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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부 7
거리 한가운데 잿빛 준마 두 필이 끄는 화려한 고급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부는 밑에 내려와 서 있고, 말들은 재갈을 문 채 붙들려 있었다.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서로 밀치며 둘러섰고, 맨 앞에는 순경 몇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등불을 손에 들고 쭈그리고서, 마차 바퀴 바로 옆 포장도로 위의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와글와글 떠들고 외치고 한숨짓곤 했다. 마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따금 이렇게 되풀이했다. "이런 변이 있나! 아아,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라스콜니코프는 되도록 앞으로 뚫고 들어가 마침내 이 모든 소동과 호기심의 이유를 알아냈다. 땅바닥에는 방금 말에 밟힌 사내가 정신을 잃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보기엔 매우 초라하지만 그래도 '나리'다운 옷차림을 한 사내였다. 얼굴에서도 머리에서도 피가 흐르고,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고, 살가죽은 까져 완전히 외모가 일그러져 있었다. 밟혀도 보통 밟힌 게 아닌 것이 분명했다.
"여러분!" 마부는 울부짖으며 호서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것도 내가 말을 급히 몰았다거나 이 사람에게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보통 걸음으로 말을 몰았습니다. 인간은 거짓말투성이고 나도 그 한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여러분도 다 보셨을 겁니다. 주정뱅이는 아시다시피 촛불을 켜고 다니진 않으니까요!..... 보니 이 사람이 휘청휘청 쓰러질 듯이 길을 건너려고 했어요....그래서 나는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소리치고 고삐를 잡아당겼습니다만, 이 사람은 곧장 말 다리 밑에 쓰러졌어요! 일부러 그랬는지, 그렇잖으면 몹시 취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말은 아직 어려서 놀라기를 잘하니까 달려보린 겁니다. 게다가 이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더욱더...그래, 이러헥 됐지 뭡니까."
"정말이야!"하고 목격자의 목소리가 군중 속에서 들렸다.
"소릴 질렀어, 그건 정말이야, 세 번이나 소리를 질렀어." 또 한 목소리가 호응했다.
"꼭 세 번이었어, 모두 들었는걸!" 제3의 소리가 외쳤다.
그렇다고 마부는 그다지 풀이 죽거나 겁을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마차의 주인은 부유한 명사로서 지금쯤 어디선가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순경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을 원만히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쨌든 부상자를 지서나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다친 사람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라스콜니코프는 사람들을 헤치고 더욱 가까이 가서 몸을 굽혔다. 순간 등불이 이 불행한 사내의 얼굴을 똑똑히 비추었다. 그는 사나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압니다. 내가 알아요!" 그는 맨 앞으로 뚫고 나가면서 외쳤다. "이 사람은 관리인데, 퇴지 9등관 마르멜라도프입니다! 바로 이 근처 코젤리의 집에 살고 있어요...빨리 의사를! 비용은 내가 내죠, 자, 여기 있어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였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순경들은 부상자의 신원이 밝혀져 만족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이름과 주소를 일러주고, 마치 친아버지라도 되는 듯이 인사불성의 마르멜라도프를 일각이라도 빨리 그의 집으로 데려가도록 열심히 설득했다.
"바로 저기, 세 번째 집입니다." 그는 혼자 애를 태웠다. "코젤리의 집이에요, 독일인 부호....이 사람은 틀림없이 술 취해 집으로 가던 길이었을 겁니다. 나는 이 사람을 알아요...모주꾼입니다....집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부인과 아이들과.....딸도 하나 있어요. 병원에 가기까지 우선, 그 집에도 아마 의사는 살고 있을 거예요! 지불은 내가 하죠, 내가 하겠어요!....뭐니 뭐니 해도 가족들이 간호할 테니까, 응급치료는 될 겁니다. 그렇잖으면 병원에 가는 동안 죽고 말아요......."
그는 슬쩍 순경의 손에 약간의 돈을 쥐어주기까지 했다. 물론 사건은 명료하고 합법적이었지만, 어쨌든 간에 그러는 편이 치료는 빠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부상자를 들어 올려 운반하기로 했다. 도와줄 사람이 몇 명 나타난 것이다. 코젤리의 집까지는 30보쯤밖에 안 되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조심스레 머리를 받쳐 들고 뒤따라가면서 길을 안내했다.
"이쪽, 이쪽! 층계를 오르려면 머리를 위로 해야 돼요. 자, 돌아요...아, 그렇게! 내가 돈을 드리죠, 내가 사례를 하겠어요"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언제나의 버릇대로 틈만 나면 곧 가슴 위에 팔짱을 끼고는 혼잣말을 섞어가며 쿨룩쿨룩 기침을 하면서, 조그만 방 안을 창가에서 난롯가로, 난롯가에서 창가로 오락가락하곤 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열살 난 큰딸 폴렌카를 상대로 오랫동안 자주 얘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딸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많았으나, 자기가 어머니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커다란, 영리해 보인는 눈으로 어머니의 뒤를 쫓으면서 무엇이든 다 알아 듣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이때 마침 폴렌카는 온종일 몸이 불편했던 남동생을 재우려고 옷을 벗기려던 참이었다. 사내아이는 오늘 밤 사이에 빨아두어야 할 셔츠를 갈아 입혀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른스런 얼굴로 뒤꿈치는 붙이고 발끝은 벌린 채 두 다리를 가지런히 쭉 뻗고서 조용히 꼼짝도 않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대체로 영리한 아이들이 자러 가기 전에 옷을 벗길 때면 으레 그러하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크게 튼채 꼼짝도 않고 어머니와 누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 밑의 계집애는 그야말로 누더기가 다 된 옷을 입고 칸막이 옆에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층계 쪽으로 향한 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은 안쪽에 있는 다른 방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 때문이었는데, 담배 연기가 이 불행한 폐병쟁이 여인을 오랫동안 괴롭게 기침하게 했던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한 주일 동안 더 여윈 것 같았고, 얼굴의 붉은 반점도 전보다 더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너는 믿을 수 없을 거다, 상상도 못할 거다, 폴렌카"하고 그녀는 방 안을 거닐며 말했다. "할아버지 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를, 그리고 저 주정뱅이가 어떻게 너희 모두를 파멸시키려 하는지를! 할아버지는 5등관이었으니까 군인이라면 대령이고, 말하자면 현 지사 급이었지. 그래서 모두가 할아버지한테 와서는 이렇게들 말했지. '우리는 당신을 이미 지사님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반 미하일르이치.' 내가 말이다....쿨룩! 내가 ....쿨룩쿨룩.....아아, 이젠 살기도 지긋지긋하다!" 그녀가 가래를 빝고 가슴을 누르면서 외쳤다. "내가 말이다...그래, 그건 마지막 무도회 때였다, 귀족단장 댁에서였어....베즈제멜리나야 공작 부인이 -그분은 나중에 내가 너희 아버지와 결혼했을 때 축복해주신 분이란다, 폴라야 -그분이 나를 보자 '저 아가씨가 바로 졸업식 때 숄을 들고 춤을 춘 그 귀여운 아가씨 아네요?'하고 물으셨지....뚫어진 데를 꿰매야지, 자, 바늘을 가져와서 꿰매도록 해라, 내가 가르쳐준 대로, 그렇잖으면 내일은....쿨룩! 내일은 꿀룩, 꿀룩, 꿀룩! 더 찢어질라........"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그녀는 외쳤다. "그때 페테르부르크에서 오신 세체골스코이 공작이라고 하는 시종 무관이....나와 마주르카를 추시고, 그다음 날 내게 청혼을 하러 오겠다더구나. 그때 나는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 마음은 이미 다른 분에게 바쳤다고 거절을 했지. 그 다른 분이란 바로 너희 아버지였단다, 폴라야. 그러자 할아버지가 몹시 화를 내시고는....아, 더운물이 준비되었니? 자, 속옷을 이리 내라, 그리고 양말은? ....리다야"하고 그녀는 작은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할 수 없으니 속옷 없이 자거라. 어떻게 해서든지....양말은 옆에 내놔라....함께 빨아야 하니까.... 왜 그놈의 주정뱅이는 안 돌아올까! 셔츠를 걸레가 다 되도록 입어 누더기를 만들어놨구나....이틀 밤이나 고생하기 싫으니 모두 한꺼번에 빨아버려야겠다! 아아! 쿨룩, 쿨룩, 쿨룩! 또! 아니, 저건 뭐야?" 그는 문간에 모여드는 군중과, 뭔가 메고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그건 뭐예요? 대체 뭘 가지고 왔어요? 아아!"
"자, 어디다 내려놓지?"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는 마르멜라도프가 방으로 들려 들어오고, 순경 한 사람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소파에! 소파에 그냥 누여요. 자! 이쪽에 머리를 두고"하며 라스콜니코프는 소파를 가리켰다.
"거리에서 마차에 치였어요! 술에 취해서!" 문간에서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선 채 괴롭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기겁을 할 정도였다. 막내딸 리도치카는 비명을 올리며 폴렌카에게 달려들더니, 언니한테 꼭 달라붙어 온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마르멜라도프를 누이자 라스콜니코프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옆으로 달려갔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놀라지 마시고!" 그는 성급히 말했다. "바깥양반은 길을 건너려다가 마차에 치이셨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이제 곧 정신이 드실 테니까요. 내가 이리로 모시자고 했죠. 난 한 번 온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곧 정신이 드실 겁니다. 돈은 내가 내겠습니다."
"드디어 소원대로 됐구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절망적으로 외치더니 남편에게로 달려갔다.
라스콜니코프는 곧 그녀가 기절하여 쓰러질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불행한 노인의 머리에는 베개가 받쳐졌다. 그때까지도 누구 하나 베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잊고,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금방 가슴속에서 튀어나올 듯한 외침을 억제하면서 열심히 정성껏 침착하게 남편을 돌봤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사이에 의사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의사는 한 집 건너 바로 이웃에 있었다.
"의사를 부르러 보냈습니다." 그는 되풀이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내가 낼 테니까요. 물은 없습니까?...그리고 냅킨이든 타월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빨리 주세요.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르니까요....바깥양반은 다쳤을 뿐이지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정말이에요....글쎄, 의사가 뭐라고 말할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창가로 달려갔다. 한쪽 구석의 납작해진 의자 위에 아이들과 남편의 속옷을 밤중에 빨기 위해 준비한 커다란 대야가 놓여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렇게 밤중에,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때로는 그 이상 손수 빨래를 했다. 집안 식구들 속옷이 한 벌뿐이므로 갈아입을 것도 없을 지경이지만, 그녀는 더러운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미여서 집안에 더러운 것을 내버려두기보다는 힘에 겨운 무리한 일로 자기 몸을 괴롭히더라도 밤에 다들 자고 있을 때 발랫줄에 널어 말려서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대야를 가져다주려다가 그만 대야를 들고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어느새 찾아낸 타월을 물에 적셔 피투성이가 된 마르멜라도프의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가슴 아프게 숨을 몰아쉬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 자신이 오히려 간호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라스콜니코프도 부상자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한 것이 자기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차차 깨닫게 되었다. 순경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폴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소리쳤다. "소냐 언니를 불러와라, 빨리! 혹시 그 집에 없으면 일러두고 오너라, 아버지가 마차에 치이셨으니 돌아오는 대로 곧장 집으로 오라고....빨리, 폴랴! 자, 이 수건을 쓰고 가!"
"단숨에 뛰어갔다 와!" 남동생이 의자 위에서 소리쳤다. 그러고는 다시 아까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발을 앞으로 던지고 발끝을 벌린 그 자세대로 얌전히 의자 위에 앉아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방 안은 사람들로 꽉 차서 입추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순경들은 돌아갔으나, 한 사람만은 남아 층계에서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밀어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대신 안쪽 방에서, 리페베흐젤 부인 집에 셋방 살이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몰려나왔다. 처음에는 문간에서 밀치고들 있었으나 차츰 방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그만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죽을 때만이라도 좀 조용히 죽게 해주면 어때요!" 그녀는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구경거리라고! 담배까지 피워 물고! 쿨룩, 쿨룩, 쿨룩! 아주 모자가지 쓰고 오시지....아니, 정말 모자까지 쓴 사람도 있군....나가요! 죽은 사람에게나마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죠!"
기침 때문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녀의 위협은 효과가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에 돌발적인 불행이 생겼을 때 비록 절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으레 느끼게 마련인 그 야릇한 마음속의 만족을 느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문간으로 물러갔다. 사실 누구나 이런 경우 가장 진지한 연민이나 동정을 가지고 있어도 이와 같은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는 법이다.
문간에는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느니, 여기서 쓸데없이 떠들어봤자 소용없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단 말이오?"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그리고 문을 열고 그들에게 호통을 쳐주려고 달려 나갔으나, 마침 문간에서 이 불행한 소식을 듣고 돌봐주러 온 여주인 리페베흐젤 부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수다스럽고 주책이 없는 독일 여자였다.
"아이고 저런!"하며 그녀는 손뼉을 쳤다.
"바깥양반이 술 취해 마차에 치이셨다고요? 병원으로 보내요! 나는 이 집 주인이에요!"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 좀 생각을 하고 말해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위압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녀는 집주인을 대할 때 상대가 '자기 분수'를 알도록 언제나 이렇게 위압적인 어조로 말하곤 했으므로, 지금도 역시 그러한 만족감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
"전에도 한 번 말했을 거예요, 나를 절대로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라고 부르지 마라고. 나는 아말리야 이반이에요!"
"당신은 아말리야 이반이 아니라,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예요. 나는 지금 저 문간에서 키득거리고 있는 레베쟈트니코프처럼 치사하게 비위나 맞추려는 사람은 아니니까.(사실 문간에서는 웃음소리와 '또 붙었군!'하느 ㄴ외침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당신을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라고 부르겠어요. 하긴 이렇게 부르는 것이 왜 당신 마음에 안 드는지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당신도 눈으로 보면 알 거예요. 세묜 자하르이치가 어떻게 됐는가를. 그 사람은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 지금 곧 문을 닫고 아무도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요. 제발 죽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죽게 해줘요! 그렇잖으면 내일 당장 당신의 소행이 지사님께 알려질 거예요. 그 공작님을 나는 처녀 시절부터 알고 있고, 우리 바깥양반도 늘 돌봐주셨으니까 잘 아실 거예요. 우리 주인에게 많은 친구와 보호자가 있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아요. 단지 그이가 너무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의 불행한 약점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는 그분을 멀리했을 뿐이죠. 그러나 이번에는(하고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가리켰다) 돈도 신분도 있는 이 친절한 분이, 주인과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이분이 우릴 도와주고 계세요. 그러니 아무 염려 말아요. 아말리야 류드비고브나........"
그녀는 이 모든 말을 무척 빨리 지껄였다. 그리고 갈수록 말은 점점 더 빨라졌으나 갑자기 기침이 나면서 그녀의 웅변을 꽉 막아버렸다. 마침 이때 빈사의 부상자가 의식을 회복하여 신음 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녀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부상자는 눈을 뜨기는 했으나 아직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지, 앞에 서 있는 라스콜니코프를 멍청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사뭇 괴로운 듯이 드문드문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 양 끝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안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서글프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남편을 지켜보았으나, 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어쩌면 좋아요! 가슴팍이 엉망이군요! 아, 이 피, 이 피 좀 봐요!" 그녀는 처절하게 외쳤다. "웃옷은 벗겨야겠어요! 조금 옆으로 돌아누워요. 세묜 차하르이지, 움직일 수 있으면"하고 그녀는 남편에게 소리쳤다.
마르멜라도프는 아내를 알아보았다.
"신부님을!"하고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창가로 물러서서, 창틀에 이마를 대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뇌까렸다.
"아아, 빌어먹을 세상!"
"신부님을!" 빈사의 병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벌써 모시러 갔다고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그는 그 고함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고는 겁먹은 듯 서글픈 시선으로 아내를 더듬었다. 그녀는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와 머리맡에 섰다. 그는 다소 기분이 가라앉은 듯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윽고 그의 눈길은 한쪽 구석에서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오들오들 떨면서 휘둥그레진 가련한 눈으로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 나이 어린 리도치카(그의 귀염둥이)에게 멈추었다.
"아.....아........"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그녀쪽으로 눈짓을 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소리쳤다.
"맨발이야! 맨발!" 그는 흐릿한 눈으로 딸의 맨발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말 말아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소리쳤다. "왜 맨발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다행히도 의사가 왔군!" 라스콜니코프가 기쁜 듯이 외쳤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늙은 독일인 의사가 귀찮은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병자 곁으로 가서 맥을 짚어보고 조심스레 머리를 만져본 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손을 빌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셔츠 단추를 풀고 병자의 가슴을 헤쳤다. 가슴은 엉망진창이었다. 피부는 밀리고 찢겼으며, 오른쪽 늑골이 두세 개 부러져 있었다. 왼쪽 심장 바로 위에는 누르스름한 검은 반점이 끔찍하게 퍼져 있었다. 무참한 말발굽 자국이었다. 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순경은 의사에게 부상자가 마차 바퀴에 끼어 30보쯤이나 끌려갔다고 말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게 이상할 정도군요"하고 의사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 어떻겠습니까?"라스콜니코프가 물었다.
"이제 곧 숨을 거둘 거요."
"전혀 가망이 없습니까?"
"전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중입니다. 게다가 머리에도 심한 중상을 입었으니까요....글쎄요....피를 뽑아내봐도 좋지만....그것도 소용없을 겁니다. 5분이나 10분 후엔 숨을 거둘 테니까요."
"하여튼 피라도 뽑아봐주십시오!"
"글쎄요....그러나 미리 말해둡니다만, 그러헥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이때 또 발소리가 들리면서 문간방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쟁반에 미리 준비한 성찬을 담아 든 신부가 나타났다. 몸집이 작은 백발노인이었다. 그 뒤로 순경이 따라 들어왔다. 거리에서 만나 같이 온 것 같았다. 의사는 곧 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의미심장하게 서로 눈짓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의사에게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달라고 간청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남아 있기로 했다.
모두 뒤로 물러섰다. 참회식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죽어가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띄엄띄엄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낼 뿐이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리도치카의 손을 잡고 사내 아이는 의자에서 내려, 구것에 있는 날로 쪽으로 물러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계집아이는 떨기만 했으나, 사내아이는 앙상한 무릎을 꿇고 고시리 같은 손을 절도 있게 올려 성호를 크게 긋고 마루에 이마를 톡톡 부딪치며 경건히 절을 했다.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특별한 만족을 주는 것 같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도 기도를 드렸으나, 이따금 어린것들의 셔츠를 매만져주기도 하고 기도를 계속하면서 무릎을 꿇은 채로 옷장에서 작은 숄을 꺼내어 알몸이 드러난 계집아이의 어깨에 걸쳐주기도 했다. 그사이에도 안쪽 방으로 통하는 문은 구경꾼들의 손으로 자꾸 열리곤 했다. 문간방에는 각 층에서 구경꾼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으나 문지방을 넘어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겨우 촛불 한 자루가 모든 정경을 희미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바로 이때, 언니를 데리러 갔던 폴렌카가 군중을 헤치며 바삐 들어왔다. 너무 급히 달려와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나, 방에 들어오자 재빨리 모자를 벗고, 눈으로 어머니를 찾아내자 그 옆으로 다가가서 "지금 와요! 가다가 만났어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딸을 꿇어 앉히고 자기 옆에 자리를 잡게 했다. 이때 군중 속에서 겁먹은 표정의 한 처녀가 소리도 없이 앞으로 나왔다. 가난과 누더기와 죽음과 절망이 가득찬 이 방 안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 것은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 역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값싼 것이긴 했으나 어느 특수 사회에서 자연히 이루어진 취미와 법칙에 따라 밤거리 여인답게 야하게 차려입어서, 그 천한 목적이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소냐는 바로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았다. 너무 당황하여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그저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이런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 길고 우스꽝스러운 꼬리가 달린, 몇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모르는 화려한 빛깔의 옷도, 방문을 막아버릴 정도로 폭이 넓은 치마도, 번쩍이는 구두도, 밤에는 필요 없는 파라솔을 들고 있는 것도, 새빨간 깃털 장식을 단 우스꽝스러운 듯한 밀짚모자도, 모든 것을 다 잊은 듯싶었다. 어린애처럼 비스듬히 눌러쓴 모자 밑으로 공포 때문에 벌어진 입과 움직이지 않는 눈방울, 여위고 창백한 얼굴이 엿보였다. 소냐는 자그만 키에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윈 처녀였으나, 놀랄 만큼 푸른 눈에 꽤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그녀는 침대와 신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너무 급히 달려오느라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마침내 군중의 수군거림과 동시에 두세 마디 말이 귀에 들어왔는지,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문턱을 한 발 넘어섰으나 다시 문가에 걸음을 멈추었다.
참회와 성찬식이 끝났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다시 남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신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고별과 위안의 말을 하려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애들은 어떻게 하면 좋지요?" 그녀는 날카롭고 초조한 어조로 어린것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주님의 도움을 바라십시오"하고 신부는 입을 열었다.
"흥! 바지로우시다지만, 우리하곤 인연이 멀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부인, 죄가 돼요!" 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타일렀다.
"그럼 이건 죄가 아닌가요?" 죽어가는 남편을 가리키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참변의 언인이 된 사람들이 당신에게 배상을 해줄 것입니다. 수입을 잃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아듣지 못하시는군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한 손을 내젖고 찌증 섞인 소리로 외쳤다. "무엇때문에 배상 같은 걸 한답니까! 술에 취해서 자기가 말발굽 밑어로 기어들었는데! 수입이란 건 또 뭐요? 저 사람은 수입은커녕 고통만 주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굉장한 주정뱅이라 몽땅 다 마셔버렸으니까요. 우리 물건을 훔쳐내서 술집에 가져갔어요. 아이들과 내 일생을 술집에서 망쳐놓고 말았어요! 죽어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지요! 오히려 손해가 적어질 테니까!"
"임종 때는 용서해드려야죠. 그런 말은 죄가 됩니다. 부인, 그런 마음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남편 곁에서 열심히 시중을 들었다. 물을 먹여주고, 머리의 땀과 피를 닦아주고, 베개를 고쳐주기도 하면서 이따금 신부 쪽을 돌아보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때는 별안간 이성을 잃은 듯이 그에게 대들었다.
"이보세요, 신부님! 그건 말뿐, 단지 말뿐이에요! 용서하라고요! 오늘도 마차에 치이지만 않았다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돌아왔을 거예요. 한 벌밖에 없는 낡아빠진 셔츠 위에 누더기를 걸치고는 그냥 정신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그래도 나는 새벽까지 절벅거리며저 사람과 애들의 옷을 빨아야 하고, 또 그것을 창밖에 널어 말려야 하고, 그러다가 날이 새면 해진 데를 기우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밤이에요! .....자, 이래도 용서라는 말이 나옵니까! 그렇잖아도 나는 어지간히 용서해온 셈이지요!"
무섭도록 격렬한 기침이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녀는 한 손으로 괴로운 듯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수건에 가래를 받아 그것을 신부님 앞에 내밀어 보였다. 손수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신부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임종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자기에게 몸을 굽힌 아내의 얼굴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했다. 그는 열심히 혀끝을 움직이면서 불명확한 소리를 내며 말하려 했으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이 용서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 명령하듯이 그에게 외쳤다.
"잠자코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요!" 그러자 부상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방황하는 그의 시선이 문득 문간에 머무르면서 소냐를 발견했다.......
그때까지는 그는 딸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구석진 그늘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저건 누구야? 저건 누구야?" 갑자기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에 불안의 빛을 나타내고 공포에 싸인 눈으로 딸이 서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누워 있어요! 누워 있으라니까요!"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팔꿈치를 세웠다. 그는 마치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마 동안 옴짝달싹 않고 이상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딸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아직 이런 옷차림을 한 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는 딸을 알아보았다. 학대받고 짓밟힌 딸을, 칙칙한 싸구려 의상을 부끄러워하며 임종하는 아버지에게 고별인사를 드릴 차례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딸을. 끝없는 고민의 빛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소냐! 내 딸아! 용서해다오!" 그는 이렇게 외치고 딸에게 손을 내밀려 했으나,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소파에서 마룻바닥으로 쿵하고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달려와 안아 일으켜 다시 소파에 누였으나, 그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가고 있었다. 소냐는 가냘픈 비명을 올리며 옆으로 달려들어 아버지를 끌어안았으나,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기어이 소원을 성취했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의 시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어쩌면 좋지! 어떻게 장사를 지낸담? 내일부터 저것들을, 저 애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
라스콜니코프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곁으로 다가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바로 지난주에 돌아가신 주인께서는 자신의 신세와 집안 사정을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주인께서는 당신에 대해 감격에 넘친 존경 어린 마음으로 얘기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족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고, 특히 당신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그 불행한 약점을 지녔으면서도 당신을 무한히 사랑하고 또 존경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 그날 밤부터 나는 그분의 친구가 되었습니다.....그래서 실례지만, 지금 내게....다소나마....고인에게 의무를 다하게 해주실 순 없을는지요. 여기....아마 20루블쯤 있을 겁니다. 혹시 이거라도 도움이 된다면.....그야말로....나는.....아무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꼭 오겠어요, 내일이라도 또 와서 뵙겠습니다...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재빨리 방을 나와 사람들을 헤치면서 급히 층계 쪽으로 나갔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경찰서장인 니코짐 포미치와 딱 마주쳤다. 그는 이 불행을 알고 몸소 뒤처리를 강구하려고 왔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그 일이 있은 뒤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난 적이 없었지만, 니코짐 포미치는 곧 그를 알아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물었다.
"죽었습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의사도 오고 신부도 와서 모든 일이 격식대로 갖추어졌습니다. 제발 그 불행한 부인을 귀찮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렇잖아도 폐병을 앓고 있으니까요. 될 수 있는 한 기운을 내도록 격려해주십시오....당신이 친절한 분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웃음을 머금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군요." 초롱 불빛으로 라스콜니코프의 조끼에 묻은 생생한 핏자국을 발견하자, 니코짐 포미치는 이렇게 주의해 말했다.
"네, 묻었어요....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뭔가 색다른 표정을 지으며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그리고 싱긋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층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열병에 걸린 것 같은 기분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충실한 굳센 생명이 느닷없이 밀려와서 그 끝없는 새로운 감각이 온몸에 넘쳐흘렀다. 이 감각은 일단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특사를 받은 것 같은 느낌과 흡사했다. 층계 중간에서 돌아가던 신부가 그를 따라잡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무언의 인사를 나누고 잠자코 신부를 앞세워 보냈다. 그러나 마지막 몇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폴렌카였다. 소녀는 뒤에서 달려 내려오며 그를 불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돌아다보았다. 소녀는 마지막 층계까지 달려와서, 그보다 한 계단 높은 곳에서 그와 얼굴을 맞대고 섰다. 희미한 불빛이 마당에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위기는 했어도 귀엽게 생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쁜 듯이 생글거리며 천진난만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소녀는 몹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전갈을 가지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저어,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어디 사시죠?"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다급히 물었다.
그는 소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 어떤 행복감을 느끼면서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를 보고 있으니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자기 자신도 몰랐다.
"누가 너를 보냈지?"
"소냐 언니가 보냈어요." 소녀는 한층 더 기쁜 듯이 생글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소냐 언니가 보냈을 거라고."
"어머니도 가라고 하셨어요. 소냐 언니가 갔다 오라고 하니까 어머니도 옆에 와서 '얼른 뛰어갔다 온, 폴렌카!'라고 말씀하셨어요."
"넌 소냐 언니가 좋으니?"
"누구보다도 제일 좋아요!"하고 이상하리만큼 힘을 주며 폴렌카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는 갑자기 진지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좋아해주겠니?"
대답 대신 그는 자기에게로 가까이 오는 소녀의 얼굴을, 그리고 자신에게 키스하려고 천진하게 비죽 내민 볼록한 입술을 보았다. 순간 성냥개비처럼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껴안고, 조그만 머리가 그의 어깨에 묻혔다. 그리고 소녀는 점점 강하게 얼굴을 루그면서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빠가 불쌍해요!" 잠시 후에 느녀는 울던 얼굴을 들고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요즈음은 불행한 일만 계속돼요." 그녀는 더욱 정색을 하고 불쑥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은 어린애가 갑자기 '어른 같은' 말을 하려 할 때 애써 지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빠는 너를 귀여워하셨니?"
"아빠는 리도치카를 제일 귀여워하셨지요."
소녀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웃지도 않고 아주 어른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제일 어린 데다 늘 앓기 때문에 특히 귀여움을 받았어요. 그 애한테는 언제나 선물을 사다 주셨어요. 우리는 아버지한테서 책 읽는 것을 배웠죠. 나는 문법과 성서를" 하고 그녀는 대견스럽게 덧붙였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기뻐하신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알고 계셨고요. 어머니는 나한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시고 싶어해요. 나도 이젠 교육을 받을 나이거든요."
"너 기도할 줄 아니?"
"네, 알고말고요! 벌써 오래전부터. 나는 이제 컸으니까 혼자 입속으로 기도를 드려요. 콜랴와 리도치카는 어머니와 함께 소리를 내서 기도드리지만요.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고, 그다음에는 또 하나 '주여, 소냐 언니를 용서하시고 축복해주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그리고 또 '주여, 우리의 두 번째 아버지를 용서하시고 축복해주소서'하는 기도를 드려요. 거건요, 전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지금은 다른 아버지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처음 아버지를 위해서도 역시 기도를 드려요."
"폴레치카(폴렌카의 애칭), 내 이름은 로지온이야. 언젠가는 나를 위해서도 기도를 좀 해다오, '주님의 종인 로지온을'하면 되니까."
"난 이제부터 일생 동안 내내 아저씨를 위해서 기도하겠어요"하고 그녀는 열틴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웃으면서 느닷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꼭 껴안았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녀에게 자기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고, 내일 꼭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소녀는 무척 기뻐하며 돌아갔다. 그가 거리에 나왔을 때는 벌써 10시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5분 후에 그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아까 여자가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였다.
'어리석은 생각은 그만하자!' 그는 의기양양하게 단호히 말했다. ‘신기루여, 사라져라, 공연한 공포도 사라져라, 환영도 꺼져버려라!.....나는 아직 살아 있다! 아니, 내가 지금 살아 있지 않단 말인가? 내 생명은 그 노파와 더불어 죽어버린 것이 결코 아니다! 노파에겐 천국에서 고이 잠들라고 명복이나 빌면 족하다, 이젠 그 노파도 편이 쉴 때가 되었으니까! 이제 비로소 이서오가 광명의 왕국이 찾아든 것이다! 그리고....의지와 힘의.... 자, 이제 두고 보라지! 해볼 테면 해보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향해 도전이라도 하듯이 그는 분연히 덧붙였다. ‘나는 이미 1아르신이 안 되는 공간에서라도 살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지금 나는 매우 쇠약한 듯하지만, 그래도....병은 완전히 나은 것 같다. 아까 집을 나올 때부터 나는 병이 나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포친코프의 집은 바로 눈앞이다. 어쨌든 이제 라무지힌한테는 꼭 들려야겠다. 비록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내기는 녀석이 이겨도 좋다!....그 녀석도 위로를 좀 받아야지. 아무려면 어때, 그래도 좋아!.....힘, 필요한 건 힘이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힘은 힘으로 얻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자들은 바로 이것을 모르고 있거든.’ 그는 오만하고 자신 있게 덧붙이고는 간신히 발을 옮겨놓으면서 다리를 떠났다. 그의 긍지와 자신감은 시시각각으로 그의 내부에서 성장하여, 다음 순간에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대체 무슨 변이 일어나 이토록 그를 일변시킨 것일까? 그것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던 그는 갑자기 ‘살아갈 수 있다. 아직 생명은 있다. 내 목슴은 그 노파와 더불어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라고 느꼈다. 어쩌면 그는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의 종인 로지온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건 또 뭐냐.’ 이런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아니, 그건....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다!’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곧 스스로 자신의 어랜애 같은 핑계가 우스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라주미힌의 집을 찾아냈다. 포친코프의 집에서는 벌써 새로 세 든 사람을 알고 있어서 문지기가 곧 방을 가르쳐주었다. 층계 중간쯤에서부터 큰 모임이나 있는 것처럼 떠들썩한 소리와 활기 띤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층계 쪽으로 향한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떠드는 소리와 토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주미힌의 방은 제법 큰 편이었고, 모인 사람은 열댓 명쯤 되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문간에서 멈춰 섰다. 칸막이 뒤에서 주인 집 하녀 둘이 커다란 사모바르 두 개와 주인집 부엌에서 가져온 피로그(고기만두의 일종)와 안주 등을 담은 접시와 술병 사이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라주미힌을 불러달라고 햇다. 라주미힌은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그가 전에 없이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라주미힌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좀 다른 것 같았다.
“저 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성급히 말했다. “내가 온 것은 자네가 내기에 이겼고, 실제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난 들어가진 않겠어. 몹시 피로해서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아. 그러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네! 내일 우리 집에 와주게나.......”
“그럼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지! 자네 입으로 그토록 기력이 없다고 하니........”
“손님은 어떻게 하고? 저 곱슬머리는 누구지, 방금 이쪽을 내다본 사내 말이야?”
“저 사람? 내가 알 게 뭐야! 아마 백부님이 아는 사람이겠지, 아니면 불청객인지도 모르고....저 사람들은 백부님께 맡겨두면 돼. 백부님은 정말 좋은 분이야, 자네에게 지금 소개할 수 없는 게 유감이군. 아무튼 저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어! 지금 그들은 내게 관심둘 겨를이 없으니까. 나도 바람을 좀 쐬어야지.
마침 잘 왔어. 2분만 더 있었더라면 나는 저들과 격투를 벌였을 거야! 정말이야! 아주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지껄이거든.....자네는 인간이 얼마만큼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아니, 상상 못할 리도 없겠지? 이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도 곧잘 거짓말을 하니 말이야. 실컷 하라고 내버려두는 거야. 그 대신 나중에는 거짓말을 못하게 되겠지. 잠깐만 기다리게, 조시모프를 데려올 테니.
조시모프는 그 어떤 이상한 열의까지 보이며 라스콜니코프를 대했다. 그의 얼굴에는 일종의 특별한 호기심이 엿보였으나, 곧 그 얼굴은 티 없이 밝아졌다.
”곧 자리에 누워 쉬셔야겠어요.“ 그는 환자를 되도록 찬찬히 보고 나서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이걸 한 봉 드시면 좋겠는데, 드시겠소? 아까 지어놓았어요.....가루약 한 봉지입니다.
“두 봉지라도 좋아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가루약은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다.
“그거 잘됐군, 자네가 바래다준다니!”하고 조시모프는 라주미힌에게 말했다. “내일 어떨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오늘은 퍽 경과가 좋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오래 살고 오래 배우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나올 때 조시모프가 내게 뭐라고 속삭였는지 아나?” 거리에 나서자 라주미힌은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들이 하도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니까 나는 자네한테 죄다 얘기하겠네만, 조시모프는 이렇게 명령하더군. 가는 길에 자네를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자네에게도 말을 시키라는 거야. 그리고 자기한테 들려달라는 거지. 그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이야....즉 자네가 미쳤든가, 아니면 거기에 가깝다는 거야. 어때, 놀랐지! 첫째로 자네는 그 자보다 세 배나 영리하고, 둘째로는 자네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의 머릿속에 그런 맹랑한 생각이 있든 없든 문제 삼을 것도 없어. 셋째로 저 고깃덩어리 같은 친구는 전공이 외과이면서도 지금 정신병에 열중해 있는데, 오늘 자네와 자묘토프의 대화가 자네에 대한 그의 견해를 송두리째 뒤엎었다는 말일세.”
“자묘토프가 자네한테 죄다 얘기하던가?”
“죄다 얘기했어. 그리고 얘기하길 참 잘했어. 이제 나도 모든 걸 알게 됐고, 자묘토프도 알게 됐지. 한마디로 말해서 로쟈....요컨대....나는 지금 약간 취했지만....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야...요컨대 그런ㅅ 생각....알겠나? 사실 말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거야, 알겠나?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것을 입밖에 내지 못했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니까, 특히 그 칠장이가 붙잡힌 뒤로는 모든 명상이 일시에 무너지고 영원히 사라져버렸지.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우둔할까? 나는 그때 자묘토프를 조금 때려주었네. 이건 우리끼리 얘기지만, 자넨 아예 내색도 하지 말아주게, 알겠나? 나는 그자가 아주 신경이 예민한 사내라는 걸 알았어. 루이자네 집에서 있었던 일이야.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은 명백해졌지. 장본인은 일리야 페트로비치였어! 그자는 자네가 그때 서에서 졸도한 것을 이용하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진거야. 나는 다 알고 있네......”
라스콜니코프는 귀를 바싹 기울여 들었고, 라주미힌은 취한 김에 마구 지껄여댔다.
“그때 내가 졸도한 것은 숨이 막히는 데다 페인트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야”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또 변명을 하는군! 페인트 냄새뿐이 아니야, 병은 한 달 전부터 잠복하고 있었던 거야. 조시모프가 증인이지! 그러나 지금 그 풋내기는 얼마나 기가 죽었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걸세. ‘나는 그 사람 새끼손가락만큼의 가치도 없어’라고 말하고 있다네. 자네 새끼손가락 말일세. 그렇지만 여보게, 그자도 가끔 선량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어. 하여튼 교훈이었어. 오늘 수정궁에서의 일은 그자에게 좋은 교훈이었지. 그야말로 완전 이상의 것이었어! 자넨 처음부터 그 자의 혼을 빼놓고 떨게 했다더군! 그리고 그자에게 추악한 망상을 거의 완전히 믿게 하고는 갑자기....혀를 날름 내밀고 ‘흥, 어때, 잘됐나!”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였어. 그자는 지금 완전히 풀이 죽어 말이 아니라네! 자넨 정말 명수야. 그자들은 그렇게 한 번 혼을 내주어야 한다니까!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게 유감이야! 그자는 지금 자네가 오길 무척 기다리고 있다네. 포르피리도 자네와 사귀고 싶다더군......“
”아니....그자까지....그런데 왜 나를 미친놈이라고 보았지?“
”아니, 미쳤다는 게 아니야. 아마 내가 너무 지껄인 것 같군...그건 말이야. 자네가 그 한가지 점에만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 조시모프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걸세. 그러나 지금은 왜 흥미를 갖게 됐는지 명백해졌어. 모든 사정을 알고 보면....또 그때의 그 사건이 극단적으로 자네의 신경을 자극해서 병과 함께 뒤범벅이 됐다는 것을 알고 보면 말이야.....아니, 내가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군....그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자는 또 그자대로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아무튼 그 자는 정신병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자넨 그자에게 침이라도 뱉어주면 되는 거야.......“
30초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여보게,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가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솔직히 말하겠네, 나는 지금 죽은 사람 곁에서 오는 길이야. 어느 관리가 죽었어....나는 거기서 있는 돈을 죄다 줘버렸네....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내게 키스를 해주었어. 그 사람은 내가 누구를 죽였다손 치더라도, 역시....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다른 인간을 보았어....새빨간 깃털이 달린....하지만 내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는 것 같군. 나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나를 좀 부축해주게....이제 곧 계단이겠지.....“
”아니, 왜 그러나.....왜그래?“ 라주미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머리가 좀 어지러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자꾸만 슬퍼지는 게 문제란 말이야. 한없이 슬퍼! 여자처럼......정말이야! 아니, 저게 뭔가? 저길 좀 봐!“
”뭘 말인가?“
”저게 안 보아나? 내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이지? 문틈으로........“
그들은 이미 주인집 문간과 나란히 있는 마지막 층계 앞에 와 있었다. 과연 라스콜니코프의 조그만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래에서도 보였다.
”이상하군! 어쩌면 나스타시야인지도 모르지.“ 라주미힌이 말했다.
”아니, 이런 시각에 내 방에 온 적은 없었어. 벌써 자고 있을 거야. 그러나.....아무래도 좋아! 그럼 잘 가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자네를 바래다 주러 온 거야. 함께 들어가세!”
“함께 들어가도 좋지만, 난 여기서 악수하고 헤어지고 싶네. 자, 손을 내게, 잘 가!”
“아니, 왜 그러는 거야, 로쟈?”
“아무것도 아니야....그럼 가세....자네가 입회인이 돼도 좋겠지......”
두 사람은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라주미힌의 머리속에는 어쩌면 조시모프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갓다. ’쳇, 내가 너무 지껄여서 이 녀석의 머리를 흔들어놨군!‘하고 그는 혼잣말을 햇다. 그들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방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라주미힌이 외쳤다.
라스콜니코프가 먼저 홱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그는 문지방 위에 꼿꼿이 얼어붙고 말았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소파에 앉아서 벌써 한 시간 반이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출발하여 여행 중에 있으니 곧 도착할 것이라는 통지를 오늘까지 몇 번이나 받았으면서도 그는 어째서 그 두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또 그 두사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한 시간 반 동안 두 사람은 앞다투어 나스타시야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었고, 그래서 나스타시야는 여태까지 두 사람 앞에 서서 모든 것을 숨김없이 얘기해줬던 것이다. 그가 병중인데도 ’오늘 뛰쳐나갔다‘는 말을 듣자, 두 사람은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틀림없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아, 이를 어쩌나!‘ 두 사람은 울었다. 그들은 한 시간 반을 기다리는 동안에 십자가의 괴로움을 참아내야 했다.
기쁨과 감격에 넘친 외침이 라스콜니코프를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서 있기만 했다. 참을 수 없는 돌발적인 의식이 천둥과도 같은 충격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을 포옹하려 해도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하며 웃고 울었다. 그는 한 걸음 내딛는가 했더니, 허우적거리며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혼란, 공포의 외침, 신음 소리....문턱에 서있던 라주미힌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그 힘센 팔로 병자를 안아 소파에 눕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는 어머니와 누이에게 외쳤다. “그저 기절했을 분입니다. 염려 마세요! 조금 전에 의사도 많이 좋아졌고 이젠 건강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으니까요! 물을! 자, 벌써 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자, 보세요,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으스러질 정도로 힘껏 두네치카의 손을 움켜쥐고는, ’벌써 정신이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녀의 몸을 굽히게 했다. 어머니도 동생도 감격과 감사의 어린 눈으로 라주미힌을 구세주처럼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이미 나스타시야한테서 이 ’민첩한 청년‘이 병중에 있는 자기네 로쟈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주었는지를 들어 알고 있었다. ’민첩한 청년’이란 이날 밤 두냐와 허물없는 이야기 끝에 풀헤리야 할렉산드로브나 라스콜니코프 자신이 라주미힌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