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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신앙
(이사야 41:14~16)
여러분들은 평소에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강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분은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만 대부분은 다 자기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약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 마음이 약한 것을 숨기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해도 인간의 마음의 깊숙한 곳에는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약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약한 자가 강해지는 비결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약한 자가 강해지려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안정된 마음으로 해야 강하게 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운동 선수도 마음이 안정되어야 게임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또 집중력이 있어야 강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강의를 잘 듣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의 특징은 집중력이 부족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집중력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듣기는 들어도 무엇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집중력이 있으면 마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폴 투르니에가 쓴 ‘약자와 강자’라는 책에서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약한 것을 받아들어야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지렁이 같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옛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렁이는 그 약한 존재를 지칭합니다. 이처럼 약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만드셔서 산들을 때려 부셔서 부스러기로 만드는 힘 있는 장수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지렁이 같은 역사입니다. 초대 교회는 핍박 받는 지렁이 역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약한 자에게 힘을 주셔서 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늘 우리 약한 마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렁이 같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매우 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을 아시고 많은 이적을 베풀면서 모세를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사사기 6장과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일을 맡기시는데 기드온이 두려워하니까 세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그래도 두려워하니까 네 번째로 말씀하시길 사사기 7장 10절에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약한 자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부라라고 하는 부하를 그에게 붙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심하게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여러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고 가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무겁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너무 힘들고 여러분의 삶이 그것을 질만큼 강하지 못하고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도우시기 위해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약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십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늘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순교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강하다고 하는데 그 목사님은 자신의 약함을 이와 같은 시로 고백하였습니다. 다음은 본회퍼 목사가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감옥생활 속에서 쓴 일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자유롭게, 다정하게, 밝게, 명령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간수들과 내가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합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침착하게, 미소하며,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불행한 나날은 내가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자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새장 속의 새와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들었고,
목을 졸렸을 때와 같이 숨을 쉬려고 몸부림치고,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을 그리워하고,
멸시와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에 떨리고,
저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데 지쳐서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양자가 동시에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일까?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떠한 자인 것은,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오직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본회퍼 목사의 고독함과 약한 모습이 너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이러한 약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므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므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 이사야 41장 14절 말씀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할 때 힘을 얻습니다. 잠언 16장 20절에 보면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결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집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J. Adams라는 학자는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설교를 듣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설교가 지루하다고 계속 좁니다. 또한 토요일에 밤새 새벽까지 자지 않아서 주일 날 설교 시간에 계속 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잘 듣기 위하여 늘 토요일 날 잠을 푹자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 임종하는 권사님의 임종예배를 보기 위하여 갔는데 목사님 손을 붙잡고 ‘2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눈물 흘리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죽으려니 죽음 앞에 두렵다’라고 말합니다. 20년 신앙생활 하면서 목사님 손을 붙잡고 통곡하며 웁니다. 목사님도 성도의 손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까지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이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등록교인의 통계치를 조사하였습니다. 그 통계에 따르면 25%는 기도를 안 하고, 35%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50%는 십일조를 하지 않고, 75%는 전도를 안 하고, 100%는 천국을 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주님 말씀하시면’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셋째,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으로 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렁이가 어떤 존재입니까? 지렁이는 보기에도 혐오스럽습니다. 항상 밟히는 존재입니다. 징그러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비록 지렁이 같은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드는 칼날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고통당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뉴욕 퀸즈 평화 교회 이 계선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지렁이 믿음 주소서’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사자나 독수리 같은 천하무적의 믿음이라면 몰라도 왜 하필 지렁이 믿음일까? 그러나 나 지신 밟히고 잘리고 꿈틀거리면서 25년을 목회해오다 보니 나도 어머니처럼 ‘지렁이 목사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지렁이는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지만 지렁이 꿈틀해 봤자 별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무던히 밟히시고 찢기셨습니다. 성경을 찢어 아궁이에 던지시고 어머니 머리채를 낚아채시면 나는 너무도 놀라 장롱 속으로 뛰어들어가 앙앙 울어댔습니다. 워낙 고약스레 크게 울어대는 내 울음 소리에 한풀 꺾인 아버지가 건넌방으로 가시면 나는 어머니 품속으로 뛰어들어가 사정했습니다. “엄니, 엄니, 예배당에 다니면서 매맞는 것보다 예배당 그만두고 매맞지 마…” 그러면 어머니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날 껴안아 두 손을 내머리에 얹으시며 서럽게 눈물 기도를 드렸는데 그 순간 온 몸이 뜨거워지는 황홀한 체험을 하곤 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도 목사 안수 받을 때도 나는 남들처럼 별난 감동이 없이 당황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지렁이 믿음 시절 눈물기도 받을 때 진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지렁이 같은 어머니의 신앙이 사자 같은 아버지를 끝내 집사로 만드셨고 우리 7남매를 목사, 장로, 집사 되게 하셨습니다. 개척 교회를 하다보니 ‘지렁이 목사 되지 않고는 힘들구나’라고 생각하고 어둠 속에 엎드리면 지렁이 기도 소리에 오버랩 되어 나타나는 어머니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와 같은 이 계선 목사님의 간증에서 볼 수 있듯이 지렁이 신앙은 사자와 호랑이보다 강한 신앙입니다. 지렁이는 밟혀서 두 동가이 나도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어 기어갑니다. 생존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지렁이는 또한 인내심이 강합니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말은 지렁이의 강한 인내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지렁이는 땅을 헤집고 다니며 매일 자기 몸무게만큼의 흙을 먹습니다. 흙속에 들어 있는 양분을 이용하고 남은 찌꺼기는 꽁무니로 내보냅니다. 그래서 지렁이가 많이 사는 곳은 흙이 아주 부드러우며 비옥합니다. 이런 기름진 땅에서는 식물이 잘 자랍니다.
이처럼 지렁이 신앙은 인내심이 강한 열매맺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지렁이 신앙은 약하지만 강하고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또한 주변 환경을 비옥하게 해서 열매를 많이 맺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물맷돌은 초라합니다. 그냥 조그마한 돌멩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강한 무기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잡히니까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줍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연약하다고 절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지렁이처럼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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