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종합해보면 진나라 말엽 즉 '팔왕의 난'으로 어지러워졌을때 요동에 있던 백제가 영악스럽게 요서로 진출하여 진평군을 만들고 중원을 치고 내려가기 위한 거점을 만들었다.
요서군과 진평군 2개군이 아니라 요서에 있는 진과 평이라는 2군을 건설했다는 뜻이다.
다음 지도를 보면 요서가 지금의 요녕 조양이거나 산해관 동쪽이 아니라 북경 남쪽이다.

晋州와 安平의 두글자를 따서 晋平郡이 된것으로 보며 그 위치는 현 하북성 중남부이다.
이곳은 조선의 창해군이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끈을 놓지않고 이곳을 4세기초에 다시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중국사서에는 백제가 이곳 뿐아니라 강좌(江左)에 걸쳐있다고 하는데 강좌는 바로 지금의 강소성과 절강 해안 지대에 또 다른 영유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중원 진출의 직접적 동기는 서진이 망하고 사마예가 남경(南京)에 동진(東晉)을 세우고 북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파견을 요청하는 385년 이후 강남에 파견되어 강좌(江左)에 거하게 된것으로 본다.
주서(周書)는 위나라때 중원에 백제가 안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띄어읽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수 있으나,백제전에 기록된 것을 염두하고 다음과 같이 해석될수있다.
自晉宋齊梁據江左,後魏宅中原.
'백제는 진송제양시대 부터 양자강 동쪽에 의지하였고,북위는 중원에 본거지를 세웠다' 보다는
自晉宋齊梁據江左,後魏(時)宅中原.
'백제는 진송제양시대 부터 양자강 동쪽에 의지하였고,백제는 후위때 중원에 본거지가 있었다'
운영자는 아래 해석에 무게를 둔다. 후대 중국사가들이 알량한 중화가 불명예당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글자 하나 빼는 것은 식은죽 먹기 였을것이다. 남제서에서 '次下缺文'이라하고 2페이지를 없애버린 것으로 보아서이다.
이유로 동성왕과 백제가 5세기말 5차례에 걸쳐 싸운 역사적 사실로 볼때,북위와 전쟁시 그많은 백제군사를 한반도에서 출동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며 대륙어딘가에 그 본거지가 있을것이므로 그곳에서 출동시켰을 것이다.
그곳은 하북의 진평군 일대였거나 산동성에서 중원으로 쉽게 나갈수있는 력성(제남) 근처에 웅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운영자의 백제가 동위,북제라는 이름으로 숨겨져 있다는 기사 참조)

歷城資運竭夜晶籌量沙以爲未魏人謂資糧有余緩之乃歸.
위군이 역성에 가서 양식이 떨어져 밤에 모래를 쌓아서 곡식처럼 위장하고 군량이 풍족한것 처럼 해두고 도망갔다.
북위는 산서대동에서 태원을 거쳐 493년 중원에 도읍을 정하는데 이때 이미 중원에 있던 백제와 세력의 쟁패를 두고 5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루었다고 볼 수있다.

참조 기록 삼아 열거한다.
고구려의 略有遼東, 백제의 略有遼西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그뒤 고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이른다.(하북성 하간현 부근)
《남제서》(南齊書), (建康實錄)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晋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서진때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남사》 79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통전》 185권 변방 동이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였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십육국춘추》 16권 전연록 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구려·백제 및 우문부·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군사력에 따라 옮겨진 바, 중원의 의로움을 좇아 여기에 온 것이 아니므로 모두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이해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건무 2년에 백제 동성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지난 경오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삼국사기》 26권 백제본기 동성왕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46권 열전 최치원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
《周書》 帝紀第6 武帝下 - ★ 숨겨진 사료
六年(577)春正月乙亥,齊主傳位於其太子恆,改年承光,自號為太上皇。壬辰,帝至鄴。齊主先於城外掘塹豎柵。癸巳,帝率諸軍圍之,齊人拒守,諸軍奮擊,大破之,遂平鄴。齊主先送其母幷妻子於青州,及城陷,乃率數十騎走青州。遣大將軍尉遲勤率二千騎追之。是戰也,於陣獲其齊昌王莫多婁敬顯。帝責之曰:「汝有死罪者三:前從幷走鄴,攜妾棄母,是不孝;外為偽主戮力,內實通啟於朕,是不忠;送款之後,猶持兩端,是不信。如此用懷,不死何待。」遂斬之。是日,西方有聲如雷者一.
577년 북제황제 고양이 황위를 태자 긍에게 물려주고 년호를 승광으로 고쳤다. 스스로 태상황으로 했다. 임신일 북주황제가 업에 다다랐다. 제나라 군사가가 성밖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웠는데 북주황제 우문옹이 군대를 지휘하여 에워싸고 이내 쳐부수었다. 이내 업이 평정되었다. 제황제 고환이 먼저 모후와 처자를 청주로 보내니 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내 기병10명과 청주로 갔다. 북주 대장군 위미근이 기병2천과 함께 추격하였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진중에서 제 창왕 모다루를 잡았다. 제가 3가지 불효, 불충, 불신한 것을 꾸짖고는 이내 참하였다.
백제가 산동을 경영해서 濟=齊라 하였다. 창왕(위덕왕)의 이름은 부여昌이 아니라 우리나라 말로 모다루이다. 기록상 북주의 왕 우문옹에게 죽었다. 부여능산리 창왕사리감에 기록된 567년도는 건강을 기원한것으로 보아야한다.
이때 백제의 중심지가 하남 鄴이었다.
이것은 문주왕이 牟多이고 동성왕이 牟大 이다 慕=牟=莫 이다. (운영자 저서에 있다.)
동위,북제의 高氏가 중국사가가 숨겨놓은 대륙백제일 수 있다.(백제와 고구려가 성이 같다는 기록이 있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