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만폭동도」
석야 신웅순
정선의 「만폭동도」, 견본담채(絹本淡彩) 33 x 22 cm, 간송미술관 소장.
“허리 구부러진 늙은 장송 광풍을 못 이겨 우줄우줄 춤을 출 제, 원산은 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산(每山)이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쭈루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두 골 물이 한데 합수쳐 천방저 지방저 월특저 방울저 방울 이 버큼 저, 건너 병풍석에다 마주 꽝꽝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판소리 ‘수중가’ 중 중중모리 ‘고고천변’이다. 자라가 용왕의 약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나오면서 난생 처음 세상을 구경하는 대목이다. 중중모리 장단은 판소리에 쓰이는 조금 빠른 속도로 중모리보다는 빠르고 자진모리보다는 느리다. 춤추는 대목, 활보하는 대목, 통곡하는 대목 등 활기차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대목에 사용되는 장단이다.
오주석이 이 걸작을 보면 이 판소리 중중모리 ‘고고천변’이 귓전을 울린다고 한다.「만폭동도」를 보기만해도 어깨가 으쓱해지고 ‘지화자’. ‘좋다‘가 절로 나온다. 경쾌하고 빠른 붓질의 속도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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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만폭동도’는 음악이다. 넓은 계곡을 휩쓰는 골바람이 온 산을 한 무리 악사 로 여겨 한결같은 장단으로 흔들어대면, 탄력 넘치는 붓질로 신명나게 뽑아 올린 노송 줄기는 굵었다 가늘었다 흥겨운 가락을 타며 자연의 춤사위를 보인다. 그러자 콸콸 쏟 아져 내리는 여울물이 이리 돌고 저리 곤두박질치다가 깊은 소에 이르러 제멋에 겨워 빙빙 도니, 그림 속에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해설 또한 그림 못지 않다. 더는 사족를 붙일 수 없다. 쓸어버리듯 휘두르는 거침 없는 중중모리 장단 같은 빠른 붓질이다.
조선 후기 가사의 대가 정철이 읊은「관동별곡」중 ‘만폭동’은 타에 추종을 불허, 조선 가사의 백미이다.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잦았으니
들을 제는 우레더니, 보니난 눈이로다
물안개는 은 같은 무지개요 물줄기는 옥 같은 용의 꼬리라. 섞여돌며 품어내는 소리 십리까지 자자하니 멀리서 들을 때는 우레소리요 가까이 바라보면 온통 눈이로다. 제 아무리 여산 폭포라한들 이 만폭동보다 더 낫다 할 수 있겠는가.
시인 묵객들이 금강산에 가면 빠뜨리지 않고 찾아가 시를 읊는 곳이 만폭동이다.정선은 이를 그림으로 옮겼다. 붓질을 보라. 물 흐름과 똑 같지 아니한가. 정선의 능란하고 힘찬 필력이 금강산 만폭동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
시인 유척기는 만폭동을 이렇게 일갈했다.
조물주는 무슨 일로 있는 솜씨 다 부렸는가 化翁何事施奇工
첩첩 겹친 깊고 큰 골짜기 그 모두 독특, 웅장해라 萬壑千峰特地雄
들을 때는 우레 같더니 보아하니 눈 같구나 聞却如雷看如雪
송강 정철 관동별곡 으뜸으로 그려냈네 松江歌曲最形容
- 유척기의 「만폭동」
만폭동이 문학에서 정철이라면 그림에선 정선이다. 당시의 선비들은 정철의 가사와 정선의 그림을 같은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후에는 정선의 그림이요 後有元佰畵
이전에는 정철의 가사이다 前有季涵詞
- 조수유의 「4첩의 작은 병풍에 부친 오언절구 제 1첩」
명시라한들 명화라 한들 어디 실물 금강산만 하겠는가. 금강산 시로 세간에 이름을 떨친 시인이 있다. 김창흡과 그의 제자 이병연이다. 이병연 시는 매우 뛰어나 그의 스승 김창흡으로부터 높은 칭송을 받았다. 이병연은 조선 진경시의 거장이요 정선은 조선 진경산수의 거장이다. 둘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 친구이다. 10대부터 스승 김창흡 아래에서 동문수학, 여든을 넘길 때까지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면서 시와 그림을 주고 받으며 살았다.
『해악전신첩』은 정선이 72세가 되던 1747년의 작품이다. 그림 21폭에 글씨 21폭의 화첩이다. 그림마다 당대의 명사인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 발문까지 갖추어져 있어 화첩 제작의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다. 36세 (1711)때 그렸던 금강산 그림『신묘년풍악도첩』이후 36년 만에 다시 그린 작품이다. 진경산수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정자연, 화적연,사인암, 총석정,삼부연, 해산정,시중대, 정양사,칠성암, 당포관어,문암관일출,단발령만금강,장안사비홍교,불정대,만폭동,문암,피금정,사선정,화강백전,용공동구 등이다.
어느날 초보 거간꾼이 용인 양지면을 둘러보고 있었다. 큰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송병준 손자가 사는 집이었다. 집주인은 거간꾼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울이야기도 나누었다. 날은 저물어 거간꾼은 하루를 묵어 가기로 했다.
그는 마침 일을 보러 가다 하인이 불을 때고 있어 그곳을 기웃거렸다. 깜짝 놀랐다. 초록색 비단 화첩을 막 불쏘시개로 쓰려고 하던 참이었다.
“아니, 잠깐만.”
거간꾼은 부랴부랴 달려가 살펴보았다. 그림과 글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집주인에세 그 화첩을 팔라고 했다. 집주인은 장작값이나 내고 가져가라고 하며 화첩을 내주었다.
초보 거간꾼이 이 화첩을 들고 간송 전형필을 찾았다. 그는 열배 정도인 200원을 받으려고 마음 먹었다. 화첩을 살펴본 간송은 1500원을 선뜻 내놓았다. 그렇게 해서 사라질뻔했던『해악전신첩』은 간송에 의해 살아났다. 만폭동은 북한 천연기념물 제455호로 지정되어 있고 겸재의 「만폭동도」는 1949호 대한민국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병연이 읊은 만폭동 시이다.
삐쭉 삐쭉 기운 봉우리 빈 땅을 다투고 擾擾側峰爭隙地
푸릇푸릇 빗긴 고개 높은 가을에 닿네 蒼蒼橫領界高秋
골짝 열려 다른 골짝 속으로 드는 길 끝이 없고 洞開洞裏不窮路
못물 떨어져 다른 못물 속으로 흐름에 쉼이 없네 潭落潭中無靜流
좌사천 우겸재이다. 사천은 시를 쓰고 정선은 그림을 그렸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것이다.
만폭동 한 가운데에 너럭바위가 있다. 여기에는 선조들의 이름이 수 없이 새겨져 있다. 시구절도 새겨져 있고 선비들이 노닐다가 간 자취, 바둑판도 새겨져 있다. 만폭동 바위에는 가장 큰 유명한 글씨 하나가 새겨져 있다. 양사언의 초서 대자 ‘봉래풍악원화동천 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글자이다.
봉래풍악원화동천 중 ‘화’- 출처 http://blog.daum.net/nyj2006/12559854
「만폭동도」의 우측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가 쓰여져 있다.
천개의 바위가 솟기를 겨루고 만개의 골짝은 흐르기를 다투더라
풀나무 그 위로 올라 몽롱한 것이 구름 크게 일고 노을 가득낀 양하더라
千岩競秀 万壑爭流
艸草蒙籠上 若雲興霞藯
- 고개지 顧愷之
‘천암경수 만학쟁류’라는 여덟 글자는 인구에 회자 되었고 깊은 산수를 표현하는 하나의 성구로 사용되어 왔다.
이 시는 남조 송의 유의경 『세설신어』의 「언어」에 소개되어 있다.
만폭동을 둘러본 문사들은 만폭동 바위에 ‘천암경수 만학쟁류’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만폭동도」의 화제는 누가 썼을까. 아마도 훗날 이 그림의 소장자가 썼을 것이다. 이 바위의 글씨는 곡운 김수증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의 화제는 고개지의 시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필시 김수증 후배나 후손이 쓰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고연의,『그림, 문학에 취하다』(아트북스,2011,299-301쪽 참조)
감상하는 우리들이야 누가 썼던 그림이 시구와 어울리면 그만이다. 시와 그림 그리고 가사, 판소리와 함께 이 그림을 감상한 것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월간 서예,2019.3.157-159쪽.
첫댓글 좋은 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게도 겸재정선 여주나들이展 을 여주박물관에서 한답니다...
감상하며 행복을 누립니다 ...
행복한 주말보내세요 교수님...
그러시군요.잘 계시지요? 가기가 쉽지 않네요.고맙습니다.