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일반아(一半兒)」 봄날의 복사꽃, 배꽃, 수양버들을 읊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만물이 소생하는 완연한 봄날 강진(康津) 유배지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께서 복사꽃과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가벼운 봄바람에 살랑이는 수양버들을 보고 갈급(渴急)한 욕망(慾望)조차도 주체할 수 없어 「일반아(一半兒)」 같은 송사(宋詞) 원곡(元曲)의 형식을 빌려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보통 「일반아(一半兒)」는 5구(句) 31자의 단조(單調)로, 마지막 구를 「一半兒□□, 一半兒□」라고 한 것에서 곡패명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곡조는 [억왕손(憶王孫)]과 동일하지만, 대부분 마지막 구에 ‘一半兒’라는 세 글자가 들어가 있다.
다산(茶山) 선생은 「일반아(一半兒)」의 3수(首)의 산곡(散曲)에다, 봄날의 복사꽃 <영홍도(詠紅桃)>, 배꽃 <영이화(詠梨花)>, 수양버들 <부수양(賦垂楊)>이란 소제목(小題目)을 달아 붓을 들었다. 따뜻한 춘풍에 꽃가루 흩날리면 오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춘정(春情)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만개(滿開)하였기에 어찌 한 곡조(曲調) 읊지 않으랴.
또한 「일반아(一半兒)」는 주로 남녀의 연정 및 이별을 노래하면서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표출했다. ‘반(半)은 이렇고 반(半)은 저렇다’는 표현을 통해서 인물의 갈등과 모순된 심리를 표출하기에 알맞은 곡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반아(一半兒)」에서는 연정을 묘사하며 인물의 갈등 심리를 표출한 것뿐 아니라 풍경 및 사물의 묘사를 통해 주로 처해진 상황 혹은 펼쳐진 풍경에 대한 다양한 모습 및 양면성, 상반된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 이번에 소개하는 정약용(丁若鏞)의 「일반아(一半兒)」 3수(首)는 각각 7언 3구(句), 3언 1구(句), 一半兒 9언 1구(句)로 된 총 5구(句)로써, 각 구(句)가 7.7.7.3.9 자(字)이며 단조(單調) 총33자로 구성되어 있는 산곡(散曲)들이다.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5(卷五)에는 9수(首)의 사(詞)와 함께 산곡(散曲) [일반아(一半兒)] 3수가 수록되어 있다.
다산(茶山) 선생은 놀랍게도 그 흔한 한시의 형식을 쓰지 않고, 접련화(蝶戀花), 작교선(鵲橋仙), 호사근(好事近), 일반아(一半兒) 같은 송사(宋詞)와 원곡(元曲)의 형식을 빌렸다. 수련을 받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생소한 형식을 구사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원곡을 사용한 것은 혹시 남녀 간의 사랑을 묘사한 『서상기(西廂記)』에 심취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 참고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교육과 김영미 교수의 <<元 散曲[一半兒]의 창작과 조선에서의 수용 고찰>>이라는 논문을 보고, 우리나라 산곡(散曲)의 창작은 정약용(丁若鏞)에게서 처음 나타났으며, 앞서 소개한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의 [일반아(一半兒)] 8首는 원(元)의 산곡가 사덕경(査德卿, 또는 진극명(陳克明)의 作)의 작품을 필사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일반아(一半兒)」에 대한 고찰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 덧붙여, 나는 한문학 운문(韻文) 중에서 격식을 차리는 ‘한시(漢詩) 근체시’보다는 마음을 더듬는 송(宋)나라 사(詞)가 좋다. 시(詩)로는 사람의 정감은 끝까지 밀어 부칠 수가 없다. 시(詩)란 법도를 지키는 것인 반면에, 사람의 정한(情恨)을 풀어놓은 것이 노래(歌)이고 사람의 뜻을 간절하게 다하는 것이 가락(曲)이라고 한다. 그래서 춤과 노래, 그리고 관현악이 어우러져 연주하는 사(詞)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사(詞)는 시(詩)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자유로우며 흥겹고 역동적이다. 송나라 음악 송사(宋詞) 즉, 사악(詞樂)은 궁중의 교방여기(敎坊女妓)에 의해 연주되었기 때문에, 흔히 기녀들의 가무 교방악(敎坊樂)이라고도 불렸다. 게다가 나는 글자 수가 일정치 않는 장단구(長短句) 중에 송사(宋詞)보다 더욱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원대(元代)에 성행한 장르 ‘산곡(散曲)’이 훨씬 더 가슴에 와닿는다.
◉ [「일반아(一半兒)」 해설] 옛 곡패(曲牌)의 명칭 「일반아(一半兒)」는 중국 당(唐), 송(宋), 원(元)나라 때에 시가(詩歌)로서 민간 악부계통에서 발생한 것으로 글자 수(句의 장단)가 일정하지 않는 장단구(長短句) 형식이다. 또한 운문의 속성을 지닌 장르로, 운을 사용하지만, 산곡(散曲)의 운(韻) 사용이 사(詞)에 비해 더욱 자유롭다. 원나라 시인 장가구(張可久 1270~1348)가 가장 유명하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져 왔으나 큰 인기는 없었다. 오언, 칠언 詩(제언체)에 비하여 산곡(散曲, 산악의 곡조)은 더욱 평이하고 통속적이며, 진솔하고 자연스럽다.
우리나라에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일반아(一半兒) 산곡시(散曲詩)를 남겼으며,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께서도 장가구(張可久)의 [일반아(一半兒)] 2首와 사덕경(査德卿)의 [일반아(一半兒)] 8首의 산곡을 필사해서 문집에 남겼다.
○ 또 「일반아(一半兒)」에서 일반(一半)은 ‘절반’, ‘반쯤’이라는 뜻이고 "兒"는 친자(襯字)이므로 "兒"자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자수(字數)의 격식이 모두 「억왕손(憶王孫)」과 같다. 「억왕손(憶王孫)」은 단조(單調) 총31자로 구성되어 있는 사패(詞牌)이다. 그리고 「일반아(一半兒)」는 대개 마지막 구에서 측성으로 마무리 하지만, 「억왕손(憶王孫)」은 평성으로 마무리한다. 이것은 양자 사이의 작은 차이이다. 그러나 「일반아(一半兒)」도 원나라 시인 조선경(趙善慶)의 "심매" 中, 一半兒街着 一半兒開 (반은 머금고 있고 반은 벌리고 있다) 처럼 평성으로 마무리 한 것도 있다. 「억왕손(憶王孫)」도 측성으로 마무리 한 것도 있지만, 이 둘의 관계는 분명하다.
◉ 더하여 「일반아(一半兒)」는 무엇보다도 음률에 대한 이해 없이 곡을 창작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정약용(丁若鏞)의 「일반아(一半兒)」 창작은 원대(元代)의 새로운 운문인 산곡(散曲)을 수용하려고 한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일반아(一半兒)」라는 새로운 곡조를 사용하여 기존의 곡조와는 다른 느낌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동일 사물이 갖는 상반된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 다음 ‘庚’ 운목(韻目)의 장단구(長短句) 산곡(散曲) 「일반아(一半兒)」 <영홍도(詠紅桃)>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작품이다. 각 7.7.7.3.9자로 된 5구(句), 단조(單調) 총33자로 구성되어 있는 산곡(散曲)이다. 내용을 보자면, 붉은 복사꽃이 아리땁게 만발하는, 춘정(春情)을 자아내는 봄날이다. 새벽 비에 살짝 젖은 복사꽃이 가벼운 바람에 반쯤은 살랑거리고 반쯤은 조용하다.
1) 「일반아(一半兒)」 붉은 복사꽃을 읊다(詠紅桃) / 정약용(丁若鏞)
小桃紅艶漾春情 춘정(春情)을 자아내는 붉게 물든 저 복사꽃
照著筠簾火樣明 불모양 훤하게 대나무발에 비치네.
曉雨細霑嬌不驚 새벽비(曉雨)에 살짝 젖어 아리따워도 놀라지 않고
晩風輕 가벼운 늦바람에
一半兒婆娑 一半兒靜 반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반은 가만히 있네.
[주1] 일반아(一半兒) : 옛 곡패(曲牌,곡조의 명칭) 이름. 끝 구절에 가서 반드시 일반아(一半兒)라는 세 글자를 넣거나, 또는 일반아를 두 번 되풀이하여 넣어 구절을 만드는 것이 특색임. 《曲諧》
[주2] 춘정(春情) : 남녀 간의 정욕(情慾). 봄의 정취(情趣).
[주3] 파사(婆娑) : 춤추는 소매의 날림이 가벼움. 몸이 가냘픔. 세력이나 형세 따위가 쇠(衰)하여 약(弱)함.
● 다음 ‘文’ 운목(韻目)의 장단구(長短句) 산곡(散曲) 「일반아(一半兒)」 <영이화(詠梨花)>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작품이다. 각 7.7.7.3.9자로 된 5구(句), 단조(單調) 총 33자로 구성되어 있는 산곡(散曲)이다. 내용을 보자면, 울 너머 새하얀 구름처럼 배꽃이 피어있다. 햇살에 화장을 담박하게 한 듯, 훈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마치 반쯤은 희미하고 반쯤은 은은하다.
2) 또[又] 「일반아(一半兒)」 배꽃을 읊다(詠梨花) / 정약용(丁若鏞)
隔籬暈臉睡梨雲 울 너머에 저 얼굴 졸고 있는 이운(梨雲)인가
牆角酴醾態不分 담 모서리 도미(酴醾)인가 태도 분간 못하겠네.
日照澹粧如薄醺 해가 비치면 엷게 물든 듯이 담박하게 화장하고
細煙薰 훈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아
一半兒熹微 一半兒隱 반은 희미꾸레하고 반은 은은하네.
[주1] 이운(梨雲) : 배꽃같이 새하얀 구름.
[주2] 도미(酴醾) : 꽃 이름. 도미(酴醾)는 원래 술 이름인데 꽃이 그 술빛처럼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임. 《歲時記》
[주3] 연훈(煙薰) : 연기(煙氣)로 인하여 훈훈(薰薰)하게 더움.
● 다음 ‘鹽’ 운목(韻目)의 장단구(長短句) 산곡(散曲) 「일반아(一半兒)」 <부수양(賦垂楊)>은 조선후기 문신이자,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작품이다. 각 7.7.7.3.9자로 된 5구(句), 단조(單調) 총33자로 구성되어 있는 산곡(散曲)이다. 내용을 보자면, 조용한 못가에 푸르고 짙누른 빛의 수양버들이 주렴에 수놓은 듯하다. 맑은 날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 가냘픈 버들 일렁인다. 반쯤은 축 늘어져 있고 반쯤은 흔들거린다.
3) 또[又] 「일반아(一半兒)」 수양버들을 읊다(賦垂楊) / 정약용(丁若鏞)
廢池楊柳曉光添 버려진 못의 수양버들(楊柳)에 새벽빛(曉光)이 비치면
澹翠濃黃入綉簾 맑고 푸르른 빛과 짙누른 빛, 두 빛이 발에 어리네.
晴日煖風吹不嫌 개인 날이면 따스한 바람(煖風) 불어도 상관없는데
弱纖纖 가냘픈 몸이라
一半兒低垂 一半兒颭 반은 축 늘어져 있고 반은 흔들거리네.
[주1] 섬섬(纖纖) : 가냘프고 여림. 연약하고 가냘픈 모양.
[주2] 점(颭) : 물결이 일다. 살랑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