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거금(距今) 천 사백여 년 전, 신라(新羅) 선덕 여왕(善德女王) 원년(元年)인데, 당승(唐僧) 상원 대사(上原大師)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起居)하며 수도(修道)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大師)는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念佛)에만 전심(專心)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呻吟)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여 사방을 분간(分揀)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處女)를 물어다 놓고 가버렸다.
대사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기절(氣絶)한 처녀를 회생(回生)시키니, 바로 경상도(慶尙道) 상주읍(尙州邑)에 사는 김 화공(金化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處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前後事)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佛心)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淸淨)한 도덕(道德)과 온화(溫和)하고 준수(俊秀)한 풍모(風貌)에 연모(戀慕)의 정(情)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夫婦)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哀願)하지 않는가?
김 화공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救援)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이므로, 그 음덕(陰德)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義男妹)의 인연(因緣)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男妹)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佛道)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男妹塔)이요, 상주(尙州)에도 또한 이와 똑 같은 탑(塔)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男妹)의 지순(至純)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 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熱氣)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不動心)과, 백설(白雪)인 양 순결(純潔)한 처자의 발원력(發願力), 그리고 비록 금수(禽獸)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機緣)이 한데 조화(調和)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登山客)의 심금(心琴)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몇일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지 오래여서, 다시 산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던 피천득의 수필 <인연>, 이상보의 <갑사 가는 길>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가진 ‘시나브로’라는 말이 ‘갑사 가는 길’에서 나온다.
또 이를 강조하던 국어선생님.
또‘남매탑’전설은 어쩜 그리도 애틋하던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길은 유성 쪽의 동학사에서 시작한다.
# 갑사 사는 길의 최대 하이라이트! 남매탑에 얽힌 스토리텔링
남매탑이 없었으면 갑사 가는 길은 여느 산길과 별다를 것 없는 길이다.
먼 옛날 신라시대에 한 스님이 계셨다.
그 분은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정진수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입을 벌리며 울부짖었다.
스님이 가까이 가서 보니 목에 커다란 인골 가시가 박혀 있었다.
스님은 두려움 없이 그 가시를 뽑아 주었다.
며칠 뒤 호랑이가 한 아름다운 처녀를 등에 업고 와 놓고 갔다.
은공에 보답하는 뜻이었을 게다.
이곳에서 천 리 정도 떨어진 상주처녀였는데, 혼인을 앞두고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보낼 수도 없고, 인연도 그러하니 거두어 주기를 바랐다.
어찌할 수 없었던 스님은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수행하다가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들었다.
두 사람의 사리를 모신 것이 바로 이 탑이라 한다.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3곳이 있다.
잘 알려진대로 동학사는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강원인 승가대학이다.
동학사의 최초창건은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로 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 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불렀다.
고려때부터 조선시대를 걸쳐 모두 다섯 번의 중창이 있었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현재의 전각으로는 대웅전·삼성각을 비롯하여 조사전·육화원·강설전·화경헌 ·범종각·염화실·실상선원· 숙모전 등이 있다.
산내암자로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석봉암·천장암·마쇄암·보현암·실상암·옥천암·극락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관음암·길상암·문수암·미타암·귀명암·상원암 등이 있다
첫댓글 시나브로 계룡산을 알게되었습니다.
좋은정보,,, 배우고 갑니다^^*
해인님 갑사에대해서 공부넘 많이한것
같아요
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