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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에 들어서
염 상 섭
1
동호의 맏형 동준이가 대전으로 전근을 하여 가게 되니까 일대 타격(?)을 받은 것은 막내동생 동호였다. 부모 없는 동호는 두 형의 힘으로 큰형의 집에서는 법을 먹고 작은형 동만이는 등록금을 내어주고 하여 공부를 하여 왔던 것인데, 이번에는 소임을 바꾸어 작은형 집에 와서 숙식을 하는 대신에 큰형이 학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도 책값이요, 용돈 푼은 이 누이에게 떼를 쓰고 저 누이에게 구걸을 해야 하키는 일반이다.
동호는 외양간에 들어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둘째형 집으로 옮겨 왔다. 둘째형수라는 사람은 도무지 종을 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그저 모른 척해 둘 뿐이다. 갓 떠나왔을 때는 밥상이나 점심 도시락 반찬 같은 것도 그럴 듯하더니 이즈막에는 똑 떨어진 것을 보면 밥값 밀린 하숙인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정작 형 동만이는 처음 올 때부터 씰쭉해 하였지마는 요새로 부쩍 내색이 달라졌다.
형제간 우애가 자별히 있는 것도 아니나 그래도 전에 그렇지 않았는데 작은형이 장가를 간 뒤에 형의 신접살이하는 집에 가끔 놀러 들르는 동안에 눈에 거친 꼴이 뜨인 뒤로 이내, 이 두 내외가 싫어진 것이다.
"영숙씨 들어가 살림 잘해요."
궁금할 일도 없으나 동호는 언젠가 지난 결에 뜰에서 어린애 기저귀를 널고 있는 형수에게 말을 결었다. :
"그러믄요. 바루 요전에 옥동자를 낳았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되나요?"
동호는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애어머니가 됐구나 하고 약간 놀랐다. 하기야 이 집에 백일이 된 딸년이 생기지 않았는가.
영숙이란 바로 이 방에 하숙하고 있던 작은형수 순희의 절친한 동창 말이다. 한때는 자기에게도 혼담을 결어 온 일이 있고 잠시나마 교제를 해봐서 잘 알기에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불쾌는 하면서도 생각이 가다가 나는 것이다.
결국은 제대로 제자리에 들어가서 아이까지 낳고 소리 없이 산다지마는, 어쩌자고 자기의 오라범댁이 될 사람을 돌려빼서 동서를 삼아 볼 작정으로 서둘러댔던 것인지? 작은형수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친한 동무에게 졸리다 못해 싫어도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서두른 혼인인데, 이런 딱한 일이 있나! 그 사품에 작은형마저 몇 달 맡아두었던 남의 집 딸을 제대로 두지 못하고 손을 대고 말은 것은 남의 일이라도 늘 분하다. 동호는 공교롭게도 그러한 눈치를 챌 기회가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불행히도 생각되었으나, 그러한 점은 방임주의인 형수가 똑같이 잘못이라고 미워했다. 그 사품에 자기도 멋모르고 끌려가지 않은 것만 다행하나, 동호는 그때부터 세상을 고쳐 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생활토대도 없이 허턱대로 졸업하기 전에 장가만 들려던 동호도 아니었으니 영숙이쯤 놓쳤다고 아쉴 것도 없었다.
"출출하실 텐데 이거나 잡수세요."
순희는 아까 어쩌다 영숙이 이야기가 나왔을 제, 더 깊이 터치하기가 싫은 듯이 얼른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영숙이를 새에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던 일 년 전 그 시절이 추억도 되고, 시아주비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떡 접시와 사과 알갱이를 방에 들이민다.
"네."
하고 동호는 책상에 앉은 채 돌아다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허출하니 금시로 손이 떡접시로 갔다.
이제야 마악 떡접시의 부리를 따는 판인데, 바로 옆인 반양식 대문이 덜거덕덜거덕 한다.
『또 성가신 방문객인가?』
하는 생각에 동호는 다음 하회를 기다리며 모른 척하고 있었다. 실상 생각하면 후년이면 어엇한 공학사(工學士) 인데 이 집 문지기로 왔겠느냐는 자존심에, 낮이고 밤이고 누가 와서 찾아도 대개는 모른 척해 왔었다. 한데, 오늘은 공교롭게 형에게 걸려서 문지기 노릇을 잘못했다고 톡톡히 호통을 들었다.
하여간 밖에서는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문을 두들기기만 하니, 동호는 요새 자주 드나드는 불길한 손만 같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는데 안방에서 나와서 문을 열어 주니까, 그제서야 형 동만이의 목소리가 난다. 퇴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들어온 것이다. 어째 일찍 들어왔는지 요새는 어쩌다가 대면을 해도 별로 접어(接語)도 않고 지나치는 사이거니와
"얘는 어디 갔어?"
닫힌 대문은 얼른 안 열어 주고, 뜰안에 들어와 아랫방에는 동생의 구두가 눈에 뜨이니 화를 버럭 내었다.
"시장에 보냈어요."
남편의 눈치를 알아차린 순희는 좀 허둥대는 기색이었다.
"문은 대낮에 왜 닫아 뒤?"
올라갈 생각도 없이 뜰 한가운데 선 채 마치 문초나 하는 어조이다. 방안에 들어앉아 듣는 동호도 문은 왜 닫아 두었던고? 하고 듣기에 괴란쩍고 민망하였다. 그러나 가로 타고 나설 문제도 아니기에 먹던 떡접시를 앞에 놓고 밖에 귀만 기울이고 앉았다.
"순이가 나가면서 거지가 온다기에 나왔던 길에 닫구 들어갔었죠. 이 동네선 뉘집이나 노상 닫구 살지 않아요.":
방 안팎에서 형제가 다같이 그것은 사실일 게라고 생각하였으나, 방안의 동생은 순이가 시장에 갈 제 그런 소리를 하고 가던지? 무심하였다.
남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집에서 신는 흰 고무신 한 켤레와 헌털뱅이 구두가 축대 위에 놓인, 꼭 닫힌 아랫방 쪽으로 각도를 돌리자 순희는 낯빛이 이상해졌다. 꼭 무슨 큰소리가 날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동만이는 대청으로 올라가려던 발길을 돌려서 쭈르로 아랫방으로 가서 창문을 홱 열고야 말았다.
"일찍 들어왔구나?"
동만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붙였다. 그러나 동호는 멸시하는 낯빛으로 마주 쳐다보고만 앉았다. 그 기세에 늘려서가 아니라, 얼토당토 않은 오해에 코웃음의 항의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래 바루 여기 앉았으면서 문 열라는 소리가 안 들리더란 말이냐?"
형은 낯이 뒤틀리며 시비조다.
"순이든지 안에서 누가 나와 열려니 하였지, 난 형님집 문지기루 온 것 아니니까. 하하하……."
동호는 놓쳐 버렸다. 형제간 나이가 네 살 차밖에 안 되고 전에는 그런 새가 아니었는데, 장가란 무엇인지 장가를 들고 나더니 아주 어른이나 된 듯시피 훗부리는 것이 아니꼽기도 하거니와, 자기의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려 들고 자기네 생활에 접근하여 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형의 눈치가 우습기도 하다.
동만이는, 내 밥 먹으면서 문 시중을 못 들어줄 게 무어냐고 큰소리를 한마디 하려다가 끌꺽 참고 돌아서 안마루로 올라갔다. 뒤에서 조마조마하며 지키고 있던 순희는 비로소 마음이 놓여서 입가에 웃음까지 띠고 따라 들어가 옷 갈아입는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남편은 눈에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저녁상을 받을 때까지 종시 말 한 마디 없다.
2
아랫방에서 저녁에 먹고 앉았던 동호는 안방에서 형의 내외가 주거니받거니 지껄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 그럴 줄 알았지! 아니꼬운 반주(飯酒)는 뭐야? 오늘은 더구나 그걸 곱게 새기지 못할 줄 알았지!"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인제야 스물여섯쯤 된, 회사에 나가서나 사회에 나가서 햇병아리인데 날마다 저녁상에는 반주가 따랐다. 기분이 좋은 날은 그것만 먹고 말지마는 그렇지 않은 날에는 또 한 주전자 가져오래서 떠들썩했고, 밖에서 전작(前酌)이 있어 들어온 날도 공부를 할 수가 없이 안방은 시끄러웠다.
"이 뚱뚱보! 대관절 대낮에 하는 일이 뭐야?"
대개 이런 조로 시초가 되어서는 너저분히 잠들 때까지 끈적끈적히 말대답을 하는 새댁과 입씨름을 하는 것인데, 날씬한 여자가 소원인 남편이 영숙이를 놓친 것이 언제까지나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것이었다. 딸을 낳아 놓고는 아들이 아니었다고 들컹대고, 너 닯아서 미인이 될 것 같다고 걱정이었다.
"그럼 뭐야? 대낮에 젊은 놈하구 문을 걸구 들어앉아서…… 거지가 그렇게 무섭더란 말야? 어디 말을 해봐, 나 먹을 떡접시에 사과까지 얹어서…… 내, 네 뱃속을 몰라?"
안방에서 형의 언성은 주기와 함께 점점 높아 갔다. 그 대신 형수는 무슨 소리를 우물거리는지 목소리가 낮아져 갔다. 거기에 화딱지가 난 동호는 먹던 밥술을 놓고 방안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것두 말이라구 하는 거야? 날 누구루 알구? 난 형과는 달러!"
동호는 안방에 쓱 들어서며 눈을 부라리고 들이대었다. 요새 세상에서는 싸울 때가 아니라도 말투가 그렇지만 곧 형의 법상이라도 메어치려는 기세에 동만이는 찔끔하며 마주 일어섰다.
"누가 너더러 뭐라구 했니? 네 형순가 뭔가…… 내 계집내가 데리고 신칙 하구 가르치는데 무슨 아랑곳이냐 말야?"
"신칙도 좋구 가르치는 것을 누가 말래! 하지만 왜 남까지 끌구 들어가느냐 말야? 난 그 썩은 머리완 달라! 신혼초부터…… 신혼가정 공기를 퀴퀴하게 해놓구…… 뭐야…… 아니꼬운 반주만 먹고 떠들면 그만야?"
동호는 기승기승 마구 들이대며, 영숙이 사건의 목은 화풀이까지 해버렸다.
벼란간 우박을 맞은 순희는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남편에게로 달려가서,
"이거 왜 이래요. 그리게 술이 탈야."
하고 뒤로 껴안으며 앉히려 하였으나, 동만이는 그 반발로 홱 뿌리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선다. 술이 웬만큼 취한 사람이라 그 힘을 당해 낼 수가 없다.
"뭐? 이눔마! 썩은 머리라구?"
하고 남편의 손이 동생의 얼굴로 올라가는 것을 순희는 파자마의 소맷자락을 잡아 붙들고 매어달렸다. 동호는 얼굴을 피하려 하지는 않고 눈을 똑바로 뜨고 부르대고 섰으나 하여간 형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만 순희에게는 다행 하였다.
"약주가 취해서 그러시니까 어서 내려가시죠."
순희는 동호에게 넌지시 눈짓을 하였다. 싸움을 말리려니 그렇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동호에게는 그것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외면을 하고 싶었다.
"어디 때려 봐요, 그까짓 밥 한술 떠세루 이러는 거야?"
동호도 분통이 터지니까 그렇지마는, 씁씁히 물러서기가 어색해서도 또 한번 맞대들었다.
"뭐 어쨌다구? 주제넘게 이 집안 공기가 퀴퀴하거든 어서 나가! 썩 썩 나가. 누가 두자는 게 아니야."
하고 동만이가 팔을 홱 뿌리치는 길로 어느덧 철썩 소리가 동호의 뺨에서 났다. 동호보다도 순희의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으면서 이러다가 이 집안이 어떻게 되려누? 하는 겁도 났다. 또다시 남편의 팔을 뒤로 껴안고 앉히려고 몸부림을 하였다. 동호는 씨븐벌떡하면서 그래도 형에게 손찌검은 아니 하였다.
"아니꼬와서두 이 집 밥이 내일부터 다시는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겠습니다. 나가지 말래두 나가 드리죠."
동호는 코읏음치며 기를 활짝 펴고 마루로 나섰다.
자기 방으로 내려온 동호는 숟가락이 꽂힌 밥상은 본체 만체 내일 강의 시간표를 보고 노트 몇 권만 뻬어 들고, 입었던 와이샤쓰 바람으로 훌쩍 나와 버렸다. 나와 보니 시원하기는 하나, 날은 벌써 폭 어두웠고 어디로 갈지가 망단하였다. 그래도 대중 치고 나신 데는 고등학교 시대부터의 짝인 K군 집이다.
뭐 그까짓 것 화낼 것도 없지만, 흥분을 풀려고 천천히 계동까지 걸었다. 좀 초원하기는 하지마는 와 보니 아직 대문이 안 닫힌 것만 다행하다.
"이거 웬일이냐?"
친하기는 하지마는 동호가 밤중에 노트를 끼고 온 것을 보고 K는 놀랬다.
"두말할 것 없이 하룻밤 재워 주게."
동호는 아무리 진한 새라도 좀 쭈빗쭈빗하면서 솔직히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하하하…… 들어와. 여기는 여인숙은 아닐세. 무허가 하숙이더면 더 좋았겠는데……."
K는 심심한 판에 잘 왔다고 껄껄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서 은근히,
"너, 무슨 화가 나서 온 게로구나? 내, 술 한잔 사오마."
하고 일어나 나간다. 동호는 싫을 것도 없어 웃어만 보이고 말리지는 않았다. 인제들 배우기 시작한 술이라 만나면 한잔 하고도 싶고 친구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위로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시하(侍下)요. 학생의 몸이니 숨어 먹는 술이라 몰래 아이를 불러 시키는 것이었다.
"건데 왜 그러는 거야?"
다시 들어온 K가 궁금한 듯이 말을 꺼냈다.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주정꾼하고 싸우구 나왔지."
"그럼 내 주정 받군, 또 어디루 갈 테냐? 하하하."
"맞주정으로 어디 누가 이기나 밤새껏 주정 씨름이나 해보자꾸나."
동호는 비로소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한 술상이 소리 없이 몰래 나왔다. 봄새라 데우지도 않은 술을 한 잔씩들 마시고 나니 술맛은 모르나 속이 찌르르하고 기분이 금시로 활짝 개인다.
"너두 지금은 조심조심 도둑술을 먹지만, 장가만 들면 판을 차리구 반주도 자시고 하게 되겠지?"
"아, 그렇게만 되면야 거기서 더한 상팔자가 어디 있겠니!"
하고 둘은 또 깔깔대었다.
거기에 뒤달아서, 일 년이나 넘은 신혼생활이지만 동만이의 신혼생활의 꼬락서니와 날마다 반주만 자시고 부부끼리 말다툼을 하는 것은 벌써 권태기에 들어간 탓인지? 애초에 신부집이 부자라는 데에 혹해서 한 혼인인데 별로 처갓덕을 못 봐서 그런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고사하고, 그 걱정이로구나, 의처증이 심해서 그렇기보다두 워낙 네 품행이 단정치 않아 그런 게지? 하하하……."
저녁을 먹다 말고 뛰어나오게끔 분란이 난 사연을 듣고나서, K는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깔깔대었으나, 똑같이 인제야 스물두엇밖에 안된 K에게도 분개를 느끼게 하는 듣기 거북한 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렇거나 저렇거나 난 원체 그 형과 맞지 않아서 이 기회에 아주 나와 버리려는데 하숙엘 가려도 당장 돈이 있어야지. 너 어디 알바이트 자리라도 하나 구해 주렴?"
동호의 말에는 기가 찬 성실한 데가 있다.
"그런 데가 있으면 널 소개해 주겠니. 내가 가겠다."
댓잔 술에 얼굴이 벌개진 K는 껄껄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고나서,
"뭐 그리 걱정할 거 있니. 돼 가는 대루 하자. 우선 우리집에 같이 와 있으면 되지 않니?"
하고 역시 좀 사는 집 귀동아들이라 부모의 허락도 없이 배짱 있는 큰소리를 한다.
"얘, 말만이라도 고맙다. 하지만 어버지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리 있겠니?"
"그런 염려 말어. 난 너 같은 가정교사가 아니라 비서를 하나 데려온 대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오케이니까. 하하하."
차차 취홍이 도도하여지니 둘이는 못할 말이 없이 농담이 번져나갔다.
"에이 이자식! 내가 네 가정교사라면 또 몰라부 아무려면 비서 노릇이야 하겠니?"
동호는 인제는 암담하던 전도가 활짝 개인 듯한 기분으로 때리는 시늉까지 하여 보이며 껄껄대었다.
"잔소리 말구 내일 짐 꾸려 가지구 와. 여기는 무허가 하숙이 아니라 무료 하숙이니까. 하하하……."
3
이튿날 학과를 마치고 K와 헤어질 제,
"그럼 꼭 짐을 가지고 오너라. 난 밥을 안 먹고 기다릴 거니까."
하고 K은 다짐을 하였다. 동호는 그 우정이 동기간 우애보다도 고마웠다.
동호는 그 길로 삼청동 큰누이에게부터 들렀다. 무어 하소연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말이나 알리려는 생각이다. 누이집이라도 잘 살면 좀 떼를 써 보겠지마는 나이 사십이 넘도록 남의 집 사랑채의 방 둘에서 여섯 식구가 복작대는 형편이니 어제만 해도 발길이 그리로 가지 않고 K군 집으로 갔던 것이다. 또 둘째누이야 시집살이를 하고 있으니 간들 소용이 없다.
"뭐? 쫓겨날 게 어디 있니? 저는 누구 덕에 공부를 했길래!"
큰누이는 서슬이 시퍼렇게 화를 내었다. 조실부모한 탓으로 동만이 역시 큰형과 큰누이의 힘으로 학교를 마치고 났던 것이다.
"쫓겨난 게 아니라,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겁디까, 이쪽에서 미리 물러서는 거죠."
동호는 누이의 역성이 좋기는 하였지마는 어차피 그 집에서는 같이 지낼 수 없는 바에야 소리 없게 하려 하였다.
"무슨 소리냐? 어디 같이 가 보자. 저희들 그따위 맘보로 뭐 되겠니? 버르장머리를 좀 가르켜 놔야지."
오십이 넘은 이 마님은 다소 봉건적인 생각도 남아 있지마는 막내동생이 가엾어서 치를 부르르 떨었다.
큰누이는 아무리 말려도 옷을 부덩부덩 갈아입고 나섰다. 거산을 하는 동생을 자기가 맡을 수도 없고, 공부하는 아이가 마음만 달뜰까 보아 애가 쓰이니 한시를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작은형의 집에 와 보니 아직 형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 어찐 소리야? 뭣 때문에 막내시애지비를 내쫓겠다는 거야? 응, 뭣 때문야?"
큰누이는 마루에 올라서기도 전에 소리를 벼럭버럭 질렀다.
"에이 그만두우. 옆집에서 들어두 동리가 챙피해요."
동호는 질색을 하면서 누이가 안방으로 들어간 동안 얼른 가서 택시를 하나붙들어 왔다.
안방에서 누이가 올케를 가지고 꾸지람꾸지람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책고비와 금침이며 옷가지들 간단한 것만 추려다가 실어 놓고,
"누나, 난 가요."
하고 소리를 쳤다.
"뭐? 가긴 어딜 가? 가더래두 나하구 같이 가자. 집이나 보아 둬야지."
하고 시급히 뛰어나오는 누이의 뒤를 따라 나오는 작은형수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감히 이쪽을 쳐다보지를 못하였다.
K의 집으르 같이 온 큰누이는 밥값이라도 물어줄 듯이 주인 마님한테 인사를 치르고 가긴 했지마는 넉넉지도 않은 터에 매부에게 기대는 것두 한두 번이지 장구지책은 아니다. 신문의 구직란에 가정교사 광고를 일주일씩 격해서 한 너댓 번 내보았으나 일향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이리 떠나온 지도 한 달이 되어 왔다.
동호는 떠나 올 때야 흥분한 생각에, 또 우정이 우애보다 낫다는 호기(豪氣) 로서,
"너 고맙다. 한두 달 공밥 좀 못 멕이겠니."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떠나 온 것이나, 지내보니 온 집안이 너무 고맙게 굴어 미안하고 요새 물가에 학생 하숙료로 따지자면 이삼만 환이나 할 텐데, 어린애도 아니요 주는 밥을 염치없이 얻어먹고 앉았기가 불안스럽고 창피한 생각이 차차 들던 터에 한 달이 차 가니 동호는 새삼스럽게 초조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모른 척하고 가만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이가 밥값이나 주나? 하고 스르르 가 보기도 전에 용돈 뜯으러 다니던 것과 달라 거액이니 거북하고 낯이 뜻뜻하다.
그저 마음만 졸이면서 학교에서 오다가 원남동 네거리 로터리인데 길모퉁이를 돌치면서 우연히 눈에 뜨이는 것이 이층 벽돌담에 붙인 『보급원 지망자는 신속히 이력서를 지참할 사(善及員 志望者는 迅速히 履歷晝를 持參할 事)』라고 구식 문투로 써 붙인 커다란 종이조각이다. 눈이 번쩍 띄어서 다시 한번 치어다보았다. 날마다 지나는 길이나 무심했더니 어느덧 이 집에, 새로 나온다고 소문에 들은 X신문 보급소 즉 판매소의 간판이 붙어 있다. 신문 배달부 한 자리에 얻어 결리기도 어려운 이 판에 갓 나오는 신문이니만큼 배달부를 모집한다는 말인 듯싶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동호는 발을 멈추고 넋을 잃고 멀거니 그 글쪽지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차마 들어설 용기 (?)가 없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대학생이요, 이때까지 자라온 집안 환경으로 생각하면 신문배달이 된다는 것이 창피스러워서 차마 그런 용기가 안 났다.
『……그러나 당장 먹어야 하지 않나? 먹어야 공부도 하지 않나? 언제까지 K군 집 신세를 지고 있겠는가? K의 짐두 어서 덜어 주어야 하지 않나?』
찬찬히 걸으며 곰곰히 생각하던 동호는 무슨 시비나 하러 가는 사람처럼 분연히 발길을 돌렸다. 보급소에를 들어가 보니, 과연 배달부를 모집하는 중이라 S대학교 공과대학 이년생이니 걸려든 것만 다행해서 아주 대환영이요, 내일 이력서를 써 가지고 와 달라는 것이었다. 동호는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취직 같지도 않은 취직이지마는 저편이 반겨주는 것만 고맙고 새 기운이 난다.
계동으로 돌아와 보니 큰누이가 와 앉았다. 혹시나 이 그믐께쯤 큰누이가 오지나 않을까 싶기도 하였지만 무척 반가웠다. 커피를 내놓고 대객을 하던 마나님은 얼른 자리를 피하여 올라가 버렸다. K는 아직 안 들어왔다.
"누나, 왜 또 여길 왔어요?"
하도 미안하니까, 누이를 고맙다는 대신에 되려 핀잔을 주었다.
"그래 지내기는 어떻던?"
"퍽들 고맙게 굴어 줘요. 너무 과할 지경이죠."
큰누이는 좋아하며 핸드백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식비 일만오천 원은 좀 적겠지만 하는 수 있니? 나머지 오천 환은 너 쓰라는 거다."
동호는 그만 입이 벌어졌다.
무어 자랑할 일이라고 아직은 숨기자던 것인데 미안해서 어서 안심을 시키느라고 발설을 하고 말았다.
"응, 그래? 어디 야?"
하고 누이는 눈이 커다래서 반색을 한다.
"신문사예요. X신문사인데 학생이라 밤일만 가서 돕는 거니 누나 찾아오진 마세요."
말을 꺼내 놓고, 창피하니 차마 배달부라고는 하기 싫어 이쯤 하여두었으나 누이는 동생이 큰 출세나 하는 듯이 아주 흐뭇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식비는 넌지시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K군 모친에게 주려니까 펄쩍 뛰며,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하숙 치던가? 셈평 피어 나갈 때까지 마음 놓고 있으라구."
하며 내민 손을 민다. 지금 세상에 이런 마님도 있나 싶었다. 하는 수 없었다.
"우리 집 아이 밥상에 자네 밥 한 그릇 더 얹어 놓은 것밖에 없지 않은가. 염려 말어."
동호는 그래도 수중에 돈이 있는지라 저녁 전에 K를 끌고 나가서 청요리에 술 한잔씩 먹고 들어와서는 이력서를 써 놓았다가 새벽같이 보급소로 달려갔다. 저편에서는 하루가 급하다니 이왕이면 생색 내서 오늘부터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야, 새벽 도둑이냐? 그렇게 어두커니 어딜 갔더란 말야?"
일요일이라 K는 아직 자리 속에 있었다.
"창피는 하지만 신문배달의 첫 출사다. 그 길에 하숙두 아주 잡아놓구 왔다."
"뭐? 신문배달?"
K는 커단 소리를 치고 눈이 뚱그래서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얘, 야, 챙피스럽다. 떠들지 마라."
"흥, 밥술이나 멕여 길러 가지구 뉘를 보자 했더니 그것두 허사로구나."
하고 K는 껄껄 웃고 말았다. 말리자니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야 말리지 그런 결심이라도 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동호는 하숙으로 옮기고 새벽이면 배달을 끝내고 나서 학교에 뛰어가고 하기에 안해 보던 일이라 분주하고 고단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도 차차 익어 났다.
그런데 요새로 한 가지 질색할 일이 생겼다. 월말에 처음으로 수금을 나섰는데 어떤 쓸쓸한 문화주택에를 들어가니 신문값을 젊은 주부가 손수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하였으나 딱 마주치자 피차에 깜짝 놀랐다. 말문이 막혀서 한참 동안 마주 쳐다만 보았다.
"아, 이거 웬일예요?"
영숙이는 순희에게 동호가 집을 나가 떠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어 아는 터이지마는, 아무려니 동호가 신문 배달부가 되다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반갑고도 그저 가엾었다. 그러나 동호는 사무적으로 영수증을 써 주고 돈을 받자마자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문밖으로 나와 버렸다. 동호는 풀이 죽고 분하기만 하였다. 그다음 날부터는 박 무어인가 하는 말하자면 둘째형수의 친정집에 신문을 들이뜨리기가 창피스러워 첫새벽 컴컴한 틈을 타서 담너머로 던지곤 하였다. 사둔의 집이라 해서 뿐만 아니라, 무슨 연모하는 여자는 아니나 혼담까지 있던 영숙이 집이니 말이다.
다달이 신문의 부수(音瞰)가 느니까 수입도 할 만하고 조수로 어린애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다음 달 수금에는 그 아이를 시켜 영숙이 집에를 보내게 되어 무난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동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배달부 꼴로 영숙이 앞에 나타나서 멸시를 받았거니 하는 고까운 생각이었다. 누가 무어라 한 것도 아니요 우연히 만났단 뿐이니 그저 그런 대로 넘기면 좋으련마는 동호는 뉘게 호소할 데 없이 몹시 분하였다.
석 달이 지나니까 매삭 하숙비를 제하고도 거진 만 환씩 남았는데 거기에 큰형이 신문배달을 한다고 동정해서 다달이 보내준 용돈과 합하면 손에 쥔 돈이 삼만 환이 훨씬 넘었다.
"에라, 양복이나 한 벌 해 입자."
원체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 제복밖에 해 입은 일이 없는 동호는 남이 신사복을 입은 것이 부럽기도 하고 그것이 큰 희망이기도 하였지마는 영숙이에게 신문배달의 초라한 꼴을 보인 뒤로는 늘 옷에 머리가 쓰였던 것이다. 하여간 그리하여 이번 가을에는 국산품으로 똑딴 신사복을 맞추어 입었다.
동호는 신사복을 새로 해 입은 뒤로는 학교에 갈 제나 올 제나 길을 좀 돌아서라도 영숙이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옷자랑이 아니라 속에 품은 굴욕감을 힘껏 내어뿜고 싶은 것이었다. 혹시나 영숙이가 문밖에 나와 있다가 알은 체를 하면 시치미를 떼고 휙휙 지나쳐 버리는, 새양복을 입은 자기 자신을 동호는 머리에 그려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을 두고 그 문화주택 앞을 조석으로 왔다갔다하여야 그런 기회는 오지 않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 날이 바짝 추워지니, 이번에는 외투 걱정이다. 외투도 없이 을씨년스러운 꼴로 그 박모(朴某)라는 영숙이 집 앞을 지나기는 싫어서 요새는 뒷골목으로 새어 다니기도 하였다.
〈1959년 〉
2016년 11월 25일 읽음
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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