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지 처음으로 지난 9일 전투 지역이나 양국 접경 지역이 아닌 크림반도의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사키' 군용 비행장에서 대규모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폭발 원인은 사건 발생 1주일이 지나도록 미궁(?)에 빠져 있지만, 러시아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런지는 짐작 가능하다. 러시아 국방부가 사건 첫날 항공 탄약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폭발사고, 즉 '인재(人災)'라고 발표한 뒤 현장 조사를 벌이면서도 철저히 침묵 모드를 지키는 이유다.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러시아 측에 유리한 것은 일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입을 닫고 있는 사이, 우크라이나와 서방 전문기관, 외신들은 자신들에게 편리한(?) 쪽으로 다양한 외부 공격설을 제기했다.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나 크림반도에서 암약하는 게릴라들이 '자살 드론' 등을 이용해 파괴 공작을 벌였거나, 우크라이나군이 장거리 미사일로 폭격에 나섰을 것이라는 게 대표적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정부 매체인 '미디어조나'의 팩트 체크 기사다. 이 매체의 보도 성향은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이끈 '노바야 가제타'에 못지 않게 '반 푸틴'적이다. 당연히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친서방의 '외국 대리인' 딱지가 붙었다.
지난 10일 저녁(현지시간) 이 매체가 온라인에 올린 '크림반도로 번진 전쟁, 비행장 폭발 - 가설 분석' 기사는 서방(우크라이나) 측이 제기한 여러 가설들을 팩트 체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크림반도로 번진 전쟁, 비행장 폭발 -가설들을 분석한다'는 미디어 조나 웹페이지/캡처
이 매체에 따르면 폭발사고가 난 '사키' 군비행장은 구소련시절부터 항공모함 탑재 항공기의 갑판 이착륙를 훈련하고, 흑해 함대에 필요한 탄약들이 저장되는 곳이다. 일부 외신은 이 비행장이 흑해함대 소속 '제43독립해상공격항공연대' 본부(기지)로, 현재 우크라이나 공습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해 왔다고 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사건 직후 '화재 안전 규칙 위반'으로 폭발사고가 발생했으며, 인명 피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튿날(10일) 세르게이 악소노프 크림 주지사는 사망 1명, 부상 14명의 인명 피해를 집계, 발표했다고 이 매체는 꼬집었다.
미디어조나에 따르면 사키 군비행장 폭발은 지난 9일 오후 3시 30분(현지 시간)께 첫 폭발과 함께 (항공기 기체의 파편으로 보이는) 파편 조각들이 하늘로 튀어오르면서 시작됐다. 인근 심페로폴의 한 주민은 "파편을 육안으로도 20개, 21개까지 셀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폭발 규모를 짐작케하는 증언이다.
폭발 사건에 서둘러 대피하는 인근 해변의 피서객들(위)와 사키 위치/사진출처:텔레그램 얀덱스 지도 캡처
인근 해변에 있던 피서객들도 놀라 급히 자리를 떠 해변은 순식간에 텅 비었고, 도망간 애완견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또 그날 저녁, 우크라이나의 한 텔레그램 채널은 본토와 연결되는 크림대교 위의 교통 체증 영상을 올렸다. 전쟁 공포에 휩싸인 현지 주민들이나 피서객들이 서둘러 (크림반도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했다.
사건 직후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페이스북을 통한 공식 논평에서 "화재 원인을 규명할 수는 없지만 화재 안전 수칙과 미확인 장소에서의 흡연 금지(의 중요성)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며 러시아측 발표에 사실상 동의했다고 미디어조나는 평가했다.
그 기조는 그러나 9일 저녁 미하일 포돌야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의 트윗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포돌랴크 고문은 "크림반도의 폭발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이날 대국민 연설의 대부분을 크림반도에 할애했다. 우크라이나 공군도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군용기 9대가 파괴되고 비행장은 작전 불능상태가 됐다"며 탄약고 외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주장을 반박했다.
올렉시 아레스토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은 아예 온라인 회견에서 이번 폭발이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무기 혹은 크림반도 내 게릴라에 의한 것임을 시사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특수부대가 공격 작전을 수행했다"는 우크라이나측 주장을 전했다.
그동안 국내 언론이 전한 △장거리 미사일 폭격과 △크림반도 내부 게릴라들의 습격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공격 가능성 등 대부분의 가설이 우크라이나측 인사로부터 맨 처음 제기됐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들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 것은 10일 저녁 공개된 폭발 현장 위성 영상(사진)이다. 미 뉴욕 타임스(NYT)는 '플래닛 랩스'가 공개한 폭발 전후 위성 영상을 비교, 분석했다. 영상에는 비행장 서쪽 포장도로에 3곳의 커다란 폭발 구덩이와 파괴된 Su-24, Su-30 전투기가 최소 8대 확인됐다고 했다. 서방 진영 일각에서는 최소 15대의 항공기가 파괴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럽의 자유라디오와 라디오 리버티의 기획보도팀 '스헤미' 측은 폭발 4시간 전(오전 11시 10분)에 촬영된 위성 사진에 군용기 위치를 표시한 이미지를 공개했다(아래 사진). 위는 10일 위성사진/사진출처:트위트 @cxemu
폭발 전후 위성 사진/텔레그램 캡처
러시아군 활동을 감시하는 국제시민단체 인폼네이팜은 위성사진 분석 결과, M270 다연장 로켓 시스템으로 발사한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 두 발이 비행장을 타격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미디어조나는 이같은 주장들에 대해 꼼꼼하게 팩트 체크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가 우크라이나군이 자체 개발한 대함 미사일 '넵튠'을 지상 공격용으로 변형해 공격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증거는 없다"고 지적한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군이 장거리 미사일로 공격한 게 맞다면, '넵튠'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 이유는 사정거리다. '넵툰'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280km로, 우크라이나의 헤르손 지역 최전선에서 '사키' 비행장까지의 거리(약 250km)를 넘어선다는 것. 그러나 '넵튠' 미사일이 지금까지 한번도 지상 목표물 공격에 사용된 적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지적했다.
2021년 실전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넵툰' 대함 미사일/사진출처: 위키피디아
M270 다연장로켓시스템(MLRS)으로 발사되는 '에이태큼스' 미사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 혹은 제공하기로 한 첨단 장거리 미사일 공격설에 대해서는 (돈바스) 분쟁 정보 플랫폼(Conflict Intelligence Team. CIT) 전문가들을 동원해 가능성 여부를 확인했다. CIT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동부 돈바스 지역의 분쟁 정보를 전하고 분석하는 민간 전문가 그룹이다.
미디어조나는 CIT가 지난 10일 폭발 사건 분석 보고서를 내면서, 폭발 원인에 대해 내부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전제한 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을 약속한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이나 이미 제공한 '하이마스'(HIMARS) 공격 버전을 부인했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ATACMS 미사일이 이미 우크라이나에 인도됐다고 하더라도, 첫 공격 목표가 도네츠크 지역이 아니라 크림반도였다는 게 이상하다"고 우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하이마스'를 배에 싣고 크림반도 해안 80km까지 접근해 군비행장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기술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하이마스'가 현재 사용중인 다연장 로켓(MLRS)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약 80k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는 '하이마스'를 운송할 만한 군함도 없다"고 했다.
미 국방부도 크림반도 폭발사건에 대한 발표가 오락가락했다. 미 국방부가 크림반도 (러시아 군용) 비행장 폭격에 관한 성명을 고쳤다는 13일자 현지 언론 보도 묶음/얀덱스 캡처
뒤늦었지만, 미 국방부도 12일 미국의 무기(미사일)가 크림반도의 러시아 군비행장 공격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 국방부 고위 관리는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를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며 하이마스에서 발사할 수 있는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은 제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300km에 이르지만, 갖고 있지도 않는 미사일을 크림반도를 향해 쏘았다는 것은 '작문'에 불과하다.
목격자들도 미사일 공격 가능성을 배제했다. 한 주민은 미디어조나 측에 "로켓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그냥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솟구쳤는데, 로켓이라면 보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디어조나가 접촉한 CIT팀의 정보 분석관 키릴 미하일로프는 목격자와는 다른 이유로 우크라이나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는 (크림반도 타격이 가능한) 전술용 미사일 '그롬'(Гром)이 있지만, 이 미사일이 실천 배치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또다른 다연장로켓(MLRS)이나 '토치카-U' 미사일은 현재 배치된 곳을 보면 크림반도는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미하일로프의 분석이다.
대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로 그는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드론 공격(우크라이나측 주장)과 현장의 폭탄 취급 부주의(러시아측 주장)를 들었다. 우크라이나 특수부대가 '카미가제 드론'을 이용해 군 비행장을 공격했다면, 비교적 위력이 약한 폭발물이라도 탄약고의 연쇄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와 관련, 우크라이나 언론인 유리 부투소프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크림반도 폭파 작전(2016년 8월)의 전말을 미디어조나가 소개했다. 키릴 부다노프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국방부 산하 정보국 특수 부대의 폭파팀이 6년 전에 러시아 공군 기지를 습격하기 위해 크림반도에 잠입했다는 것. 비록 폭파 계획이 사전에 러시아 정보기관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게 우크라이나 언론인의 주장이다.
미하일로프 분석가는 크림반도 내 게릴라들의 습격이나 폭발물의 밀반입 등은 현지 군 비행장의 철저한 보안시스템을 감안하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보다는 폭발물 취급 부주의에 의한 사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진짜 크림반도 폭발사건·사고의 원인은 무엇일까? 러시아 국방부가 철저 조사 후에도 모든 것을 솔직히 공개하지 않는다면, '사키 군비행장의 폭발 미스터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