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 관한 고려 시대 문헌 두 제목]
1. 공주 동정기 (公州 東亭 記) 동문선 제65권/ 기(記)
석식영암(釋息影庵)
큰 주(州)와 부(府)에는 반드시 영춘정(迎春亭)이 있다. 해마다 겨울이 지나가고 양기(陽氣)가 돌아와 동방의 양(陽)이 처음으로 열리고, 모든 물건이 싹터 움직이면 이것을 입춘(立春)이라 한다. 이에 앞서 주와 부에서는 흙으로 빚어서 소를 만들고, 쇠붙이와 나무로 만든 얼마만큼의 농기구와 채소ㆍ과일ㆍ술ㆍ안주 등 제물 얼마를 준비하여, 일을 맡은 아전이 목록을 적은 문서를 들고 이를 감독하여 빠짐없이 준비가 완료되면, 수령과 부관은 모든 우두머리 아전과 모든 군관과 병졸들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 나가서 각기 관복을 착용하고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사직(社稷)을 받들며 농사를 연습하는 것이며, 조세를 받아들이며 회계 사무를 수행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거나 경축 행사가 있거나 하는 등 1년의 사무를 모두 벌여 놓아야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정자에서 하지 않으면 적당한 곳이 없다.
큰 주나 부에는 또 영객정(迎客亭)이란 것이있다. 안부(按部)라든가 찰방(察訪) 같은 크고 작은 사절이 오고 갈 때면 주나 부에서는 반드시 모든 군관과 병졸과 모든 우두머리 아전들에게 명하여, 깃발을 들고 의관을 갖추고 먼저 나가서 먼 경계선에서 영접하고, 부관과 군수는 관료들을 인솔하고 가죽신과 복장을 갖추고 맞이하여 뵈옵는 형식을 갖추고 서로 차례대로 근교에서 기다린다. 외모를 단정히 하고 예를 행함에 있어서 엄숙하며, 공경하고 진실하며 삼가고, 주인과 손님의 거동을 화목하게 하며, 높고 낮은 지위를 차려서 맞이하며, 또한 전송하게 될 때 또한 이 정자가 꼭 필요한 것이다. 지금 공주(公州)는 옛날의 절도사(節度使)가 있던 부(府)이다. 계룡산(鷄龍山)은 동남간에서 일어났고 웅진강(熊津江)은 서남 간으로 둘러있다. 땅이 신령 하고 수려한 정기를 배태하여 여러 세대가 바뀌면서 점점 커져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큰 주(州)ㆍ부(府)를 이루었다. 주(州)의 읍내에서 동편으로 2백 보쯤 되는 지점에 폐허가 있는데, 이것이 옛날의 영춘정 자리라고 전 한다. 주춧돌과 계단 돌이 허물어져 있고 나무와 풀이 나서 우거졌다. 태수가 천백 명이 갈리면서도 아무도 다시 건물을 세워서 관청을 만들고 법령을 실행하는 이가 없었다. 여흥(驪興) 민 상백(閔祥伯)이 이주에 자사(刺史)로 부임하여 1주년이 못 되어 사무가 정돈되고 행정이 잘 되었다.
일반 행정을 하는 여가에 공은 곧 소속 관료에게 문서를 나누어주어 인부를 모집하여 역사를 실시하였다. 읍내에 있는 관사(館舍)ㆍ창고ㆍ학교ㆍ사찰ㆍ정자 등이 누추하거나 못 쓰고 없어진 것을 모두 수리하고 복구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수령[牧]은 지위가 백성을 다스리는 우두 머리에 앉아 있는 것이며 농사를 장려하는 직책을 갖고 있으니, 백성에게 농사짓는 것을 시범하는 교육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주의 읍내는 두 도(道)의 요충 지점에 있어서 이쪽 방면에서 번화한 도회로 불리고 있으므로, 손님을 맞이한다든가 전송하는 예절도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 동정(東亭)은 두 가지의 행사를 다 할 수 있는 곳이니,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 건축 공사는 이 정자부터 시작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아전들은 마음을 다하고 인부들은 힘을 다하여 북을 울려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모여들었 으며, 매를 들고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지런히 하였다.
목재는 상류(上流)에서 물로 운반하였고, 기와는 동쪽 언덕에서 구워냈다. 공은 새벽부터 밤까지 직접 현장에 나아가서 전후로 지시하고 계획하였다. 지면의 넓이를 참작하여 지대가 동편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거기에 빈루(賓樓)를 세우고 남향으로 주 건물을 높이 지었다. 서편의 행랑과 남편의 행랑이 모두 14칸이요, 옷 갈아입는 장소와 음식 차리는 장소며, 겨울에 사용할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시원한 대청까지 모두 마련되었다. 그리고 나서 곧 축대를 쌓고 벽 바르는 일을 하고 단청을 올렸다. 그 규모는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으며 그 설비는 누추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평평한 마당과 층층대의 계단과 행랑(行廊)과 보도(步道)들의 위에서는 예절을 행할 수 있으며, 아래에서는 사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정자가 이미 완성되니 그 정자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이 인하여 머뭇거리며 칭찬을 드리고 노래를 읊으며 돌아갔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공이 공주를 다스리니 공주의 생활이 유족하도다. 공주의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생각하여 다투어 공덕을 노래하도다. 공은 백성에게 농업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보장하였 으며, 공은 나라의 사절(使節)을 맞이하여 임금의 명에 노력하도다. 공의 정자를 보면 공의 정치를 알 터이니, 공의 정사(政事)는 이 정자를 거울로 삼으리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임 창순(역) | 1968
公州 東亭 記
大州府必有迎春亭。歲冬後九五。三陽肇啓。萬物萌動。謂之立春。先時州若府。命具土牛洎金木田器若干。蔬果酒饌祀奠物若干。主事吏執牘而監之。使莫敢不備。然後守與倅。率群長吏群將卒出東郊。各以弁服將事。所以奉社稷習稼穡。至於斂入會計。施惠行慶。一歲之務。旣陳乃已。則非于亭莫宜也。大州府又必有迎客亭。如按部如察訪。比小大使之往來也。州若府。必命群將卒群長吏。執旂纛具 冠帶。使先迓于 遠壃。倅與 守率 僚佐。亦以鞾袴奉謁狀。相次候於近坰。修容展禮。肅恭敦謹。睦主客之儀。敍尊卑之位。以迎且送之。則抑惟亭是賴焉。今公州古節度府也。鷄龍山巽起。熊津水坤抱。 后土孕靈秀。更代而大振。古之今爲大州府也。州治東二百武。有廢地。 傳云古迎春亭也。礎砌壞圯。薪蒸蓊蔽。歷太守千百。莫克構立司設令。驪興閔祥伯刺是州。年未期。職修治成。庶政有餘暇。公乃分牒聯屬。聚工徵役。將使州治之舘舍庫廩庠塾寺院亭觀之猥陋弊亡者。靡不革復之。公之言曰。 顧員位。居牧人之長。帶勸農之職。示民播藝之敎。不可忽也。又州治在二道要衝。號一方繁會。候賓餞勞之禮。抑所重也。夫東亭二事之所由行也。 此莫急焉。亟宇之繇玆亭始。於是胥徒盡心。傭夫畢力。集不待鼛鼓之召。 勤不煩繩杖之督。流材于上游。陶埴于東阜。而公曉夕親臨之。前指後畫。 損益廣袤。以面勢之東偏而建賓樓。南嚮而崇主宇。西序南廡。共十四閒。 更衣之次。設食之所。冬以 燠室。夏以 涼廳。已乃版築之墁墍之丹雘之。 其制之不摦不隘。其飭之不陋不盈。夷庭層梯。行廊步道。上可以行乎禮。 下可以趍乎事。亭旣成。有道過亭下者。因裴回歎賞。謳吟而歸。其辭曰。 公治于公公乃盛。公民德公競謠咏。公勸民農遂民性。公迎王使勤王命。 見公之亭識公政。公之政以亭爲鏡。 |
2. 공주(公州)에서 아침 일찍 출발 하다. 목은 시고 권 3
바쁜 고을엔 머무르기 어려우나 / 劇邑難休駕
나의 동년이 장관이 되었기에 / 同年政作官
처음엔 안 만나고 떠나려다가 / 題門初欲去
술 대하여 우연히 즐기게 되었네 / 對酒偶成懽
새벽 산 숲엔 구름이 옮겨 가고 / 山曙雲移樹
찬 강여울엔 달빛이 반짝이네 / 江寒月照灘
아침 길에 고상한 흥취 일어서 나고 / 早行高興發
좋은 시구가 안장에 가득하네 / 佳句滿征鞍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0
이시는 목은 선생 27세 때인 1354(갑오)년 10월경 지은 시로 중국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급제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관직을 제수받기 전에 한산 고향을 방문하고 동년들이 지방행정을 맡고 있는 곳을 방문 동년들을 만나보고 개경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것으로 지금부터 670여 년 전 공주에 대하여 읊은 시로 1404년 발간된 목은고 시고에 있는 오래된 글이다. 고려 때도 공주는 아주 좋은 고을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복일 옮김 -
[목은선생은 충청도 한주사람으로 현재 서천군 한산이 관향이시다.] 한산은 공주목에 속하였던 곳이며 서천은 홍주목에 속해 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 先生은 1328년 5. 9일 출생하여 1396. 5. 7일 서세하신 대학자 관료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종장이시며 고향이 공주한산(현재 서천군 한산면)으로 부친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과 부자父子가 우리나라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중국 과거에도 급제하여 양국의 관직에 계셨다. 특히 목은 선생은 과거급제 전 중국에 유학하여 4년간 성리학을 절차탁마하시고 귀국하시어 고려국의 교육과 인재양성에 전력하시어 20여 년 넘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시고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의 관직과 5회 공거貢擧를 하시어 135명의 문생門生 제자와 수백 명의 성균관제자을 두고 계시다. 특히 공주 동학사東鶴寺 삼은각三隱閣에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의 三隱삼은의신위 神位를 모시어 추계 제향을 지내고 있다. 목은 牧隱은 아들 손자도 옆에 함께 모셔있다. 한산에는 선영이 있고 기산면 영모리에는 목은 선생의 묘소와 재실과 문헌서원이 있어 유서 깊은 유교문화와 1404년 초간되고 1626년에 중간된 목은고 55권 28책의 책판과 부친의 가정집 20권 아들 종학의 인재유고 1권 등 3대선생 문집판각이 장판각藏版閣에 잘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도 고려시대 동 지공거를 관장하시어 각각 33명씩의 훌륭한 문생 제자를 두시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셨다. 3대 선생의 문집은 후대의 교육에 보탬이 되고 현대에도 분량이 커서 부담이 되어 그렇지 상당히 많이 읽혀지고 여러면에서 참고되고 있는 문집이다. 분량이 많아 아직 연구가 다 되지 못하였다. 앞으로 더욱 연구하여 대한민국 민족문화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한 역할을 담당 할 것을 기대하여 보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