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을을 벗한 은은한 달빛과 별빛이 처마 고드름에 스며들었다. 밤새 문풍지를 파르르 떨게 하던 겨울바람은 지쳐 잠이 들었다.
함평천지에 여명이 밝아오나 보다. 대숲에서 참새가 어지럽게 날아오르고 암청색 어둠 속에서 고택의 실루엣이 선명해진다.
설핏 호접몽에 빠졌던 과객이 조용히 문을 연다. 기다렸다는 듯 모평헌의 설경이 차가운 아침공기와 함께 방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파평 윤씨 집성촌으로 천년고을, 모평헌 등 한옥은 외갓집 분위기… 눈꽃 핀 대숲과 누정은 한폭수묵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마을, 황토담으로 이어진 고즈넉한 골목길, 솟을대문이 멋스런 한옥, 천년 째 맑은 물이 샘솟는 우물, 동백꽃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마당,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처마…. 설경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은
외할머니가 버선발로 반겨주던 시골 외갓집 분위기다.
평범한 농촌에서 한옥촌으로 거듭난 모평마을은 천년 전 고려시대에 함평 모씨(牟氏)가 처음 개촌했다. 그 후 1460년경 윤길(尹吉)이
90세의 나이로 제주도 귀양길에서 돌아오다 이곳의 산수에 반해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들녘을 사이에 두고 상모평마을과 하모평마을로 이루어진 모평마을은 57가구에 130여명이 사는 작은 농촌마을. 주민의 90%가 파평
윤씨로 골목길에서 만나는 주민들은 대부분 친인척이다. 마을도 아담해 길잡이를 자청하는 강아지와 함께 뒷짐 지고 골목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마을의 작은 역사와 맞닥뜨리게 된다.
모평마을을 대표하는 고건축물은 마을 뒷산인 임천산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영양재(潁陽齋). 오동나무와 대숲에 둘러싸인 영양재는
조선시대 천석꾼 선비인 윤상용이 건립한 정자. 선비의 풍류가 배어있는 영양재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면 절로 시심이 우러난다.
영양재의 기둥마다 걸려있는 주련(柱聯)에는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동
(非禮勿動)'이 새겨져 있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모평마을이 예사 마을이
아님을 암시한다.
마을 뒷산 자락에 조성된 죽림차밭산책로는 눈이 내릴 때 더욱 환상적이다. 대숲에서 참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르고 바람이 빗질하듯
쓸고 지날 때는 댓잎에 쌓인 눈이 보석가루처럼 떨어진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대밭에 뿌리를 내린 야생차나무는 그윽한 다향을
품고 있다.
물레방아 옆에 위치한 수벽사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은 고려의 윤관(1040∼1111년)을 모신 사당. 수벽사 옆에는 애닮은
사연을 가진 2개의 비석이 눈길을 끈다. 제각 안에 위치한 비석은 신천강씨 열녀비.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살해당하려는 것을
막으려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부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열녀비 옆에 위치한 투박한 비석은 충노(忠奴) 도생과 충비(忠婢) 사월을 기린다. 노비부부인 도생과 사월은 신청강씨 부부가 죽자
주인의 어린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과거에 급제시켰다고 한다. 후에 그 아들이 노비부부의 비를 세우라고 유언을 남겼고 지금
까지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노비에게 제를 올린다고 한다.
모평마을은 수벽사 앞에 조성된 마을숲으로 인해 더욱 운치 있다. 마을의 젖줄인 해보천을 따라 뿌리를 내린 팽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등 수령 300년의 고목 서른여섯 그루는 겨울철 서해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는 인공방풍림. 겨울철에는 눈사람으로 변한 고목과
정자를 품은 연못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린다.
천년고을인 모평마을에는 200년 안팎의 역사를 간직한 고가옥이 몇 채 있다. 마을 중간쯤 솟을대문 사이로 '귀령재(歸潁齋)'라는
편액이 걸린 한옥은 파평 윤씨의 종가. 메주와 시래기가 귀령재 툇마루에 걸려있고 앞뜰에는 꽃을 활짝 피운 동백나무 한 그루가
남도의 겨울을 노래한다. 이밖에도 윤상용 선비가 둘째아들을 위해 지어준 고택(김오열가옥)과 동헌 내아 터에 위치한 윤선식가옥
등이 눈길을 끈다.
한옥체험마을인 모평마을에는 숙박체험이 가능한 한옥도 여러 채 있다. 소풍가(笑豊家)는 웃음(笑)이 가득한(豊) 집(家)이라는 뜻.
귀향한 노부부가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의 한옥에서 온갖 화초류를 가꾸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영화황토민박집은 솟을대문에
희소문(喜笑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을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고 웃음이 떠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황토한옥으로 이루어진 모평마을은 골목길도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모평헌에서 안샘을 거쳐 윤선식가옥에 이르는 100m 길이의
골목길은 모평마을을 대표한다. 골목이 꺾이는 곳에 위치한 안샘은 동헌 내아에 있던 우물로 역사가 천년에 이른다.
안샘은 임천산의 대나무와 야생차 수액이 우물로 흘러들어 물맛이 좋기로 소문났다. 안샘에서 윤선식가옥에 이르는 골목길은 황토
담과 살아있는 조릿대로 이루어져 사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솟을대문이 멋스런 '모평헌(牟平軒)'은 특별한 한옥체험 공간. 물이 늘 넘치는 안샘이 골목 끝에 위치해 '물 넘칠 모(牟)'자를 써서
모평헌이라 명명했다. 모평헌의 안주인은 두해 전 서울에서 귀향한 이수옥씨. 잠자리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이씨의 후덕함과 섬세함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눈 내리는 날 모평헌 별채에서 맞는 아침풍경은 감동적이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지붕과 마당에 소복소복 쌓인다. 장독대도
두터운 눈이불을 덮었고 대숲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눈꽃을 활짝 피웠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영양재는 한 폭의 그림.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마당에 발자국을 찍는 녀석은 연신 꼬리를 흔드는 이웃의 강아지뿐으로 모평헌의 아침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한겨울 눈 내리는 모평마을에서 만나는 호젓한 겨울풍경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