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4.05.15(목)
참 가 : 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9명
불 참 : 김상문(함평) 김재일(신병) 정원길(지병) 등 3명
회 비 : 90,000원
식 대 : 86,000원(애호박찌개 6, 김치찌개 2, 닭발 1 등
금일 잔액 : 4,000원
이월 잔액 : 730,000원
총 잔 액 : 734,000원
부곡정에는 김영부와 이용환이 먼저 와 있었다. 이어서 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윤상윤 등이 도착하였다.
10시가 넘어 회원 7명이 산행을 시작하였다. 기온은 조금 서늘하였지만 볕은 따스하여 햇볕이 잘 드는 도로를 걸어서 올라갔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이렇게 청명한 날씨는 우리나라에서나 맛볼 수 있는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청명한 날 산에 와서 걷고 있는 우리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춘강 박남용이 부인의 요통이 처음에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X-ray 촬영만 하였다가 새로 개업한 젊은 담당의사가 사진 판독으로는 원인을 밝힐 수 없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CT나 MRI 촬영을 해 보라고 하였는데, 어느 통증의학과에서 경험 많은 의사로부터 뼈는 이상이 없다면서 신경 안정 주사로 처방하였더니 금방 호전되어 이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리에게도 ‘신참 의사’보다 ‘경험 많은 의사’가 더 낫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월전 윤상윤은 자기의 중학교 동창생이면서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인송 박정웅의 타계에 대하여 궁금하던 차에 다른 성전중학교 동창생의 귀띔으로 사인(死因)을 알게 되었다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자세한 내용보다는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송(仁松)이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하였는데,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라! 자연히 조문객도 받지 말고, 철저히 가족장으로 끝내라!’ 는 것이었기 때문에 장례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친지들의 전화를 받게 되어서,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야 인송(仁松)이 타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이를 알게 된 밝뫼 윤정남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년에 밝뫼의 처상(妻喪) 시에 인송이 서울에서 광주까지 찾아와 문상을 하였다면서 그 답례로라도 자기 역시 꼭 문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그렇지 못하였다면서 부득이한 결례에 마음 아파하더라는 이야기도 함께 하였다.
나와 인송과의 인연은 사범학교 1·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반에서 체격이 비슷하였으므로 출석번호도 거기에서 거기였다. 그래서 비교적 친하게 지내면서 그를 많이 놀려대었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광주사범학교 김주성 교감선생님 댁에 기숙하고 있었을 때, 그와 내가 나눈 대화 중의 한 가지는 사춘기 소년이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내용은 당시 김주성 교감선생님의 따님이 우리와 같은 동 학년인 전남여고 1학년이어서, “야! 교감선생님이 너를 사위로 삼으시려는가보다.”라고 놀려댔었다. 그런데, 그 후 김주성 교감선생님의 따님은 내가 예측한 데로 되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광주 어느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우리 집안 형님의 부인이 되어, 내 형수님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대전에 있는 <육군 통신학교>에서 신병으로 근무하였을 때이다. 통신학교는 전 육군의 통신병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교육성과를 평가하던 평가분석 하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5년인가? 인송이 육군 사관생도로 내가 근무하던 통신학교로 1개월간 단체 위탁 교육을 받으러 와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기의 꿈을 이야기 하였다. 그가 육사를 졸업을 하면 육군 장교가 되어 서울대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가서 학위를 받은 후에 육사교수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라 하였다.
그런 꿈을 꾸던 그가 그 후 육사에서 퇴교되어 하사관으로 제대하였고, 그는 교사로 복직하였다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전라남도청에서 법무관으로 시보생활을 하고 있을 때(1973년쯤), 도청에 국장으로 근무하던 사범학교 박일출선배의 사무실에 갔다가 인송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가 여천시장으로 근무할 때, 김선섭의 주선으로 우리 동창생들이 관광버스를 동원하여 여천시를 방문하였을 때 여천시장인 그를 대면하였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나 우리들 모두가 은퇴하여 <서천 생태공원>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마지막으로 대면하였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 사범학교 신입생 시절에 청운의 꿈을 키우면서 지냈던 약관(弱冠) 이전에 시작하였고, 그 후로는 그렇게 밀접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멀리서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제각기 자기의 분야에서 삶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나와는 그리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성격상으로도 상반된 성격이었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와 나는 서로를 무시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았었고, 서로의 능력만은 인정하던 사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가까웠던 윤상윤의 말에 의하면, 그가 육사에서 퇴교되었던 연유는 이러하다.
그가 육사에 입학하였더니 광주사범학교 오관치 라는 1년 선배가 당시 육사생도로서 ‘생도 구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매우 엄격한 성품으로 후배생도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고등학교 직속 후배가 입학을 하였으니 생도들은 인송을 집단 괴롭힘의 대상으로 점찍고, 학과점수에서 빼어난 인송을 시기하여 내무생활에서 집단 괴롭힘이 시작된 것이다.
내무반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점호준비를 위해 관물함을 잘 정돈해 놓고 내무검열 직전에, 누군가가 잘 정돈해 놓은 관물함을 건드려 내무 점수를 깎아 먹게 하거나, 또는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보급품(스푼, 치약, 칫솔 등)을 숨겨버리는 등으로 역시 내무 점수에서 감점을 당하게 하여 결국 3학년을 마치고, 내무 점수 미달로 퇴교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육사를 거쳐 서울대 청강 후 육사 교수가 되려 하였던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되어 나중에 행정고시 합격으로 차관 급의 고위직 행정관료로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업적은 그가 시골 벽촌에서 태어나 오로지 그의 능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 생각할 때, 그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한 삶을 살았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용한이 약사암의 대웅전에 ‘양수랑’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다고 하여, 대웅전으로 들어가서 삼배를 하고 천장을 살펴보았더니 정말로 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누가 나에게 이런 공을 들이는 일을 했을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나 외에 같은 이름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와 동명이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음악정자에 다시 모여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의 <스승의 은혜>를 불러 보았다.
작사가 강소천(姜小泉, 1915.9.16.~1963.5.6.)은 함경남도 고원에서 출생하였는데, 본명은 강용률(姜龍律), 고원공립보통학교와 함흥 영생고보를 1937년에 졸업한 후, 고원중학교, 청진여자고급중학교, 청진제일고급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월남하여, 어린이 잡지 편집에 종사하였다. 『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 『새벗』 주간, 『아동문학』 편집위원,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문인협회 이사,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5월 6일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9년 도서출판 배영사에서 <소천 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고, 1963년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1985년 10월 19일 ‘문화의 날’을 맞아 정부에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1987년 9월 16일 동시 「닭」을 새긴 강소천 문학비가 서울 어린이대공원 진입로에 세워졌다. 1931년 『아이생활』에 동화 「버드나무 열매」를 발표하고, 1936년 『소년』 창간호에 동시 「닭」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동요‧동시는 작가 자신이 작품 속에 몰입함으로써 동심 세계와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초기 대표시인 「닭」, 「달밤」, 「호박」 등은 7‧5조나 3‧4조의 전통적인 운율을 벗어나 동시로서의 독특하고 참신한 리듬감과 직관 그대로의 순수한 표현미가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조그만 하늘」, 「사슴뿔」, 「민들레」 등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그의 동화소설은 본래 그가 동요‧동시로 출발함을 보여주듯,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가 시심(詩心)이 담긴 동경과 환상의 세계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작품의 발표 시기와 성격에 비추어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초기 동요‧동시의 창작과 더불어 동화 「돌맹이」(1940)를 발표한 시기로 예술적인 향기가 짙은 문학적 동요의 시기이다. 「돌맹이」는 동화이면서도 시적인 묘사와 함께 상징적 의미 형상화의 절정으로 평가된다. 제2기는 월남 후 자신의 어두운 운명에 대한 슬픔과 전란으로 인한 회고조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시기이다. 「방패연」(1941), 「꿈을 찍는 사진관」(1954) 등으로 소극적인 회고, 회상의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3기에 이르면 현실에 바탕을 둔 교훈성과 설득적 성격을 띤 작품이 보인다.
저서로는 동요‧동시집 『호박꽂 초롱』(1941),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1952), 『꿈을 찍는 사진관』(1954), 『인형의 꿈』(1958), 『대답 없는 메아리』(1960), 소년소설 『토끼 삼형제』(1961) 등이 있다. 전집류로 『강소천 아동문학독본』(1961), 『한국아동문학전집[편]』(1962) 등이 있다.
이상은 [네이버 지식백과] 강소천 [姜小泉]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에서 퍼온 글이다.
첫댓글 내가 함평읍내에 잇는절에서 초파일행사를하는데 참여하는라고 2박3일 있었다. 가능한 목요일엔 동행하려고 하나 그러지를못하고 불참하게되니 여간 마음이 편치않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양수랑회장의 논에 보이는 현장 그대로를 보고하는글을 읽으며 대리만족하고 있다. 찬석한 회원들으 ㅣ동정도 알개되고 자세한 내렭도 알게되는 기쁨도 지녀서 펵 고맙게 생각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있지만 아무나 이렇게 세세하세 깊게 쓰지를 못한다. 하여튼 고맙다. 평소의 글쓴 솜시로 쓰기 때문에 읽기도 수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