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몽골의 대지에 두 발을 딛었을 때 눈앞에 펼쳐지던 그 막막한 풍경. 나를 꼼짝할 수 없이 가두고 있는 사방의 지평선은 단지 ‘황량한 들판’이라고 말해 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릎 닿는 풀 한 포기 없고, 그늘이 되어 줄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으며, 마른 목을 적실 물 한 모금 찾기 어려운 그곳. 방향을 가르쳐 줄 만한 표식은 물론이요 불러 볼 사람 하나 없이 영하 50도의 추위와 맹렬한 더위만이 자리를 바꿔가며 인간의 방문을 한사코 거부하는 땅. 그곳에는 고독한 영혼을 위무할 꽃들의 향기도, 수고로운 생애를 맡길 숲의 그늘도, 대지에 심어 놓고 생명의 육성을 노래하며 수확을 기다릴 씨앗도 없었다.
몽골의 대평원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육체적 긴장에 사로잡힌다. 그 벌판을 대하는 순간, 그동안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던 생존 방법이 단 하나도 먹혀들 것 같지 않은 어떤 한계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정착문명 속에서 누려온 생존의 방법이 그 황량한 곳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랬을 때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곳에서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감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마음먹은 것은 1999년 12월 31일 밤 12시였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씁쓸하기만 하다. 거리는 넘쳐나는 인파들로 들끓고, 도시는 수천 개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작렬하고 있었다. 그 분주한 어둠 속에서, 성난 공룡이 불빛을 쏘아 대는 것처럼 골목 안까지 속속들이 쑤셔 대는 차량들, 대낮보다 밝은 밤, 부딪치는 발길들, 정체되는 자동차…… 사람들은 지구가 한 천년의 끝을 어떻게 마감하고 시작하는지를 보고자 어깨를 부딪치며 몰려다니는 중이었다.
지상에서 이같은 대축제를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인류는 감격스러웠을지 모른다. 그 밤을 만끽하게 해준 위대한 문명이 자랑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들 먼 곳에서 먼 곳에 있는 자의 표정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자정이 임박할수록 이동전화의 폭주로 휴대폰이 자꾸만 불통되고는 했다. 도대체 서기 2000년의 0시라는 시간이 무엇이기에 다들 이 밤을 그냥 지나쳐갈 수 없다는 말인가?그 가공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공중파는 최신 단말기를 작동하여 여섯 개의 대륙에 걸친 주요 도시와 오지들을 접속하고, 지구촌의 표정과 메시지를 중계했다. 그리하여 마술처럼, 그 시각이 어떤 곳에서는 아직 12월 30일이었을 테고, 또 어떤 곳은 2000년 1월 1일이 지났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천년의 매듭을 동일한 전광판 위에서 동일하게 소멸시켰다. 거대한 밀레니엄 하나가 그렇게 굉음 속에서 막을 내린 것이다.
도약의 시대, 풍요로움을 꿈꾸는 시대, 문명을 기획하는 시대, 그 모든 낡은 꿈의 종착지인 한 천년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로운 시간의 탄생’을 맞는 자리. 인류는 들떠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온갖 의미를 도출해 보지만, 지구촌이 체험할 미래의 일정에 대해서 대략의 윤곽이나마 그려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저물면서 멀어지는 망망대해와 같은 황혼 속에서 낯설고 새로운 시간들에 매우 근접해 있는 자, 그리하여 『21세기 사전』을 저술한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조차도 공포감을 감추지 못한다.
21세기 중반에 세계 인구는 80억을 넘어설 것이다. 대부분이 도시 유목민인 이들은 인구 500만이 넘는 숨막히는 도시에서 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노동은 매우 불안정해질 것이다. ……가상현실은 많은 사람을 광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며 다양한 형태의 유목생활이 전염시키는 미지의 바이러스 때문에, 기상 재난 혹은 원자력 사고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 자크 아탈리, 『21세기 사전』
1900년대의 소멸과 함께 시작된 이 이상한 열풍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인간들을 거의 완벽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이 열풍을 만들어낸 신(新)인류의 이상한 퍼스낼리티를 앨빈 토플러의 말을 빌려 ‘미래 쇼크’라고 해도 될 것이다.
미래 쇼크는 시간적 현상으로 사회적 변화 속도의 대폭적 가속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가 낡은 문화와 중첩되는 데서 발생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화 쇼크이다. 그러나 그 충격은 훨씬 더 심각하다. 대부분의 평화봉사단원,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들이 남겨 두고 온 문화로 언젠가는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안을 얻게 된다. 그러나 미래 쇼크에 걸린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다. ― 앨빈 토플러, 『미래 쇼크』
방금 떠나온 과거의 땅으로 인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이 그 시각에 어떤 마술에 걸려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 소란스런 와중에서 그날 밤 나는 어떤 큰 재앙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2. 초원으로부터의 리포트
몽골어로 '강(Gan)'이라고 하는 자연재해가 있다. 초원에 이상기온이 생겼을 때 찾아오는 집중 가뭄 현상의 하나이다. 이 '강'을 만나면 몽골은 초가을부터 풀이 말라 가축들이 기나긴 겨울과 봄을 나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다. 여기서 유목민에게 있어서 가축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것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두자.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식량, 수송, 구매(현금/물물교환) 뿐만 아니라 보건, 교육시설의 접근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차원을 넘어 가족의 개념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낱 자연재난(?)으로 가족의 일부가 소멸해 버리는 것을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리가 없다.
자연재난에 대비해 초원의 유목민들도 저축을 해 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초지(草地)를 계절별로 나누어 비축해두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강'을 만나면 이듬해 새싹이 돋을 때를 가늠해가며 겨울과 봄에 쓸 저축 초지를 조금씩 절약해서 사용하면 되었다. 몽골에서도 대대로 그렇게 해왔다. 이 같은 지혜가 다행히 계획대로만 되어 준다면 유목민들의 평화는 나름대로의 흉년과 풍년을 교차하며 지속될 것이다. 어떤 해는 겨울나기가 조금 어렵고, 또 어떤 해는 가령 보릿고개 같은 것을 넘기기가 조금 수월해지는 선에서, 오히려 단조롭지 않은 일상의 순환 과정에서 길고 짧은 행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신의 힘을 다스리지 못한다. 우리 속담에도 복은 쌍으로 오지 않지만 화는 쌍으로 온다는 말이 있다. '강'을 이기기 위해 겨우겨우 절약하면서 살아온 이들에게 숨돌릴 틈도 없이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치는 수가 있다. 이른바 '쪼드(Dzud)'라고 하는 겨울 재해가 그것이다. '쪼드'는 여름과 가을의 가뭄 뒤에 때 이른 강추위가 들이쳐서 인간과 가축을 위협 속에 빠트리는 재난인데, 정착민들이 알고 있는 천재지변 즉, 태풍이나 홍수 혹은 지진의 위협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운 것이다. 가뭄에 지쳐 허기진 자들의 대지에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다. 가축과 인간은 그 속에서 마실 물을 확보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미래를 훔치는 일로부터 재난이 시작된다. 겨울과 봄에 살자고 당장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단 저축 초지를 가불(?)해서 사용하고 나면 미래의 불안에 초조하지 않을 중생은 없다. 그것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점점 노골적으로 초지의 황폐화를 진행시킨다. 갈수록 그것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가속화되고 결국에는 내분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저축 초지 전체가 쑥밭이 되고 난 결과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추위는 나날이 심해지고 배는 더욱 고파온다. 유목민들은 이제 어디론가 길을 나설 수밖에 없다. 그곳이 어디이며 어떤 경계선이 쳐져 있는 곳이건 초지를 찾으면 뜯어야 되고 그걸 막으면 싸워야 된다.
이 이야기를 구태여 13세기까지 거슬러 가서 해야 할 까닭은 없다. 1999년 가을, 몽골 유목민들은 '강'을 만났다. 여름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풀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일찍 내린 눈이 두터운 얼음 층을 만들어 동물들은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마실 물도 먹을 풀도 구할 수가 없게 됐다. 그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CNN 방송은 이렇게 전한다.
몽골인들이 30년 만에 최악의 겨울에 직면해 있다. 가뭄 뒤에 눈보라와 꽁꽁 얼어버린 날씨가 사람과 가축을 시시각각으로 위협해 오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추위를 막는 원형 천막의 난로에 피울 연료인 '건조해진 동물 배설물'의 부족을 겪고 있다. 전국적으로 기온이 영하 56도까지 곤두박질쳤고, 눈은 가축들이 주식으로 하는 목초지를 덮어 버렸다. 이미 백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죽여버렸고, 고립된 시골 공동체는 위험하다.
유엔관계자는 기아에 직면한 유목공동체 50만 명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경고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가축의 절반이 죽어서 '겔'이라는 유목 텐트 주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양들이 절망적으로 흙과 돌을 먹는가 하면 소들은 말꼬리를 씹기도 한다. 어떤 주민은 죽은 양의 배를 갈라보니 배 안에 자갈과 흙이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절망적으로 흙을 파먹은 것이다. 유목민이 의존하는 유제품은 소가 죽었거나 젖을 내지 못하기에 거의 사라져 버렸다. 엄마들은 아기들에게 우유 대신 미음을 준다. 탈 말이 없어서 출산이 가까운 임산부들은 수마일을 걸어서 병원에 가지만 그곳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격심한 눈보라로 모든 말들이 사라져 버렸고, 폐렴이 계속 퍼지고 있으며,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1999년 12월의 마지막 밤을 몽골 유목민들은 그렇게 맞고 있었다.
끝없는 눈보라. 영하 50도의 추위를 헤치고 유목민들은 집을 나간 가축들을 찾아 헤매고, 동물들(소, 양, 염소, 말, 낙타)은 밤이면 추위를 이기지 못해 길가로 모여든다. 그 풍경은 측은하다 못해 고통스럽다. 추운 바람에 거의 미동도 하지 않던 어린 소가 어느 순간 뒷다리가 접혀서 도리깨질을 하고, 얼어죽게 된 조랑말이 길가에 곧추 서 있다. 최소한의 힘도 없어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좌절 그 자체다. 간신히 살아 있는 말들은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앞다리로 얼음을 파헤치며 풀을 찾는다. 몽골 말은 땅딸막하지만 매우 강인하다. 그 말들은 동굴벽화에 새겨져 있는 말처럼 진한 갈색이나 검은 색으로 덮인 갈기와 크고 추한 머리를 가진 역사 이전의 말처럼 보인다. 그런 말들이 굶주렸고, 갈빗대는 하얀 반점이 있는 피부에 드러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가축들이 봄을 두려워한다는 데 있다. 적어도 낮에는 기온이 올라가지만 대지는 눈으로 쌓여 있다. 잔인한 역설은 봄의 모래바람이 단지 죽음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가축 사망률은 눈보라와 먼지 폭풍이 불고, 풀이 자라지 않는 봄 동안에 계속 증가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새끼를 밴 동물들이 죽을 것이다. 양들은 보통 3월에 새끼를 낳는데 그 때까지 새끼를 배 안에서 키울 능력이 없고, 새끼를 낳더라도 젖을 줄 수 없다.
이 참혹한 풍경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몽골 유목민의 강인함을 아는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몽골에서는 사실 악천후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고비사막의 기온은 겨울에 섭씨 영하 50도에서 여름에 115도까지 올라간다. 바람은 자갈이 많은 잿빛 갈색의 모래 위에 끊임없이 분다. 그런 환경 속에서 단련된 많은 유목민들은 어지간히 어려운 생활을 맞아서는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어려움이 침묵을 깨뜨리게 한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CNN이 인터뷰했던 한 부족장은 한 마디로 일갈하고는 서둘러 등을 돌려버린다.
인간은 대지의 질서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다.
3. 불 멸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는 몽골 현지에서 만난 한 소년의 사연에 흥분하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가다 만난 소년은 머나먼 도회지로 약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고 했다. 소년이 귀가하자면 밤새워 길을 걸어서 늦은 아침에 약을 구해 땅거미가 진 후에야 도착할 수 있다. 그 사이에 환자는 죽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막막한 거리감, 그 아득한 공간의 절망감에 비하면 마라톤의 전설은 차라리 어리광스러운 것이었다.
마라톤 경기가 그래서 생겨났다. 그리스에서 전투에 나섰던 어느 병사가 승전을 확인하고 나서 그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물경 42.195킬로미터를 내달린 끝에 절명했다. 인류는 왜 이것을 신화로만 스쳐 버리지 않고 ‘마라톤 경기’라는 기념비를 남기게 되었을까? 그에 대해 『거리의 소멸 @ 디지털 혁명』이라는 책의 한 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라톤의 전설은 ‘거리’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구속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거리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어진 공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이 숙명과 싸우기 위해 인류가 지불한 대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몽골의 그 소년은 21세기 앞에서도 여전히 그같은 숙명과 맞서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그래서 탐구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떠올려 주는 것은 ‘불멸’이라는 말밖에 없다. 몽골 유목민들의 재난 소식은 인류가 간직했던 꿈과 절망의 ‘불멸’들로 가득가득 넘친다.
불멸!
그렇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힘으로 역사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간 의지의 불멸이 있다.
그 소년의 현실에서도 인간 의지의 불멸을 읽을 수 있다. 극도로 열악한 환경이 자포자기마저도 용납해 주지 않을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조급증과 자기 울분을 못 이겨 섣불리 패배의 지점을 찾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오랜 고독을 견디고 견딘 끝에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낸다.
자연은 인간에게 가혹한 시련을 내려서 바위처럼 강인하고 불덩이처럼 뜨거운 인간을 만들어 낸다. 정착문명의 인간들이 자연의 혜택 속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는 동안 유목민들은 그 북방 잿빛 시련의 들녘에서 강인하게 벼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는 몽골 아이들의 성인식 행사에서 엿볼 수 있다.
몽골에서는 한 해에 있어서 처음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을 중요시한다. 그 눈보라가 사흘째 몰아치는 날, 그러니까 가장 엄혹한 추위가 닥치는 날 성인식을 치른다. 그 광경은 말 그대로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영하 40도의 허허벌판, 눈을 뜨고 있기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들녘. 그 한복판에서 두터운 가죽옷을 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10여 명의 몽골 아이들이 말 위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린다. 부모들의 배려 속에서 이성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소꿉놀이하듯이 어른들의 연애 감정을 흉내내어 보는 유럽의 청소년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나이도 반으로 접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어리다.
이제 갓 열 살이 된 그 앳된 소년들이 살을 에는 추위와 바람에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우주의 점 한 톨처럼 막막한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면 소년들은 말을 달리기 시작하는데, 눈보라를 뚫고 왕복 80킬로미터를 달려야 한다. 소년들은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저 먼 지평선 끝에서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발굽 소리와 함께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소리를 들려준다. 너무나 추운 나머지 아이들은 마지막 도착 지점을 바라보면서 울분과 환희에 휩싸여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그 고함 소리는, 인내력의 한계를 넘는 시련의 고문을 이기느라 내지르는 비명 소리이면서 동시에 그 시련의 끝을 발견한 자의 환희와 격정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같은 성인식의 결과는 즉석에서 확인된다. 눈보라 속을 뚫고 온 아이들의 눈빛은 출발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돌아온 소년들과 말의 모습은 참혹하다. 어떤 소년은 너무나 힘든 나머지 고삐를 놓쳐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지만, 숨이 끊어지는 법은 있어도 말타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스스로 일어나 다시 말의 등에 오르지 않으면 그 추위를 벗어날 길이 영영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돌아왔을 때 말의 입김이 얼어붙어서 말의 입가는 온통 허옇게 고드름이 맺혀 있고, 말의 온몸은 흘린 땀이 그대로 얼어붙어 얼음이 맺혀 있다. 그러면서도 온몸에는 뜨거운 김이 펄펄 난다. 또 말의 고삐를 쥐었던 소년들의 손은 얼어붙어서 퍼렇게 동상에 걸려 있다. 고삐를 놓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동상 걸린 손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소년들은 다 돌아와서야 동상 걸린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비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같은 것이다. 동상 든 손은 눈 속에 파묻어야 다시 피가 돌기 시작한다. 이것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지혜이다. 푸른 늑대의 후손, 몽골 유목민의 아이들은 이렇게 길러진다.
바로 그곳에 가득 찬, 인류사에 충격을 불러온 숱한 파란의 요소들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 태풍의 눈
그들은 지금도 이동식 천막집을 짓고 산다. 그 하얀 겔 속에서 800년 전의 사람들이 우리 2000년대의 사람들과 함께 동시대를 숨쉬고 있다. 그들이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려고 한다면 비행기만 한 번 타면 된다. 실제로 많은 몽골인들이 21세기의 나라들에 진출해 있고, 울란바토르(몽골의 수도)로 돌아가는 항공편에는 외지에서 불법 체류에 실패한 이들이 퇴출당하고 있다. 그들이 수시로 넘고 있는 그 엄청난 시간적 단절은 언제나 돌발적인 충동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이동식 천막집 겔 안에서 CNN방송을 청취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분노 혹은 에너지 폭발의 현장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똑같은 시간에 음식 쓰레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야 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둘, 이동의 숙명
그들은 이동하는 삶을 사랑하고 이동의 숙명을 숭배해 왔다. 모든 것은 생태계의 흐름을 따라 옮겨다녀야지 한 자리에 고이면 썩는다. 그들은 목축을 하더라도 이동에 장애가 되는 돼지와 닭, 오리 같은 것을 기르지 않았다. 신속하고 간편한 것을 추구하며, 몸에 지닐 수 있는 것 이상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어 온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형성된 철학과 역사와 문명을 안고 살아왔다. 그리하여 70년 간의 사회주의도 몽골 유목민의 문화를 없애지 못했으며, 초원의 귀족이라는 자부심과 세계의 절반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민족 자존심을 몰아내지 못했다.
자, 그런 환경에서 서기 2000년 0시의 ‘쪼드’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유목민들은, 어쩌면 이것이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 위기일 지 모른다는 예감에 빠져 있다. 다시는 이같은 위기가 올 수 없는, 말 그대로 끝일 지 모른다! 이제 이들에게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문제를 앞서는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면 약탈도 불가피해진다.
셋, 손과 발 그리고 촉수의 연장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나면, 이제 그들은 무엇이건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도구가 된다. 아마도 그런 처지의 인간들이 발명의 역사를 채워왔을 것이다. 사다리는 다리의 연장이고 장대는 팔의 연장이며, 자동차는 발의 연장이고, 의복은 피부의 연장이요, 전기는 중추신경의 연장이다. 그들은 더 많은 연장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기술 숭배는 발을 땅에 대고 있는 한 고갈되지 않는다. 이같은 필연 속에서 그들은 말(馬)을 길들여 자신들 발의 연장으로 삼았다.
넷, 인간과 자연의 일치
유목민은 동물을 몰고다니며 방목하는 사람들로 이해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유목민은 자연(계절이나 기후 변화)이 가는 길을 제멋대로 이탈하지 못한다.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먼저 동물이 이동하고 그 뒤를 인간이 뒤쫓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광기에 가까운 질주의 역사가 출현한다.
4. 칭기스칸처럼
‘질주’라는 단어가 지구촌의 피를 끓게 하던 시대가 있었다. 유라시아의 12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반까지 2백여 년에 걸쳤던 칭기스칸의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그 시기의 유목민들은 칸을 따라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의 대지를 내달리고는 했다. 비록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들이었지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의 질서가 그들의 질주로 인해 바뀌는 것을 보았고, 또 그들 앞에 무릎 꿇는 정착민들을 보면서 머물러 사는 자의 안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목격했다.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에는 가난하고 괴로워도 내일에의 꿈을 향해 말 위에서 자고 샜다.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칸께서 우리의 땅이라고 명하셨다.
이렇게 외칠 때 그들은 행복했다. 칸의 역사를 함께 사는 일, 칭기스칸이 만들어 가는 세상의 질서에 동참하는 일, 거기서 맛보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일깨워주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값지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후회없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질주가 가로막힐 때마다 격렬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자들과, 소유에의 욕망을 잠재우려는 자들간의 싸움에서 승패는 언제나 불을 보듯 뻔했다. 유목민들의 승리였다.
아,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피눈물과 신바람이 교차되며 격정의 한 시대가 만들어졌던가? 때로는 몇 십 만의 부족이 순식간에 도륙당하기도 했지만, 유목민이 승리한 대륙을 따라 역참제가 신설되었으며, 물샐 틈 없이 칸막이되어 있던 문명과 문명간의 경계들이 허물어졌다.
동양과 서양이 통일되고, 지상의 먼 나라들간에 소통이 시작되던 그 대변혁의 시대. 유목민들이 칭기스칸의 깃발 아래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고 제국 건설의 열기 속에 열정을 불태웠던 결과에 대하여 인류는 오랫동안 침묵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가고자 한 길을 뒤따라갔으며 역사는 그들의 에너지에 증폭되어 전혀 다른 차원의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칭기스칸의 역사를 문제삼는 지점일 것이다. 정착문명이 만들어낸 숱한 국경과 성벽들을 생애의 마지막까지 돌파하다가 죽어간, 야심에 찬 황색의 한 질주자 칭기스칸에 대해 인류가 품어온 편견과 오해는 지독했지만 그가 꿈꾸었던 역사의 윤곽이 다시 그려지지 않는다면 이후 놀라운 진전을 이뤄온 지구촌 시대의 개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 그들은 지구촌 시대를 꿈꾸었다!
그랬다. 그들은 지구의 이쪽과 저쪽이 잉여 물품을 서로 나누어 쓰는 물류 유통 사회를 희망했다!
그래서 칭기스칸과 그 후예들은 한편으로는 무력과 파괴,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열린 태도와 타민족의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잔혹한 전쟁을 이끌어갔다. 그럼으로써 여러 다양한 민족들의 물질적·문화적 교류에 장애가 되었던 장벽들을 허물었다. 그리하여 ‘몽골족의 세기’에 대륙간 교역은 번성했고, 대상(隊商)들의 통로는 이전보다 더욱 안전해졌으며, 더욱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이는 동서간의 개인적인 접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접촉은 결코 마르코 폴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접촉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영원한 타자(他者)로서만 존재하던 동과 서가 서로를 정신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들이 남긴 폐허, 그들이 얻은 영광, 그 모두를 일컬어 한낱 야만성에 불과하다고 혐오했으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정착문명의 콤플렉스를 그나마 극복시킨 것은 그들 이후의 또다른 야만(?)이 출현하여 찬란한 질주의 광채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면서였다. 이름하여 서부개척시대 - 헐리우드식 카우보이의 이상(理想)은 유목민 신화의 직접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아메리카의 질주가 나온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칭기스칸의 정신에서 흘러온 것이었고, 오늘을 거쳐 내일로 가는 인류의 이동 방향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4. 질주하는 문명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지구촌의 서막을 열었던 몽골 제국의 영광도 사라졌고 황혼도 잊혀졌다. 그러는 동안 지구촌에는 또다른 가치들이 출현하고 젊은 피들을 들끓게 했지만, 인류사가 진행되면서 간절히 추구되었던 거의 모든 가치들은 실패하거나 곡해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숭상하고 평화를 갈망하며 평등을 도모하던 인류의 꿈을 지난날의 역사가 어떻게 짓밟아 왔는가를 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 모든 가치는 심한 경우에는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까지 파괴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오직 하나, 지속적인 신장을 보여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목민들이 일관되게 추구해오던 가치, 즉 ‘자유’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20세기에도 자유는 신장했다. 우리가 유목민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진짜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는 혈통적으로뿐 아니라 문명사적으로도 그들의 후예이다. 디지털 감염자가 시시각각으로 늘어나는 21세기의 거리에서 저 어두운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열망, 그들의 속성, 그들의 영혼, 그것이 그 후 오랫동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돌고 돌아 또다시 거대한 이동을 하는 것을 보라. 그 이동의 힘은 지금의 지구촌 시민들, 곧 벤처 사업가들, 네티즌들, 디지털 시민들의 피 속을 관통하면서 오늘의 한국도 휩쓸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저 거리의 퀵 서비스 사내에게도 흐르고 있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중국집 배달부의 오토바이 위에도 살아 있으며, 밤새 사이버 대지 위를 질주하느라 잠을 놓쳐 버린 청소년들의 가슴 속에도 요동치고 있다.
이제 머지 않아 모든 거리는 디지털 문명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공간의 숙명 앞에서 막막한 거리감과 싸우지 않는다. 대지 위의 길은 그렇게 해서 소멸되지만 이동은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 먼 옛날 칭기스칸이 밤하늘의 별과 함께 초원 위를 갔듯이 앞으로의 인류는 문명 속에서 문명 속으로 어두운 모니터 안에서 깜박이는 커서와 함께 한없는 질주를 지속하리라.
이 책, 『유목민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삶에 동참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1 장 - 역사가 오해한 것들
1. 누가 성을 쌓았는가
미리 흥분할 것은 없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은 문명의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얼굴도 없이 등장하고 이름도 없이 존재해 왔다. 먼저 그 이야기부터 하자.
달의 높이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단 하나의 축조물만 보인다고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사실 여부를 백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 아래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라는 생물이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흔적으로 하필 만리장성이 거론된다니!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높이 8.5 미터, 폭 5.7∼6.5 미터의 웅장한 축성이 장장 만리에 걸쳐 뻗어 있다! 그것이 달에서도 보인다!이 기이한 광경을 보기 위해 오늘도 관광객들은 북경 교외 북쪽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팔달령에 오른다. 그리고 산을 따라 뱀처럼 뻗어 가는 장성을 보면서 그 장성만큼이나 길고 먼 동양의 고대사를 상상한다.
일대 장관을 이루는 이 축조물을 인류가 처음 쌓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원 수세기 전에 성의 흔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명(明)대에 이르러 재축성이 되기 전까지 장성은 본디 돌이나 판목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것으로 지금보다는 많이 볼품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다.
지구에 이같은 축조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몇 가지 지워진 페이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먼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구에는 무엇인가를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한 발짝 더 들어가면 그 무엇인가를 차지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 곧잘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사실과 만난다. 그리고 곧바로,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으로, 그들간의 대결이 팽팽한 긴장을 나누며 오래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누구와 대립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할 나름의 진실을 갖고 있는 법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논리적일 수 있다. 그 장대한 성곽이 ‘중국’이라는 영토를 말 한 마리 들어올 틈도 없이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설파하면서 당대 권력자들의 지배력과 권위를 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큰 성을 쌓기 위해 숱한 기술의 축적과 희생이 따랐으리라는 점은 전혀 의심할 바가 없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하나를 놓는데 평균 3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한다면 저 거대한 축조물에 바친 것은 인명 피해만도 최소한 오늘날의 산업재해보다는 더 컸을 것이다. 한강의 교량이 기껏 5리에 불과하니 오늘날을 기준으로 한다 해도 최하 2천 배의 희생이 따랐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한 사람의 제왕이 그토록 엄청난 백성의 희생을 투자할 수 있었다면 그 권위의 크기는 새삼 물을 것조차 없지 않은가.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논리가 성립된다. 그 전제 권력의 내면에 담겨 있었을 집착과 정신 구조, 그리고 그 무엇인가에 대한 공포감을 감출 길이 없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공포가 중원의 문명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엄청난 방어 의식을 드러내게 했을까? 황하 문명이라는 대문명을 일으키고, 유사 이래 한 번도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 자존심 강한 중원의 백성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엄청난 노역을 지불하게 만들었을까?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대립했던 양쪽 당사자들에 대해 오늘날의 교과서가 설명해 주는 것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단순하다. 그 둘의 관계에 대해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태반이 사실은 성곽 안에서 오로지 안일(安逸)만을 도모했던 쪽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비리(?)를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 안의 사람들은 말한다. 기원을 전후로 해서 자신들은 빈번히 말을 타고 나타나는 변방의 침입을 받아 골머리를 앓았다. 침략자들은 활 솜씨와 말 타는 실력이 뛰어나 언제나 바람처럼 기습해 활 세례를 퍼붓고 물품을 약탈한 후 바람처럼 사라지고는 했다. 그들은 평상시에 북부의 초원 지대에 흩어져 살면서 말을 타고 방목 활동을 주로 해왔는데, 침략은 매번 가을에 있었다. 봄, 여름에 배부르게 풀을 먹은 말이 가을이 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만 어느새 풀은 시들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대지는 꽁꽁 얼어붙게 된다. 그래서 추위가 시작되기 전에 식량을 구하러 남쪽을 찾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성 안의 사람들이 온통 가을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한서(漢書)』는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가을에 온다.
살찐 말과 강한 활과 함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만리장성 너머에 의문의 존재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곽의 역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 안의 사람들과 대치했던 ‘적’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이렇게 공포의 빛깔로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는 거듭 물어야 한다. 천하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중원의 사람들이 그들을 무서워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족속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같은 궁금증에 대한 역사의 설명은 참으로 미미하다. 그들에 대한 성곽 안 사람들의 기록은 어느 페이지를 뒤적여 보나 관찰기라고 말하기조차 무색할 만큼 부실한 것들 뿐인 것이다.
가축을 따라 옮겨 다니며…… 수초를 따라 이동한다. 성곽과 항상 머무는 곳이 없으며 농사를 짓지 않는다.
― 사마천, 「흉노전」
저 유명한 사마천의 묘사조차도 그들에 대해서만은 인색하기 그지없다. 계속해서 사마천의 「흉노전」은 말한다.
문자가 없어 말(口辯)로써 서로 약속하고…… (사정이) 괜찮으면 가축을 따라다니고 사냥을 하여 금수(禽獸)를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하지만, 급해지면 사람들은 싸우고 공격하는 것을 익혀 침략하는 것이 그 천성(天性)이다. ……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예의를 알지 못하고…… 건장한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고 늙은 사람은 그 나머지를 먹는다. 젊고 튼튼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늙고 쇠약한 것을 천하게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뒤에 남긴 어머니를 부인으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모두 그 부인을 자기 처로 삼는다.
― 사마천, 「흉노전」
모든 초점이 시종 열등하고 부도덕한 행태를 밥 먹듯이 일삼았던 야만스런 존재들이라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 물론 이같은 기록이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 공통되는 서술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교정 없이 반복된다는 것만으로도 그 진실은 충분히 가늠된다.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수초를 따라 이동하니 항시 머무는 장소가 없다. 펠트로 만든 텐트를 갖고 피발좌임(被髮左?)을 하며, 고기를 먹고 요구르트(酪)를 마신다. 몸에는 가죽옷과 털옷을 입고, 노인을 천하게 여기고 젊은 사람을 귀하게 대접한다.
― 『수서(隋書)』, 「돌궐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역사의 기록에서 언제나 나쁘고 사나우며 악한 자로 묘사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용문이 늘어날수록 독자는 실망할 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순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성 안 사람들이 준엄하게 꾸짖고 통렬하게 매도하는 성 밖 무리들은 이상하게도 그들이 열등하다고 강조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열등한 존재들에게 끝없이 침탈당했던 자들의 무력감만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어 놓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윤리 이 모든 차원에서 낙후되었던 자들에게 중원의 패자들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침탈당하곤 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결과이다.
그 당당한 목청 뒤에 도사린 곤혹감을 노출시키는 에피소드는 곳곳에서 출몰한다. 기원 전 110년 흉노와 전쟁을 벌였던 한 무제(漢 武帝)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이제 선우(單于: 흉노 군주의 칭호)가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 한(漢)과 일전을 겨루어 보라. 천자(天子)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변경에서 기다리리라. 만약 능력이 없다면 빨리 남면(南面)하여 한에게 신하를 칭하라. 어찌 멀리 도망하여 막북(漠北: 고비 사막 북쪽의 땅, 즉 오늘날의 외몽골)의 춥고 고통스러운, 수초도 없는 곳에 숨어 있는가.
― 『한서(漢書)』
이 위풍당당한 호령이 풍차 앞에 선 돈키호테의 외침처럼 공허하게 들린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한 무제는 그 흉노를 치기 위해 다른 동맹군까지 구해 장수를 파견했지만 번번이 사로잡히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의 관계만으로 보면 너그러운 쪽은 오히려 침략자들이었다.
이같은 일은 서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대제가 기원전 516년(혹은 513년)에 대군을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스키타이를 침공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적을 만나지도 못하고 전투도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만다. 다리우스는 잡히지 않는 적을 향해, 도망만 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일전을 겨루던가 아니면 복속의 길을 선택하라고 외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낙담한 끝에 이렇게 실토한다.
그들은 도시도 성채도 갖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자신의 집을 갖고 다닌다. 더구나 그들 모두는 말 위에서 활 쏘는 데 능하며, 농사를 짓지 않고 가축을 치며 산다. 수레야말로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집이니, 그들을 어떻게 정복하고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 헤로도토스, 『역사』 제4권
그랬다. 마치 제자리에서 붙박이로 살고 있는 식물과 사방팔방을 날뛰어 대는 동물간의 싸움처럼 이들의 대결은 전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그들은 싸우고 싶은 장소와 시간을 그들이 선택하여 느닷없이 치고 사라져 버린다. 상대로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울 길이 없다. 반드시 어떤 장소에 의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그 절대 가치인 장소를 갖지 않으면서 사는 자들을 어떻게 진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오늘날 SF 영화에서 씩씩한 지구의 용사들이 화성이나 다른 별나라의 이방인들을 만나 겪게 되는 곤혹을 연상시킨다.
2. 길을 닦은 사람들
성곽의 역사는 오늘날의 인류에게 자신들의 과거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념비로 추억되고 있다. 그곳에는 지난날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걸어온 족적(야만과 싸웠던)과 성 안의 백성들을 보호해온 제왕들의 영광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족적이 정말로 자랑할 만한 것일까? 만일 21세기의 지구촌 시대가 불가피했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성(城)은 그 내부에 어떠한 사정이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닫힌 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리 아름답게 설명해도 지상에 칸막이를 세우는 것이고, 대지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것이며, 사회와 사회, 문명과 문명간의 소통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절과 차단의 칸막이는 열린 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과거의 문명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회의의 눈으로 보면 문명의 칸막이들은 무척 낯뜨거운 것이다. 개인의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이기(利己) 본능이 그 이기를 지키기 위한 보호 본능으로 발전된 사례는 흔하다. 인류가 하나의 큰 문명 집단을 단위로 해서 소유 본능과 폐쇄 본능을 발휘하여 세상을 잘게 쪼개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변명하기 어려운 치부이다. 불행하게도 위엄에 찬 성곽은 규모가 다를 뿐 중국만 아니라 유럽의 곳곳에도 서 있다. 문화 대국일수록, 찬란함을 자랑하는 문명 사회일수록 그것은 오히려 심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성 밖의 존재를 괄호 안에 묶어 두는 데 쉽게 동의해 버렸는지 모른다.
여기서 재론할 문제가 하나 있다. 문명의 성곽에 대한 이같은 매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늘의 결과를 앞세워 과거를 단죄하는 것은 오류일 수 있다. 만일 지난날의 시대적 제약이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면 성을 쌓은 것은 정당한 일이 된다. 하지만 더 일찍부터 열린 사회를 꿈꾸었던 또다른 인류가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제 그들에 대한 역사의 복권이 정말로 필요해진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해 서기 1000년의 지구 풍경을 상기해 보자. 때는 아직도 캄캄한 중세였다. 그 중세의 밤중에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지구 반대쪽의 세상을 알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지상의 모든 민족과 민족,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간의 경계는 이승과 저승의 간격보다 크고 멀었다. 그 1000년으로부터 다시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각기 반대쪽 존재들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 지구인이 외계인에 대해 상상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기괴했을 것이다. 그 무렵에 통용되던 신화나 여타의 고전들을 보면 상대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얼음보다 차가웠고 혐오스런 상상의 동물로 대치되어 있었다. 예컨대 동북아시아 상상력의 원천이자 황당무계한 기서(寄書)로도 일컬어지는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민국이 그 동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길고 몸에 날개가 나 있다.
또 이런 표현도 있다.
환두국이 그 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에 날개가 있고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지금 물고기를 잡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흉노가 쳐들어 왔을 때 한 궁정 관리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야생 동물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들은 인류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황당한 것은 이토록 터무니없는 견해가 문명에 의해 그것도 문명 나름의 지식과 논리를 앞세워 확대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상상적인 지리 인식은 자신에게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극화시켜 자기 중심의 사고를 강화시킨다.
그들은 옷없이 산다. 그러나 중국에서 성군이 즉위하면 그 나무에서 껍질이 나와 옷을 해 입을 수 있었다.
이같은 『산해경』의 세계 구조, 그것은 외견상 중국을 한가운데 두고 사방의 주변이 그것을 옹위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이를테면,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단혈산이라는 곳인데 산 위에서는 금과 옥이 많이 난다. 단수가 여기에서 나와 남쪽으로 발해에 흘러든다. 이곳의 어떤 새는 생김새가 닭 같은데 오색으로 무늬가 있고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엄청난 장벽이 최초로 허물어지기 시작했을 때의 풍경은 참으로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적대감을 극복하고 무역과 교류를 시작하는 데는 많은 긴장과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전쟁의 위험을 몇 배로 줄이고 평화의 정착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구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길을 뚫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장벽을 무너뜨리는 소통의 징표와 같은 교역로를 놓고 인류는 불행하게도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매우 모호하게 취급해 왔다. 이름마저도 정당하게 부르지 않는다. 예컨대 그냥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식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역사 재판에 올려질 만한 사안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처음 보급시킨 사람은 독일 베를린 대학 지리학 교수 리히트호펜(1833∼1905)이었다. 리히트호펜은 『중국』이라는 다섯 권 짜리 책과 지도 한 권을 펴내면서(1877∼1901) 중국과 유럽을 잇는 이 길을 ‘자이덴슈트라세’라고 표현했다. 중국의 비단이 멀리 로마에까지 도달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이를 영어로 옮기면 실크로드, 곧 비단길이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런 도로(?)가 있었을까? 인간이 지나다닐 수 없는 곳을 중국인이나 유럽인이 개척한 끝에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든 그런 인공 도로가 말이다. 우리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크로드가 로드(도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역사의 중대한 비밀 하나를 추적하게 만든다. 그곳은 도로가 없기 때문에 통행세를 받는 사람도 없고 또 그같은 권리 행사를 어느 나라가 해야 마땅한 지도 알 수 없다. 진정한 주인이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크로드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 지역은 유럽과 중국의 통로 구실을 한 도로라는 인상이 강하게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의 중앙아시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했던 것이지 유럽과 중국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중앙아시아는 동서 문화의 통로로서 동과 서의 문물을 중개하는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어디까지나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고유한 사회와 독자적인 문화, 주체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다. 모든 중요한 교역로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에 의해, 또는 그들의 참여 하에 개척되었다. 그들은 지리적 위치와 기동력, 운송용 동물의 소유, 먼 지역으로의 이동, 이주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심리적 태도를 기반으로 교역과 중개, 물건 운송, 운송에 필요한 동물을 팔거나 빌려주기, 대상(隊商)의 보호와 안내, 통행료 징수 등의 역할을 맡아왔다. 그것이 독특한 자연환경의 결과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는 대삼림 지대가 펼쳐진다. 시베리아의 삼림을 야쿠트어로 ‘타이가’라고 하는데, 이는 삼림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침엽수가 많다. 이 삼림 지대에는 수렵, 어로, 순록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다. 이 삼림 지대의 남쪽,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는 건조한 초원 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동으로는 몽골 고원으로부터 서쪽으로 중가리아 분지, 키르기스 초원, 그리고 폴란드·헝가리의 초원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대이다. 기원전 약 10세기부터 서남아시아 북부에는 청동제 재갈을 발명한 기마유목민이 출현해 이 초원 지대에도 기마유목민의 문화와 역사가 형성되었다.
초원 지대 남쪽으로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고, 그 사막 곳곳에는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도 오아시스가 늘어서 있고, 카라쿰·키질쿰 사막을 통과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아강 유역과, 이 두 강의 틈에 끼어 있는 지역을 서쪽으로 흐르는 자라프산 강가에도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다. 오아시스는 산지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 흐르면서 만들어진 강 유역과 강 하류, 또는 용수지를 중심으로 하는 곳에 생겨난다. 사람들은 그 물을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와 용수로를 파고, 지하수를 끌어들이는 지하 터널식 수로(카나트)를 만들었다.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은 보리·밀·면화·포도·뽕나무 등을 재배하고 목축도 했다. 그러나 적은 물 때문에 오아시스 농경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오아시스 사람들은 철과 금, 옥을 채취하고 직물·피혁 제품·도자기·금속 제품 등 수공업을 일으켰다. 오아시스와 오아시스 사이에서 사람들이 물자를 교환하면서 상업이 일어나고 대상(隊商) 활동이 시작됐다.
덕택에 오아시스는 상업 도시·숙박 도시·대상 기지로도 발달했다. 삼림과 초원과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교류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지중해 지역의 농경민과도 물자와 문화를 교류했다. 기마유목민은 때때로 농경지역을 지배했다. 또한 초원의 기마유목민과 오아시스 농경·상업민 사이에도 정복·지배 관계가 성립되었다. 지배를 당한 오아시스 사람들은 초원 사람들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통상 범위를 확대하고자 했기 때문에 상호간에는 공존공영의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삼림과 초원,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삼림의 길’, ‘초원의 길’, ‘오아시스의 길’로서 교역로가 열렸으며 동과 서의 여러 지역으로도 교통로가 연결되었다.
이 교통로들은 삼림 지역의 담비, 우랄·알타이 산맥의 금, 타림 분지의 옥, 초원의 말, 중국의 비단 등 대표적인 무역품 이름에 따라 ‘모피의 길’, ‘황금의 길’, ‘말의 길’ 그리고 ‘비단의 길’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길로 상품만 이동했던 것은 아니며 상인들만 왕래했던 것도 아니다. 정치가와 외교관과 군대가 오갔고, 종교인·사상가가 걸었으며, 기술자와 예술인들도 왕래했다.
이같은 길의 발견은 확실히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그 감동을 당시에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몽골의 구전가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머나먼 길 걸어서
끝없는 사막과 자갈길을 나아간다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혹 위에 무거운 짐 싣고
대단한 힘을 가진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먼 길을 걷는 그대들과 함께 나도 나아간다
나는 초원을 생각한다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그대들이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으리오
그대들이 있음은 나의 행복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우리는 걷는다. 타향이나 고향의 산천을,돌과 모래도 넘고 넘어서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아득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
여기서 물건을 팔고, 저기서 물건을 사고,우리들은 모두에게 나누어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의 진정한 벗 낙타들이여!
이 아름다운 시는 수세기에 걸쳐 불려지던 대상(隊商)의 노래였다. 문명의 역사에서 그들의 노래는 묵살되었지만 이것이 실크로드의 노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3. 초원의 서사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어쨌거나 우리의 주인공들은 늘 성 밖에서 돌격해오던 자들이었다. 가을이 되면 바람처럼 나타나 문명의 성곽에 상처를 입히고 오래오래 야만인의 악명을 떨치던 그들! 그들의 이름은 유목민이었다. 그 유목민의 삶에 대한 역사상의 발견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인류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목민에게 가해진 가혹한 평가 절하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칭기스칸이 출현한 이후부터 러시아인들의 역사적인 기억 속에 정정할 수 없게 각인된 ‘잔인한 약탈자’나 ‘무서운 정복자’ 같은 상(像)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잘못 각인된 이미지로 인해 그들은 다른 민족을 응징키 위해 신이 사용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여겨 졌다. 훈족의 왕 아틸라가 ‘신의 채찍’으로 묘사되었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유목민의 침입이 콜레라나 장티푸스 같은 재해의 하나로 기록된 일도 흔하다. 유목민들은 일관되게 악마의 현현(顯現)처럼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 아님은 물론이다. 유목민에 대한 적개심이 빚어낸 가장 대표적인 오해의 하나는 그들을 뭔가 알 수 없는 집단으로 표현하면서 생겨난 이미지 즉, 유목사회는 폐쇄적인 사회라고 단정해 버리는 거의 언어도단에 가까운 왜곡상이다. 유목생활은 그 빈곤함이나 기타 다른 부정적인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이동성을 근거로 한 열린 사회의 추구라는 매우 놀라운 장점을 갖고 있었다. ‘철의 장막’ 안에 숨어 있는 세상이 아니었던 만큼 누군가 그 내부를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또 언제든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특성은 정착민들에게 많은 경이감을 불러일으키고, 정착민들의 답답한 상상력에 섬광을 주었다. 우선 초원에 펼쳐지는 유목민들의 생애 자체가 한 편의 서사시처럼 아름다웠다. 이는 정착문명권의 현자들에게 끝없는 의문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유목민에 관한 신화는 정착사회의 현자들 사이에서 끈질기게 전수되었다. 철학자들은 여행가에게, 여행가는 다시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근대에 들어서게 되면 유목민들도 이제 전투 대상이 아닌 탐구의 대상, 인식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변화는 근대적 역사학과 인류학이 성립한 이후 서구인들의 뇌리 속에서 유목민의 습격이 가져다 준 막연한 공포심을 걷어내면서 그 연구도 동양에서보다 훨씬 덜 경험적인 것이 되게 만들었다. 인류 전체의 발전사 속에서 유목민이 맡은 역할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생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목민에게 그들 나름의 고유한 세계가 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 이상으로 대지의 자식들이 없고, 그들 이상으로 자연환경의 산물은 없었다. 그 점은 사마천에 의해서 ‘문자가 없다’고 멸시되었던 유목민들의 숱한 시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리아스타이 물살이 빠른 강
나는 헤엄쳐 건널 수가 없다네
내 마음에 드는 저 젊은이를
유혹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네
그들의 삶에서 보여지는 것들은 일상생활이든 정신적인 고뇌이든 인생에 있어서의 다양한 현상은 언제나 자연현상과 일치되어 있었다. 그 자연현상이 인간들을 서로 떨어져 존재하게 만드는 생태계적 명령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그리움이 그들에게서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숙명 속에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운 슬픔’이 노래되는 것이다.
흩어진 돌에도, 나무에도
백조는 머물지 않네 머물지 않네
멀리 목지(牧地)에서 온 젊은이와
함께 하고 싶지만
한낱 도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이런 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을 것이다.
유목민들은 분명히 그들에 의해 불운하게 정복을 당한 사람들의 눈에 비쳤던 것처럼 그 자체가 공격적이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구전가요에서 엿보이는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보면 그들은 정착사회가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틀림없다.
보름달은
밤하늘의 밝은 등불
15세의 소녀는
부모의 환한 등불
설령 달이 하늘에서 스러져도
온 우주를 비추는 달은 등불
설령 아내가 서른이 넘어도
가족들에게 그녀는 희망의 등불
달은 사라져 없어지는 일도 있지만
온 우주를 비추는 밤의 등불
비록 어머니가 늙어 노파가 되어도
자녀들에게는 따스한 등불
유목민사회에서 딸이자 아내요 어머니가 되는 여성은 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서 등불이었음을 이 시는 노래하고 있다. 여성이 가정에서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권리를 당시의 정착사회들이 이만큼 배려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유목민에 대한 이미지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갖게 된다. 그들의 문화적 역량은 미개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달랐을 뿐이다. 그 점에 대해 구소련 학자 똘리베꼬프가 그리고 있는 카자흐 유목문화에 대한 묘사는 유려하고 감동적이다.
일자무식의 카자흐 유목민들은 다른 곳의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목자(牧者)이며 동시에 전사(戰士)이고, 웅변가이자 역사가요, 시인이자 가수였다. 세대를 걸쳐 쌓여온 민족의 모든 지혜는 구전(口傳)의 형태로만 존재하였다.
똘리베꼬프는 이같은 현상이 15∼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몽골 국민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유목민 사회에 엄연히 관통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언어를 선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문자를 선호하지 않았으며, 인문주의적 소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소양을 전수하는 방식이 달랐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매우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 정착문명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았던 것을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등지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자식을 꾸짖을 때는 언제나 농경민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상기시킨다.
네 놈은 네 똥이 있는 데서 계속 뒹굴며 살아라!
유목민의 눈에 농민이란 자기의 똥이 뒹굴고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으며 또 그것은 당연히 멸시할 만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종류의 족속들이 어울려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유목민이 더 선호되었고 사회적 우위를 점했다. 투르크멘 같은 지역에서는 농경민은 유목민을 동경했기 때문에 농경으로 가축을 늘리면 유목민이 되었고, 유목민이 악천후나 전염병 등으로 가축을 잃으면 가난한 농경민이 되었다.
유목민들이 남긴 몇 안되는 사서(史書)에서도 우리는 초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유목민들이 갖는 무한한 자부심과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 예컨대 『황금사(黃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몽골의 왕자들이 둘러앉아서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 혹은 가장 행복한 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치(칭기스칸의 큰아들)는 “내게 가장 큰 기쁨은 최상의 목지를 찾아내 가축을 치는 것, 머물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 황장(皇帳)을 치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커다란 잔치를 벌이는 것, 이것이 최상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톨로이(칭기스칸의 막내아들)는 “잘 조련된 준마를 타는 것, 뛰어난 매를 데리고 들판의 연못에서 구구거리는 새들을 사냥하는 것, 산과 계곡으로 가서 점이 박힌 새를 사냥하는 것,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정착문명이 갖는 악의성과 머물러 사는 해악(?)을 시종 경계해 왔다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칭기스칸 시절 북(北)중국을 점령했을 때도 정착세계의 풍요로움을 즐기기는커녕 황하 이북의 평원을 완전히 초지로 바꾸어 가축을 키우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어쩌면 이것이 『유목민 이야기』의 총체적 주제가 될지 모른다.
유목민들이 생명처럼 여겼던 것, 즉 성을 쌓기보다 길을 닦아야 된다는 감격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을까?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의 생존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왜곡에 속한다. 그들은 분명히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울란바토르 근교에 가면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이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유목민이 겪었던 눈물겨운 사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군의 유훈(遺訓)을 깊이 깊이 새기고 있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 사회만이 영원하리라는 이 말은 성을 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과는 크게 다른 이상(理想)을 가진 자들이 추구한 사회적 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럽이 겨우 중세의 아침을 맞고 있던 시기(기원 7,8세기)에 벌써 열린 세상을 꿈꾸라고 외쳤던, 이 전율할 듯이 선구적이고 예언자적인 집단이 일구어 놓은 문명의 능력과 품위를 인류는 오랫동안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성을 파괴하고 길을 놓으려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매우 중요한 단서를 러시아의 저술가 미하일 일리인이 『인간의 역사』에서 암시한다.
숲과 들은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떠한 짐승도, 어떠한 새도 이 벽을 빠져나갈 수 없는 듯이 보인다. 산새, 다람쥐 같은 숲의 주민들은 들에서는 볼 수 없다. 들기러기, 야생 토끼 같은 들의 주민들은 숲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렇듯 어느 숲, 어느 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일리인이 ‘칸막이’라 말한 어떤 경계에 의하여 세계는 엄격하게 분할되어 있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작은 세계’ 안에서만 자유를 구가한다. 뭍의 것들은 뭍에서만 살고, 어패류는 물에서만 산다. 한 발 더 나아가면 그것들은 더욱 좁은 영토로 분할되어 있어서 예컨대 제비는 겨울 하늘을 날지 못하고 민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계를 뛰어넘고, 영토의 칸막이를 허물어뜨려 온 존재가 있다. 일리인은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그 칸막이는 자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내부에도 있었다. 종족과 종족,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 계급과 계급간에 거의 단절된 형태로 그 칸막이가 엄존해 왔다. 중세에 이르면 그 칸막이 안에서만 자유를 구가한 민족도 있었고, 그 칸막이를 무너뜨리며 넘나드는 자유를 갈구한 민족도 있었다. 일리인이 바로 그런 칸막이를 뛰어넘는 데서 인간의 위대성을 보았다면, 유목민들의 이동마인드 역시 그 같은 위대성을 보여준 예라고 볼 수 있다. 지상에 구축된 상이한 사회와 각종의 문화를 연결하는 역할은 유목민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목민이란 무엇인가?
4. 뮬란의 적
유목민을 목격하기 위해서 너무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울란바토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다면 비디오 대여점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코너에 어김없이 꽂혀 있는 「뮬란」을 뽑으면 된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중국(위나라) 국경의 북쪽. 훈족이 쳐들어오자 온 나라에 징집령이 내려진다. ‘파’씨 가문의 외동딸 뮬란은 늙은 아버지의 입대를 안타깝게 여겨 자신이 남장을 하고 훈련소로 떠난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이 소동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파씨 가문의 조상들이 유령으로 환생해 대책회의를 열고 가문의 수호신인 무슈를 보내 그녀를 돕기로 한다. 그리하여 무슈와 귀똘이(귀뚜라미)의 도움으로 뮬란은 병영에서 여자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긴 채 훈련에 임하고, 뜻밖의 전공을 세워 훈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여자임이 밝혀져 위기에 빠진다. 뮬란이 적을 물리치고 중대장 샹을 구한 공이 인정되지 않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뮬란은 목숨을 건지지만 감히 여자가 국가를 속이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참여한 잘못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 이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샹과 병사들이 황궁에서 성대한 환대를 받을 때 훈족의 적장이 다시 쳐들어온다. 그것을 눈치챈 뮬란이 무슈, 귀똘이, 병사들과 의기투합하여 또다시 황제와 나라를 구한다. 그리하여 금의환향하는 뮬란, 소녀 시절부터 늘 정숙하지 못해서 혼처도 없이 부모님의 걱정이나 끼치던 그녀가 마침내 영웅적인 중대장 샹과 결혼해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이 애니메이션은 개봉되자 곧바로 지구촌의 이목을 끌었다. 이성과 과학을 앞세운 서양의 근대가 반성되면서 동양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한창 드높아 가던 무렵이었다. 세계화 시대의 신소재라고 할까? 뮬란은 미국 영상 기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동양의 이야기에 무기력하던 할리우드의 실망스런 전례를 뒤엎고 미국이 동양 이야기로 지구인의 정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은 오늘의 이야기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디즈니풍답지 않은 중간색의 배경 처리, 부드러운 담채기법, ‘미녀와 야수’에서 시작된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력 등으로 실사 영화 못지 않은 웅장한 서사시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국에서도 여러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설원의 전투와 황궁 장면 등의 볼거리, 매끄럽고 따스한 스토리 전개, 개성있는 캐릭터 묘사,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 세계(뮬란의 아리아를 ‘미스 사이공’의 주역 레아 살롱가가 부르고 부대장 샹의 노래를 도니 오스몬드가 불렀다) 등은 디즈니 만화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여러 나라의 어린이들이 주인공 뮬란의 행적에서 많은 재미를 느끼고 배우며 또 상상했을 것이 뻔하다. 전란을 맞아 공동체에 헌신하는 뮬란의 미덕을 통해 삶의 시련과,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인생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여기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여성의 지위가 너무 낮은 점, 남성 위주의 정착사회가 가문의 명예와 체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점 따위를 치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지 모른다. 그것은 당시 중국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뮬란의 역사에 동원된 상대측의 논리를 모조리 일축해 버린다. 아니, 적들의 용모를 돌이킬 수 없이 비틀어 버린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뮬란의 적들에 대해 이 애니메이션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들이 막무가내의 저돌성을 지닌 불멸의 악마라는 점과, 이름이 훈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저주에 찬 존재들처럼 뮬란의 적들은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감행한다. 충돌의 원인은 한편은 선(善)인데 한편은 악(惡)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뮬란측의 사람들에게 귀엽고 훈훈한 인간미를 부여하고 적들에 대해서는 색상부터 다르게 칠한다. 동작이 똑같은 유령들처럼 온통 죽음의 빛으로 채색하고 있다. 이 화면에서 소름 끼치는 적들이 아무리 죽여도 소멸되지 않고 몰려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관객들은 분노에 떨 수밖에 없다.
훈족에 대한 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편견이야말로 정착문명의 역사가 지난 천년 동안 저질러온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뮬란이 보여준 바 그대로 역사 속의 유목민은 우리에게 지극히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목격된다. 그들과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과연 그랬던가? 다민족 혼혈 사회라는 미국은 다른 영화에서 지구인과 외계인의 갈등을 그릴 때도 상대방을 그렇게까지 악마로 만들었던가? 유목민은 인류사를 이끌어온 한 주체로서 우리에게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점은 우리에게 정착적 사고의 편협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유목민은 결코 지구를 파괴하러 온 외계인이 아니다. 뮬란의 적들은 도대체 왜 어디에서 무엇을 하러 왔다가 그렇게 혼이 나야만 했다는 말인가?이 도깨비 같은 유목민의 돌발적 출현에 대해 그들의 알리바이를 추적하여 재구성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00년경, 비옥한 계곡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중앙아시아 북쪽의 야만적인 종족으로서 유목민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이 침입자를 ‘흉노’라고 불렀다. ‘훈(Hun)’이란 명칭은 이 흉노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의 한족이 흉노의 정체성을 일찍부터 유목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만리장성으로 알 수 있다. 만리장성은 농경지대와 유목지대의 생태분계선이었다. 당연히 한족은 이 생태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흉노와 대립했고, 그 때문에 또 흉노의 움직임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 몽골의 고원 지대에서 살고 있었다. 이후 남쪽과 서쪽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넓은 지역으로 옮겨간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성곽도 유목민의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이 정복되어 광대한 중원에 흉노의 첫 제국이 건설된다. 하지만 유목민은 정착하는 순간 몰락이 시작된다. 이때도 그랬다. 흉노는 수백 년 동안 불안한 정세 속에서 많은 분쟁과 전투가 잇따른 끝에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서기 350년에 극악한 인종 박해를 받고, 벌써 몇 세대를 그 땅에 살았던 흉노는 사라지고 만다. 이때 중원의 정착민들에 의해 그들 중 20만 명이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살해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한때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흉노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이제 새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남은 흉노는 우선 북쪽으로 도망친다. 그들의 이동을 가속화시킨 것은 끔찍한 기후 변화였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만나면 초원은 황폐해진다. 눈이 끊임없이 내리고, 악천후의 적응력이 뛰어난 들소조차도 선 자리에서 동사한다. 유목민은 생사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373년, 유목민들은 북쪽 피난민이 늘어 초원에서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인구가 최대로 증가한 상태에서 몹시 추운 겨울을 맞고 처참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원 지대의 얼음이 녹을 겨를도 없을 만큼 여름은 짧았고, 양식은 거의 바닥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늦은 봄의 어려운 시기에 어린 가축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여기까지이다. 그렇다면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추측은 어렵지 않다.
흉노는 식량 부족과 인구 과잉으로 대이동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쪽은 튼튼한 방어 수단이 된 만리장성과 중국 때문에 내려갈 수 없어서 다른 길, 즉 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알타이 지역을 지나 아랄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흑해를 지나 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 분지까지 쭉 뻗어 있는 초원 지대를 따라간다.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떠난 흉노를 훈족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유목민이 그 훈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럽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열리는 것이다.
5. 신의 채찍
뮬란의 시대에 유목민의 등장은 잠든 대지를 일깨우는 하나의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오던 정착민에게 가해진 참으로 놀라운 외부 충격이었다. 불우하게 뮬란에게 패해 서양 쪽으로 기수를 돌린 훈족! 그들이 유럽에 출현했을 때 유럽인들은 경악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언젠가 독일 ZDF TV의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그 점을 다루기 위해 유목민의 정체와 이동 경로를 추적하여 Q채널로 방영한 적이 있다.
유럽에 폭풍같이 밀려들던 훈족은 서양 역사상 큰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훈족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도대체 이들은 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미지의 땅으로 진출했을까? 이 원정의 배후에는 어떤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까?
아시아와 유럽의 최강국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려 버렸던 훈족의 실체에 대하여 서양의 역사가들은 많이 알지 못한다.
유목민의 정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유럽인들의 종교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로부터 골란 지방까지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곧 세계의 멸망”이라는 생각과 로마의 분열, 수많은 황제들의 쿠데타 등 정세 불안으로 모두가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던 때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곡과 마곡(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종족)을 각각 고트족과 마사게타이족으로 여겼으며, 당시에는 마사게타이족이 사라진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훈족이 바로 그들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심리적 불안을 배경으로 묵시록의 심판자인 말 탄 기사의 이미지는 국경을 넘어 침략하는 유목민들에게 투영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렇게 훈족을 악마가 보낸 군대라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훈족의 유래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유목민의 이미지는 그만큼 유황 냄새와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가졌던 유목민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감은 「니벨룽겐의 노래」라는 서사시 안에 아로새겨져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아틸라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갈 수 없다.
아틸라는 우리의 환상을 자극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세계 역사상 손꼽히는 지배자 중 한 명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잔인함과 정열과 힘에 매혹된다. 그가 일생 동안 약탈로 모았거나, 교묘한 협정을 체결해 확보했던 무한한 재화, 로마인들에게 대놓고 맞섰던 교만,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미인을 데려다 놓은 하렘(harem), 술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 전쟁에서의 인내, 외교술, 그리고 젊은 부인 일디코의 팔에 안겨 맞은 수수께끼 같은 죽음 등등은 이 유목민 왕을 신비로운 인물로 만들었다.
아틸라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을 촉발시킨 유목민의 아들로, 훈족은 그를 통해 비로소 한낱 초원의 야만인 집단에서 로마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서기 434년, 훈족의 부족 연맹 지도자로 선출되면서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여, 451년 북프랑스를 침탈했다가 실패한 후 2년 만에 죽기까지 아틸라는 탁월한 전술과 무자비한 응징으로 온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극적인 행동, 검소한 생활, 뛰어난 정치적 지략은 유목민을 단순무지한 야만인으로만 생각했던 유럽인의 편견을 말끔히 불식시켰다. 그러나 그의 제국이 자식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분열되고 흔적도 없이 붕괴되자 아틸라의 적들은 그를 외계인 괴물로 몰고 말았다.
로마의 동전에는 훈족이 주조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악마 인간에 머리는 뱀인, 그리고 한때 제우스신에게 대적했던 이상한 존재로 나타난다. ‘로마 황제의 발 밑에 깔린 뱀’이 조각된 그 금화 속의 용모를 역사가들은 유럽인들이 그린 아틸라의 초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아틸라의 성격을 당시 로마 제국의 장수들보다 야만적이고 잔인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에 관해 서기 449년,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에 머무른 적이 있는 그리스인 프리스코스(Priscus)의 관찰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프리스코스에 의하면 훈족은 자신들의 왕 아틸라를 ‘하늘의 아들’로 여겼다. 하지만 아틸라와 일반 훈족 사이에는 유럽의 왕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격차의 신분 차이가 없었다. 프리스코스는 말한다.
아틸라는 왕관을 쓰지도 않았고, 옷은 수수했다. 그의 칼, 신발, 마구(馬具)에도 금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나무잔으로 술을 마셨고, 나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아틸라는 훈족 내부의 다툼을 듣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같은 관찰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아틸라가 그 유목민 왕의 본명인 것도 아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종족적으로 몽골인보다는 터키인을 닮은 이 특이한 민족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 이리저리 추측할 뿐 딱히 확정짓지 못한다. 명백히 알려진 것은 꽤 많은 고유명사뿐이다. 이런 단어도 이민족 언어인 로마어나 고트어, 혹은 그리스어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아틸라’라는 이름은 세월이 흐른 후에 붙여졌을 것이다. 아틸라 자신은 고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틸라’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인들은 훈족의 왕이 실제로 어떻게 불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관한 모든 이름은 아틸라로 통일되어 있고, 지금 인용하는 프리스코스의 기록은 그에 관한 것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와 그 친척들을 매우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인 까닭이다.
아틸라는 수염이 적었다. 아틸라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작았다. 코는 아주 납작했다.
그는 아틸라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아틸라 궁정의 생활 방식과 훈족의 관습에 대해서도 관찰했다. 그러면서 훈족들에게서 매우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손님을 집주인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배려하는 훈족의 관습도 야만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자기들을 찾아온 손님에게 최대한의 우의와 친절을 베풀려 하는 유목민의 심성이 먼저 느껴진다. 아틸라는 그런 문화권 속에서 유목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유럽인들을 호령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목민의 실체를 만나는 것이 실제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칭기스칸에 앞선 아틸라 같은 인물들의 출현으로 인해 유목민의 용모는 정착민에 의해 마음껏 편집되고 각색되었다. 「뮬란」만 해도 오히려 좋아진 경우에 속한다. 그 이전에는 정확히 말하면 드라큐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서운 도적떼 이야기가 어린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처럼 유목민 이야기가 서양인들의 울음을 그치게 했던 데서 「드라큐라」가 영화화되었다. 그러니까 「뮬란」 이전에는 영화 「드라큐라」에 유목민이 출현했던 것인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곡절이 있었다.
6. 유럽사에 등장하다
이제 무대는 유럽이 된다.
당시 훈족의 출현이 얼마나 당혹스런 것이었는지를 다루면서 독일 ZDF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유럽인들이 시종 공포를 떨치지 못했다고 전한다.
서기 375년, 유럽인들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리는 일을 경험했다. 광활한 아시아로부터 온 야만적인 기마집단이 동쪽 국경을 유린하자, 살인과 고문 그리고 불탄 마을에 관한 충격적 소식이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로마 세계권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훈족이 온다! 세상의 종말인가? 성서에 예언된 지구의 종말이 온 것인가?
언젠가 유럽 북쪽 리메스 건너편의 야만인들이 전쟁을 걸어와 로마를 불안에 빠트린 적이 있긴 했지만 이처럼 파죽지세는 아니었다. 약탈이나 하는 아시아의 기마유목민이 어떻게 해서 세계 제국인 로마를 유린하고, 군사적으로 초강대국인 찬란한 고대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혹독했다.
유럽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로마의 연대사가들은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라 해도 훈족만큼 자기의 말과 일체가 되어 자라지는 못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훈족의 말들은 강인하고,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까다롭지도 않다. 그 말들은 혹독한 겨울에 눈 속에서도 먹이를 직접 찾는다. 훈족 기병대의 가장 큰 장점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인과는 반대로 훈족 기병대는 과외 비용 없이 일년 내내 출동할 수 있었고, 예비 말도 충분했다. 훈족의 전사 한 명이 말 일곱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훈족 한 사람이 말 여러 필을 동시에 부리는 것을 보면서 아연 숨이 차서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훈족에게는 로마인이 상상도 못했던 신(新)기술이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을 압도해 버린 아시아 유목민의 신기술은 네 가지였다.
하나, 나무 안장
유럽인들의 눈에 말과 기수가 한 몸으로 보이는 것은 안장 때문이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인의 안장처럼 말의 몸통에 가죽끈으로 잡아매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훈족의 안장에는 나무 버팀목이 있었다. 앞뒤로 높이 올려진 우뚝한 기둥과 안장머리는 말이 움직일 때마다 기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에 반해 로마의 둔중한 기병들은 전투 도중 균형을 잃고 낙마해 때때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공할 아시아 유목민들은 전혀 달랐다. 그것을 암니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회오리바람처럼 높은 산에서 휘달려 내려와, 그들이 누구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둘, 등자
훈족은 아시아에서 올 때 안장 외에도 새로운 전쟁 기술을 풍부하게 가지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유럽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등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는,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다리를 고정시키는 발판(등자)을 이용하여 달리면서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셋, 새로운 활
훈족이 보여준 또 하나의 무기는 특이하게 제작된 활이었다. 탄력 있는 나무로 만들어 진 훈족의 활은 당길 수 있는 중간 부분과 활의 현에 놓인 화살의 끝 사이 폭이 꽤 짧았다. 이 활은 아래쪽보다 위쪽이 더 많이 구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기병이 자유자재로 손을 놀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때문에 이 활은 ‘복합곡궁’ 혹은 ‘불균형의 반사궁’이라 불렸다.
넷, 삼각 철 화살
훈족은 아시아에서 낯선 화살도 들여왔다. 손잡이에 특별한 구멍이 뚫려 있는 훈족의 화살은 공중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 병사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화살촉은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철이었고 화살의 길이는 대략 60∼80센티미터였는데, 그것은 저승사자의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 꽂힌다. 화살의 파괴력은 치명적이었다. 그것이 무서운 소리를 내고 나면 곧 가죽으로 만든 로마의 갑옷을 종이조각처럼 뚫고 큰 상처를 입혔다. 훈족의 활은 60미터 떨어진 거리의 목표물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훌륭했다. 덕택에 훈족의 전사들은 칼, 창으로 싸우는 전통적인 병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공격할 수 있었다. 훈족은 적과 직접적인 접촉없이 공격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훈족의 이러한 군사적인 우월성을 경험하고 나자 서양 사람들은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서양은 자신들과 다른 전투 방식을 쓰는 훈족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길 때까지 적과 눈을 맞대고 싸우는 고대의 전술은 이제 소용 없어졌다. 유럽인들은 이같은 전투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인명 피해가 갈수록 늘자 로마는 방어 수단을 강구했다. 하는 수 없이 군사들에게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장비는 행군을 할 때나 전장에서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군인들은 자신의 몸을 예전보다 더 잘 보호할 수는 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자유자재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랬을 때 전투가 어떤 양상을 보였을 지는 이제 상상에 맡겨도 될 것이다.
훈족의 전술은 완벽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500명에서 1000명으로 이루어진 강한 소부대를 만들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여러 쪽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했다. 적이 달려오면 훈족은 곧 도망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했다. 그러면 그때까지 꼭꼭 숨어 있던 화살 부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매복 장소로부터 도망친 적병은 불과 몇 명이었지만, 도망치는 척했던 훈족의 기병들은 다시 머리를 돌려 곧바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초토화시켰다.
서양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생업은 전쟁이었고 그들의 일자리는 말의 등이었다.
이 놀라운 사태를 경험한 유럽인들은 작은 소규모 전투를 하더라도 훈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소위 ‘용병’이라는 희한한 군사 영업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제 훈족은 거액의 몸값과 스카우트비를 받으면서 유럽의 곳곳으로 팔려 다니기까지 한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하지만 훈족이 전쟁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말을 팔아서도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적국의 기병대가 훈족의 말로 무장하는 경우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전쟁 중에 말을 파는 행위는 위법이었지만 훈족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유럽의 정착민들은 훈족이 자기네가 정복한 지역을 계속 유지하려는 집착을 보이지 않는 까닭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훈족은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부를 밭에서 쫓아내지 않았고, 도시의 건물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도시 사람들을 몰아내지도 않았으며, 특권을 누리기 위해 정복 지역의 정통 정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훔치며 약탈하고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유럽에 알려진 그 어느 적보다 더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성직자들은, 하늘이 요한계시록의 기사를 보냈는데 훈족이 단죄를 집행하는 살인마들이고 드디어 신의 분노가 내렸다며 넋을 잃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세계는 이미 멸망하고 있고, 쇠락하고 있다.
이 모든 사례들은 농경정착민과 유목이동민의 마인드가 얼마나 크게 다른 것인지를 실감나게 한다. 그 점은 개미와 거미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뮬란이나 유럽측이 개미와 같다면 유목민은 거미와 같았다. 개미와 거미는 같은 절지동물로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개미는 곤충강(綱)에 속하고 거미는 거미강(綱)에 속하는 전혀 다른 동물들이다.
7. 개미와 거미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가 말해 주듯이 개미는 근면성, 협동성, 조직성을 가진 존재로 근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이 모든 역사를 통틀어 지향했던 서구적 가치관의 정점을 나타내 왔다. 우리가 그간 개미의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간직해 온 이유는 그것이 산업사회의 가치관에 걸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개미 사회의 가치관은 걷잡을 수 없이 회의되고 위협받고 있다.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 일개미, 군병개미 등 매우 질서 있게 구조물을 만들어 생활하는데, 이 개미식 조직화의 능률을 실험을 통해 관찰하면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 발견된다고 한다. 예컨대, 개미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 놓고 특수 광선 효과로 비디오 추적을 하면 개미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거짓임이 판명되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왔다갔다 일하는 것 같은 개미들 중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15 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괜히 휩쓸려 다니기만 하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만 따로 모아도 그 중의 15 퍼센트만 일하고 나머지는 놀며, 놀기만 하는 개미들도 함께 놔두면 15 퍼센트는 다시 일한다는 점이다. 조직의 생리상 일하는 자와 조직에 얹혀 사는 자가 있기 마련인 근대 관료 조직의 특성이 이것이다.
그러나 거미는 그 같은 개미의 마인드와는 크게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땅에 구멍을 파고 사는 개미와 달리 허공에다 집을 짓고 사는 거미는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것이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쳐 놓고 벌레가 와서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날쌔게 먹이를 채간다. 이 둘의 생존 방식은 마치 관료 사회의 마인드와 정보사회의 마인드만큼이나 다른 가치관을 낳게 된다.
당시 유럽인과 훈족의 차이, 즉 개미와 거미의 차이는 오늘날의 정착마인드를 가진 사람과 이동마인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미의 마인드와 동작들은 개미로서는 납득도 예측도 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개미 집단 안에는 거미들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난무했다. 유럽의 국경에 훈족이 출현한 후 유행된 수없이 많은 풍문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들 투성이이다. 훈족은 적의 두개골을 파내어 물 사발로 이용하고, 자기 부족의 노인을 죽이며, 전쟁 전에 끓인 태아의 즙에 화살을 담근다고도 하고, 어린아이를 먹거나 여자의 피를 마신다고도 했다. 또한 그들은 밤낮으로 말을 타다 안장 위에서 잠을 자며, 다리가 기형이어서 걸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거의 희극에 가까운 그 같은 오해의 일부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역시 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400년 말경 암미아누스는 훈족이 불도, 맛있는 음식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단련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야생 식물의 뿌리와 동물의 날고기를 먹고, 고기를 말 등과 허벅지 사이에 놓아 약간은 따뜻하게 만들어서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해석의 황당함만을 증명할 뿐이다. 유목민은 식물의 뿌리를 먹지 않는다. 또한 고기를 사람과 말의 체온으로 데워 먹었다는 관찰은, 훈족이 안장 때문에 생긴 자국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상처난 말 등에 생고기를 붙이고 안장을 얹었다는 것과, 그들이 물기없이 바짝 마른 고기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먹었다는 사실을 오해한 데서 생긴 것이었다.
이같은 유언비어들은 지금도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상당 부분은 훈족이 전투의 일환으로 일부러 퍼뜨린 작전용 낭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훈족은 심리전의 대가였다. 그들은 적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칼로 자신의 뺨에 상처를 냈다고 전해진다. 어깨와 팔의 문신, 북슬북슬한 모피, 온갖 동물의 뼈와 뿔 장식, 화살 통에 꽂힌 피로 붉게 물든 화살, 색색 천으로 질끈 동여맨 십자형 혁대 등으로 치장하고, 울긋불긋 물들인 변발이거나 한쪽을 빡빡 밀어낸 머리를 뒤흔들면서 원초적인 소리를 지르며 적진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폭풍처럼 밀려드는 훈족 앞에서 로마는 집단 히스테리에 휩싸인다.
유럽에서 훈족의 영향력이 커져 훈족의 미적 관념을 수용할 정도까지 되었던 것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 점을 역사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전한다.
고고학자들은 몽골에서부터 서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훈족 시대의 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사실을 알아냈다. 죽은 사람의 머리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나 있었고, 머리통은 길게 늘어났다. 머리 형태가 변형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뾰족 머리가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결과라고 한다. 뼈가 아직 부드럽고, 형태를 갖추지 않았을 영아의 머리 정수리 부분을 끈이나 혁띠로 묶으면 머리통이 길어진다.
훈족이 점령한 지역의 귀족 제후 가문도 자식들의 머리를 이런 식으로 변형시켰다. 머리 변형은 하층 계급과 신분을 구분하는 방법이 되었다.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미적 이상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훈족의 유행에 동화한 이 증거 자료들은 훈족이 점령지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전해준다.
오늘날 학자들은 훈족의 역사적인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로마인들의 눈에 훈족은 무정부적이고 야만적인 용병 집단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발달한 문화가 있었다. 만일 훈족이 가축이나 기르는 기마병에 불과했다면 앞서 말한 ‘기적의 무기’는 허구가 된다.
훈족의 활, 복합곡궁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연구되고 여러 장인에 의해서 복원이 시도되었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훈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활과 똑같이 활대를 중심부터 가장자리로 갈수록 가늘게 다듬고, 활시위를 최대한 당겼을 때 활대가 골고루 휘어지도록 나무 결이나 흠을 정밀하게 깎아봤지만 훈족이 쓰던 활과 똑같은 성능을 가진 활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무와 각재를 모양에 맞게 다듬고, 활 등에 댈 힘줄의 모양을 만들고, 활 각 부분의 약한 곳과 강한 곳의 최적 비율을 맞추는 일 등은 오랜 기간의 숙련이 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백인 중에서 복합곡궁을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셋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황인종이 만드는 것을 백인종이 못만들라는 법이 있는가?” 라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대 동양인들이 만든 활과 겨룰 만한 것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 엘머, R.P.
유럽인들의 이같은 진술은 4,5세기가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도 계속된다. 훈족에게는 피혁공, 금 세공장이, 목수, 목판 조각가, 가구장이, 마구장이, 땜장이, 도공, 수레 목수, 병기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이 있었다. 수공업에 대한 그들의 능력과 지식이 수준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증명된다. 고도의 문명 국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오리엔트 예술품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분묘 출토품은 그들의 기술이 이미 실용적인 도구들을 넘어 과시벽과 장식 취미를 발휘하는 수준에 가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