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오늘은 벼르고 별러 시골에 벌초를 하러 갔습니다.
지난해에는 벌초를 하려고 미리 예취기(풀깎는 기계) 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었지만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쉽사리 그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다시 날을 잡아 내려오기에는 시간을
내기가 그리 쉽지않은 터라 그냥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잘 댕기지 않아 풀숲이 키를 훨씬 넘고있는 가운데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벌초를 하기란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20 몇년 전처럼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탄탄한 몸이라면 몰라도 그간 책상물림
으로 지내오던 부실한 몸으로는 약간은 무리한 시도가 틀림없었습니다.
나중엔 걸어다니는 대로 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달라붙은 풀조각들이
떨어지지 않아서 민생고를 해결차 내려온 식당 거울에 비친 모습은 한마디로
목불인견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잠을 깨니 5시경...밖에서는 비가 매우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만약에 오늘 벌초하러 내려가지 않는다면 바쁜 일정상 추석 당일날 해치울 수
밖엔 없을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날도 비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오늘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지난해처럼 끔찍한 작업을 또 해야 한다
는 점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습니다.
이생각 저생각으로 뒤척이고 있는 사이에 시간만 잘도 흘러갔습니다. 문득 일
기예보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컴을 켜고 의자를 끌어다가 엉덩이를 내려놓
았습니다.
기상청으로 들어가 각 지방의 날씨를 살펴 봅니다. 서울등 중부권에선 밤부터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부터 남부지방은 당장은 흐리지만 아침 9시경부
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오후부터는 30 ~ 60mm 의 강우가 예상된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일기예보가 나와있었습니다.
매우 낙담을 하고 있던 찰라 개미사랑방에서 사귄 지방에 사시는 어떤님이 생
각났습니다. 이시간에 아마도 주무시고 계실 것이지만 행여 잠없는 노인네 용
케도 컴에 들어와 계시다면 물어볼 요량을 했습니다.
"일기예보에는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온다고 나오는데 그곳 날씨가 혹시
어떻습니까...오늘아니면 시간이 없어 꼭 벌초는 해야겠는데 지난해처럼 봉변
을 당할지 약간은 걱정이 되거든요"
그러자 정말 용케도 멜이 왔습니다.이양반이 이 이른시각에 용케도 안 주무시
고 소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컴앞에 앉아있다는 생각
이 들자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지금 이곳의 날씨는 약간 흐리나 비가 올 정도는 안됨. 엊그제 많은 비가 내
렸기 때문에 오늘 그리 많은 비는 내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함. 소신을 가지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바람."
이때가 아마도 아침 8시경 쯤 되었을겁니다. 온 가족들은 각자에게 배당된 물
건들을 준비하여 들고 즉시 출발을 결행하였습니다.
차가 서울을 빠져나와 경기도내를 지날동안 비는 여전히 부슬거리고 있었습니
다.
그러다가 서해대교를 지나면서 날씨는 급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충청권에서는
그야말로 시간당 20 ~ 30mm는 족히 될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은근히 아까 보았던 일기예보가 캥겨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거 꼼짝없이 지난해 재판이 되게 생겼군. 올 여름부터는 어찌 이리도 주말
만 되면 빠짐없이 비가 쏟아지는고..."
혼자서 넉두리 비슷한 말을 중얼거려 봅니다.
뒷좌석에선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난 아이들이 서로들 티격태격 다투며 장난
에 열중입니다. 운전자의 주의를 분산할 위험이 크므로 자제할 것을 주문하던
시각에도 비는 그칠줄을 모릅니다.
대천을 지나자 빗발이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서천에 이르르자 그곳엔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말짱한 것이었습니다. 지구본을 보면 작은 땅덩어리
인데도 이렇게 천변만화하는 기후를 보면 참으로 신기롭습니다.
산길은 예전보다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잡목도 우거지고 키를 훨씬 넘는 풀숲
에 가시덩쿨이 엉켜있으니 아마도 이제 산길은 더 이상 인간들의 발자취를 거
부하려는듯 하였습니다.
매우 호젓한 산길을 걸어 조상님들의 봉분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
니다. 겨울철이라면 몰라도 요즘과 같이 숲이 우거지고 풀이 한길이나 자라면
왠만큼 익숙한 길이라도 눈에 설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취기를 잘 조립한 후에 오토바이 윤활유와 휘발유의 비율을 1:25 로 맞추어
기름통에 반쯤 차도록 들이 붓고서 시동을 겁니다. 그놈도 1년여 만에 돌리는
것이라서 한번 시도로 쉽게 살아나려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문득 5년여 전에 걸었던 내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일의 발단은 년
년생인 형제의 키차이가 10 cm 이상 난다는 데에 있습니다. 당시 형은 제아우
의 키가 유전자 때문에 더디 자란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키차이가 유전자 때문이라는 큰아이의 주장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작은애의 키는 대기만성형이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다닐때
쯤이면 분명히 형의 키보다 커질 가능성이 많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형으로부터 키 컴플랙스에 빠져 있던 막내에게는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식이
었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사기가 오른 아우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형보다
키가 커지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 형과 서로 2,000원(당시 짜장면 값)을 걸고
내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의 키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 15cm 까지 차이가 나다가 요즘에는 작
은녀석도 키가 부쩍 커지는 바람에 두사람 사이의 키차이는 요사이 약간 좁혀
드는 것도 같습니다. 시간적 여유만 충분하다면 작은 아이에게 승산이 있을지
도 모릅니다.
우거진 풀숲에서 갑자기 요란한 기계음이 시끄럽습니다. 지난해보다는 상당히
익숙해진 쏨씨로 질긴 억샛풀이나 싸릿대등의 잔나뭇가지를 단숨에 잘라 넘깁
니다.
그러나 비록 비는 오고있지 않더라도 습도가 매우 높습니다. 상대습도가 거의
100%를 육박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온몸이
땀에 젖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추석날 성묘를 대신할 요량으로 미리 챙겨온 과일이며 약주등을 꺼내는 아내
의 손길이 매우 부산합니다. 깎아낸 풀들을 치우라고 시킨 아이들은 두 발로
공차듯이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잔가지를 하나 꺾어들고 갈퀴처럼
긁어내는 시범을 보입니다.
다행히도 몇개의 봉분을 모두 소화한 후 마을로 내려와 미리 준비된 도시락을
꺼내듭니다. 일을 했던 안했던 무관하게 밥맛이 꿀맛같은지 충분히 준비된 량
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밥통이 거덜났습니다.
너무 늦지 않도록 집에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상경길을 서두릅니다. 충청권에
접어드니 역시 굵은 빗줄기가 앞유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습니다.
지지난 주나 저번주 일요일에 비해서는 고속도로가 매우 한산하게 느껴집니다.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덕분에 그리 늦지않게 집에 도착할 수 있
었습니다.
집에 가면 자기가 먼저 씻어야한다며 욕탕 순번을 다투던 아이들은 정작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보더니 생각이 바뀌었는지 의자를 끌어당겨 컴퓨
터 앞으로 바짝 당겨 앉습니다.
은아무개/올림
참조:개미사랑방은 다음 증권코너에 있는 공개게시판으로써 제가 다음과 인연을
맺을때부터 글을 올린 곳입니다. 물론 필명은 다른것을 썼습니다.
카페 게시글
314 …(손정민님)
" 벌초 "
은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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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08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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