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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선지식 제4차 대만 해외성지순례
10월18일 20시30분에 대구 공항에서 반가운 모습으로 만난 23명은 3박5일 성지순례 출국수속을 마치고 20시05분에 이륙하는 티웨이 항공편에 몸을 싣고 타이페이(台北) 공항에 24시05분경 도착 짐 가방을 찾아 관광객이 많아서 인지 몰라도 입국 수속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에 탑승 백금화원주점(白金花園酒店)에 도착 룸 배정을 받고 잠자리에 든 시간은 02시가 넘어서였다.
10월19일 모닝콜 06시30분 일어나 호텔 창밖을 내다보니 밤에 비가 와서 촉촉히 젖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천수경, 예불,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관음정근,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부처님 가피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지순례가 좋은 날씨와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발원기도 후 08시30분에 버스 승차 후 가이드는 대만 국토 소개로 남북이 394km, 동서가 144km에 달하는 고구마 또는 담배잎 모양의 지도로 생긴 나라 대만의 면적은 35,980K㎡으로 경상남북도 크기, 수도는 타이페이(台北:TaiPei), 인구는 약23,36만명(대만성인84%, 대륙본토인14%, 원주민 2%)으로 작은 섬나라이다.
인구의 75%가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로 크고 작은 사찰들이 현대인에 맞는 생활속의 불교를 세계속의 불교로 급부상한 나라이며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늦고 아열대성 기후라 비가 자주 오고 현재날씨는 7월초여름과 같았다.
숙소에서 버스로 이동 가이드로부터 오늘 일정을 듣고 대북(台北)역에서 열차를 이용 우리나라 무궁화호 열차 정도로 차창 밖 전원 풍경을 내다보며 담소(談笑)를 나누다 3시간정도 소요 신성(新城) 태노각(太魯閣)역에 도착 버스로 이동 중식 후 자제정사로 향하였다.
☆자제정사당(慈濟靜思堂)에 도착 자제의료원과 함께 있었는데 人本重視 尊重生命 글자를 보며 대만 4대 사찰중 하나인 자재정사 정사당(靜思堂) 건물은 현대식 건물이며 안으로 들어가니 나이가 드신 봉사요원이 안내를 하여 관세음보살님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무량의경(無量義經) 사경(寫經) 액자를 걸어 놓았으며, 바닥은 연꽃 문양으로 된 여기는 수련장이라 하였으며 복도를 지나 대강당 집회장에 도착 연꽃모양 나무 의자 밑은 사물을 넣을 수 있는 공간 확보와 2층의 기도실천정은 자연 채광과 정면에 대형 입체식으로 그려진 현대식 부처님 형상을 제작 봉안 해 놓았다.
정사당 창설하신 증엄(證嚴, 비구니)스님은 1937년 출생 4세경 숙부님의 양녀가 되어 똑똑한 유년 시절을 보내시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세상을 달리하자, 증엄 스님은 가난과 죽음 그리고 질병이라는 중생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5세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어느 날 시우 타오(Hsiu Tao) 스님을 만났을 때 “어떤 여자가 가장 행복합니까?”를 질문했고 “시장 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자”라는 대답을 듣고 의문을 가졌던 그는 여자는 돈을 지출하고 가정만을 위해서 일할 권리뿐만이 아니라 남자처럼 사회에 대한 책임(責任)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이 되면 사회적 자비심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겠다고 결심했고 그 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사회와 모든 중생에게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집을 떠나 붓다에 귀의(歸依)할 절을 찾기로 결심했다.
60년대 당시 마을 사람들이 가난했기에 아무런 보시도 받지 않기로 하고 나물과 산열매를 따고, 추수하고 남은 땅콩이나 고구마를 주워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원초적인 삶을 살면 서도 그는 마치 모든 것이 그에게 드러난 것처럼 행복을 느끼면서 불교를 공부하다 그 다음해 겨울, 스님은 스스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는 불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1963년 2월 타이페이로 가서 비구니가 되기 위한 32일간의 수련 과정을 신청했다.
그 기간을 통해 그는 대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순(Yin Shun)스님을 찾아갔는데 인순스님은 제자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셨는데 그를 보고는 흔쾌히 승낙하시고 스님은 법명을 주고, “이제 너는 비구니다. 끊임없이 불교와 모든 중생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담고 그는 불교에 입문 이후 한 치의 후회도 없이 모든 중생을 마음으로 포용했다.
후아리엔(Hualien)에 돌아와서도 쳉옌 스님의 청빈한 삶은 계속되었는데 푸밍(Pu Ming)사원 뒤 작 은 움막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규칙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야채를 경작하고 공장에 가서 재료를 가져다 스웨터를 짜고, 콘크리트 포대로 동물 사료를 위한 작은 포대와 아기 신발도 만들었으며 또한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경을 읽거나 불교의식을 행하지 않았고 보시자나 후원자를 찾지도 않았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대장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1966년 어느 날 그가 입원한 신도를 만나기 위해 후아리엔에 있는 병원에 갔을 때 병원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피(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유산한 한 원주민 여성이 흘린 것이며 가족들이 그녀를 데리고 8시간을 걸어서 병원으로 왔는데 예치금 8000원이 없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돈 때문에 고귀한 생명이 죽어 간다는 슬픔으로 가슴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눈물을 억누르고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가난한 비구니로서 그의 힘은 제한되어 있으나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 하지만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 했으며, 대부분의 불자들은 자신을 닦는 수행 만을 추구하고 선행(善行)을 베푸는 이는 거의 없었다.
불교에는 많은 선지식들이 있고 불교의 가르침은 심오(深奧)하지만 왜 그들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함께 뭉치지 못하는가 하고 반문하며 스님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래, 불자(佛子)들은 세상의 고통을 다 보고 그들을 도와 주는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을 부르지만 자신의 선행을 다른 이에게 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각자 행동하므로 불자들의 선행과 실행은 가려져 있다.
만일 사람들의 친절한 가슴과 힘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를 위해 단결할 수 있다면 그 원주민 여성과 같은 비극(悲劇)은 크게 줄어 들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부자를 교육할 자선 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 가난한(貧者) 이는 물질이 부족하고, 부자(富者)는 영적 양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교의 인간화”를 실천하게 한 자극이 되었다.
어떻게 이 주어진 일을 실행할 것인가에 몰두하며 “가볍게 하기”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행(實行)하기로 마음 먹도 신도(信徒)들에게 불경(佛經)을 공부하거나 의식만을 행하며, 붓다에게 낮과 밤에 예불 드리는 것만으로는 공덕을 쌓을 수 없고, 불교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덜어 주는데 있다고 신도들에게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면서 “가볍게 하기”를 요청했다.
쳉옌 스님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대부분 주부인 30명의 신도들에게 하루 50센트씩 매일 시장 바구니에서 저금하도록 대나무로 조그만 저금통을 만들어 주어 신도들에게 매일 시장가기 전에 그 돈을 넣으라고 부탁했다.
“왜 하루에 50센트씩 절약하나요? 한 달에 15불씩 절약하는 것이 쉽지 않나요?”라고 신도들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같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돈을 한 달에 한 번만 저금한 다면, 당신은 한 달에 한 번 자비(慈悲)를 베푸는 것입니다.
비록 매일 절약하는 50센트가 적은 금액이지만, 당신은 매일 다른 사람들을 돕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저축(貯蓄)하는 것입니다.”
“50센트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라는 좌우명이 후아리엔(花蓮)의 모든 시장에서 급속도로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참가로 그 힘이 커져 갔다.
1966년 3월 24일에 자제공덕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래서 시장 바구니 를 들고 다녔던 한 그룹의 주부들이 자제공덕회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을 열 개 되었다.
스님과 그 제자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음식이나 돈이 필요한지 보살폈으며 그들이 병들었을 때 의사에게 데려가서 치료받게 했으며, 그들이 죽었을 때 경전을 독경하고 모든 장례 절차를 진행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에게 고마워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의 확고한 신념(信念)과 영감(靈感) 아래 자제회의 회원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고, 행복과 축복이 날마다 늘어나 마치 모래가 쌓여 산이 되듯이 조 그만 업적들이 천천히 축적(蓄積)되어 갔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넓은 규모로 발전되면서 수용할 만한 적절한 건물이 필요했던 그는 “정사의 집(靜思堂)”을 짓기로 했다.
건물을 지을 때 예산 초과한 건축비로 인해 건물과 땅을 은행에 저당 융자(融資)를 받아야만 했으며 대출을 갚기 위하여 비구니 스님들은 주로 양초와 콩가루를 만드는 등 다양한 일을 했으며, 보시로 들어온 돈은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1979년 스님은 병원을 짓기로 결심한 것은 대만 동부 지역에 적절한 병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아리엔(花蓮)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병원을 짓기로 했으며 불충분한 의료 체계로 심각한 병에 걸린 동부인들은 타이페이(臺北)까지 먼 길을 가야만 했고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채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그 당시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만약 내가 다른 영혼을 구하러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라고 말한 지장보살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기금을 모으기는 어려웠으며 자제회는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나 돈을 모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 건축공사가 여러 번 중단(中斷)되기도 했다 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병원을 짓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가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조금씩 돕겠다는 실천을 하고 그 기부금이 보태져서 큰 돈이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수백만 명의 가슴으로부터 진실한 자비심(慈悲心)을 자아내게 하였든 것입니다.”
스님은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호응의 응답(應答)을 받았고, 1986년 8월 17일 병원이 완공되어 대만에서는 최초로 예치금을 요구하지 않고 모든 응급 환자를 즉각 받아들이는 병원이 되어 환자가 돈이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들은 신속하고 전문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100개의 침대와 4개의 부서로 문을 열었고 그 이후로 625개의 침대와 21개의 부서로 확장되었으며, 외래 진료과는 매일 1,2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은 양,한방과도 가지고 있으며 이곳에서 종양을 치료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 했다 한다.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은 마치 가족처럼 가깝고 상호 신뢰와 진실성으로 “낯선 이에게도 자심(慈心)을, 모든 이에게 비심(悲心)을”이 라는 이 원칙(原則)은 이 병원을 현대의 가장 감동적인 전설(傳說)로 만들었다.
그는 날마다 환자와 직원들을 순회 방문하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는 것을 본 후에야 편안 해 졌다 했다.
1996년 8월 8일 자제 병원은 대만에서 처음으로 최대 23개의 침대를 수용할 수 있는 말기환자를 위한 고통 경감 병동을 설립 이 병동을 “신리엔(Hsin Lien)”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마음의 연꽃”이란 뜻이다.
자제공덕회는 모금활동과 자원봉사로 운영하고 매월 정기적으로 세계 후원회원에게 모든 사용내역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으므로, 지계정신에 기반을 둔 투명한 경영, 지속적인 사회복지사업, 1만 5천명의 자제위원, 400만명의 후원자 등을 기반으로 공덕회는 봉사단체로 급성장 했다.
인간에 대한 존경 최우선인 자제공덕회는 크게 8대 사업으로 자선, 의료, 교육, 문화, 국제구호, 골수 기증, 환경 보전, 지역사회개발사업이다.
자제공덕회가 직영하는 5개의 병원과 종합대학, 방송국에는 약 2천명의 직원이 소속돼 있으며 1994년 개교한 자제의학원을 통해 전문 의료인력 배출하고 있으며, 1993년 설립된 자제골수등록회에는 미국과 유럽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골수 은행이 설치돼 있다.
자제공덕회의 국제구호활동은 중국 본토이든 가리지 않고 5대양 6대주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증엄스님은 전문적인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봉사활동을 펼치는 자원봉사자들이나 봉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명한 의사를 갖는 것은 쉽지만, 양심 있는 의사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며 인도주의적 학습을 강조한 스님의 메시지는 자제공덕회가 이 땅에 구현하려는 바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사람의 손이 1000명의 손을 움직인다”는 스님의 믿음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손길이 되어 이 땅에 자비희사(慈悲喜捨)의 꽃을 뿌리고 있다.
인순(印順)대사님은 세계 최대 불교봉사단체인 자제공덕회 창설자 증엄 스님 은사(恩師)로, '자제공덕회' 이념을 제공 대만 근대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며는 정사당에서 세수 100세로 열반에 하셨다.
인순대사의 '인간불교' 사상은 증엄(證嚴)스님 뿐 아니라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星雲) 스님과 유각 스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였다.
☆화련(花蓮)협곡(峽谷) 태노각(太魯閣) 국가공원은 타이중시(市)의 중앙 횡단고속도로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화련 태로각 협곡은 평균 해발 2,000m의 험준한 산과 바위에 첩첩이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대리석 협곡으로써, 대만에서 4번째로 지정된 국가공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규모의 대리석 암반으로 구성된 협곡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면적 920k㎡, 길이 20km의 거대한 이 곳 태로각 협곡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무려 해발 3,742m가 넘는다 했습니다.
태로각 협곡은 웅장한 협곡으로 절벽 사이를 관통하는 도로를 들어서니, 협곡의 계곡 물을 보면 물 색깔이 짙은 회색빛 물로 석회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생물이 살지 못한다 하였고 이곳의 암석에는 탄산칼슘의 함유량이 높아 물에 대한 용해성이 매우 높아 침식이 쉽게 되어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거대한 협곡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비가 오면 낙석이나 산사태가 발생하는 빈도가 매우 잦아 태로각 협곡은 자연 그대로의 깊은 산과 협곡만 있었으나, 장개석의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패배한 후 대만으로 도피하면서 가져온 보물들을 옮기기 위해 1957년부터 3년간 대만의 원주민들과 수감자(收監者)들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지금의 이 태로각 협곡의 도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대부분이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구성되어 지반 자체가 단단한 난공사로 국민당 정부 시절 이 협곡 도로를 만들 당시 현재와 같이 중장비들도 없었을 뿐더러 산사태 등의 위험 때문에 폭약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사람의 인력으로 이룩하였으며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없어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험악한 산세로 3년의 공사 기간 도중 약 200여 명이 사망, 7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여 태로각 협곡의 도로에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추모비나 제단을 장춘사에 마련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하였다.
태로각 협곡 도로는 국민당이 최초 만들었을 때는 군사용 목적 이었으나, 현재는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만의 동쪽과 서쪽을 관통하는 유일한 도로였고 태풍과 지진이 잦은 편으로 협곡의 급한 경사로 낙석이 많아 항상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며 도로와 터널 공사가 진행 통제로 대기 해가며 곡예운전으로 진입 하였습니다.
지난밤에 비가 와서 저 멀리 여러 곳의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었으며 대웅고문님께서 사주신 맛있는 망고 쥬스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다음 장소로 이동 출렁다리는 8명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며 자모교(慈母橋)는 어머니가 자식을 일터로 보내 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다리(橋)가 있었습니다.
석식은 현지식으로 과일노점상에서 열대과일을 먹고 송산역(松山驛)에서 열차를 이용 대북역에 내려 버스로 이동 저녁 늦게 숙소에 도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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