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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
출 21: 22
한국에서 15년간 생활한 어느 일본인은 한국에서 사는 동안 가장 실망한 일 중의 하나가 간판이나 팻말에 쓰여진 말들이 너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라는 팻말 바로 그 밑에는 어김없이 쓰레기가 있고 대중 목욕탕의 '물을 아껴 씁시다' 라는 문구 바로 밑에는 한참동안 뜨거운 물을 마냥 틀어놓고 누워있는 아줌마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라는 글씨가 간판과 함께 붙어 있는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는 손님이 아무리 불러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는 교통 질서를 잘 지킵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버스를 탈 때마다 그 버스는 법규를 위반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차라리 그런 글이 없었더라면 하는 심정으로 많이 괴로워했는데 가끔 본국에 갈 때면 그 괴로움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쓰레기 버리는 날은 화요일입니다' 라고 쓰여있으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것을 지키고 '개똥 사양' 이라는 팻말이 있는 공원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지나가는 아저씨 손에는 반드시 개똥을 담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그렇게 잘 지키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 그는 일본의 무서운 단결력이 아니라 고토다마(言靈)의 사상이 일본 민족 속에 체질적으로 베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고토다마(言靈) 즉 말속에 영의 힘이 있다는 말인데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으로 말이 씨앗이 된다는 우리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어떤 말에 대해서는 지나치지 말고 그 말을 중히 여기라는 교훈적인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쓰여진 말이나 이미 우리들에게 정해진 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나라와 사회 자체가 말을 말로 여기지 않는다면 사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민족을 돌아볼 때 우리의 현실은 그 일본인이 말한 정도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해도 정치권에서는 말을 말로 여기지 않을 때가 있고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이 서원하듯이 한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명심할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면서 즐거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신의 축복은 물론이고 그 축복이 이웃과 나라와 민족에게 이어져서 그것이 곧 그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 노예로 있을 동안에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셨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내면 당신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기대하시면서 온갖 기적과 이사를 통해서 에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달리 하나님 마음을 너무 알아주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거나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법을 정하신 후 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아니하면 거기에 따른 마땅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아버지와 자식간의 신뢰가 무너져서 그 관계가 계약으로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이런 계약적인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지 석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해서 먼저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십계명을 주셨고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모세에게 나머지 율법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내용 중 일부로 아주 구체적입니다. 먼저 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만일 종을 사면 육년 동안만 섬기게 하고 7년째에는 그가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자유하게 할 것이며 그 처와 자식에 대한 일 등 남종과 여종에 관한 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돈으로 여자를 샀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씀하셨는데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살인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특히 사람을 후린 자 즉 유괴한 사람과 부모를 저주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서로 싸우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셨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종을 다치게 한 경우와 짐승이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대해서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1-32절).
그런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노예에 대한 법률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노예제도를 인정하시는 것처럼 여겨지고 돈으로 여자를 주고 사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내용이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꼭 기억하실 것은 인류역사상 노예문제나 종의 문제 그리고 여성의 지위 등은 기독교가 해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인간의 상식과 양식을 통해서 잘못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로 잡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때가 되면 분명히 바로 잡으시지만 그러나 그 전에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도나 방법들이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그 자체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이 사회에는 마치 무슨 제도나 방법이 우리에게 곧바로 의나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정치 계절이므로 정치 이야기를 한 번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대통령제나 내각제를 주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제도를 실행하면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될 것처럼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오히려 몇몇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요즘 시민단체들이 하는 낙천 낙선 운동도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낙천 낙선 운동이 적어도 2000년 총선의 결과로 남긴 것은 보수 진보의 대립을 양극화하였고 정치 원로들이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자기 입지를 높이는데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운동에 기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힘쓰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일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이루는 해결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과 많은 사람들에게 핑계거리만 제공할 뿐이었습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방어기제 즉 탓으로 돌릴 거리만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방법론이나 제도론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는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면 돈으로 노예로 산 자를 칠 년째 자유케 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은 돈이 없어서 노예로 팔린 자에 대한 긍휼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주고 샀다고 할지라도 불쌍히 여길 줄 알라는 말씀으로 이 마음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그러한 제도가 있기 때문에 돈으로 여자를 샀지만 어찌 그 여자에 대해서 돈을 주고 산 대가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냥 취했거나 어떤 대가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고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의 문제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돈으로 노예를 사고 파는 그들의 부모 그리고 그 선조들 또한 돈으로 여기저기에 팔려 다닌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므로 그들을 마음대로 유린할 것이 아니라 한 형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제 36년 그리고 6.25전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조상들은 종과 같이 여기저기 끌려 다니던 존재였는데 어떻게 오늘 이렇게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바로 몇 달 전까지의 이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 특별히 잘 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은혜로 그냥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나라 이 민족 그리고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고 여러분들은 그저 얻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전의 모습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마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종을 허락하셨고 이혼 증서를 주면 이혼을 허락하셨으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는가? 하고 말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는 함께 살다가 내쫓으면서 돈을 주었으니 상관없다고 말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쳤으니 당연히 손해를 배상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손해를 보셨습니까? 예수는 얻은 것 없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득과 손실을 따지고 있는가?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혼 증서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당시의 여자들은 남편이 공궤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생활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내를 쫓아내는 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내를 쫓아낸 후 다시 재혼하려면 꼭 있어야 할 이혼증서를 주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창녀로 팔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을 때 이혼 증서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결코 빌미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강한 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 악한 자들의 꾀를 막기 위해서 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더 횡포를 부리고 남에게 더 손해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아니 된다는 것이 율법이고 힘이 있고 꾀가 있다고 하여 조금만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니 되니 더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율법입니다.
오늘은 저희 교회 창립 2주년이 되었습니다. 1998년 3월 8일에 창립예배를 드리고 오늘 이렇게 2주년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와 이토록 많은 은혜를 베푸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이미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이 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꾸 새로운 법을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셨지만 세우신 교회가 처음에는 그 모습을 따라가는 듯 하였지만 점점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대에 자꾸 멀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자꾸 세우셨습니다. 그 세우신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분당소망교회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됩니다.
데오도로 벧엘이 교회에 대하여 풍자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주 배가 파손하는 위험한 해안에 난파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작은 인명 구호소가 있었다. 움막 같은 보잘것없는 집 한 채와 작은 배 한 척 뿐이었지만 헌신하는 일꾼들은 불철주야로 난파선 구조에 전력을 다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인명 구호소에 의해 구출되었고 이 집은 점점 더 유명해졌다. 구출 받은 사람들,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돈을 이 인명 구호소에 기부했다. 인명구호소는 점점 좋아지고 많은 회원들이 모이게 되었다. 차츰 인명구조에는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모인 돈으로 그 일을 대신하여 일할 선원들을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사교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 이 인명구호소의 전체분위기는 사교 클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불만하는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내었지만 투표결과 관철되지 못했고 그들은 결국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새로 시작했던 구호소도 처음의 구호소와 똑같은 길을 되풀이하기 시작했고 헌신적인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같은 일은 반복 또 반복되었다. 지금도 그 해안에는 사교장으로 변한 인명구호소들만 사치스럽게 남아있을 뿐 난파하는 배에 탄 선원들은 대부분 구조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소박한 소원은 사람들 그리고 이 사회가 법이 없어도 되는 사회, 법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제는 더 이상 세우시지 않아도 하나님 뜻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