 한다. 그 이유는 왜군은 단 일회에 걸쳐 전병력을 상륙시킨 게 아니라 1000여척의 선단을 수회 일본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상륙시켰다. 따라서 일차 상륙이후 다시 배들은 일본으로 갔다가 오는 중에 경상우수영만이라도 해상에서 결전을 했더라면 증원 병력이 상륙하는 데 큰 지장을 초래했을 거라 추측 된다 또한 잔존세력을 전라좌수영/우수영 함대와 연합했더라면, 조선수군세력도 꽤 강했겠지만 경상우수영의 함선 100여척이 사라지면서, 나머지 수군은 절반이하의 군세가 떨어진 상태에서 결전을 치러야 했다. 1596년 조선수군은 거의 300~400척의 함선과 3~4만명의 수군을 갖게 되는데, 이는 거의 이순신 장군 혼자만의 노력에 의한 거였다. 원균 장군의 업적은 북방의 오랑캐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임란초기, 이순신 장군과 연합함대의 일원으로 세운 전공정도지만 훌륭한 맹장이었다. 권준(權俊) 이순신 장군의 제갈량과 같은 인물로 본래는 문관 출신이어서 대부분이 무관이었던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는 그렇게 많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세우는 공과 뛰어난 지략 덕분으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도 이순신 장군 다음가는 장수가 되었고, 전략으로 적을 압도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었다. 또한 이순신이 장군이 처음으로 좌수영에 부임했을 때 무척이나 장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권준 만큼은 이순신 장군을 지켜주고 보좌해 끝내는 이순신 장군을 '옥포해전의 승리자'로 만들었다. 문관으로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을 세웠지만 많이 알려지지 못한 장수로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을 지키며 임진왜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수로 성장했다. 이순신 장군도 평소에 그를 아껴 두 사람은 신뢰와 충성 사이로 다져진 관계였다. 이순신(李純信) 1554∼1611(명종 9∼광해군 3)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입부(立夫). 본관은 전주(全州).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의주판관 등을 지내고 귀향하였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막하의 중위장으로 옥포(玉浦)·한산(閑山)·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내고, 98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인조 때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 무의공 이순신(방답첨사)은 방답첨사로 전주이씨이며 조선3대왕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광명시 일직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학문에 열중하고 청년이 되면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무예솜씨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후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히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선조 임금은 장군을 혜산진 첨절대사로 임명하여 북쪽 오랑캐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장군은 1611년(광해군3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근무하다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군의 죽음을 전해들은 임금은 조회도 받지 않고 슬퍼했다고 한다. 현재 장군의 묘소는 광명시 일직동 서독산 중턱에 있다. 김완(金完) 1577∼1635(선조 10∼인조 13)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자구(子具). 본관은 김해(金海). 임진왜란 때 용맹이 알려져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 들어갔고, 이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의 막하에 있다가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다음해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南原)에 갔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병력을 점검하므로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진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를 거쳐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에 이르렀고, 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에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고,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 정운(鄭運) 1543∼1592(중종 38∼선조 25)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창진(昌辰). 본관은 하동(河東). 전라도 영암(靈巖) 출생.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웅천현감(熊川縣監) 등을 지냈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출전,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그해 9월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였다. 1604년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으며,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
임진왜란 당시 녹도 만호. 전라 좌수영 내 최고의 장군. 원균 같은 맹장이 되는 것이 장수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던 인물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있던 시절부터,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했으면, 원균이 파직된 전라좌수사 자리에 이순신이 부임하자 극력 반발, 동료 제장들을 선동하여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너무 지나치게 수세적인 전술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사천해전에서 총탄을 맞은 이순신을 치료해 주는 과정에서 그와 돈독한 전우애를 쌓는다. 부산포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신호(申浩) 1539∼1597(중종 34∼선조 30)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언원(彦源). 본관은 평산(平山). 고부(古阜) 출생.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 조산만호·도총부도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대비해 정읍(井邑)의 이순신(李舜臣), 순천(順天)의 권준(權俊) 등과 함께 남쪽지방에 기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見乃梁)·안골포(安骨浦) 등 해전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랐다. 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南原城)이 포위되자 교룡산성수어사로서 이를 지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원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장(武壯). 임란 당시 낙안군수. 별명은 죽도(竹刀). 병법에 밝고 신중하면서 대쪽같은 성격으로 이순신장군의 왼팔이다. 임란이 터지자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차되고, 1595년 조방장으로 승진된다. 1597년,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다. 남원성에서 전사한 이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할 때 원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이때 이순신 장군 휘하 장수들은 육군, 수군(원균)으로 흩어졌는데, 그중 신호 장군은 육군 권율 장군 밑으로 가 남원성서 전사 한다.
어영담(魚泳潭) 1533∼1594(중종 28∼선조 27)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함종(咸從).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으며, 무과에 급제한 뒤 진해(鎭海) 등 여러 진(鎭)의 막하(幕下)로 있으면서 바닷길을 자세히 익혀 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1592년(선조 25) 광양현감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수로를 인도하는 향도(嚮導)로 활동하여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다음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 의해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되었다. 수로에 밝은 밝았으며, 이순신 장군이 삼고초려로 휘하 장수로 삼았다. 덕분에 전투에서 많이 이겼는데 아쉽게도 병에 걸려 죽는다.
송희립(宋希立) 본관 여산(礪山). 자는 신중(信仲).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도만호(智島萬戶)로 형 대립(大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고, 1598년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왜군에게 포위된 명(明)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구출하면서 전신에 중상을 입었다. 1601년(선조 34) 양산(梁山)군수,·다대포첨절제사(多大浦僉節制使)를 지내고. 이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흥양(興陽)의 세충사(世忠祠)에 배향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아끼던 장수 중 한 명.
나대용 [羅大用) 1556∼1612(명종 11∼광해군 4)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錦城). 나주(羅州) 출신.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지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 군관으로 들어가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고, 1592년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유군장(遊軍將)을 맡아 적의 대선(大船)을 격파하였다. 사천해전(泗川海戰)과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명량해전(鳴梁海戰)과 노량해전(鷺梁海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4년 강진(康津)현감으로 임명, 금구(金溝)·능성(綾城)·고성(固城)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남해(南海)현령에 제수되어 해추선(海鰍船)을 고안·건조했고, 11년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병선건조에 온갖 정력을 쏟아 충무공과 함께 옥포(玉浦) ·당포(唐浦) ·사천(泗川) 등 15여회 해전에서 왜적과 왜선을 도륙하는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함인 창선을 창안 건조하였고,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海追船)을 발명하였다
우치적
기골이 장대하고 성질이 급한 장비형의 돌격장. 원균 장군과는 종성부사 시절, 군관으로 인연을 맺는다. 전란 때 영등포 만호로 경상도로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원균 장군과 용맹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린다. 후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드러내 놓고 반대해, 이순신의 제장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인물이다. 원균 장군이 죽음을 맞는 최후의 전투, 칠천량 전투에서도 돌격장 역할을 마다치 않았던 그는, 원균 장군의 죽음을 뒤로 하고 전장에서 탈출, 이순신 장군에게 원균 장군의 유지를 전하게 된다. 기효근(奇孝謹) 1542∼1597(중종 37∼선조 30) 본관 행주. 자 숙흠(叔欽). 사과(司果) 대유(大有)의 아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왕명으로 주(州)·군(郡)의 군비(軍備) 상태를 두루 점검하였다. 임진왜란 때 남해현령으로 전함·무기를 수리하고, 원균(元均)을 따라 사천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남해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모친이 물에 빠져 자살하자 그도 뒤따라 자살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추록, 개백군(皆白君)에 추봉,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영남(李英男) 1566년∼1598년(명종 21년~선조 31년) 자는 사수(士秀),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 1584년(선조 17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훈련원 첨정(僉正),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의 율포만호(栗浦萬戶)로 전임, 임진란 발발 당시 원균 장군을 도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왕래하며 청군(請軍)하였고, 이후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각 해전에 참전,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년) 태안군수(泰安郡守),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에 전임되어 선정을 배풀었고, 1596년(선조 29년)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사(敗死)한 후 조방장(助防將)으로 진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1598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한백록(韓百祿) 1555-1592(명종 10년~선조 25년) 본관이 청주(淸州)자(字)는 수지(綬之)이다. 명종(明宗) 10년(1555)에 태어났다. 한백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다했으며, 경전과 병서 읽기에 익숙했다. 특히 장성해서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를 즐겨 읽으며, 무인의 길에 뜻을 두었다. 임진왜란 초전에서 조선군이 육지에서 잇달아 패하고 있을 때 남쪽 바다에서는 조선수군이 잇달아 승리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승리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인 명종때의 수군강화책을 들 수 있다. 특히 접경지방의 유민들과 교류하며 화포기술과 선진 조선술을 습득하여 해상 전투력의 증강이 있었다. 명종 10년(1555)에 발발한 을묘왜변에서 조선 조정은 변화된 왜침의 실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수군력 확보에 주력하게 된다. 그로 인해 판옥선의 개발과 화포의 개량 및 확보에 주력하는 등 무기체제를 충실히 하여 방위 태세를 확립하였다. 임진왜란(1592)이 터진 4월부터 6월까지 옥포·당포·부산 등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후임으로 한백록 장군은 부산병마첨절제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것은 남해의 보루를 더욱 확고히 하자는 조정의 뜻이기도 하지만 장군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음을 보여준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하여 선조 25년(1592) 7월 17일 미조항(彌助項) 싸움에서 공이 전사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선조실록'25년 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후에 장군의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충득(忠得)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충장공 한백록의 묘역과 정려각(旌閭閣)은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64, 방동리 406-2에 소재하고 있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31호이다. 이억기(李億祺) 1561∼1597(명종 16∼선조 30) 본관 전주(全州). 자 경수(景受). 시호 의민(毅愍).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후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흥(慶興)·온성부사(穩城府使)를 역임하면서 북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도 수사(水使)가 되어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당항포·옥포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참소로 하옥(下獄)되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明元) 등과 함께 무죄를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휘하의 좌익군(左翼軍)을 지휘, 용전하다가 칠천량(漆川梁) 싸움에서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황세득(黃世得) 본관은 성주, 충장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가 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종군, 선봉이 되어 벽파정, 고금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함대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이듬해 예교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직산에 정문을 세워 병자호란 때 전사한 아들 박과 함께 포양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 앵성산에 있었으나 1987년 4월에 천안시 직산면 마정리 용와산으로 천장하였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선무공신 [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明)나라에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성과를 거둔 문무 관원에게 준 훈호.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청난공신(淸難功臣)과 더불어 결정되었는데, 18명을 3등으로 구분하였다.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등 3명으로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孝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이억기(李億祺) 등 5명으로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孝忠杖義協力宣武功臣)삼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10명으로 효충장의선무공신(孝忠杖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
첫댓글 휴~ 이런 맹장들이 많이계셨는데도 왜놈발꿈치에 짓밟혔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