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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 죽음의 세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사랑과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귀한 사랑과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은 1948.5.14.에 이스라엘이 건국이라고 합니다. 100년 동안 역사적으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 공산화가 되고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고 국제연합인 유엔이 창설되고 수많은 국가가 독립하여 정부 수립이 있었고 문명적으로는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고 컴퓨터가 개발되고 인터넷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 어떤 일보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2천 년 동안 나라 없던 민족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다가 그들이 말로만 듣던 선조의 땅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세운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우리가 지금도 부인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의 예언이 현재에도 이루어지는 것을 이처럼 목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라 없이 살아가는 민족이 많은데 예를 들면 쿠르드족은 인구가 4천만 명이 넘지만 아직도 자치구역 네 곳에서 난민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혹 나라를 세운다 해도 놀랄 일도 아니고 기적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무려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하고도 남은 자들이 약속의 땅에 돌아와 나라를 세우고 주권국가가 되었는데 이것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그들을 향한 성경의 예언이 칠백여 곳에 나오는데 그것이 사실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20세기만 아니라 기원전, 기원후만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일, 기적중에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과 우리와 같이 죽음을 경험하시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이보다 더 놀라운 일, 더 큰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일로, 앞으로도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자체만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그냥 오셨다가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죽음처럼 자연사나 사고사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단지 한두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고 어느 공동체나 어느 한 시대, 한 민족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 죽음’이라고 합니다. 너무도 숭고한 희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대속 죽음! 희생적 죽음!
사람이 죽을 때 꼭 피를 흘리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죽는 것은 아닙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숨이 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야말로 온 몸의 피란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기력이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다 쏟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잔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러한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예수님은 우리 위해 피흘림으로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우리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인 사망의 형벌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받을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고난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매달려야 하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매달렸습니다. 우리가 누어야 할 무덤에 예수님이 대신 누우신 것입니다.
혹시 남의 빚을 대신 갚아준 적 있으십니까. 있다면 참 아름답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를 위해 대신 매를 맞아 보았거나 벌을 대신 서 본 적은 있으십니까. 친구를 위해, 형제를 위해 벌을 대신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신이 잘못하여 맞아야 할 매도 안 맞으려고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은 종종 있어도 남의 잘못을 대신해서 매를 맞고 벌을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진주에서 전해오는 나막신장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막신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여름에는 비가 자주 오니까 짚신보다 나막신을 찾으니 장사가 그나마 되는데, 겨울이 되면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아침부터 시장에 앉아 나막신을 팔았지만 해가 지는데 한 짝도 못 팔았습니다.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관내에 사는 양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곤장을 맞게 되었는데 대신 맞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막신장수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양반을 찾아갔습니다. 매값으로 엽전 석냥을 준다는 약조를 받고 관아를 찾아가서 양반 대신 곤장을 맞았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큰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날이 음력 1월 22일이라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데 곤장을 맞은 다리를 끌고 오다가 힘이 풀려서 고개를 넘지 못하고 결국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혼자서는 더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밤이 깊어가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고갯길까지 마중을 나갔다가 지게를 진 채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했습니다. 차갑게 얼어버린 남편을 흔들어 깨웠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 손에는 엽전 석냥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 고개가 진주 말티고개입니다. 음력 1월 22일이 나막신장수의 날입니다.
나막신장수가 누구를 대신하여 매를 맞은 것입니까. 양반을 대신하여 맞은 것이고 또한 자기 가족을 위해, 가족을 살리려고 매를 맞은 것입니다. 거룩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이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것은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한 것이고 또한 우리를 살리기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 대속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십자가의 죽음, 그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신, 자신을 낮추신, 내려놓으신 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 궁궐을 나와 지방을 갈 때 어가행렬이라고 합니다. 이때 임금이 탄 마차와 의장대, 문무백관, 호위 군졸들이 함께 따라갑니다. 수백 명이 함께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마차가 없고 가마 멜 군졸들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보다 더 낮아지신 것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요, 죽음을 당해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하늘 보좌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던 분이 자기를 비어 죽음의 자리까지, 그것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천한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죽음을 당해도 낮아진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도망친 노예가 받을 그런 죽음을 받았으니 얼마나 낮아진 것입니까. 이보다 더 낮아질 수는 없습니다. 빌2:5~8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즘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를 천만 명이 넘게 봤다는데 수양대군이 한명회의 계략을 통해 계유정난을 일으켜 자기가 왕이 됩니다.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이 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를 갔습니다. 영월에서 첫날을 자고 엄흥도가 아침식사를 준비해 올리니 단종이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역정을 내자 “아직도 지가 왕인줄 아는가벼”라고 합니다. 임금이 폐위되면 군이 됩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한 때 왕이었습니다. 왕은 폐위되어도 군으로 부릅니다. 이 정도도 왕이 낮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이 무슨 ‘군’으로 강등된 것이 아니라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힘이 없어 그렇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시고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요10:17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께서 이처럼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세 번째 의미는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 최상의 선행이 나타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말에 이웃을 구제하는 사랑과 선행을 자주 봅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일 년 동안 번 돈을 기부하는 경우를 듣게 됩니다. 전주 어느 지역엔 해마다 얼굴 없는 천사가 돈과 편지만 전달해주고 십수 년째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참 아름다운 선행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장기를 기증해서 몇몇 사람이 새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도 얼마나 귀한 선행이고 큰 사랑입니까. 넘쳐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를 위해 써야 할 것도 쓰지 않고 남을 돕는다면 대단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떠합니까. 마 20:28에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1:4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은 단지 손에 가진 것, 일부를 나눠준 것이 아닙니다. 풍족한 것 중에 조금 베푼 것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던 것,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말하자면 인류 역사에 이보다 더 큰 선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낮아짐과 사랑도 그 대상이 어떠냐에 따라 격이 다릅니다. 즉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격이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요 헌신이라면 감동하지만 한편으로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주신, 낮아지고 사랑하신 대상은 어떠합니까. 한마디로 아무 자격이 없습니다. 7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의인을 위해서나 선인을 위해서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사랑받을 짓을 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목숨도 희생하신 대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리고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한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의 상태를 이처럼 네 가지로 기록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품속에 있던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원수를 위해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라고 감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 은혜와 사랑을 간직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보답하는 심령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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