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양을 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소페사이는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받게 했던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다. 본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로서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 (2)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갈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 '할례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템노메노이는 '할례를 행하다'는 뜻을 가진 '페리템노'의 현재 중간태로서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사본에서는 완료 수동태인 '페리테트메메노이'를 취하여 이미 할례를 받은 거짓 교사들을 선명하게 지시한다.
혹자는 본문이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들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제를 현재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다 오래된 사본에서는 현재형을 취한다. 이처럼 현제형을 취하면 모든 거짓 교사들과 추종자들 다 지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듯하다.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지키지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데 퓌랏수신'은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결코...없으니'에 해당하는 '메 게노이토'는 70인역에서 주로 사용된 용법으로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소원을 나타내는 화구법이다. 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선명하게 대변한다. 한편 '내게는'이라는 표현은 온갖 불의를 무릅쓰고 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낸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세상'이란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바울이 앞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피조물'을 뜻하는 '크티스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특히 '크티시스'는 본절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간다.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본서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한편 '행하는'의 헬라어 '스토이케수신'은 '행렬에 맞추어 나가다', '규칙을 굳게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스토이케오'의 미래 직설법으로 5:25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의미할 때 사용된 것처럼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본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이스라엘 족속이 될 수 있다 .
참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을 믿어 순종케 된 자들로 구성된 '새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한다. (2) '평강'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진다.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축복과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는뎨 본절에서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함축한다
한편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의 '헤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은혜'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큰 은혜를 가리킨다. 특히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을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않은 무리들에게도 같은 축복 속으로 초대하고있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고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 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갈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모든 형제들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을 함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
저들의 구원이 자의적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라고 표현한 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내적인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길 기원하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