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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 705m
위치 : 경남 남해군 이동면
특징, 볼거리
남해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중에 유일한 산악공원이다.
기암괴석의 절경과 남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어 전망도 장쾌하다.
한겨울에도 포근하여 겨울 등산 코스로도 좋다.
금산은 삼남 제일의 명산으로 온갖 전설을 담은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금강이라 불린다.
주봉인 망대(701m)를중심으로 왼편에 문장봉, 대장봉, 형사암, 오른편에 삼불암, 천구암등 암봉이 솟아 있다.
탑대(고제암)를 중심으로 가사굴, 쌍호문등 명소가 많다.
금산의 절경 38경 중에서 쌍홍문, 사선대, 상사암, 암불암 등이 대표적인 명소다.
쌍홍문은 여인의 눈동자 같기도 하고 커다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듯하기도 한 쌍굴로서 높이는 7~8m쯤이다.
굴이 둥근 모양이어서 ‘한 쌍의 무지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굴 속에 들어 뒤로 돌면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닷물이 반짝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떠 있다.
굴 속에서 내려다보는 산과 바다의 조화도 절경이다. 금산에서 가장 웅장한 높이 80m의 상사암에는 양반집 규수를 짝사랑하던 머슴의 전설이 얽혀 있는데 이 바위에 올라 기원하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원효대사가 이 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보광사였고 산 이름도 보광산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 곳에서 약 200m 떨어진 큰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고 세상을 얻었다.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만큼 큰 비단을 구할 수가 없자 비단이란 이름으로 산을 덮어주었다.
이후 현종은 보광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자 보리암으로 개칭했다.
삼남 제일의 명산이라 일컽는 금산은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에 펼쳐지는 일출명소의 하나이기도 하다.
남녁에 위치하여 봄맞이 산행지로 3월에 가장 많이 찾는다.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이 있어 여름 바캉스를 겸한 바다산행으로도 인기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바다와 섬,
일출을 조망할 수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1974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본래 보광산이라고 불리다가 조선 태조와 관련된 전설에 따라 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함.
조선 태조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을 비롯하여, 사자암, 촉대봉, 향로봉 등 38경이 유명하며,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다
산행 코스
1코스 : 상주면 매표소- 쌍홍문- 보리암- 정상- 보리암-상주면 매표소(3시간)
2코스 : 매표소- 쌍홍문- 보리암- 정상- 보리암-보리암셔틀버스 정류장- 복곡저수지 주차장(3시간)
3코스 : 이동면 복곡저수지 주차장(매표소) - 보리암행 셔틀버스- 보리암- 정상- 보리암- 쌍흥문-상주면 매표소
4코스 : 이동면 복곡저수지 주차장(매표소) - 보리암행 셔틀버스- 보리암- 정상- 보리암- 셔틀버스-복곡저수지 주차장(매표소)
산행 길잡이
금산을 오르는 산행기점은 상주면 상주해수욕장 가는길의 매표소와 이동면 복곡저수지 매표소 두 군데이다.
상주면 매표소는 상주해수욕장 가는 길 도로에 있다.
주차장은 그리 넓지 않다. 매표소에서 정상까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지만 가파르게 1시간 20여분 정도 오른다. 보리암 알래에서는 쌍흥문이라는 바위 속을 통과한다.
하산은 상주면 매표소로 되 내려 오거나 보리암에서 20여분 걸으면 8부능선에 25인승 보리암 셔틀버스정류장이 있다.
셔틀버스는 편도 1,000원으로 복곡저수지 주차장까지 운행한다.
관광버스나 승용차는 복곡저수지 주차장에서 주차한다.
산행을 쉽게하려면 복곡저수지 주차장에서 보리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8부능선에서 하차하여 20여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 오른후 상주면 매표소 쪽으로 하산 할 수 있는데 산행의 재미가 별로 없다.
보리암 관광코스로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에서 보리암 아래 8부능선까지 올라가는 보리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보리암을 관광하고 다시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능선따라 20여분이면 보리암에 이른다
남해 양아리 석각 (南海 良阿里 石刻)
경상남도 기념물 제 6호
양아리 두모에서 부소암으로 오르는 골짜기 큰 바위에 새겨진 고문자. 양아리 석각,"서불 과차"라고 하는 이 고문자는 진시황의 사신 서불이 선남선녀 500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캐려고 이곳에 와서 새겨놓고 간 글자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거란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이곳은 그 어른의 사냥터"표시라는 설도 있으나 판독이 어려워 아직껏 베일에 싸여 있다.
'거북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에 새겨진 문자 또는 문양은 일반적으로 '서불이 고곳을 지나다'
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로 해석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서종 서불에게 동남동녀 500여 명을 주며
불로초를 구해오라고하여, 서불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서불은 세상에 늙지 않게 해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하며
이곳에서 사냥만을 즐기다 떠났다.
그때 서불은 자신이 이곳에 왔음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이 문자 또는 그림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 때는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이야기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둘러싼 해석은 다양하다.
단순한 동물의 발자국이라는 견해 우리나라의 고대문자라는 설,
또는 거리이나 산스크리트문자르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곳 남해에서 가까운도모리를 비롯한 여러곳에서 이들과 유사한 문자 또는 문양을 새긴
바위가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바위문자와 문양은 이곳 남해의 고대 문화와 관계를 갖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부소암
고려시대 제작
2011년 12월 23일 보물 제 1736호로 지정
유배객이 붙인 것은 아닐까? 이 금산에 올랐던 류의양이 붙였을지도 모르고, 남구만이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신배의 참소로 억울하게 이 고독한 외딴섬에 귀양 온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임금이 콩과 보리를 가리듯이 충신과 간신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진나라 시황의 태자 부소이다. 진시황의 두 아들이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부소와 흐리멍덩한 호해가 그 두 아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이다.
간신배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장차 부소가 임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에게 참소를 넣었다.
"부소가 폐하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부소를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라."
진시황은 호해를 가까이하고 부소를 멀리 변방으로 내쳤다. 올빼미의 무리 이사와 조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소가 폐하를 원망합니다."
진시황은 부소에게 칼을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라는 말이다.
부소는 그것이 간신배가 꾸민 간괴인 줄 알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를 타고 도망을 쳤다.
서불이 동으로 동으로 배를 몰다가 남해 금산에 도착하였다.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가'
서불은 양아리 골짜기의 바위에 왔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떠났다.
그러나 부소는 떠나지 않았다. 신령스런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주어진 수명을 누리고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소암이라 불렀다.
역사에서 부소는 진시황이 보낸 사약을 받고 변방에서 죽고, 둘째 아들 호해가 임금 자리를 계승하였다.
호해가 임금이 된 지 3년 만에 진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움막이 지금도 있다. 부소가 살았던 그 움막일까?
절벽에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속세 사람의 집이 아니다.
도 닦는 사람일까, 부소처럼 쫓겨와서 숨어사는 사람일까?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이는 끊이지를 않는구나.
제석봉
천구암 왼쪽에 있는 바위로 무당의 신인 제석님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바위로 금산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일월봉 . 화엄봉
화엄봉 왼쪽에는 세 개의 바위가 층암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제석봉 가는 길에서 가깝게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형이고 탑대에 올라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한다.
대장봉. 형리암
만장대
탑대 서남쪽 깎아 세운 듯 천인 단애를 이루고 있는 절벽.
높이가 만장이나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쌍홍문의 오른쪽에 있다.
상사암에서 바라본 보리암
대장봉 화엄봉 전망대
부산산장
단군성전
남해 금산 단군성전이 전하는 글...
본 성전은 온전한 진리되어짐인 한얼님의 기운으로 대각의 근본 되어짐을 크게 알리시고자,
우리인간의 각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일심일신일체하여 크나큰 은혜로움으로 나타내시어 오신,
한인상천황(韓因上天皇), 한웅천황(韓雄天皇),단국한배검(檀君韓倍檢)님을 모신 곳입니다.
또한 한인상천황님의 조화경전인 천부경과 한웅천황님의 교화경전인 삼일신고와
단군한배검님의 치화경정인 참전계경을 한민족의 후손으로써 높이 받들고 전하여
참다운 삶을 항상 새롭게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본 성전은 항상 이와같이 세분의 삼천님을 일심일신일체함의 각으로 삼으면서
삼기 조화,교화치화의 삼법을 올바른 성심으로 주체되어진 이치되어짐에 맞게,
천,지,인으로 비롯된 모든 삼기 만물되어진 자들과 더불어,
삼기 홍익인간의 참 실천과 이화세계의 참 덕목을 법성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본 성전의 청건자이신 일문대선사께서 한인상천황님의 조화경정을 법상함에
“나와 너를 존재하게 하여 그 자체가 조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진리되어진
각의 순행과 기운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늘 처음과 끝이 일심일체로써 하나임을 증명하기 마련이다....“
라고 하신것과
한웅천황님의 교화경전을 법상 함에 “바로 이와같은 조화의 순행과 기운함을 올바른 진리의 각으로
채워가는 목적과 과정을 알고자 하는 나와 네가,
일심일신일체로써 교화되어지는 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불러일으킨다....” 라고 하신것과
단군한배검님의 치화경전을 법상 함에. “또한 이와 같은 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참 진리의
덕목과 실천의 각으로써 크게 나타내어 펼치고자 하는 일심일신일체함이,
늘 팔조의 조정자들을 역확되어짐으로 삼아, 진리의 순행과 기운함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본 성전은 이와 같은 모든 삼기의 삼법과 이치로써 순행되어지는 기운을 각으로 삼아서,
삼기 모든 만불로써 진리되어진 자들과 함께 더불어 합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성스러운 성전으로 높이 받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본 성전은 이에 하나 되어지는 참 덕과 복의 실천자로써 삼기 진리되어진 대선각으로
크게 나타내시어 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삼기 만물되어진 모든 자들에게 참 지혜로써
은혜로이 펼쳐 치화의 세상을 직접 실천되어지게 이루어 내시고자
동방의 아름답고 깨끗한 한민족의 조선을 건국하신 단군한배검님의 선에 정신을 일로써 바르고 크게 받들면서, 삼기 천선과 선수련을 통하여.
삼기 천.지.인을 한 중심체로써 속하여 있는 우리 인간의 각들을 일로써 바르고 선에 이르도록 이끌어 실천되어지게 하는데 있습니다.
또한, 이에 삼기 선과각으로써 합일체를 이루어 선각되어진 모든 삼기 만물되어진 자들이,
서로의 사랑함을 공평하게 참 덕과 복으로 나누어 주고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청명하게 흐르는 물처럼 공유되어지게 살아가는 것을 일심일신체하여,
삼기 대선각의 큰 도로써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도록 번영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삼기 모든 선도인들께서 남해금산단군성전인 이곳을 찾아 크나큰 법성을 지니게 되어지는 것은 바로 이곳이
삼기 자연함으로 유속되어지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삼기의 참 지혜로움으로 덕과 복을 실천되어지게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본 성전은 매년 개천절 (양력10월3일) 행사를 비롯해 설날(음력1월1일)과 중추절(음력8월15일)
용왕제(음력1월15일 대보름이 지난 첫 번째 용의 날, 특별한 사유가 없을시,
남해해상국립공원 세존도를 발원지로 삼아 한해의 무사안전과 소망함을 기원하는 제를 올립니다.)
또한 정기법회를 매월 (음력1월1일과15일) 열어서 삼기 모든 선도님들의 삼천님의 크나큰 가르침대로
삼기 진로로써 실천 되어지는 각을 일로써 바르고 크게 얻도록 하여 삼기 홍익인간의 참사랑을 덕과 복으로 나누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을 열어지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요
하나의 문을 닫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요.
하나의 문을 지켜지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기에
항상, 하나의 문을 열고, 닫고, 지켜지게 할 때에는
나 자신을 먼저 열고, 닫고, 지켜지게 하는 원인되어짐으 삼천님의 조화, 교화,
치화인 삼법으로 찾아 일로써 넓고 크게 이치토록 하는 것이다....!
봉수대 / 망대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이 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금산과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광활한 경치가 황홀하다.
장엄한 남해의 일출을 보러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금산 삼십팔경과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 눈으로 굽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熢燧臺)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방조망(四方眺望)이 비길 데 없이 넓고 아름답다.
천마암
기념품 판매소
해수관음상
보리암전 삼층석탑 [ 菩提庵前三層石塔 ]
- 지정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 지정번호 : 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
- 지정일 : 1974년 02월 16일
- 소장 : 보리암
- 시대 : 신라
- 종류/분류 : 석탑
- 크기 : 높이 1.8m
-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2065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남해 금산(錦山) 상봉에 위치한 보리암 앞에 있는 3층석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683년(신문왕 3)에 원효(元曉)의 금산 개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수로왕비 허태후(許太后)가 인도의 월지국(月之國)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 못했는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운 것이 바로 이 탑이라 한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상륜부 이상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개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안내 표지판 글 : 이 탑은 금산의 정상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보(裨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보리암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보리암전 삼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683(신문왕 3)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 하기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許太后)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婆娑石)으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허태후가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양식 또한 고려초기의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이야기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다.
이 탑의 형식은 커다른 돌 하나로된 단층받침을 세우고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으며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니다.
각층 몸체의 사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에는 4단 받침이 있으며 약간의 경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처리 되었다.
꼭대기 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 비보: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의 지역에 탑 장승 뜽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일.
보리암 [ 菩提庵 ]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尙州面) 상주리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절.
-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 창건시기 : 683년(신문왕 3)
- 창건자 : 원효
- 소재지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 보리암 종무소 : 055-862-6115, 862-6500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改額)하였다.
그 뒤 1901년에 낙서(樂西)와 신욱(信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東波)가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梁素滉)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南旬童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감정되고 있다. 보리암 앞 바위 끝에 세운 높이 165㎝의 이 탑은 상륜부에 보주(寶珠)만 놓여 있다.
이 밖에도 보리암 주위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좌선대를 비롯하여 쌍홍문(雙虹門) 등 38경의 경승지가 있다.
음성굴 (금산 제 13경)
만장대 바로 북쪽, 높이 2m, 길이 5m 정도 되는 조그만 바위굴. 굴 속에 들어가 굴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음성굴이라 했다.
쌍홍문
상주 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안내 표지판 글 : 금산의 수문장, 해골을 닮은 검은 동굴 금산을 오르는 관문으로 쌍홍문은 두개의 무지개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금산 기암괴석 중 제일경으로 손꼽히며 석가세존과 세존도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세존도의 전설이 궁금해진다.
세존이 금산 쌍홍문에서 돌배를 타고 이 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상주 은모래 Beach에서 40km나 떨어져 있지만, 날씨가 좋으면 아득히 세존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에는 한복판에 원형으로 된 해상 동굴이 있다.
섬 전체가 바위이며 나무도 식수도 전혀 없는 무인도(無人島)이다.
남해에서는 오래 가물고 한발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을 본다고 하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오고 있다.
남해의 섬 중에서 낚시가 가장 잘 되기로 유명하여 낚시철이 되면 수많은 꾼들이 모여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중에서
꼭대기에 올랐다. 꼭대기가 봉수대이고 봉수대에서 다도해가 발 아래로 보인다.
류의양이 남해문견록에 이를 적고 있다.
"그 봉에 적정을 살피는 높은 대를 쌓았으니 배가 오는가 사람을 두어 살피는 곳이리라.
이 봉에서 대마도를 보고 일출도 본다고 하고 서쪽으로는 전라도 좌수영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가이 없는데 바다로 수백 리는 한데 큰 뫼 하나가 있는데 그 뫼 가눈데 구멍이 크게 분명히 보이니 그 뫼 유혈도라 일컫는다."
유혈도는 지금 세존도라 부른다.
이름은 달라도 모양은 변함이 없다.
옛날에는 구멍이 뚫렸고 지금은 구멍이 뚫렸다.
지금도 비가 오지 않으면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올린다.
그러면 세존도는 옛날처럼 비를 내려준다고 한다.
장군암 (將軍岩)
안내표지판 글 : 는 장군이 검을 짚고 봉을 향하여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장군암이라 하였으며
금산의 첫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장군이라 하여 일명 수문장이라고 한다.
특히 이 바위를 휘감고 있는 송악으로 인해 장군암이 더욱 늠름해 보인다.
사선대(四仙臺)
안내표지판 글 :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는 네 신선이 암봉에서 모여 놀았다 하여 사선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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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 후기 정말 성의 있게 써놓으셨네요.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누군가는 이것보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미리 알고 가면 더 많른 즐길 거리가 있는것 같아서 미리 찾아보고 돌아와서 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