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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마26:57-75)
2023 4/5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2626:57-75절 말씀으로“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끝나고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할 때 수많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길가에 자기들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한 날입니다. 이때 종려가지를 꺾어 흔들며 영접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또한 주께서 입성하신 후 한 주간동안 여러 일들을 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다 목요일 날 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다 잡히셔서 금요일 날 오전에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한 주간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주간으로 지내게 됩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따라가면서 베드로가 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순교까지 할 수 있었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성전에서 나온 군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말이 심문이지 그야말로 온갖 고문을 해서 사람을 거의 죽여 놓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은데, 그날 밤과 새벽에 있었던 일은 가히 상상키 어려울 정도의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특별한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던 터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한낱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범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엄청난 고문을 가했을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의 수하들이 예수님의 기를 꺾고 자신들에게 비굴하게 굴종하는 것을 보기 위해 엄청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려 돌아가셔야 하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민21:8-9, 요3:14-15, 마20:19) 제사장의 고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고문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베드로가 따라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힐 때 도망갔다가 그래도 수제자답게 차마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어서 대제사장 집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이 밤새 고통당하는 모든 과정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감추고 싶을 흑 역사가 일어났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이 장면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대제사장 집 하녀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너도 갈릴리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 이렇게 추궁하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이러면서 아랫뜰에 있다가 앞뜰로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다른 여종이 다가와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아니라고 또 부인합니다.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세 번째 예수님을 단정적이고 확정적으로 부인해버립니다. 한 3년 따라다니면 말소리까지 스승을 닮나보죠?
어쨌든 베드로가 이번에는 자신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는데, 현대어성경은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소.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소 라고 맹세까지 하였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자신과 예수님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만약 상관이 있다면 하늘의 벌이라도 받을 것이라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겠습니까?
물론 이해합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 되면, 또는 갑자기 훅 들어오면 누구라도 살고 싶고, 피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건이 있기 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슬퍼집니다.
예수님이 성찬식이 끝나고 감람산으로 올라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자(26:31) 동작 빠른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베드로는 아주 힘 있게 강조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대답하자 다른 제자들도 따라서 같이 다짐을 합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불과 몇 시간 전의 결의에 찬 용기는 다 어디로 가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왜 부인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처절한 고통을 보니 감히 엄두가 안 나서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잡혀가서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서 어떻게 고문을 당하고 모욕과 수치를 당했는지 처음부터 똑똑히 본 목격자입니다. 또 병사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며 짐승처럼 끌고 오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예수님이 대 제사장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퉁퉁 부어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베드로는 완전히 용기를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저들은 대제사장 집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68) 이러면서 조롱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따랐던 것이 대제사장을 비롯해 종교지도자들의 질투심을 유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예 작정을 하고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이란 것을 밝혀서 잃어버린 지지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욕심으로 무자비한 폭행과 조롱과 수치를 가해 예수님의 멘탈을 붕괴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똑똑히 보았습니다. 때문에 자기도 예수님과 같은 패거리로 몰리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감히 그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에게 여종이‘너도 그이 당’이라고 했을 때 본능적으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참담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권사님이 만약 내가 순교의 자리에 선다면 과연 순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는데 우리인들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자신도 하지 말고, 신앙인답게 오직 맡겨준 사명 감당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시면 됩니다.
여러분!!! 오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연거푸 주님을 부인한 것은 비단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이 그랬고, 오늘 우리들이 그럴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정작 저런 일을 당할 때 반항 한번 못하고 주님을 3번이 아니라 10번 20번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속에서 내 작은 이익 때문에,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고, 신앙인이 아닌 척하며 위장하여 007비밀요원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삶속에서 예수님을 초라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우리의 인생살이는 물론이고, 내세의 삶의 질까지 결정하시는 분으로 초라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될 분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에 대해 자존감을 잃고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마10: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어떨결에 주님을 부인했든, 의도적으로 부인했든 일생일대에 가장 아프고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큰 교훈을 얻게 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삶속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말자. 내 명예나 자존심이나 작은 이익 앞에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어쩌다 세상의 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교회동동체가 세상을 선도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비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보니 신뢰가 바닥이고, 이로 인해 교인들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어 코로나를 거치며 10,000여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답니다. 신학교도 학생들이 없어서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재작년에 KBS, MBC가 주도적으로 선동해 교회를 코로나의 온상으로 만든 원인도 있지만, 원래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교회에 불을 내겠다며 담배꽁초를 던지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일제 강점기와 50-7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가 세상을 선도하며 선각자적 위치에서 사회를 계몽해 나갔는데, 지금은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이 부담이 될 정도로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합니다.
2천 년 전에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당했고,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며 온갖 핍박과 환란을 받은 것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적 냉대는 신앙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에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니 할 말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나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예수님과 형제들이 욕먹고 전도의 길이 막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아도, 애매한 소리를 들어도 그냥 참고 넘어가시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믿음의 선배들도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욕먹고, 무시당하고, 불이익 당하고, 생계의 위협을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참고 이겨냈듯이 우리도 끝까지 주님을 시인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웁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75절)
여러분!!! 이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아~ 주님은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연약한지를 다 알고 계셨구나.’이러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이 돌아가신 후 서슬 퍼런 종교지도자들의 위세에 눌려 다락방에 꽁꽁 숨어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산회드린공의회에 체포되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받을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사람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예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동안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교감이 있었고, 또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락방에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 당신이 부활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던 갈릴리 바닷가로 제자들을 불러내어 제자들을 어루만지며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어색했을까요? 그걸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마음을 풀어주셨는데, 갈릴리에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셨고, 물고기를 제자들과 함께 구어서 드십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사랑한다고 대답은 했지만 연속되는 질문에 과거 주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아픈 추억으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답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주님은 베드로에게‘내 양을 치고 먹이라’는 사명을 다시 주십니다.
때로는 내 이익과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멀리하고 또 무관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주님은‘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정하게 찾아와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부인까지 하는데도 책망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옆에서 도우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은 우리주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곁으로 찾아오시는 시간입니다. 그동안 주님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살아왔어도 괜찮습니다. 맡겨진 직분 잘 감당하지도 못했고, 교회를 위해 수고와 헌신을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전도를 못하고, 믿음으로 말씀으로 살지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잘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여전히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세 번 배신을 당하셨지만 그 배신을 사랑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과의 관계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힘을 냅시다.
베드로가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후 거침없이 복음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은 주님의 이런 한량없는 사랑, 나는 주님을 부인했어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순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주께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한 주간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