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야권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치료한 독일 베를린 샤리테 병원 의료진이 그의 중독 증상과 치료 과정, 노비촉(독극물) 중독 확인 경위 등을 영국의 의학저널 란셋(Lancet)을 통해 상세하게 밝혔다. 란셋은 러시아의 첫 신종 코로나 백신 '스푸트니크V'에 대한 논문 검증뒤 게재해 서방측에서 처음으로 '스푸트니크V'를 인정한 영국 의학저널이다.
나발니 중독 후 치료 과정이 의학저널 란셋에 발표됐다/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샤리테 병원 의료진은 지난 8월 나발니가 러시아에서 급히 후송되어 왔을 때 다양한 의학적 분석및 진단을 통해 확인한 증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의료진 측은 란셋의 요청을 받고, 나발니의 동의를 얻은 뒤 논문을 썼다고 밝혔다.
이 논문에는 컴퓨터 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검사(MRI) 등을 통해 확인한 나발니의 신체적 증상을 비롯해 치료 방법및 과정 등이 기록돼 있다. 독일측이 발표한 노비촉 중독에 관한 세부적인 임상 자료는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독일 측에 구체적인 임상자료를 제공해 달라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이유다.
샤리테 병원 의료진은 논문에서 "나발니 혼수 상태에 빠진 원인을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 중독으로 진단하고, 며칠 뒤 노비촉의 관련성과 그에 따른 생체 내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이는 치료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의료진은 또 "(러시아 옴스크 응급병원에서) 중독후 2~3시간 내에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아트로핀을 주사한 게 치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이러한 응급 처치들이 저산소증 등으로 환자가 위중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고 했다.
이어 논문은 "입원 2주 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인정하는 독일군 실험실에서 나발니의 혈액에서 노비촉 계열의 유기인산염 신경 작용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OPCW는 이 결과를 추후 확인했다.
독일 베를린으로 후송되는 나발니(위)와 샤리테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뒤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동영상, SNS 캡처
냉전 시대 말기 구소련이 개발한 노비촉에 노출되면 신경세포 간 대사에 지장을 줘 호흡 정지, 심장마비, 장기손상 등을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비촉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 러시아 당국뿐이라고 한다.
나발니는 샤리테 병원 입원 26일 만에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고, 33일 만에 퇴원했다. 그는 퇴원 당시 뇌 활동과 말하기 등에 일부 이상 증세를 보였지만 3주 후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논문은 밝혔다. 또 "55일 만에 이뤄진 마지막 외래 진단에서 신경학적, 신경생리학적, 심리학적으로 완전히 회복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퇴원한 뒤 산책중 휴식을 취하고(위) 유명 블로거와 인터뷰하는 나발니/인스타그램 캡처
나발니는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비행하던 중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륙한 지 10분쯤 지난 뒤였다. 비행기는 옴스크 공항에 비상착륙했고, 나발니는 증상이 나타난 지 약 2시간만에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샤리테 병원 논문에 따르면, 나발니를 처음 치료한 옴스크 의료진은 초기 진단에서 그가 발열과 호흡 부전, 탄수화물 대사장애, 전해질 장애 및 대사성 뇌병증 등으로 인해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탄수화물 대사장애에 따른 혼수라고 진단했다는 것.
옴스크 공항에서 병원으로 후송되는 나발니/동영상 캡처
나발니에게서 독극물 중독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옴스크 병원측의 일관된 주장이다.
샤리테 의료진은 또 논문에서 옴스크 병원측이 나발니의 증상 조절을 위해 '비특이적' (неспецифические) 치료제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당초에는 아트로핀을 주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특이적' 치료제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특별하게 "이거다"라고 쓴 약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발니는 24일 페이스북에 "푸틴 대통령은 최근 송년 기자회견에서 독일이 임상 자료를 주면 (수사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며 "관련 자료가 의학저널에 발표됐으니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서 "러시아 국가안보회의(NSC) 소속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연방보안국(FSB) 독극물팀 요원들과 통화했다"며 "독극물 팀이 나의 속옷에 신경작용제를 묻혀 암살하려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페스코프 대변인:독일과 화학무기금지기구가 러시아에 나발니 치료 임상자료를 보내주지 않았다/얀덱스 캡처
이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나발니는 피해망상, 명백하게는 과대망상 증세를 보인다"며 "권위와 권력을 둘러싼 정신적 콤플렉스로부터 고통받는 환자"라고 응수했다.
러시아는 23일 유럽연합(EU)의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 정부 관계자들의 러시아 입국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정확하게 제재대상이 누구인지는 통보되지 않았다. 러시아 입국시 본인만이 제재대상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조치는 EU가 지난 10월 나발니 암살 시도에 관여한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 세르게이 키리옌코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 등 러시아 고위 관료 6명과 러시아 유기화학·기술과학연구소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와 자산동결, 자금제공 금지 등의 제재를 가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