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ÁNTICO ESPIRITUAL (영혼의 노래)
영혼의 노래 (제2의 노래)
Esposa 신부
2 2
Pastores, los que fuerdes 고개 날망 저쪽 양 우리로
allá por las majadas al otero, 걸어가는 목동들아
si por ventura vierdes 가다가 내 가장 사랑하는
aquel que yo más quiero, 그이를 보거들랑 그 님께 말해다오
decidle que adolezco, peno y muero. 나는 아프고 고달프고 죽어간다고
해 설
1. 이 노래에서 영혼은 자기와 애인 사이에 제삼자 즉 중개자를 통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과 고민을 그분께 전해달라고 삼자에게 청한다.
사실 자기 애인을 눈앞에 보면서 그분과 교류할 수 없는 경우
가능한 한 뛰어난 중개자를 통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특징이다.
영혼은 여기서 마음의 비밀을 애인에게 알려 드릴 수 있는 사자(使者)로
자기의 소망이나 애정이나 탄식을 이용하려고 그들(소망, 애정, 탄식)에게 가 주기를
청하여 말한다.
♥고개 날망 저 쪽 양우리로 걸어가는 목동아
2. 영혼은 자신의 소망, 애정, 탄식을 목동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이것들은 영혼을 영적인 선으로 키워주기 때문이다.
목동은 양목하는 자를 뜻하고 하느님은 소망, 애정, 탄식을 통해서
영혼과 친교를 맺으시고 영혼에게 신적 목초를 주신다.
이런 것 없이는 하느님은 영혼과 조금밖에 사귀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영혼은 “고개 날망 저쪽”으로 가는 목동들아 하는데 이는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란 뜻이다.
사실 모든 애정이나 소망이 하느님께 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오직 참된 사랑에서 나온 것만이 그 곳까지 도달한다.
3. 영혼은 천사의 계급, 천사의 대열을 양우리라고 한다.
우리의 탄식이나 기도는 이 천사들의 계급을 차례로 거쳐 하느님께 까지 이르는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고개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어서 하느님은 마치 언덕 위에서처럼 온갖 것,
그리고 높고 낮은 양우리를 죄다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이 언덕을 향해 오르고, 앞서 말했음 같이 천사들이 그것을 하느님께
바쳐 주신다.
이는 마치 토비트에게 천사가 “네가 눈물로 기도하고 죽은 이들을 묻어줄 때
나는 네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토비 12, 12)하고 말함과 같다.
또 ‘목동’을 이 천사들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 갖고 갈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전달도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
그들은 친절한 목동처럼 하느님과의 감미로운 친교나 상쾌한 영감으로 우리를 기르신다.
하느님은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들을 중개자로 쓰신다.
그리고 우리를 늑대, 즉 악마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심도 그들이다.
그러므로 ‘목동’을 자기의 애정으로 해석하든 천사로 생각하든 아무튼 영혼은
자기와 애인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간청한다.
그래서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다가 내 가장 사랑하는 그이를 보거들랑
4. 이 뜻은 “만일 요행히도 당신들이 그분 앞에 나가 그분이 당신들을 보시고 당신들의
말을 들으신다면. . . ”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하느님은 온갖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는 뜻인데
모세가 말했듯이 영혼의 생각까지도 보시고 아신다.(신명 3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곤궁을 구해 주시고 또한 청원을 들어 주실 적에
이것을 보신다. 혹은 들으신다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곤궁이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정도에 도달하기에는
하느님의 눈으로 그 시기와 시간과 도수에서도 이미 충분하다고 인정하실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하느님은 보셨다. 들어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관해 출애급기에 한 예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인에게 예속되어 고통 받기를 이미 400년을 지나서야
하느님은 모세에게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그들을 구하러 왔다.”(출애 3, 7)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슬픔을 하느님은 늘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사 가브리엘은 즈가르야에게 “두려워하지 마시오, 즈가리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간구를 들어 주셨으니 당신 아내 엘리사벳이 당신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루가 1, 13)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그의 기도를 듣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필요를 하느님께서 당장 채워 주시지 않고 그리고 자기의
기도를 곧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견디는 한 언젠가는 적당한 때에
하느님은 어김없이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익히 알아 차려야 하다.
다윗도 말했듯이 “주님은 궁할 때 든든하신 피난처시다.”(시편 9,10)이는 마치
“가다가 보거들랑” 이란 말로 영혼이 표현하려는 뜻은 내 청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기에 합당한 때가 요행이 왔다면. . . . 이다.
♥내 가장 사랑하는
5. 이는 내가 온갖 것 위에 사랑하는 분이란 뜻이다.
이것은 영혼이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든 다 하고 또한 고통을 당할
각오가 있을 때 그 사랑은 진실하다.
그리고 영혼이 다음 시구가 뜻하는 바를 진실히 말 할 수 있을 때
그것 또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표이다.
♥그 님께 말해다오 나는 아프고 고달프고 죽어간다고
6. 여기서 영혼은 세 가지 어려움을 말한다. 즉 병, 고뇌, 죽음이다.
사실 어느 정도 완전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느님이 부재를
세 가지 양상으로 괴로워한다.
말하자면 영혼은 그 세 능력 지성, 의지, 기억을 통해서 괴로워한다.
지성에게는 병이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고 다윗을 통해서
“나는 당신의 건강이다.”(시편 34, 3)이다. 하였음 같이
하느님은 지성의 건강이시기 때문이다. 의지에게는 고뇌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고 역시 다윗이 “당신 집 기름기로 그들은
흐믓하며 당신의 진미의 강물을 마시우시나니”(시편 35, 9) 라고 한 것 같이
하느님의 의지는 시원함이고 기쁨이시다.
기억에게는 죽음이라 한다.
이유는 하느님을 본다는 지성의 보화 모두와 하느님을 소유한다는 의지의 기쁨이
죄다 결핍되어 있음을 생각하고 또 한편 이 세상의 갖가지 위험이나 죄의 기회 가운데
늘 있으므로 하느님을 잃을 가능성이 짙으므로 기억에는 죽음처럼 느껴져서
괴롭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은 확실히 네 생명이다.”(신명 30, 22)하고 말한
모세의 말과 같이 확실하고 완전한 영혼의 생명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보기 때문이다.
7. 예레미아도 애가에 이 세 가지 양상의 어려움을 “ 쫓기는 이 비참한 신세 생각만 해도
소태를 먹은 듯 독약을 먹은 듯 합니다.”( 3, 19) 하였다.
처참한 신세는 지성에 상관된다. 하느님의 아들의 예지의 부요함은 지성에 속해 있고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야말로 성 바오로가 말했음 같이 하느님의 온갖 보화가 간직되어
있기(골로 2,3) 때문이다. 매우 쓴 소태는 의지에 관련된다.
그것은 이 능력에는 하느님을 소유한다는 감미로움이 소속되어 있기에 이것이
결핍되었다는 쓴맛 가운데 머물게 된다.
쓴맛이 의지에 속한 것이라 함은 묵시록에서 천사가 성 요한에게 “이것을 받아서 삼켜라.
이것이 네 배에는 몹시 쓸 것이다.”(묵시 10, 9) 함으로 밝혀 준다.
여기서 배라함은 의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소태는 영혼의 죽음을 뜻하고 그것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저주받은 자에게
관해서 말한대로다.
“포도주는 바닷뱀의 독이요 독사의 무서운 독이다.”( 32, 33)하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부재를 뜻하고 하느님의 부재는 영혼의 죽음이다. 이 세 가지 어려움,
즉 고뇌는 신 망 애의 세 대신덕에 관련되고 이 대신덕은 앞서 말한 세 능력,
여기 기록된 순서에 따르면 지성 의지 기억에 연관된다.
8.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영혼은 이 노래 안에서 오직 자신의 필요와 고뇌를 애인에게
보여 드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력 있고 깊이 사랑하는 이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나 원하는 것을
청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말하고 애인이 맘대로 하게 맡기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갈릴레아의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바로 이처럼 행동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포도주를 직접 청하지 않고 그저 “술이 떨어졌다.”(요한 2, 3)고
하셨을 뿐이다. 나자로의 자매들도 사람을 보내어 오빠를 낫우어 달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요한 11, 3)하였다.
이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주님은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의 필요와 동시에 그들의 인내와 순종을 볼 때
더욱 깊이 동정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혼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청하기보다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만을
표명하는 것이 자애심이나 이기심에서 한층 안전하게 보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혼은 바로 이처럼 행동하여 자신의 세 가자 필요를 드러내기만 한 것이다.
그것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도 같다.
부디 제 애인에게 전해 주어요. 저는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제 건강이시니 건강을 주셔요. 저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제 기쁨이시니 제게 기쁨을 주세요. 저는 죽습니다.
그리고 또 당신만이 제 생명이시니 제게 생명을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Allegri Miser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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